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사찰순례 장소는 선본사 갓바위(①조) 또는 동화사(②조) 및 대구 방짜유기박물관입니다.
팔공산 갓바위는 관봉 석조여래좌상(慶山八公山冠峰石造如來坐像)으로 경북 경산시 와촌면에 위치한 석조 불상으로, 불상 머리 위에 넓적한 바위를 갓처럼 얹은 모습이 특징적이라 갓바위라고 부른다. 팔공산을 이루는 봉우리 중 하나인 관봉(冠峰, 850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는 5.48m, 재질은 화강암이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석굴암 본존불상처럼 후덕하고 무뚝뚝한 이미지다. 갓은 본디 팔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오랜 세월에 걸쳐 훼손되는 바람에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통일신라 시대 좀 더 정확히는 9세기 초반에 불상의 몸체를 만들었으나 후대에, 아마도 고려시대쯤에 갓을 따로 만들어 올렸다고 추정한다. 1965년에 보물 제431호로 지정되었다.
갓바위 불상이 현대에 약사여래라고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 정확히 어떤 부처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학계의 논의야 어떻든, 또한 과거의 진실이 무엇이든, 현대 한국의 불자들은 갓바위가 약사여래라 믿으며 소원을 빌러 찾아온다. 갓바위가 석가모니로 대접받는 날은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미륵으로 알려졌으며, 나이든 인근 노인들은 갓바위를 '미륵님', 혹은 '갓바위 미륵님'이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라 1821년에 작성된 선본사 사적기에서도 선덕여왕 7년(638)에 의현대사(義玄大師)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한 미륵보살이라고 설명하였다.
학자들은 미륵, 아니면 아미타불이라고 추정한다. 갓바위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는데, 본디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 불상이 취하는 수인이다. 그러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불상에서는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가 항마촉지인을 한 사례가 곳곳에 있으므로, 단지 항마촉지인만으로는 불상의 정체를 밝히기 어렵다.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갓바위는 원래 9세기 초 통일신라 시대에 아미타불로 조성됐으나, 후대 어느 시점(아마도 고려시대)에 사람들이 미륵불로 믿어 미륵이 쓴다는 천관을 뜻하는 갓을 올려놓았고, 다시 현대에 들어 약사여래불로 와전됐다고 한다. 실제로 팔공산 갓바위에는 약사여래의 지물인 약합이 없다. 예전에는 불상의 왼손에 약합이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조사해보니 불상의 왼손 엄지손가락이었다. 갓바위가 약사여래로 알려진 때는 광복 이후 1960년대부터이고, 그 근거는 약합이라고 착각했던 엄지손가락밖에 없었다. 갓바위가 약사여래라 함은 민간전승도, 불상 고증도 아닌 제3의 주장이었다.
2009년에 창사 46주년을 맞아 대구문화방송에서 제작, 방송한 다큐멘터리 <팔공산 갓바위>에서는 '관암사 백암(柏巖) 스님이 1962년 3월부터 신도들에게 갓바위를 알리고 참배시키면서 약사여래라고 가르쳐 알렸다.'는 주장을 소개하였다. 백암 스님의 제자이자 관암사 주지인 혜공(慧空)스님이 방송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백암 스님은 힘든 이 시대(1960년대)에는 약사여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약사여래 신앙을 일으키고자, 갓바위를 약사여래라고 부르도록 신도들을 가르쳤고, 제자들을 갓바위로 보내 처음으로 갓바위 불상을 '약사여래'라고 칭하며 불공을 드리게 했다고 한다. 혜공 스님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백암 스님도 갓바위가 원래는 지역민들에게 미륵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던 듯하다.
동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로서 493년(소지왕 15) 극달(極達)대사가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 그 뒤 832년(흥덕왕 7) 심지(心地)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그 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진표(眞表)율사로부터 영심(永深)대사에게 전하였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대사가 다시 받은 뒤, 이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참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제41대 흥덕왕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심지대사는 중악(中岳:팔공산)에서 수도하던 중,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에서 영심대사가 그의 스승 진표율사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받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때가 늦어 당(堂)에 올라가서 참례할 수 없었으므로 땅에 엎드려서 참례하였다. 법회 7일 만에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심지대사의 둘레 10자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당으로 안내하였다.
여기서 심지대사는 열심히 수도하여 영심대사로부터 법통을 계승하는 간자를 받았다. 그 뒤 팔공산으로 돌아와 산꼭대기에서 간자를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짓고 간자를 모셔 동화사의 개조(開祖)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극달대사의 창건연대인 493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시기이므로 공인되기 전에 법상종(法相宗)의 성격을 띤 유가사라는 사명(寺名)이 붙여졌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심지대사가 창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많다.
창건 뒤 934년 영조(靈照)선사가 중창하였고, 1190년(명종 20) 普照國師 지눌(知訥)국사가 중창하였으며, 1298년(충렬왕 24) 홍진(弘眞)국사가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606년(선조 39) 유정(惟政)대사가 중창을 하였고, 1677년(숙종 3) 상숭(尙崇)대사가 중건하였으며, 1732년(영조 8) 관허(冠虛)·운구(雲丘)·낙빈(洛濱)·청월(晴月)대사 등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영조 때의 중창시에 세워진 건물로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蓮經殿)· 천태각(天台閣)· 영산전(靈山殿)· 봉서루(鳳棲樓)· 심검당(尋劍堂)· 칠성각· 산신각· 응향각(凝香閣)· 강생원(降生院)· 원음각(圓音閣)· 천안문(天安門) 등이 있다. 또한 부속암자로는 금당암(金堂庵)· 비로암(毘盧庵)· 내원암(內院庵)· 부도암(浮屠庵)· 양진암(養眞庵)· 염불암(念佛庵)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1606년 학인(學人)대사가 건립한 것을 1677년 상언(尙彦)대사가 중수하고, 1727년 천순· 홍재· 의회대사가 중수하였다. 이곳에 모셔놓은 삼존불상은 1728년에 왕준(王峻)대사가 만들었고, 후불탱화는 1620년(광해군 12)에 의현(義玄)대사가 그린 것을 1688년에 다시 고친 것이며, 이 밖에도 삼장탱화(三藏幀畵)· 제석탱화(帝釋幀畵) 등이 있다. 또한 대웅전 천장의 극락조(極樂鳥)는 일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구방짜유기박물관은 전국 유일의 방짜유기를 테마로 한 전문박물관으로서 자랑스러운 고유문화유산인 방짜유기와 그 제작기술을 전승·보존하며 후손들에게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고 지역문화 발전을 이루고자 2007년 5월 25일 개관하였다.
수려한 풍광으로 유명한 팔공산에 자리 잡은 박물관은 지하1층, 지상2층(대지면적 17,880㎡ 건축연면적 3,758㎡)의 규모로 유기문화실, 기증실, 재현실, 기획전시실 등의 전시실과 야외공연장, 체험의 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 77호로 지정된 유기장 이봉주 선생이 제작하고 수집한 방짜유기작품 275종 1489점을 대구광역시가 기증받아 관람객을 다양한 방짜유기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앞으로 대구방짜유기박물관은 세계적으로도 그 기술 보존국이 드문 방짜유기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높이는 한편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꾀하는 21세기 문화경쟁의 시대에 발맞춰 품격 있는 전시공간과 다양한 문화교육 프로그램, 각종 문화예술 공연 등을 마련하여 찾아오시는 관람객들에게 인상적이고 특화된 문화예술공간으로 다가갈 것이다.
- 순례일시 : 2024. 2. 4(일) 07:00 대전세무서 출발
- 순례장소 : 갓바위 또는 동화사, 방짜유기박물관
- 순례코스 : 대전(07:00) - ①조, 갓바위 (09:30~12:00) / ②조, 동화사 (10:00~11:30) - 점심공양 (12:00~13:30) - 방짜유기박물관 (14:00~15:00) - 대전(18:00)
- 점심공양 : 대구포도밭식당 (053-984-8667)
- 순 례 비 : 40,000원
- 입금계좌 : 하나은행 740-910157-83807(정인자) 010-5454-4560
자비행사찰순례단 회장 최종대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