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층으로 이루어진 내부에는 층마다 총안이 있는데
먼 곳에 있는 적과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총안의 각도가 다릅니다.
활과 창이 아니라 총과 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꼭대기에서는 너른 들판이 훤하게 내려다보여 적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문경 새재 관문에 대하여 알아보았으니, 말이 나온 김에 성곽에 대하여 더 빠져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이라 하면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수원 화성(華城)이 국내 최고지요. 아름다움과 뛰어난 문화재적 가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한국의 자랑입니다. 화성을 보면 여러 가지 특이한 설계에 눈길이 가게 되고 ‘전투를 위해 만든 성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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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정조가 화성을 완성한 뒤 신하들과 화성 순행을 하다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자랑을 하였다는 공심돈(空心墩)을 구석구석 살펴보세요. 3층으로 이루어진 내부에는 층마다 총안이 있는데 먼 곳에 있는 적과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총안의 각도가 다릅니다. 활과 창이 아니라 총과 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꼭대기에서는 너른 들판이 훤하게 내려다보여 적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볼 수 있습니다. 장안문(長安門)과 팔달문(八達門)은 서울 남대문보다 더 크고 웅장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eekly.chosun.com%2Fwdata%2Fphoto%2Fnews%2F200503%2F20050331000007_02.jpg) |
▲ 북서포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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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돈 |
정조는 왜 수원에 엄청난 비용과 정성을 들여 화성을 지었을까요? 정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을 겪습니다. 왕이 된 정조는 당파싸움으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시파와 벽파의 권력을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행에 옮깁니다. 우선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신진학자를 등용시켜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만듭니다. 또한 국왕 직속의 친위부대를 만들어 쿠데타를 방지하고 왕권을 강화합니다. 거기에다 수원에 신도시를 만들고 경제의 중심이 되게 하여 서울을 기반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을 몰락시키려 합니다. 돈에서 권력이 나오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수원이 조선 제2위의 도시로 성장하게 되는 배경입니다.
정조 13년(1789)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읍치(邑治)인 화산 아래로 옮기고 이름도 영우원(永祐園)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꿉니다. 대신 수원 읍치는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유수부로 승격시키며 성을 쌓고 행궁, 관아, 민가 등을 세웁니다. 유수부란 현재의 광역시와 비슷한 제도입니다. 구읍민에게는 이주비용을 지급하고, 신읍치로 이주하는 주민에게는 10년 동안 세금을 받지 않으며 나라에서 빌려준 환곡을 탕감해줍니다. 한마디로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저수지와 둔전을 개발하여 농업을 일으키고 서울 개성 평양의 상인을 유치하여 상업의 중심도시로 만듭니다. 이런 특혜 아래 수원은 엄청나게 성장을 합니다.
정조는 수원 화성의 설계를 젊은 실학자 정약용에게 맡깁니다. 화성은 임진란의 경험을 기초로 한 유성룡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중국과 서양성의 특성을 참고하여 축성됩니다. 당시로 치면 세계 최첨단의 과학기술이 담긴 성이었지요. 정조가 자랑할 만했습니다.
성역의 총지휘는 영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에 있던 채재공이 맡습니다. 인부의 품삯도 성과급으로 하여 넉넉하게 지급합니다. 백성의 원성도 사지 않고 능률도 오르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10년으로 잡았던 공사기간이 34개월로 단축된 것입니다. 물론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 신식 기계도 큰 몫을 합니다. 정조가 거중기로 공사비 4만냥을 절약하였다고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해외에서 한국인이 합심하여 일하는 것을 보고 외국인들이 혀를 내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하튼 대단한 민족입니다.
화성 공사 전체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보면 그 치밀함과 꼼꼼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됩니다. 화성의 계획, 전체 설계, 각 건물의 내용과 자재의 종류와 수량, 동원된 22종 장인의 이름, 일한 장소, 일한 날짜, 지급한 급여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화성이 역사도 오래되지 않았고 근래에 복원한 부분이 많은데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심사위원들이 화성성역의궤에 놀랐기 때문이랍니다. 세계적으로 드문 기록물이지요. 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의궤의 방대한 양이나 세밀함을 보면 조선이 세계 역사상 드물게 500년을 유지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파괴된 화성을 제대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엄치욱이 근대적 기법으로 그린 화성전도를 보면 항공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건물 하나하나의 앞과 뒤, 내부까지 그려놓은 설계도는 그림만 보아도 배가 불러옵니다.
성벽은 돌과 벽돌을 함께 이용하였습니다. 벽돌이 포격에는 돌보다 더 잘 견딘답니다. 돌도 그랭이 기법으로 서로 맞물리게 쌓아 튼튼합니다. 잉카유적에서 보이는 기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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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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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
성문 앞에는 반원형으로 옹성(甕城)을 둘러 성문을 공격하는 적군을 앞뒤에서 공격하도록 하였고, 성 위에는 1.2m 높이로 성가퀴를 쌓았습니다. 성의 일부가 바깥으로 튀어나온 치성(雉城)을 만들어 성벽을 오르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5개의 포루(砲樓)에는 각기 6문의 대포를 설치하였습니다. 적에게는 참 무서운 시설입니다. 또 다른 5곳의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지어 방어군의 수나 움직임을 적이 모르도록 한 것으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건물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지은 장대(將臺)에서는 사령관이 지휘하였습니다. 방화수류정(謗花隨柳亭)은 4곳의 각루(角樓) 중 하나로 높고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세워 전투지휘를 하는 곳이면서 평시에는 휴식장소로 많이 쓰였습니다. 변형된 십자누각으로 화성의 백미로 손꼽습니다. 두 곳의 수문과 5곳의 암문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봉화를 올리는 봉돈(烽墩)도 있습니다.
행궁까지 번듯하게 지은 정조는 10년 후 수원 화성으로 옮길 예정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화성 완공 4년 만인 재위 24년(1800)에 세상을 뜹니다. 헌법재판소도 없었는데 정조는 왜 화성으로 바로 천도를 못하였을까요.
그림ㆍ글ㆍ사진=김영택 펜화가(honginart@hanmail.net)
출처= 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