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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담양 가사문학관
가. 소개
전라남도 북쪽에 위치한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 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 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 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 하며 낙남(落南)하여, 무등산 정기 어린 이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 (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이들은 수신과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 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초당춘수곡·사친곡·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 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담양군에서는 이같은 가사문학 관련 문화 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본관과 부속 건물인 자미정·세심정·산방·토산품점·전통찻집 등이 있다. 전시품으로는 가사문학 자료를 비롯하여 송순의 면앙집(俛仰集)과 정철의 송강집(松江集) 및 친필 유묵 등 귀중한 유물이 있다. 2002년 부터는 영남의 규방가사를 비롯하여 기행가사, 유배가사 등의 원본 및 필사본을 수집·전시, 명실상부한 한국가사문학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는 약 1만여권의 가사 및 한국 문학 관련 책자는 가사작품 연구를 위하는 전국의 국문학도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가사문학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개최되는 가사시조 경연대회와 가사낭송대회는 가사라는 국문학 장르의 전국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해를 거듭할수록 창작성 및 작품성이 뛰어난 창작물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환벽당·소쇄원·송강정·면앙정 등은 호남 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 면면히 그 전통을 오늘에 잇게 하고 있다.
나. 가사문학이란
1). 가사문학의 개관
가사(歌辭)는 시조(時調)와 더불어 한국 고시가의 대표적 장르이다. 그 형식은 1음보 4음량에 1행 4음보라는 기본 율격을 지닌 유장(悠長)한 운문체로서 노래·읊조림·율독의 형태로 향유되었다.
발생 시기는 대체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특히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지었다는 서왕가(西往歌)와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은 그 발생기를 가늠하는 초기의 작품으로 주목된다.
조선 중기 이후 가사는 사대부 층에 의해 폭넓게 향유되면서 사대부 시가문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의 강호 자연 생활에서 몸에 밴 물아 일체적(物我一體的) 삶을 비롯하여 명승지의 유람·유배의 체험·유교적 이념의 구현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송순(宋純)과 정철(鄭澈)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면앙정가(仰亭歌)와성산별곡(星山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을 통해 사대부가사의 절정을 이룬 작가들이다.
조선 후기 사회를 지나면서 가사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에는 사대부 위주였던 향유 계층이 서민과 여성 등으로 확대되면서 서민가사와 여성가사가 새롭게 성행하였으며, 작품의 내용도 전쟁·기행·역사·산업·애정·현실 비판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또 개화기에는 종교가사·개화가사 및 의병가사 등이 등장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가사는 점차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차차 창가 또는 현대시로 옮겨지는 길을 걷게 되었다.
2) 담양의 가사문학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사림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피하여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으로 인심이 넉넉한 호남 지방으로 낙남하여, 특히 이곳 담양에 많은 누정을 건립하고 인재 양성은 물론 시단(詩壇)의 결성과 시회(詩會)를 통하여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시가문학을 창작하였다.
그 같은 시문학 제작의 전통은 국문시가의 하나인 가사문학 창출의 비옥한 터전이 되었다. 조선 중기 이서의 낙지가를 필두로 20세기 정해정의 민농가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 동안 담양권 가사문학의 제작은 끊임없이 지속되었으니, 이는 국문학 사상 크게 평가되는 주목할 사실로 지적된다.
담양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이서(李緖)의 낙지가(樂志歌)는 서사ㆍ본사ㆍ결사의 3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전체 내용은 중국의 처사(處士) 중장통(仲長統)의 삶을 흠모하여 권력 등 세속의 영화와는 멀리한 채 자연과 함께 하는 안빈낙도의 처사적 삶을 노래한 가사이다.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仰亭歌) 역시 그 내용은 서사ㆍ본사ㆍ결사의 3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서사에서는 면앙정의 위치와 그 모습을, 본사에서는 면앙정에서 바라뵈는 원근의 풍경과 춘하추동 사계의 경관을, 결사에서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즐거움과 임금을 그리는 정을 노래하였다.
정철(鄭澈)은 이곳에서 4편의 가사를 지었다. 성산별곡(星山別曲)ㆍ관동별곡(關東別曲)ㆍ사미인곡(思美人曲)ㆍ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이 그것이다. 성산별곡은 서사ㆍ춘사ㆍ하사ㆍ추사ㆍ동사ㆍ결사 등 6단의 구성으로 시간에 따른 순차적 전개를 취하고 있으며, 강호 전원 생활의 풍류를 우리말의 어감을 한껏 살려 훌륭하게 드러내었다. 관동별곡은 당쟁으로 담양에 물러나 있던 정철에게 강원도 관찰사가 제수되자 그때의 기쁨과 관동 지역의 승경 탐승으로 고조된 정서를 진솔하게 읊었는데, 작자의 풍류와 함께 관료로서의 포부 및 연군의 정을 우리말의 묘미를 유감없이 살려 4단락에 나누어 매우 적절하게 노래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미인곡 또한 성산별곡처럼 6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서사ㆍ춘원ㆍ하원ㆍ추원ㆍ동원ㆍ결사 등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전개되어 있다. 그 내용은 임과 이별을 한 어떤 여인의 입장을 빌어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였는데 속미인곡과 함께 충신 연주가사의 백미로 지적된다.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속편으로 춘하추동 사시의 절서 순에 따른 구성을 취하였다. 본의 아니게 임금에게서 버림받은 작자의 입장을 외롭게 된 여인의 처지에 비유한 충신 연주가사이다. 갑ㆍ을 두 여인의 대화체 진술 양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이 그 특색이다.
정식(鄭湜)의 축산별곡(竺山別曲)은 작자가 경상도 용궁 지방의 현감으로 재임할 당시 그곳의 산천 풍물과 거기에서 느껴진 심회를 읊은 가사이다. 춘하추동 사시 순에 따라 작자의 풍류가 잘 드러나 있는데, 정철의 성산별곡과 관동별곡의 가풍이 느껴지기도 한다.
남극엽(南極曄)의 가사로는 2편이 전한다. 그 중 향음주례가(鄕飮酒禮歌)는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대왕의 덕교와 덕치가 만백성에게 미치어 삼강과 오륜이 지켜지고 예법이 이어져 양속(良俗)의 하나인 향음주례가 베풀어짐을 기리며 좋은 세월에 대한 기쁨을 노래했다. 남극엽의 충효가(忠孝歌) 또한 4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훌륭한 인물과 조선 역사의 유구함 및 충효로 뛰어난 인물을 칭송하고, 후손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다짐을 교시적으로 진술한 노래이다.
유도관(柳道貫)의 경술가(庚戌歌)는 전체 내용이 6단락으로 되어 있다. 경술년에 공자 등 훌륭한 인물이 태어난 사실을 말한 뒤, 같은 경술년에 원자(조선조의 순조)가 태어난 것을 경축하면서, 중국의 요순처럼 정치를 잘 하여 담양에서도 태평가를 부를 수 있기 바라는 충정을 노래했다. 사미인곡(思美人曲) 역시 유도관의 작품으로 그 내용은 6단락으로 나뉘어진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해와 해바라기와 같다고 하면서 작자는 임금이 자신을 찾을 때까지 정성을 다 바칠 뿐만 아니라 상사곡을 타면서 충성하는 마음 변치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충신 연주가사이다.
남석하(南碩夏)의 가사로는 백발가(白髮歌)ㆍ초당춘수곡(草堂春睡曲)ㆍ사친곡(思親曲)ㆍ원유가(願遊歌) 등이 전한다. 백발가는 그 내용에서 한시와 달거리 형식을 수용하는 등 작품 구성이 시가 장르의 혼합 양상을 보이고 있어 자못 흥미롭다. 먼저 역대 훌륭한 인물들이 모두 백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북망으로 돌아갔음을 말한 뒤, 늙어지면 미인이나 맛있는 음식도 모두 허사이니 늙기 전에 인생을 허송하지 말 것을 권유한 노래이다. 초당춘수곡은 전체 3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제1단은 봄날의 정취를, 제2단은 독락의 안분지족적 생활을, 제3단은 부귀와 공명의 덧없음을 말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영원히 불변하는 강산과 더불어 일생을 마치겠다는 작자의 의지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사친곡은 남석하가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평생을 포의로 살았던 아버지 남극엽과 어머니 남원 윤씨가 천당에 가 계신다는 확신 아래 천당에 찾아가면 그 동안의 불효를 사죄하고 효도하지 못한 원통함을 아뢰겠다는 내용이다. 사설의 끝에서는 임금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말하면서 자신의 단충을 호소하였다. 원유가 역시 3단 구성의 가사이다. 여기에는 웬만큼 벼슬을 한 뒤 욕심 내지 않고 벼슬을 반납한 채 자연과 더불어 질병 없이 백년 종락하겠다는 소망적 주제가 담겨 있다. 임금과 대화하는 대화체 수법을 통하여 작자의 포부를 말하고 자신이야말로 직신(直臣)이요, 충신(忠臣)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정철의 10대손인 정해정(鄭海鼎)은 석촌별곡(石村別曲)과 민농가(憫農歌)를 제작하였다. 전자는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유적지를 대하는 감회와 무등산의 수려한 승경을 유람한 흥취를 주된 내용으로 하였다. 아울러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의 어수선한 당시의 현실을 심히 걱정하던 작자가 시대를 개탄하는 심회를 감추지 못하면서 산수간에서 숨어살고자 하는 심정을 담고 있어 이는 은일가사로 분류된다. 민농가는 기ㆍ승ㆍ전ㆍ결의 4단으로 구성된 권농가사이다. 기사에서는 국가의 근본이 백성이며, 백성의 근본된 일은 농사이므로 이에 더욱 노력하라 하고, 승사에서는 농사 때가 중요하니 때를 놓치지 말고 정성으로 농사 지을 것을 권하고, 전사에서는 농사일의 어려움과 지나친 세금 착취에 대한 탄식을, 결사에서는 악초 제거와 좋은 볍씨 확보 등으로 풍년 농사에 더욱 힘쓰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작자 미상의 효자가(孝子歌)가 있다. 이는 서사ㆍ본사ㆍ결사의 3단 구성을 한 도덕가사이다. 그 내용은 무등산 아래 산음동 출신의 효자 전우창이 9세 때에 이미 아버지를 대신하여 스스로 옥에 갇혔고, 풀려난 뒤에는 부친의 병환에 상분을 꺼리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효도하였으며, 어버이를 잃은 후에도 시묘살이를 지속적으로 이행하는 등 평생을 효성으로 일관했다는 효행담을 담고 있다.
3) 성산별곡
엇던 디날 손이/ 星山(성산)의 머믈며셔 棲霞堂(서하당) 息影亭(식영정) 主人(주인)아/ 내 말 듯소 人生(인생) 世間(세간)의/ 됴흔 일 하건마는 엇디한 江山(강산)을/ 가디록 나이 녀겨 寂寞(적막) 山中(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고 松根(송근)을 다시 쓸고/ 竹床(죽상)의 자리 보아 져근덧 올라안자/ 엇던고 다시 보니 天邊(천변)의 떳난 구름/ 瑞石(서석)을 집을 사마 나는 듯 드는 양이/ 主人(주인)과 엇디한고 滄溪(창계) 흰 믈결이/ 亭子(정자) 알패 둘러시니 天孫 雲錦(천손운금)을/ 뉘라셔 버혀 내여 닛는 듯 펴티는 듯/ 헌사토 헌사할샤 山中(산중)의 冊曆(책력) 업서/ 四時(사시)를 모르더니 눈 아래 헤틴 景(경)이/ 쳘쳘이 절노 나니 듯거니 보거니/ 일마다 仙間(선간)이라
梅窓(매창) 아젹 벼테/ 香氣(향기)에 잠을 깨니 山翁(산옹)의 하욜 일이/ 곳 업도 아니하다 올 밋 陽地(양지) 편의/ 외씨를 씨허 두고 매거니 도도거니/ 빗김의 달화 내니 靑門 故事(청문고사)를/ 이제도 잇다 할다 芒鞋(망혜)를 뵈야 신고/ 竹杖(죽장)을 흣더디니 桃花(도화) 핀 시내 길히/ 芳草洲(방초주)예 니어셰라. 닷봇근 明鏡中(명경중)/ 절로 그린 石屛風(석병풍) 그림재 벗을 삼고/ 서하(西河)로 함께 가니 桃源(도원)은 여긔로다/ 武陵(무릉)은 어디메오. 南風(남풍)이 건듯 부러/ 綠陰(녹음)을 혜텨 내니 節(절) 아는 꾀꼬리는/ 어드러셔 오돗던고 羲皇(희황) 벼개 우헤/ 픗잠을 얼픗 깨니 空中(공중) 저즌 欄干(난간)/ 믈 우희 떠 잇고야 麻衣(마의)를 니믜 차고/ 葛巾(갈건)을 기우 쓰고 구부락 비기락/ 보는 거시 고기로다 하로밤 비 깨운의/ 紅白蓮(홍백련)이 섯거 픠니 바람 업시셔/ 萬山(만산)이 향긔로다
簾溪(염계)를 마조보와/ 太極(태극)을 믓잡는 듯 太乙 眞人(태을진인)이/ 玉字(옥자)를 헤혓는 듯 鸕鶿巖(노자암) 건너보며/ 紫微灘(자미탄) 겨태 두고 長松(장송)을 遮日(차일) 사마/石逕(석경)의 안자하니 人間(인간) 六月(유월)이/ 여긔는 三秋(삼추)로다 淸江(청강)의 떳는 올히/ 白沙(백사)의 올마 안자 白鷗(백구)를 벗을 삼고/ 잠 깰 줄 모르나니 無心(무심)코 閑暇(한가)하미/ 主人(주인)과 엇더하니 梧桐(오동) 서리달이/ 四更(사경)의 도다 오니 千巖 萬壑(천암 만학)이/ 나진들 그러할가 湖洲(호주) 水晶宮(수정궁)을/ 뉘라셔 옴겨 온고 銀河(은하)를 띄여 건너/ 廣寒殿(광한전)의 올랏는 듯 짝 마즌 늘근 솔란/ 釣臺(조대)예 셰여 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 대로 더져 두니 紅蓼花(홍료화) 白蘋洲(백빈주)/ 어느 사이 디나관대 環壁堂(환벽당) 龍(용)의 소히/ 뱃머리에 다하세라. 淸江(청강) 綠草邊(녹초변)의/ 쇼 머기는 아해들이 석양(夕陽)의 어위를 계워/ 短笛(단적)을 빗기 부니 믈 아래 잠긴 龍(용)이/ 잠 깨야 니러날듯. 내끠예 나온 鶴(학)이/ 제 기슬 더뎌두고 半空(반공)의/ 소소 뜰듯 蘇仙(소선) 赤壁(적벽)은/ 秋七月(추칠월)이 됴타 호되 八月(팔월) 十五夜(십오야)를/ 모다 엇디 과하는고 纖雲(섬운)이 四捲(사권)하고/ 믈결이 채 잔 적의 하늘의 도든 달이/ 솔 우희 걸려거든 잡다가 빠딘 줄이/ 謫仙(적선)이 헌사할샤 空山(공산)의 싸힌 닙흘/ 朔風(삭풍)이 거두 부러 떼구름 거느리고/ 눈조차 모라오니 天公(천공)이 호사로와/ 玉(옥)으로 고즐 지어 萬樹 千林(만수 천림)을/ 꾸며곰 낼셰이고 앏 여흘 가리 어러/ 獨木橋(독목교) 빗겻는데 막대 멘 늘근 즁이/ 어느 뎔로 간닷 말고 山翁(산옹)의 이 富貴(부귀)를/ 남다려 헌사 마오 瓊瑤窟(경요굴) 隱世界(은세계)를/ 찾을 이 이실셰라 山中(산중)의 벗이 업서/ 漢紀(한기)를 싸하 두고 萬古(만고) 人物(인물)을/ 거스리 혜여하니 聖賢(성현)은 만커니와/ 豪傑(호걸)도 하도 할샤 하늘 삼기실 제/ 곳 無心(무심)할가마는 엇디한 時運(시운)이/ 알락배락 하얏는고 모를 일도 하거니와/ 애달옴도 그지업다 箕山(기산)의 늘근 古佛(고불)/ 귀는 엇디 싯돗던고 박소리 핀계하고/ 操狀(조장)이 가장 놉다 人心(인심)이 낮 같아야/ 보도록 새롭거늘 世事(세사)는 구롬이라/ 머흐도 머흘시고 엇그제 비즌 술이/ 어도록 니건느니 잡거니 밀거니/ 슬카장 거후로니 마음의 매친 시름/ 져그나마 하리나다 거믄고 시옭 언저/ 風入松(풍입송) 이야고야 손인동 主人(주인)인동/ 다 니저 버려셰라 長空(장공)의 떳는 鶴(학)이/ 이 골의 眞仙(진선)이라 瑤臺(요대) 月下(월하)의/ 행혀 아니 만나신가 손이셔 主人(주인)다려 닐오되/ 그대 긘가 하노라
2. 담양 소쇄원
• 지정별 : 명승 제40호
• 규모 : 정원 일원(1,500평)
• 시대 : 조선 중종(1530년대)
• 지정일 : 2008년 5월 2일
• 소재지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게액되어 있으며, 1755년(영조 31년)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3. 식영정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이 성산에 와 있을 때 머물렀던 곳 중의 하나이다. 『서하당유고』의 기록에 따르면 명종 15년(1560)에 지었다고 한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가쪽 친척이며,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함께 공부하던 동문이다.
정철(1536∼1593)은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 식영정을 무대로 하여 많은 선비들과 친분을 나누었으며, 시문을 익히고 『성산별곡』 등의 문학작품을 지었다.
식영정은 앞면 2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한 것이 특이하다.
4. 환벽당
광주호 상류 창계천의 충효동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정자로, 조선시대 때 나주목사 김윤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가 걸려 있으며,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환벽당 아래로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가 있는데, 여기에는 김윤제와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보니 용소에서 한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데려다가 제자로 삼고 외손녀와 결혼시켰는데, 그가 훗날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5. 취가정
취가정(醉歌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광주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동쪽에 있는 정자이다.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 난실 김만식과 친족들이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었다. 그 후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난실의 후손인 김희준과 친족들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 한 것은 권필의 꿈에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술에 취해 나타나 서로 시를 나누었는데 외로운 혼을 달래기 위한 《취시가》를 읊은 데서 유래 된다
6. 전남 창평 슬로시티 마을
Ⅰ. 슬로시티 란
1. Slow City라고 하면 말 그대로 "느린 도시"라는 뜻으로
향토인으로 하여금 자연 속에서 살면서 마을(고을, Town)의 고유 먹거리와 지역의 고유 문화를 느끼며 삶의 질을 향유하는 동시에 도시인(관광객)에게 마음의 고향을 제공하며 느리고 조용히 사는 공동체 운동을 말한다.
2.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전남의 신안, 완도, 장흥과 담양 4개 군이 가입되었습니다. 작년까지 지정된 나라로는 12개국 총 101개 도시가 가입되어 있다.
3. 1999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발된 느림 운동은 느리게 살기 운동과 느리게 먹기 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목적인 인간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오래 갈 미래를 위한 2가지는 자연과 전통 문화의 보호에 있다. 4. 슬로 시티의 목표는 자연, 문화, 인간ㆍ생물 간의 조화와 포괄 통섭을 존중하여 각 지역의 다양성(local color )과 차별성의 특색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5가지 지침은 ① 철저한 자연 생태의 보호 ② 전통문화의 자부심 ③ 슬로푸드(제철ㆍ제때의 식재료와 유기농법) ④ 특산품, 공예품 지킴이 ⑤ 지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태도(정직한 진정성 유지)이다.
Ⅱ. 전남 창평 삼지내 마을 현황
가. 자연 환경
1.창평면의 산세를 보면 동남서로 월봉산이 위치하여 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금산이 무정면과 접경하여 양지맥이 동에서 서주하여 동북고 남서 저형의 지세로 대부분 평탄한 지대 형성
2.대덕면 만덕산과 창평면 월봉산을 기원으로 용수천이 해봉과 무정면 운천산을 기원으로 창평천의 본류와 창평면 유곡리에서 합류하여 해곡천을 지나 영산강 상류인 봉산면 서단에서 합류하며 이 유역에는 협소한 농경지가 형성
3.기후적 특성은 대륙성 습윤, 온난기후지대에 속하며 대체적으로 온화한 지역으로 과거 10년 간(1991~2000) 담양군의 평균기온은 13.86℃로서 최고기온은 38.5℃, 최저기온은 -11.7℃를 나타냄
Ⅲ. 마을별 지몀유래
1. 창평리 (시동마을, 사동마을)
51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당시 극심한 한발로 우물이 말라 식수난을 격었으나 오리촌의 방죽은 마르지 않아 오리이상 주민이 식수를 길러갔다 하여 오리촌이라 불리웠으며 시장이 있는 곳을 시동(市洞), 활을 쏘는 정자가 있는 마을을 사동(射洞)이라 불렀음.
2. 삼천리(하삼천마을,상삼천마을)
151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어 고가(古家)가 많으며 동평에 월봉산과 남쪽에 국수봉이 있고 마을앞으로는 삼지천이 흐르고 봉황이 날개를 뻗어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삼천리라 칭하였으며 현재는 상삼천, 하삼천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Ⅳ. 창평 삼지내 슬로시티 마을 안내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 82-2 번지
#. 삼지내 마을에 다녀왔다. 슬로시티국제연맹으로부터 ‘느리게 사는 마을’로 인정받은 이곳은 고요하면서도 활기가 있었다. 옛 돌담이 인상적인 고즈넉한 동네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면 조그마한 읍내가 나온다. 창평 전통시장이 있는 이곳은 작지만 생명력이 넘쳤다. 이날은 5, 10일마다 열리는 5일장인 창평시장의 추석 대목장날이었다. 수탉들이 푸드덕대고, 강아지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며 꼬물거렸다. 창평 국밥, 쌀엿 등 지역 특산 음식들도 눈길을 끌었다.마을 입구 면사무소에는 ‘매월 둘째주 토요일 놀토 달팽이 시장’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매달 둘째 토요일,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놀토’마다 이곳에선 아기자기한 벼룩시장이 열린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든 장아찌·장류·쌀엿 등 전통 음식, 직접 기른 채소, 인근 산에서 캔 나물들도 판매된다. 떡메치기, 작두샘 체험, 투호놀이, 천연염색 등 전통 체험이나 돌담길 작은음악회 등 공연도 즐길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느림보 자전거 경주대회’. 마을 돌담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가야 하는 이색적인 경기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지내 마을 안길, 돌담장 사이로 한 아이가 뛰어가고 있다. 삼지내 마을의 돌담은 돌과 논흙을 사용한 토석담으로 소박한 멋이 있다.
삼지내 마을은 1510년쯤에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선지 마을에 고가가 많다. 창평 고씨 씨족마을이었던 만큼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들이 많다. 비어 있는 고재선 가옥은 상시 개방되지만 고재환 가옥은 요청할 때만 둘러볼 수 있다. 이들 중 춘강 고정주 고택이 유명하다. 고정주는 구한말 규장각에서 벼슬을 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곳으로 낙향했다. 그리고 영학숙과 창흥의숙을 짓고 무료로 근대교육을 시작했다. 그 역사가 마을 안에 있는 창평초교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마을을 돌아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걸어서 30분이면 간단히 돌아볼 수 있다. 이곳의 돌담은 ‘창평 삼지천 마을 옛담장’이란 이름으로 지정된 등록문화재다. 돌과 논흙을 사용한 토석담으로, 깔끔하진 않지만 삶이 묻어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스팔트로 덮인 일부 길은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옛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아스팔트길을 흙길로 바꾸는 중이란다. 마을 곳곳에 펄럭이는 슬로시티의 상징, ‘달팽이 그림’ 깃발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에도 좋다. 면사무소에서 무료로 자전거를 대여해 준다. 삼지내 마을에서는 하루쯤 머무르면서 한옥 체험을 하는 게 좋을 듯싶다. 5곳의 한옥 민박집이 있다. 보통 비성수기 가격으로 하룻밤에 5만원부터다. 한옥 민박집에 머무르면 창평의 슬로푸드인 쌀엿·한과·장류·장아찌 등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쌀엿을 만들어 먹어볼 수 있는 쌀엿체험장, 천연염색을 체험할 수 있는 두레박 공방 등도 있다
- 2010년 9월28일 경향신문 이로사 기자-
●인솔자 약력
심 재 근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
-옛그늘 문화유산답사회 회장
(1996년10,1 창립~195차 기행:연인원 6,500명 답사기행,
해외기행 8회)
-전 마산MBC 교통리포터. 진주MBC 향토문화순례(2006년)
-문화재청 행정모니터 역임
-전국 산행 가이드 10년
-글쓰기
경남문화유산답사기[경남신문:2001.9.14~2004.6.11.126회]
우리 땅 순례[경남신문:2005.4.7~ 현재: 61회 연재 ]
문화누리(창원문화재단)- 풍경이 있는 시간-연재
경남도청 대표 블로그: http://blog.naver.com/gnfeel/
문화와 전설이 있는 기행-연재
마산시보, 사람과 문화 등
-강사: 경남교육연수원 신임교사 학생지도 연수 강사, 대우문화센터, 양산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마산도서관, 창원도서관, 창원교육지원청(2010,지역 특성화 연수)강사, 창원교육지원청(2011 초등신임교사 지역문화연수강사. 경남초등학교 사회과 교사 현장체험연수 등
-Email: dolmenkr@hanmail.net
-카페: 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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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010-9457-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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