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따돌림을 넘어 어울림으로]
가해학생 절반 이상 "장난으로… 이유없이…" 친구들 사이의 폭력, 57%가 "모른 척 한다"
"저를 아예 이 세상에 없는 듯, 투명인간처럼 대하더라고요." 담담히 말하는 A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 현우(가명)의 얼굴에는 세상을 적잖이 살아온 사람의 표정 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경기도 안산까지 와서 집단따돌림(왕따) 학생과 인터뷰하는 우리의 심정도 착잡했다.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데 힘은 안 되고, 맞더라도 참는 거죠.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것을 누군가 한순간에 짓밟아 없애는 것 같은 느낌… .내가 그렇게 못난 놈인가…. 아무도 없는 데로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하게 됐어요." "선생님은 제가 왕따를 당하는 줄 전혀 모르셨어요. 선생님 계실 때는 두 얼굴을 가진 애들처럼 착한 척하다가 안 계시면 악마의 탈을 쓴 것처럼 저를 때리고 빼앗고…. 견디다 못해 다른 학교로 전학 갈 때도 왕따 때문이란 말은 하지 않고 아버지 일 때문이라고 했어요." 현우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 ▲ 김호기 교수(왼쪽)와 고동현 전문위원(왼쪽에서 두 번째)이 성지고를 찾아 김한태 교장 등과 인터뷰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사회학적으로 왕따는 공동체적 결속감을 빼앗아버리는 행위다. 그것은 폭력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왕따를 당하게 되면 무기력하거나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기 쉽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말한 일종의 아노미(anomie)를 경험하게 된다.
여러 연구들이 지적하듯이 왕따를 당한 학생이 오히려 다른 학생을 왕따시키거나 공격적 성향을 갖는 문제아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현우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6학년 여학생 민지(가명)는 왕따를 당한 후 1년도 되지 않아 학교에서 아주 유명한 말썽쟁이가 됐다. "복수하고 싶었어요. 다른 애를 똑같이 왕따시키거나 힘으로 눌러버리는 거…. 그 담부터는 저를 안 괴롭혀요. 오히려 굽실굽실 거리죠." 피해학생이 가해학생이 되고, 다시 새로운 피해학생이 나타나는 '왕따의 악순환'이다.
- ▲ 서울 성지고 김한태 교장(오른쪽)이 학생들과 함께‘왕따 없는 학교를 만들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전 학교에서 부적응 문제로 고민한 학생들이 많은 성지고는 왕따 없는 학교를 만들 기 위해 학교 곳곳에 표어를 붙이고, 학생들이 참여하는 모의 재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집단따돌림을 낳는 요인은 다양하다. 첫째, 배타적인 또래집단 문화다. 자기와 성향이 다른 친구에 대해 낙인을 찍고 괴롭히는 집단 압력과 동조 현상이 일어난다. 친구를 도와주고 싶어도 자기 역시 왕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방관하는 경우도 많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2009년 조사한 결과 "친구들 사이에 폭력이 발생해도 모른 척한다"는 학생이 57%나 됐다.
둘째, 지나친 학업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좌절감 등이 공격성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된다. 과도한 경쟁과 입시 교육이 왕따의 배경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부모 및 교사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가해학생의 경우 부모와의 관계가 친밀하지 못하고 가족 사이에 갈등이 많다. 또 부모와 교사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 경험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얼마 후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성지고등학교를 찾았다. 대안학교인 이 학교는 전교생 1800여명 가운데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전 학교에서 부적응 문제로 전학 왔다고 한다. 학교를 들어서자 '폭력 없는 친구 사이, 왕따 없는 우리 학교'라는 표어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터놓고 얘기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거려요. 그리고 주입식 교육보다는 대화를 많이 하죠." 김한태 교장은 왕따 없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교사와 학교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런 노력의 하나가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는 모의재판이다. 지난해에는 다문화 가정 학생의 집단따돌림 문제를 주제로 한 모의재판을 열었다. 학생들이 직접 대본을 쓰고 배역도 맡아 재판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돌아보게 한 프로그램이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조사를 보면 가해학생의 55%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장난'이나 '이유 없다'고 답해 왕따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지고 모의재판 지도교사인 박진철 교사는 "학생들이 스스로 '왕따가 잘못된 거구나' '정말 나쁜 범죄구나'라고 깨닫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회학적으로 왕따는 우리 문화의 두 축을 이루는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기형적으로 결합된 현상이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은 개인주의는 폭력성을 수반한 자기중심주의로 나타나고, 차이를 존중하지 않은 공동체주의는 소외 또는 따돌림을 수반한 패거리문화로 외화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직장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왕따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왕따로 인해 그동안 우리 사회가 지불해 온 사회적·심리적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개인과 공동체가 생산적으로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어울림'의 문화가 창의성 및 다양성을 핵심으로 하는 21세기 사회발전의 중요한 지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어울림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제대로 뿌리 내리려면 무엇보다 왕따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왕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사회의 협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첫째, 학교 내에서는 피해학생을 돕는 상담 프로그램, 전담교사, 보호조치를 확대하고, 공정한 규칙에 따라 가해학생에 대한 적절한 제재가 이뤄져야 한다. 예방교육을 정규 교과과정과 연계하고, 학생 참여 프로그램을 늘려 '왕따 없는 학교'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둘째, 사회적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중시하는 인성교육 및 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왕따의 사회적 배경인 과도한 입시 경쟁 체제와 배타적인 집단문화를 완화하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첫댓글 성지고학생들은 좋은 분을 교장선생님으로 두신 것 같네요. 학생들 복 받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학교는 이미 문제의 반은 해결되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