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옮겼다.
김 근 필
어린 시절 기억이 점점 희미해진다. 특히 고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단편적인 몇 가지만 남았다. 장돌뱅이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새로운 지역,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건들이 계속 생기다 보니 예전의 장면들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다.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한다면 내 고향은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이다. 그러나 나는 현재 그곳에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초등학교 교사셨던 아버지 덕택에 어린 시절 여러 번 이사를 다녔기 때문이다. 예천과 대구의 초등학교 네 곳을 전전하고서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정들만 하면 옮겨 다녔으니 고향 친구가 있을 턱이 있겠나.
예천읍에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감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걸어 20분 정도 떨어진 시골 동네 단칸방에 온 가족이 살았다. 온 가족이란 부모님과 연년생인 남동생, 네 살 터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가 또 전근을 가면서 그곳에서 1년밖에 살지 않았고 이후 다시 가본 적이 없다. 그때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지만, 신기하게도 몇 가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당시 국가를 뒤흔들었던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이다. 텔레비전으로 계속 보여주는 장면들의 각인 효과였는지 내 생일도 잘 기억을 못 하는데 그 사건의 연도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 기억을 중심으로 아버지가 벌통 몇 개를 집 근처에 두고 벌을 키우다가 가족들이 벌에 쏘여서 고생한 일이며, 남동생이 한겨울 논두렁에서 바지 지퍼에 맨살이 끼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 하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어른들을 불러서 해결한 것, 그리고 장터에서 약장수들의 차력을 구경했던 것 등이 기억나는 것이다.
보문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 앞의 사택에서 다른 선생님들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시골 생활이 다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위생 상태는 엉망이었던 것 같다. 1년에 몇 번 양치하고, 연례행사로 목욕하고, 머릿니 잡고, 꾀죄죄하게 다녔다. 푸세식 화장실에 신문지로 뒤처리하고, 방이 두 개지만 외풍이 세서 한방에서 온 가족이 모여서 잤다. 그래도 그 시절은 집에 컬러 카메라가 있었나 보다. 컬러로 찍은 사진들이 많다. 사진이 많아서 그런가 보문에서의 3년은 그래도 기억에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어릴 적의 사진들은 15년 전부터 내가 갖고 있다. 사진 파일로 만들어서 컴퓨터에 영구보존하려고 작정하였으나 15년째 작정만 계속하고 있고, 이 글을 쓰는 동안도 계속 작정하고 있다. 이러다가 평생 작정만 하다가 끝날 것 같아서 불안하다. 올해는 꼭 실천하겠다고 지금 마음을 또 먹고 있다.
보문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경북지역에서 교사로 계속 근무하셨고, 자식들 교육 때문에 나머지 가족만 옮겼다. 월세 집에 1년을 살고 인근의 오래된 아파트를 샀다. 부모님 소유의 집이 처음 생긴 것이다. 내 집이 좋긴 하더라. 집주인 눈치를 안 봐도 되었고, 월세 산다는 자격지심도 없어져서 너무 좋았다. 더구나 당시 피난민촌이라 불리던 그 동네의 제일 좋은 아파트였다. 동네 아이들은 그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피난민들이 다닥다닥 지은 오래된 집들과 60년대 지었다는 허름한 아파트에 초등학교 친구들이 많이 살았었기에 상대적으로 부러움 받을 만 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때까지 거기서 살았고 부모님은 지금도 살고 계신다. 한 지역에 오래 살다보니 그 시절 골목에만 나가면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일부러 약속하지 않아도 동네 당구장이나 식당에서 볼 수 있으니 친구는 풍년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가 1994년에 재개발이 되었다. 이어서 동네의 다른 오래된 아파트와 허름한 판잣집들도 재개발되어 새로운 고층아파트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재개발 과정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친구들이 하나둘 동네를 떠나기 시작하여 점점 볼 수 없게 되었다. 당시에는 집 전화나 삐삐로 연락을 하던 시절이었고, 핸드폰이 보급되지 않았고 군대 생활 2년 2개월을 겪으며 이사를 한 친구들의 연락처를 몰라 인연이 끊긴 좋은 친구들이 많다. 대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객지에서 생활하던 나로서는 친구들과 인연을 연결하기가 더 쉽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과만 연락하고 있으니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도 명절 연휴나 휴가 때 대구로 오면 친구와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옛날 회포를 푼다. 대구에 오면 고향에 온 듯하고 친구를 만나면 죽마고우를 본듯하여 반갑다. 어느 날 밤 저녁 약속을 마치고 귀가를 하다가 보니 예전의 야트막한 동네 집들의 지붕은 오간 데 없고 불야성의 높은 아파트 단지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문득 고향이란 말이 생각났다. 우리 정서 속의 고향을 푸른 논과 밭, 산에 둘러싸여 있는 집, 그 집에 밥 짓는 연기 냄새와 거름 냄새, 새벽 장닭 울음소리, 소 울음소리로 표현했다면 지금은 아파트라는 단어로 간단히 정리될 것 같다. 회색빛 콘크리트 숲. 내 자식들은 아파트가 고향이다. 나도 이제는 마찬가지이다. 삭막한 현실이지만,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 하리라.
몇 년 전 아버지와 합의를 하였다. 이제 누가 물어보면 내 고향을 ‘대구’라고 하겠다고. ‘경북 예천’이라고 하면 내가 아는 것도 없는데 설명하기가 더 힘든 걸 어쩌랴! 대구에서 같이 자란 내 친구는 자기 고향이 서울이란다. 비록 3개월을 살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란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 인생 대부분의 추억을 가진 고향은 대구이다. 고향을 옮겼다. 누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고민하지 않고 대구라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