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5남4녀중 7째 4남으로 태어 났다. 초등학교 교장이신 아버님을 따라 거의 매년 경남지방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2학기때 마산으로 이사와서 도시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2년 뒤 6.25전쟁중에 아버지가 돌아 가시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은 매우 가난하게 성장했다.
고교졸업 당시 대학진학을 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서라벌예대를 찾아 갔고,
수석으로 장학생이 되어 학비전액을 지원받으며 졸업하게 된다.
성장기의 가난함이 삶을 지치게 만들었는지 선생의 회고담에서 " 대학을 들어 갈 때도 특별히
음악을 공부해야 할 절실함은 없었고, 다만 음악을 좋아한다는 정도" 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입학후 작곡가 김동진 선생님을 만난 것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김동진 선생은 충무로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영화음악 대부분을 도맡았는데, 조수가 된 이수인
선생은 이때 숱한 밤들을 새우며 사보(모두가 수작업), 편곡을 하며 김동진 선생의 수제자 수업을
받게 된다.
이수인 선생에게도 시련기가 있었다. 1980년 KBS성인합창단으로 보직이 변경되면서 대중가요를
지휘하고 편곡하게 되니, 선생은 전공이 바뀌어 버렸다.
이때의 심정을 부인 김복임님이 쓰신 수필에 잘 나와 있다.
"1980년 언론 통폐합때 TBC에서 오신 정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큰 힘을 등지고 이 선생이
자리하고 있던 어린이 합창단의 단장이 되었습니다. 이수인 선생은 자기 분야도 아닌 대중가요로
밀려 났습니다. 사표쓰라는 말이나 다름없지요. 이 선생은 혼신을 바쳐 묵묵히 일한 대가가 허무
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꿋꿋하게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분은 음악으로서는 선생님
의 능력을 넘지 못하겠는지 일년만에 물러나고,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 갔습니다.---"
어린이합창단은 매주 월.화.금 17:00-19:00 KBS본관에 모여 연습을 하였고, 나머지 시간은 작곡,
편곡을 하였다. KBS관현악단의 편곡을 이 선생이 하게 되는데, 이 때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
하신다.
"사실 편곡이 굉장히 어렵다고. 거기다 관현악단의 연습시간에 맞추느라 시간에 ?겨 밤새 작업
해야 하는 중노동이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려면 편곡료를 받아야 하니 안 할 수도 없고, 덕분에 편곡
에는 전문가가 되었지."
"몇일 밤새고 고생할 때는 갈등이 일어나지. 다음부터는 다시 안해야지, 그러다가는 아니 이건
내 일이다 하고서는 계속하였다."
아내 김복임님의 회고이다.
"평소에 파랑새창작동요회 회원들이 집에 찾아 오면 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살아 있을 때 편곡에
대해 배워 두라' 하셨고, 몇 명이 시도해 보았지만 힘들다고 포기해 버려 너무 안타까왔다." 파랑새
회원인 정연택 교감은 "일부 선생님들이 편곡을 하고 있지만 이수인 선생님의 감각은 아무도 따라
가지 못한다."라고 했다.
소프라노 신영옥, 조수미도 이수인의 KBS어린이합창단 출신이다.
이 선생은 우리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며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음악가요, '한국의 슈베르트' 라고
칭송 받지만 현실은 무관의 제왕이다. KBS어린이합창단 단장이라는 직함 외에 어떠한 직급이나
보수를 받은 적이 없다. 70년대 초반 숭의여전에 출강한 적은 있지만, 이수인 이력의 어느 줄에도
쓰는 일이 없다.
이 선생은 음악과 함께 한 삶이 늘 행복하다라고 하지만, 그의 집사이자 수행비서인 부인 김복임은
" 선생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지금도 새로운 동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3. 작곡의 세계
가. 가곡; 60 여곡(자료에 따라 100곡, 200곡 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 가운데 이 선생이 여러곳에서 애착을 가지고 소개한 곡은 별,고향의 노래,내 맘의
강물', '석굴암' 이다.
나. 동요; 500 여곡 (자료에 따라 1500 여곡이라고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둥글게','앞으로','방울꽃'등이 널리 애창되고 있다.
4. 가곡이야기
"별" ; 1962년 작곡(23세)
마산제일여고에서 음악교사로 재직중 밤 늦도록 피아노를 치다가 퇴근하는데, 달없는 하늘에
별이 유난히 반짝이자 학생시절 교과서에 실려 애송했던 이병기님의 시 '별' 이 떠 올랐고,
곧 교실로 되돌아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니 가곡 "별"이 되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 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 선생은 그 때를 회상하며 '시가 작곡가를 만나면 노래가 된다.'라고 하였다. 노래는 1970년
이후 KBS어린이합창단의 합창으로 전파를 타고 세상에 나와 널리 부르게 되었다.
"고향의 노래" ;1968년 작곡 (30세)
서울로 올라와 부인과 함께 서강 굴다리 부근 단칸 셋방에서 생활을 할 때다. 이 선생은 도회지
부적응과 향수병으로 우울하게 지낼 즈음, 어느날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마산제일여고 시절
단짝이던 국어교사 김재호 시인으로부터 온 엽서에 시가 있었다.
국화꽃 져 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 간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 보라
고향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고향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 골 초가마을엔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친구의 우정과 고향의 숨결이 온 몸을 감싸며 다가왔기에 단 숨에 곡조를 붙인 것이 노래가
되었고, 테너 엄정행이 불러 세상에 나왔다.
해마다 명절이면 수천만명의 귀성행렬을 이루는 모든 타향살이들에게 상실의 향수를 매우
따뜻하게 보담아 주는 노래가 되어, 이제는 많은 이의 가슴 속을 저리게 파고드는 정다운
가곡이 되었다.
"석굴암" ; 1976년 작곡 (37세)
마산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서점에서 진주 삼현여고 교사인 최재호 시인의 시집을 사서 읽다가
그속의 '석굴암'을 읽으면서 진한 감동을 느꼈었다. 그 뒤 서울에서 지내던 어느날 문득 고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토함산 숲길을 걸어 올라 석굴암 앞에 섰을 때 온 몸에 황홀히 전해온 환희
의 이미지가 떠 오르자 옛날의 그 시와 지금의 악상이 겹쳐 지면서 곡을 만들어 버렸다.
이수인 선생은 '석굴암','보문사','수덕사' 등 절을 소재로 여러 편의 곡들을 만들었으나, 노래의 주
수요처인 기독교에서 특정종교라고 배척하는 바람에 거의 파묻혀 버렸다. 그런데 '석굴암' 만은
민족적인 정서가 살아 있고 스케일이 크고 깊어서인지 많은 연주회에서 연주곡으로 선정하였기에
이제까지 널리 부르는 애창가곡이 되었다.
"내 맘의 강물" ; 1981년 작곡 (42세)
가곡을 작곡하려 하다가 마땅한 가사가 없어 먼저 멜로디를 대충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는
가사를 찾았다. 수없이 멜로디를 떠 올리며 골몰하던 중 문득 자신의 일생이 마치 ' 옛날은 지나
가도 내 마음에 강물은 흐른다.' 로구나라는 구절이 떠 오르자 피아노 앞에 앉아 시를 만들고
곡조를 다듬어 노래를 완성하였다.
선생은 뒷날, "가사도 내 기분에서 나오는 거야. 내 감정을 다른 이에게 설명을 해 줘도 내 맘에
드는 가사를 만들어 내지 못 해요. 내가 시인은 아니지만 남들이 들어 보더니 '됐다'라고 하기에
작곡을 마무리 했지."라고 회고 한다.
이 노래는 테너 팽재유가 불러서 1991년에 KBS FM신작가곡으로 전파를 탄 뒤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5. 동요이야기
이수인 선생은 동요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한다.
동요는 아동가요의 준말이며 ' 어린이가 부르는 노래' 입니다.
동요는 동심의 노래이며 어릴적 뛰놀던 고향의 노래입니다.
동요는 시노래이며 마음의 노래입니다.
동요는 집중과 순화의 노래이며 위안과 치유의 노래입니다.
오늘도 나는 참으로 행복한 순간을 만나기 위하여 피아노에 앉습니다." (2008.5.)
"방울꽃" ; 1965년 작곡 (26세)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쪼로롱 방울꽃이 혼자 폈어요
산새들 소리날까 꺾어 갈래도
쪼로롱 소리날까 그만 둡니다
산바람 지나가다 건드리면은
쪼로롱 방울소리 쏟아 지겠다
산노루 울음소리 메아리치면
쪼로롱 방울소리 쏟아 지겠다
아동문학가 임교순이 춘천에서 문인생활을 하던 중 '방울꽃' 시를 엽서로 마산의 이 선생에게
보냈고, 이를 받아 본 이 선생은 지체없이 작곡에 들어 갔다. 이수인 선생의 작곡스타일은 가사를
4-5일 동안 되풀이 읽다가 곡조와 섞여 노래가 나오면. 피아노 앞에 앉아 불과 20-30분 안에 작곡
이 끝난다.
현재 '방울꽃' 노래비는 충남 보령시 개화예술마을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지금껏 한번
도 만남이 없다고 한다.
"앞으로" ; 1969년 작곡 (30세)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거목이신 석동 윤석중(1911-2003)님이 1969년 미국이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키자 발음이 비슷한 '앞으로' 라는 동시를 지어, 작곡해 보라고 선생을 찾아 왔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지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문화계의 어른(무려 40년선배)이 손수 들고 온 가사이니 이 선생은 정성을 다 해 작곡을 하였고,
결과는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널리 퍼져 나가는 명곡이 되었다. 이 선생은 평생 작곡한 노래중
가장 마음에 남는 곡이라고 애정을 가지고 있다.
"둥글게" ; 1970년 작곡 (31세)
KBS어린이합창단을 지휘하며 기존의 몇 곡 안되는 노래를 계속하다보니 나중에는 더 이상
가르칠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동요를 작곡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노래이다.
이제는 이수인 선생의 대표곡이 되어 버린 이 노래는 레크레이션에 알맞게 되어서 당시 이런
스타일의 노래가 없던 터라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 30대 이상 세대라면 어릴적 소풍가서 '수건돌리기' 하면 자연히 주제곡으로 삼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6. 가곡 "석굴암" 부르기
작곡자인 이수인 선생이 이 노래를 잘 부르는 방법을 상세히 이야기 한다.
(1) 이 노래를 잘 부르려면 토함산을 느린 걸음으로 걷는 기분으로 불러야 하는데, 노래 속에
나누어진 세 부분을 잘 표현해야 한다. 곧,
처음은 감정을 넣어 곱게 부르고,
단조로 바뀐 중간 부분은 차츰 감정을 고조 시키면서 애조를 띄우고,
끝부분은 화려하게, 특히 한국인의 긍지로 자신감 있게 부른다.
(2) 중간부분의 '--감도는가, 막달아' 는 중간에서 끊지 말고 이어서 강조한다. 여기가 이노래의
climax이기 때문이다.
(3) 마지막의' 웃음마저 좋으셔라.' 는 박자에 구애받지 말고, 한 음 한 음 짚어 가듯이 확실하고
힘차게 끝맺는다.
(4) 이 노래는 어려운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의외로 쉽다.
고음부분이 몇 군데 있으나, 시작할 때 미리 음을 낮춰 잡으면 무리없이 해결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기백있게 소리를 쭉 쭉 뻗는다.
(5) 가사중 맛깔스런 시어들이 있는데,
'등걸' ; 줄기를 잘라낸 나무의 밑둥.
'자로 앞질러' ; 쭉 왔다 갔다 하는 모습
'스러진' ; 형체가 차츰 희미해지며 사라짐.
'막달아' ; 가다가 앞이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조으셔라' ; 좋다, 또는 졸다.
참고자료; 1. 내 맘의 강물(교육과학사, 2012.10.20.)
2. 카페 이수인의 가곡사랑
3. 카페 정다운 가곡
4. 그 외 가곡관련 카페 여러곳. 끝.
2014.12.5.(금) (작곡가 이수인 초청 가곡의 밤) 제14회 전남초등교원합창단 정기연주회 공연 사진
<내 맘의 강물> 출판 기념 음악회
작곡가 이수인의 음악과 삶을 담은 저서 <내 맘의 강물> 출판 기념 음악회가 2012년 11월 10일 오후 서울 교원단체 총연합회 대강당에서 있었다.
책은 작곡가 본인의 글, 지인들의 글, 각종 기사, 부인 김복임 여사의 글, 사진 자료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이 책은 부인 김 여사가 수년간 많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다. 출판 기념 음악회는 이수인 선생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 온 시인이며 피아니스트인 이혜자씨가 준비했다.
음악회의 사회도 이혜자씨가 봤는데, 3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였다.
이수인의 대표작은 책의 제목인 가곡 <내 맘의 강물>을 비롯, <고향의 노래> <석굴암> <별>등이다. 선생은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앞으로> 등 500여곡의 동요와 100여곡의 가곡 그리고 다수의 어린이 뮤지컬 등을 작곡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소프라노 이현정, 조정순, 테너 이재욱, 바리톤 송기창이 선생의 주요 가곡들을 불렀다. 또 한국예술가곡연주회 합창단과 코리아 힐링싱어스 합창단이 노래했고, 손녀딸인 이동은 어린이(당시 고양덕이 초등학교 5학년)가 특별 출연해 할아버지가 작곡한 <방울꽃> <솔개 그늘 이야기> 등 동요 두 곡을 불렀다.
끝 순서로 <별>을 모두가 합창할 때는 이수인 선생이 직접 나와 지휘했다.
음악회에는 멀리 캐나다에서 며칠 전 귀국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작곡자 안병원(2015년 작고) 선생 내외와 이안삼 작곡가도 참석했다.
깊어가는 가을 저녁에 노 작곡가의 인생을 정리한 책과 그가 작곡한 노래가 함께한 잔잔한 감동이 있는 음악회였다.
명함 없이 살아 온 음악 인생
음악회 프로그램 북에 이수인 선생의 인사말을 실었는데 매우 시적이다. 여기 전문을 그래도 옮긴다.
인사말
음악이 좋아 걸어온 길!
돌아보면 숱한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가로수 그늘 짙은 포장길 보다
울퉁불퉁한 돌부리가 더러는 발에 채이고
걸음걸음 뽀얀 흙먼지 이는 비포장 황톳길!
부와 명예는 거리가 멀었고 그럴듯한 직위 하나 없이 살아온 탓에
흔한 명함 한 번 새겨 돌려 본 적 없지만
호젓이 걷는 오솔길엔 산새들 지키는 방울꽃이 곱게 피고
나래 푸른 기러기 고향가는 길엔 싸리울 길동무 되어
언제라도 만나면 반가운 벗들과 동행했다.
마음은 아직 이십구세
가슴은 뜨거운데 어느새 팔십이란 숫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오늘 이 음악회를 준비한 이혜자 선생께 감사의 마음 전하며
끝없이 흐르네 내 맘의 강물은
2012년 시월 어느 날
작곡가 이 수 인
이수인 선생은 많은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동요이기도 하고 가곡이기도 한 <별>이다. 언젠가 이 선생은 ‘대표곡’을 묻는 필자의 질문에 <별>이라고 답했다. 널리 알려지기로는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로 시작되는 가곡 <고향의 노래>와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로 시작되는 가곡 <내 맘의 강물>일 것이다.
특히 <내 맘의 강물>은 선생이 작사와 작곡을 모두 했다. 각별한 애정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책의 제목으로 한 이유일 것이다.
선생은 5남4녀중 7째 4남으로 태어 났다. 초등학교 교장이신 아버님을 따라 거의 매년 경남지방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2학기때 마산으로 이사와서 도시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2년 뒤 6.25전쟁중에 아버지가 돌아 가시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은 매우 가난하게 성장했다.
고교졸업 당시 대학진학을 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서라벌예대를 찾아 갔고,
수석으로 장학생이 되어 학비전액을 지원받으며 졸업하게 된다.
성장기의 가난함이 삶을 지치게 만들었는지 선생의 회고담에서 " 대학을 들어 갈 때도 특별히
음악을 공부해야 할 절실함은 없었고, 다만 음악을 좋아한다는 정도" 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입학후 작곡가 김동진 선생님을 만난 것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김동진 선생은 충무로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영화음악 대부분을 도맡았는데, 조수가 된 이수인
선생은 이때 숱한 밤들을 새우며 사보(모두가 수작업), 편곡을 하며 김동진 선생의 수제자 수업을
받게 된다.
이수인 선생에게도 시련기가 있었다. 1980년 KBS성인합창단으로 보직이 변경되면서 대중가요를
지휘하고 편곡하게 되니, 선생은 전공이 바뀌어 버렸다.
이때의 심정을 부인 김복임님이 쓰신 수필에 잘 나와 있다.
"1980년 언론 통폐합때 TBC에서 오신 정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큰 힘을 등지고 이 선생이
자리하고 있던 어린이 합창단의 단장이 되었습니다. 이수인 선생은 자기 분야도 아닌 대중가요로
밀려 났습니다. 사표쓰라는 말이나 다름없지요. 이 선생은 혼신을 바쳐 묵묵히 일한 대가가 허무
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꿋꿋하게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분은 음악으로서는 선생님
의 능력을 넘지 못하겠는지 일년만에 물러나고,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 갔습니다.---"
어린이합창단은 매주 월.화.금 17:00-19:00 KBS본관에 모여 연습을 하였고, 나머지 시간은 작곡,
편곡을 하였다. KBS관현악단의 편곡을 이 선생이 하게 되는데, 이 때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
하신다.
"사실 편곡이 굉장히 어렵다고. 거기다 관현악단의 연습시간에 맞추느라 시간에 ?겨 밤새 작업
해야 하는 중노동이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려면 편곡료를 받아야 하니 안 할 수도 없고, 덕분에 편곡
에는 전문가가 되었지."
"몇일 밤새고 고생할 때는 갈등이 일어나지. 다음부터는 다시 안해야지, 그러다가는 아니 이건
내 일이다 하고서는 계속하였다."
아내 김복임님의 회고이다.
"평소에 파랑새창작동요회 회원들이 집에 찾아 오면 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살아 있을 때 편곡에
대해 배워 두라' 하셨고, 몇 명이 시도해 보았지만 힘들다고 포기해 버려 너무 안타까왔다." 파랑새
회원인 정연택 교감은 "일부 선생님들이 편곡을 하고 있지만 이수인 선생님의 감각은 아무도 따라
가지 못한다."라고 했다.
소프라노 신영옥, 조수미도 이수인의 KBS어린이합창단 출신이다.
이 선생은 우리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며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음악가요, '한국의 슈베르트' 라고
칭송 받지만 현실은 무관의 제왕이다. KBS어린이합창단 단장이라는 직함 외에 어떠한 직급이나
보수를 받은 적이 없다. 70년대 초반 숭의여전에 출강한 적은 있지만, 이수인 이력의 어느 줄에도
쓰는 일이 없다.
이 선생은 음악과 함께 한 삶이 늘 행복하다라고 하지만, 그의 집사이자 수행비서인 부인 김복임은
" 선생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지금도 새로운 동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3. 작곡의 세계
가. 가곡; 60 여곡(자료에 따라 100곡, 200곡 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 가운데 이 선생이 여러곳에서 애착을 가지고 소개한 곡은 별,고향의 노래,내 맘의
강물', '석굴암' 이다.
나. 동요; 500 여곡 (자료에 따라 1500 여곡이라고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둥글게','앞으로','방울꽃'등이 널리 애창되고 있다.
4. 가곡이야기
"별" ; 1962년 작곡(23세)
마산제일여고에서 음악교사로 재직중 밤 늦도록 피아노를 치다가 퇴근하는데, 달없는 하늘에
별이 유난히 반짝이자 학생시절 교과서에 실려 애송했던 이병기님의 시 '별' 이 떠 올랐고,
곧 교실로 되돌아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니 가곡 "별"이 되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 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 선생은 그 때를 회상하며 '시가 작곡가를 만나면 노래가 된다.'라고 하였다. 노래는 1970년
이후 KBS어린이합창단의 합창으로 전파를 타고 세상에 나와 널리 부르게 되었다.
"고향의 노래" ;1968년 작곡 (30세)
서울로 올라와 부인과 함께 서강 굴다리 부근 단칸 셋방에서 생활을 할 때다. 이 선생은 도회지
부적응과 향수병으로 우울하게 지낼 즈음, 어느날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마산제일여고 시절
단짝이던 국어교사 김재호 시인으로부터 온 엽서에 시가 있었다.
국화꽃 져 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 간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 보라
고향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고향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 골 초가마을엔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친구의 우정과 고향의 숨결이 온 몸을 감싸며 다가왔기에 단 숨에 곡조를 붙인 것이 노래가
되었고, 테너 엄정행이 불러 세상에 나왔다.
해마다 명절이면 수천만명의 귀성행렬을 이루는 모든 타향살이들에게 상실의 향수를 매우
따뜻하게 보담아 주는 노래가 되어, 이제는 많은 이의 가슴 속을 저리게 파고드는 정다운
가곡이 되었다.
"석굴암" ; 1976년 작곡 (37세)
마산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서점에서 진주 삼현여고 교사인 최재호 시인의 시집을 사서 읽다가
그속의 '석굴암'을 읽으면서 진한 감동을 느꼈었다. 그 뒤 서울에서 지내던 어느날 문득 고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토함산 숲길을 걸어 올라 석굴암 앞에 섰을 때 온 몸에 황홀히 전해온 환희
의 이미지가 떠 오르자 옛날의 그 시와 지금의 악상이 겹쳐 지면서 곡을 만들어 버렸다.
이수인 선생은 '석굴암','보문사','수덕사' 등 절을 소재로 여러 편의 곡들을 만들었으나, 노래의 주
수요처인 기독교에서 특정종교라고 배척하는 바람에 거의 파묻혀 버렸다. 그런데 '석굴암' 만은
민족적인 정서가 살아 있고 스케일이 크고 깊어서인지 많은 연주회에서 연주곡으로 선정하였기에
이제까지 널리 부르는 애창가곡이 되었다.
"내 맘의 강물" ; 1981년 작곡 (42세)
가곡을 작곡하려 하다가 마땅한 가사가 없어 먼저 멜로디를 대충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는
가사를 찾았다. 수없이 멜로디를 떠 올리며 골몰하던 중 문득 자신의 일생이 마치 ' 옛날은 지나
가도 내 마음에 강물은 흐른다.' 로구나라는 구절이 떠 오르자 피아노 앞에 앉아 시를 만들고
곡조를 다듬어 노래를 완성하였다.
선생은 뒷날, "가사도 내 기분에서 나오는 거야. 내 감정을 다른 이에게 설명을 해 줘도 내 맘에
드는 가사를 만들어 내지 못 해요. 내가 시인은 아니지만 남들이 들어 보더니 '됐다'라고 하기에
작곡을 마무리 했지."라고 회고 한다.
이 노래는 테너 팽재유가 불러서 1991년에 KBS FM신작가곡으로 전파를 탄 뒤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5. 동요이야기
이수인 선생은 동요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한다.
동요는 아동가요의 준말이며 ' 어린이가 부르는 노래' 입니다.
동요는 동심의 노래이며 어릴적 뛰놀던 고향의 노래입니다.
동요는 시노래이며 마음의 노래입니다.
동요는 집중과 순화의 노래이며 위안과 치유의 노래입니다.
오늘도 나는 참으로 행복한 순간을 만나기 위하여 피아노에 앉습니다." (2008.5.)
"방울꽃" ; 1965년 작곡 (26세)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쪼로롱 방울꽃이 혼자 폈어요
산새들 소리날까 꺾어 갈래도
쪼로롱 소리날까 그만 둡니다
산바람 지나가다 건드리면은
쪼로롱 방울소리 쏟아 지겠다
산노루 울음소리 메아리치면
쪼로롱 방울소리 쏟아 지겠다
아동문학가 임교순이 춘천에서 문인생활을 하던 중 '방울꽃' 시를 엽서로 마산의 이 선생에게
보냈고, 이를 받아 본 이 선생은 지체없이 작곡에 들어 갔다. 이수인 선생의 작곡스타일은 가사를
4-5일 동안 되풀이 읽다가 곡조와 섞여 노래가 나오면. 피아노 앞에 앉아 불과 20-30분 안에 작곡
이 끝난다.
현재 '방울꽃' 노래비는 충남 보령시 개화예술마을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지금껏 한번
도 만남이 없다고 한다.
"앞으로" ; 1969년 작곡 (30세)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거목이신 석동 윤석중(1911-2003)님이 1969년 미국이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키자 발음이 비슷한 '앞으로' 라는 동시를 지어, 작곡해 보라고 선생을 찾아 왔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지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문화계의 어른(무려 40년선배)이 손수 들고 온 가사이니 이 선생은 정성을 다 해 작곡을 하였고,
결과는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널리 퍼져 나가는 명곡이 되었다. 이 선생은 평생 작곡한 노래중
가장 마음에 남는 곡이라고 애정을 가지고 있다.
"둥글게" ; 1970년 작곡 (31세)
KBS어린이합창단을 지휘하며 기존의 몇 곡 안되는 노래를 계속하다보니 나중에는 더 이상
가르칠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동요를 작곡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노래이다.
이제는 이수인 선생의 대표곡이 되어 버린 이 노래는 레크레이션에 알맞게 되어서 당시 이런
스타일의 노래가 없던 터라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 30대 이상 세대라면 어릴적 소풍가서 '수건돌리기' 하면 자연히 주제곡으로 삼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6. 가곡 "석굴암" 부르기
작곡자인 이수인 선생이 이 노래를 잘 부르는 방법을 상세히 이야기 한다.
(1) 이 노래를 잘 부르려면 토함산을 느린 걸음으로 걷는 기분으로 불러야 하는데, 노래 속에
나누어진 세 부분을 잘 표현해야 한다. 곧,
처음은 감정을 넣어 곱게 부르고,
단조로 바뀐 중간 부분은 차츰 감정을 고조 시키면서 애조를 띄우고,
끝부분은 화려하게, 특히 한국인의 긍지로 자신감 있게 부른다.
(2) 중간부분의 '--감도는가, 막달아' 는 중간에서 끊지 말고 이어서 강조한다. 여기가 이노래의
climax이기 때문이다.
(3) 마지막의' 웃음마저 좋으셔라.' 는 박자에 구애받지 말고, 한 음 한 음 짚어 가듯이 확실하고
힘차게 끝맺는다.
(4) 이 노래는 어려운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의외로 쉽다.
고음부분이 몇 군데 있으나, 시작할 때 미리 음을 낮춰 잡으면 무리없이 해결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기백있게 소리를 쭉 쭉 뻗는다.
(5) 가사중 맛깔스런 시어들이 있는데,
'등걸' ; 줄기를 잘라낸 나무의 밑둥.
'자로 앞질러' ; 쭉 왔다 갔다 하는 모습
'스러진' ; 형체가 차츰 희미해지며 사라짐.
'막달아' ; 가다가 앞이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조으셔라' ; 좋다, 또는 졸다.
참고자료; 1. 내 맘의 강물(교육과학사, 2012.10.20.)
2. 카페 이수인의 가곡사랑
3. 카페 정다운 가곡
4. 그 외 가곡관련 카페 여러곳. 끝.
2014.12.5.(금) (작곡가 이수인 초청 가곡의 밤) 제14회 전남초등교원합창단 정기연주회 공연 사진
<내 맘의 강물> 출판 기념 음악회
작곡가 이수인의 음악과 삶을 담은 저서 <내 맘의 강물> 출판 기념 음악회가 2012년 11월 10일 오후 서울 교원단체 총연합회 대강당에서 있었다.
책은 작곡가 본인의 글, 지인들의 글, 각종 기사, 부인 김복임 여사의 글, 사진 자료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이 책은 부인 김 여사가 수년간 많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다. 출판 기념 음악회는 이수인 선생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 온 시인이며 피아니스트인 이혜자씨가 준비했다.
음악회의 사회도 이혜자씨가 봤는데, 3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였다.
이수인의 대표작은 책의 제목인 가곡 <내 맘의 강물>을 비롯, <고향의 노래> <석굴암> <별>등이다. 선생은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앞으로> 등 500여곡의 동요와 100여곡의 가곡 그리고 다수의 어린이 뮤지컬 등을 작곡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소프라노 이현정, 조정순, 테너 이재욱, 바리톤 송기창이 선생의 주요 가곡들을 불렀다. 또 한국예술가곡연주회 합창단과 코리아 힐링싱어스 합창단이 노래했고, 손녀딸인 이동은 어린이(당시 고양덕이 초등학교 5학년)가 특별 출연해 할아버지가 작곡한 <방울꽃> <솔개 그늘 이야기> 등 동요 두 곡을 불렀다.
끝 순서로 <별>을 모두가 합창할 때는 이수인 선생이 직접 나와 지휘했다.
음악회에는 멀리 캐나다에서 며칠 전 귀국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작곡자 안병원(2015년 작고) 선생 내외와 이안삼 작곡가도 참석했다.
깊어가는 가을 저녁에 노 작곡가의 인생을 정리한 책과 그가 작곡한 노래가 함께한 잔잔한 감동이 있는 음악회였다.
명함 없이 살아 온 음악 인생
음악회 프로그램 북에 이수인 선생의 인사말을 실었는데 매우 시적이다. 여기 전문을 그래도 옮긴다.
인사말
음악이 좋아 걸어온 길!
돌아보면 숱한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가로수 그늘 짙은 포장길 보다
울퉁불퉁한 돌부리가 더러는 발에 채이고
걸음걸음 뽀얀 흙먼지 이는 비포장 황톳길!
부와 명예는 거리가 멀었고 그럴듯한 직위 하나 없이 살아온 탓에
흔한 명함 한 번 새겨 돌려 본 적 없지만
호젓이 걷는 오솔길엔 산새들 지키는 방울꽃이 곱게 피고
나래 푸른 기러기 고향가는 길엔 싸리울 길동무 되어
언제라도 만나면 반가운 벗들과 동행했다.
마음은 아직 이십구세
가슴은 뜨거운데 어느새 팔십이란 숫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오늘 이 음악회를 준비한 이혜자 선생께 감사의 마음 전하며
끝없이 흐르네 내 맘의 강물은
2012년 시월 어느 날
작곡가 이 수 인
이수인 선생은 많은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동요이기도 하고 가곡이기도 한 <별>이다. 언젠가 이 선생은 ‘대표곡’을 묻는 필자의 질문에 <별>이라고 답했다. 널리 알려지기로는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로 시작되는 가곡 <고향의 노래>와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로 시작되는 가곡 <내 맘의 강물>일 것이다.
특히 <내 맘의 강물>은 선생이 작사와 작곡을 모두 했다. 각별한 애정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책의 제목으로 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