*2022.11.20.주일낮예배 설교(추수감사절)
*본문; 시30:11~12
*제목; 참된 감사의 모습
1. 지난 금요일 이야기
믿음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욕심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 안에서 밀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이 다 채워주십니다. 이를 기억하고 욕심을 밀어내고 감사로 채워, 믿음 있는 자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때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에 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지금 당장이 아니라 가장 적절할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믿으면 카이로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지만, 표적을 좇는 자들에게는 역사하십니다. 아멘.
2. 참된 감사의 모습
오늘을 추수감사절을 맞아 ‘요한복음강해’를 잠깐 멈추고, 참된 감사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시편’을 읽고 묵상하는 법은 그 시편을 제목을 유심히 살피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오늘 ‘시편30편’의 제목은 두 가지입니다. “다윗의 시”이고 또 “성전낙성가”입니다.
이로 봐서 이 시편의 작가는 ‘다윗’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좀 이상합니다. “성전낙성가”란 성전을 다 건축하고 드리는 노래를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전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가 성전 건축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그의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혔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제목이 붙었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역사를 조금 살펴보아야 이해가 됩니다.
B.C.168년(예수님 오시기 168년 전)에 시리아의 ‘에피파네스 왕’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 안에다 자신의 “군신(軍神)”우상을 세워놓고, 돼지를 제물로 드립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대놓고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처참한 모욕을 당한 후 4년 뒤(B.C.164년)에 ‘마카비’라는 사람이 일어나, ‘에피파네스’ 군대를 몰아내고 성전을 회복합니다. 이 때 성전을 완전히 보수한 후에 부른 노래가 바로 ‘시편30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두 번째 제목으로 “성전낙성가”가 붙게 된 것입니다.
이런 배경으로 본문을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 30:1~3)
‘1절’에 보면 다윗이 “원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을 이어서 읽어보면 이 “원수”가 사람이 아니라 “질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삼~대하’(이스라엘 역사서)까지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윗이 중병이 걸렸던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병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영적 질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영적 질병’ 가운데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 때가 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 충신인 우리아를 죽인 사건”입니다.
오늘 ‘시편30편’은 그의 이 영적 질병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노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감사에서 매우 특이한 점을 발견합니다. ‘4절’입니다.
“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 30:4)
자신을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드리는데, 갑자기 “주의 성도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감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언”하고, 그 감사를 “흘려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백성들에게 흘려보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이렇게 행하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감사의 모습”입니다.
다윗처럼, 내 안에 있는 감사의 고백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그 감사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것! 그래서 이를 함께 누린 자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선언하는 것! 이것이 참된 감사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이 한해의 인생 농사를 잘 짓게 하시고 그 안에서 감사의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진짜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고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한 사람들에게 그 감사의 열매를 나누고, 또 이방인들에게 그 감사의 열매를 나누는 것이 진짜 감사절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추수의 열매를 우리가 먹는 것은 온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의 열매는 다윗처럼 이웃에게 전해서 그들이 감사의 열매를 먹으며 하나님의 찬송하고 감사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미리 이야기되어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지만, 내년에는 주변의 이웃을 위해서 감사의 열매를 드리는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선포할 수 있는 절기로 지키기를 원합니다. 아직 우리 교회가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지만, “내년의 모인 추수감사절 헌금”은 전액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참된 감사의 모습”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5절’입니다.
“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 이루어지는 기쁨에 대해서 다윗은 이어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한글성경대로는 이해하기 좀 힘이 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염”(진노)은 사실 첫 번째 뜻은 ‘히, 아파’라고 ‘코나 콧구멍’을 말합니다. 콧구멍은 ‘숨쉬는 곳’이요 ‘생명의 통로’입니다. 생명의 통로가 두 번째 뜻인 ‘진노’가 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생명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감사하는 자녀에게는 “진노조차도 생명을 만들어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고백합니다.
“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시 30:6)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영화를 누릴 때에 이것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7절’입니다.
“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시 30:7)
주가 그 얼굴을 가리시면, 고통과 근심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진토”(먼지)에 불과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9절’입니다.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 30:9)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향한 얼굴을 돌리시기만 하면, 진토가 되고 고통과 근심의 자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를 깨닫는 순간 다음과 같은 고백이 일어납니다. ‘11~12절’입니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시 30:11~12)
하나님 없는 순간 ‘진토’뿐임을 고백하는 자는 드디어 “참된 기쁨과 감사”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그를 지키고 인도하여서, 주님이 지키시는 “평강”으로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먼저는 감사를 흘려보내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감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셔서 이룬 것이며 나는 ‘진토’에 불과한 자임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러할 때 참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런 참된 감사의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참된 감사는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이 내가 누린 감사를 함께 누리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된 감사는 내가 "진토"일 뿐이며, 오직 주의 은혜로 모든 것을 세워간다는 것을 고백할 때 느껴지는 기쁨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