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수산성조(首山城操)1702년(숙종 28) 11월2일 정의현 수산진성에서의 성정군 군사훈련을 점검하는 그림 |
▲수산성조
- 수산진성, 수산봉수, 협재연대, 구수산고성의 위치가 상세하며 수산진은 동문과 서문이 있는 타원형의 성이다. 수산진성 내에는 건물 배치 상황뿐만 아니라 샘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수산진 관할의 봉수로는 지미 · 성산 · 수산 봉수가 있고 연대에는 협재 · 오소포 · 종달 연대가 있다.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가 참석하였으며, 조방장 유효갑(兪孝甲)을 비롯해 성정군 80명 및 군기에 대한 점검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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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의조점(旌義操點)1702년(숙종 28) 11월2일 정의현성에서의 조련(操鍊)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 |
▲정의조점
- 정의현 성, 달산봉수의 위치와 읍외촌(邑外村), 궁산촌(弓山村)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정의현 성은 성곽이 둘러쳐지고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져 있으며 그 중심지에 객사가 자리 잡고 관아 · 창고 · 문묘(文廟) 등의 건물 명이 보인다.
당시 정의현은 읍내 1리, 동면 10리, 서면 12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호(民戶)는 1,435호, 전답(田畓)은 140결이다. 성장(城將) 2인, 치총(雉摠) 4인, 성정군(城丁軍) 664명과 제반군기는 물론 목자와 보인 190명, 말 1,178필, 흑우 229수, 창고의 곡식 4,250여 석을 점검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의현 성의 직접적인 관할 봉수는 남산, 독자, 달산, 토산이며 연대(煙臺)는 말등포, 천미, 소마로, 벌포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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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정의양로(旌義養老)1702년(숙종 28) 11월3일 정의현성에서 치러진 노인잔치 광경 |
▲정의양로
- 정의현 성은 성곽이 둘러쳐지고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져 있으며 그 중심지에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노인잔치는 객사(客館) 앞에서 이루어졌는데 이형상 제주목사는 북쪽을 향해 있으며 노인들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림 아래 기록에 의하면 이날 참석한 정의현에 사는 80세 이상의 남녀노인은 17명, 90세 이상은 5명이다.
이형상 목사 앞에는 가야금을 타는 여인이 4명, 대금을 부는 남자 2명, 장구를 치는 여인 1명, 틀에 달고 채로 치는 북을 두드리는 1명 등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과 춤을추는 남자 2명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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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정의강사(旌義講射)1702년(숙종 28) 11월4일 동짓날에 정의현에 머물면서 시행한 강사(講射), 즉 강(講)받기 시험과 활쏘기 시험 장면 |
▲정의강사
- 대상은 강유(講儒)와 사원(射員)이다. 講 받기 시험은 유생들에게 자신이 읽은 글을 시험관 앞에서 암송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의현 성은 성곽이 둘러쳐지고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있으며 그 중심지에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민가들이 밀집되어 있고 다음데 병고(兵庫)에 설치된 1간대문에 이른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서쪽에는 현아(懸衙)인 일관헌과 연결되는 문을 제외하고 담장을 둘러 공간을 구획했는데 마당 북쪽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은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오늘날 제주도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일관헌은 지금의 군청에 해당하는 곳으로 정의현감이 집무하던 청사이며 그 옆마당에는 거대한 연자매가 있다.)
객사를 중심으로 그 우측에는 수(帥)자기가 있고, 정면 좌측, 우측에는 각종 깃발과 무사가 배열되어 있다. 객사 안에는 이형상 목사가 앉아있고 그 옆에는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다. 활을 쏘는 사람과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객사 밖에까지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또 객사 앞에는 도훈장 5명과 강유, 각 면 교사장이 붉은 옷차림으로 앉아 있다. 특히 강유들도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 훈장인 유학 고세웅, 각 면 훈장 5명, 각 면 교사장 7명, 유학을 공부하는 166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87명의 사원(射員, 활쏘는 사람)이 재주를 겨루었다. 당시 정의현에 거주하는 사원은 350여 명이었다.
객사의 북서쪽 가까이에 현감이 집무하는 현아가 ‘ㅁ’자형으로 형성하고 그 남쪽으로 교육시설인 문묘(향교)가 주위에 별도로 담장을 두르고 ‘ㄷ’자를 형성하면서 자리 잡고, 군사들의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는 객사 마당쪽 동측에 ‘ㅁ’를 형성하고 있다.
성 밖에는 오름으로 영주산이 있고, 달산망 봉수와 초가가 보인다. 정의현 성의 직접적인 관할 봉수는 남산, 독자, 달산, 토산이며 연대(煙臺)는 말등포, 천미, 소마로, 벌포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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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정방탐승(正方探勝)1702년(숙종 28) 11월5일 배를 타고 정방폭포를 탐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정방탐승
- 폭포 위에 있는 소나무가 강조되어 있으며 그 아래 정방연(正方淵)에서 배를 타고 놀이를 즐기고 있는데 부기의 내용으로 보아 정방폭포의 길이 80여 척, 너비 5척임을 알 수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정방연(正方淵)은 정의현에서 서쪽 60리에 있으며 폭포 위에는 큰 소나무들이 있고 밑으로 바다가 있어 폭포가 바다에 직접 떨어져 가히 제일명구(第一名區)라 이르고 있다.
이 그림은 남쪽 바다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파도의 모습과 폭포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물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해안 절벽 위의 노송들이 독특하게 그려져 있고 지금의 보목동 앞바다에 있는 섶섬(삼도)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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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천연사후(天淵射帿)1702년(숙종 28) 11월6일 천지연폭포에서의 활을 쏘는 장면을 그린 그림 |
▲천연사후
- 천지연폭포에서 활 쏘는 장면으로 폭포의 반대편에 과녁을 설치해 화살을 쏘고 있는데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서 추인(芻人, 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을 좌우로 이동하게 했다. 이와 같은 추인은 주로 기병(騎兵)들의 화살을 쏘는 표적으로 주로 이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을 상대편에서 추인에게 꽂으면 이쪽에서 줄을 당겨 추인에게 꽂힌 화살을 건네받는 것이다.
천지연폭포는 길이 50여 척, 너비 10여 척이라 부기되어 있다. 정방폭포에 비해 폭포의 길이는 짧으나 넓이는 그 배에 해당한다. 폭포의 좌우는 깎인 봉우리가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활에 화살을 당긴 형상을 하고 있다.
오늘날 천지연폭포의 높이는 22m이며 폭은 한라산에 비가 많이 올 때는 12m까지 넓어진다. 20m의 못에는 천연기념물 제268호 무태장어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열대어의 북방한계지 또한 이곳이라는 사실이 중요시되어 천지연폭포는 ‘제주도 무태장어 서식지’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계곡 전체는 천연기념물 제379호로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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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귀조점(西歸操點)1702년(숙종 28) 11월5일 서귀진의 조련과 군기 및 말을 점검하는 그림 |
▲서귀조점
- 서귀진의 위치와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귀진은 동문과 서문이 있는 타원형의 성인데 성벽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고 회곽도를 오르기 위한 돌계단이 성문 옆에 축조되어 있다. 성문 앞에는 옹성이 있고 성 안의 북성 가까이에 객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객사 앞쪽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남성에 붙여 성벽과 나란히 창고, 마당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병고(兵庫), 왼쪽에는 진졸청과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있다. 객사의 왼쪽에 있는 초가는 기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鎭)의 책임자가 거주하는 진사(鎭舍)인 듯하다.
정의현감과 더불어 대정현감이 함께 참석했는데 이는 아마 다음 순력지역이 대정현 지역이기 때문에 목사를 배행하기 위해 참석한 듯하며, 당시 서귀진 조방장은 원덕전(元德全)이었으며 성정군 68명과 군기를 점검하고 목자와 보인 39명, 말 237필도 아울러 점검했다. 서귀진 소속의 봉수는 자배 · 호촌 · 삼매양 봉수, 연대(煙臺)는 금로포 · 우미 · 보목 · 연동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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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현폭사후(懸瀑射帿)1702년(숙종 28) 11월6일 현재의 중문 천제연폭포에서 활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현폭사후
- ‘대정지경(大靜之竟)’임을 표시하는 글자가 보이며, 천제연폭포를 상폭(上瀑)과 하폭(下瀑)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천지연폭포와 마찬가지로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 추인(芻人, 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이 좌우로 이동하고 있다. 이와 같은 추인은 주로 기병(騎兵)들의 화살을 쏘는 표적으로 주로 이용되었으나 여기에서는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을 상대편에서 추인에 꽂으면 이쪽에서 추인의 매달린 줄을 당겨 추인에 꽂힌 화살을 건네받는 것이다.
폭포의 길이는 50여 척, 너비는 5척이라 부기(附記)하였다.
상폭 서쪽 암벽에는 임관주(任寬周)의 시가 전해온다.
천제연 열린 곳에 큰 폭포 흘러내려
총석(叢石)으로 옮겨오고 깊은 못에 쏟아지네.
추인(芻人)은 화살을 지고 공중을 걸어가니
제일 기이하고 볼 만한 것이 이 사후(射侯)가 아닌가.
23. 고원방고(羔園訪古)1702년(숙종 28) 11월6일 고둔과원(羔屯果園)에서 왕자구지(王子舊地)를 탐방하는 그림 |
▲고원방고
- 1702년(숙종 28) 11월6일 서귀진을 떠나 이형상 제주목사는 정의현감 박상하, 대정현감 최종제와 함께 고둔과원(羔屯果園)에 도착, 샛노란 귤을 보며 술과 노래를 즐겼다. 대정현 성에서 동쪽으로 55리에 위치한 고둔과원은 현재 서귀포시 용흥동 속칭 염돈마을 운랑천 부근의 염돈과원을 가리킨다.
과원 좌측에 ‘왕자구지(王子舊地)’라 되어 있고 그곳에서 기녀들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가운데 풍악을 즐기고 있다. 과원의 방풍림으로 대나무가 심어있고 과원의 밖에는 참나무밭과 매화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운랑천(雲浪泉)으로 추정되는 물과 인근에는 그 물을 이용한 논이 형성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형상 목사는 ‘풍치로 이를 말하면 가을 겨울에 낙엽할 때 홀로 과원은 봄철 녹음으로 단장해 하늘을 가리우고 누런 열매는 햇빛에 비치니 나무마다 영롱하고 잎마다 찬란하다’고 적었다.
순력 후에 이형상 목사는 이 과원을 평가하기를 ‘제주의 북원, 정의의 성산과 함께 제주의 과원 중 가장 뛰어나다’라고 했다.
청음 김상헌도 <남사록>에서 ‘동정(洞庭)에는 귤(橘)이 있되 매화는 없고, 서호(西湖)에는 매화는 있으되 귤은 없는데 이곳은 동정과 서호가 함께 눈앞에 펼쳐져 있다’고 하여 그 풍치를 찬양했다.
과원에 있는 감귤나무는 익어가는 색깔을 달리하여 여러 품종이 재배되고 있음을 나타내며, 고둔마을은 고둔과원 근처에 형성된 마을로 지금의 서귀포시 용흥동 염둔마을을 가리킨다. 고둔과원은 현재 강정동 2012번지 부근이며 조선시대부터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둔과원 안에는 ‘왕자구지’가 있어 당시에는 제주로 부임하는 목사들이 즐겨 찾는 경승지였다.
<남환박물>에는 고둔이 ‘고득종(高得宗) 감사의 옛 집터’가 있는 곳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원진의 <탐라지(1956)>에는 ‘고둔과원은 대정현에서 동쪽 55리에 있으니, 고득종의 농막 터인데 지금도 주춧돌과 계단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득종은 부친 고봉지(高鳳智)를 따라 10세 때 상경했는데 효행이 두터워서 1413년(태종 13) 벼슬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이듬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호군, 예빈시판관 등의 벼슬을 지냈고,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제주목마장에 관해 세종의 자문에 응하며 세종의 총애를 받아 두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9년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천황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온 후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고득종은 특히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나 전하는 저술이나 작품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제주에는 기록상 3번 다녀갔는데 한번은 배가 난파되기도 했다. 황희(黃喜)와는 제주마를 줄 정도로 친분이 있었으며 안평대군과는 몽유도원도에 그의 찬시(讚詩_가 올라있을 정도의 친분이었다고 한다.
관덕정 창건 당시 고득종의 간청으로 안평대군이 관덕정의 현판글씨를 써주기도 했는데 후에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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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산방배작(山房盃酌)1702년(숙종 28) 11월10일 산방굴(山房窟)에서 배작(盃酌)의 그림을 그린 그림 |
▲산방배작
- 돌산인 산방산(山房山)의 모습이 기골이 웅장하게 묘사되어 있다.
송악산(松岳山), 형제도(兄弟島), 군산(軍山), 감산(紺山), 용두(龍頭) 등이 보이며, 도로와 산방연대(山房烟臺)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사계리 포구가 흑로포(黑路浦)로 표기되어 있는데 산방산 남쪽을 휘감은 도로는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는 도로이다.
현재 산방산 입구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노송이 이 그림에서도 노송처럼 그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수령이 400년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산방산은 대정현 동쪽 10리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높이 200척, 둘레 10리로 산 전체가 돌로 형성되어 있고 남쪽 언덕에 큰 굴이 있는데 굴암이라 이르며 물이 굴 위로부터 한 방울씩 떨어진다. 그 남쪽에 암문(暗門)이라는 굴이 있는데 그 벽 사이가 1척이며 깊이가 100척, 길이 50여 척에 이른다. 그 북쪽에 큰 굴이 있는데 깊이는 헤아릴 수 없으나 피생문(彼生門)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세 개의 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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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대정조점(大靜操點)1702년(숙종 28) 11월10일 대정현성의 성정군 조련과 대정현의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 |
▲대정조점
- 대정현 성의 내부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대정현 성은 성곽이 둘러쳐진 타원형의 성으로 성벽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고 회곽도를 오르기 위한 돌계단이 성문 옆에 축조되어 있다. 북성 가까이 정청(政廳)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향궐만배(向闕萬拜)하는 곳인 객사(客舍)가 자리 잡고 있다.
남문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 한 가운데 두 기둥을 세우고 지붕 없이 홍살을 세워 댄 홍살문에 이르는데 객사로 출입하는 문이 가운데 있고 좌우로 익랑을 둔 솟을대문에 이른다. 이 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객사가 자리잡고, 객사 앞쪽 좌우측에 객사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현관의 집무소인 관아는 객사 서쪽에 성벽과 함께 하여 ‘ㄷ’자를 형성하고 있고 객사와 관아 사이에는 군관의 처소인 관청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객사 동측에는 군기를 보관하는 군기고가 있으며 군기고 남쪽에는 좌수와 별감이 근무하는 향청, 육방의 우구머리가 집무하던 작청 등의 건물이 자지잡고 있다. 관아 남쪽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 성 밖의 민가들은 성의 동쪽에 밀집되어 있으며 당시 대정현의 편제는 읍내1리, 동면9리, 서면2리로 모두 12리에 민호는 797호, 전답은 149결이다. 성장 2인, 치총 4인, 성정군 224명, 군기, 문묘의 제기ㆍ제복ㆍ서책, 목자와 보인 123명, 말 840필, 흑우 228수, 창고의 곡식 1,9500여 석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26. 대정배전(大靜拜箋)1702년(숙종 28) 11월11일 대정현에서 시행된 배전(拜箋)의 광경을 그린 그림 |
▲대정배전
- 순력 도중 대정현에서 조정의 경사를 듣고 배전(拜箋)이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배전(拜箋)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지방관이 그 소재지에서 임금에게 전(箋, 書面)을 올려 하례(賀禮)의 뜻을 표하는 의식을 말한다.
대정현성은 성곽이 둘러쳐진 타원형으로 읍내의 민가와 읍성 밖에 동성리로 추정되는 민가들이 보인다.
그림 아래에 기사의 내용은 없다.
「대정조점(大靜操點)」, 「대정양노(大靜養老)」, 「대정강사(大靜講射)」의 그림과 아울러 대정현성 내의 건물 복원에 상당히 유용한 그림이다. 읍내의 민가와 읍성 밖에 동성리로 추정되는 민가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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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정양로(大靜養老)1702년(숙종 28) 11월11일 대정현에서의 노인잔치를 그림 |
▲대정양로
- 당시 대정현에는 80세 이상의 노인 11명, 90세 이상의 노인 1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목사의 순력 시에는 이와 같은 노인잔치는 거의 관례화되어 있었는데 제주지방 풍속 중의 하나가 ‘인다수고(人多壽考,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인데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제주 가운데 한라산이 있어 남쪽 큰 바다의 독기는 산에 막히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기운이 더운 습기와 열기를 몰아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주 내에서도 한라산 남쪽에 비하여 북쪽이 더욱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속설에는 봄가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노인성을 보면 장수한다고 전해오는데 이 노인성이 제주의 한라산에서 흔히 볼 수 있어 도민들 중에 장수하는 자가 많은 까닭으로 전해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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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대정강사(大靜講射)1702년(숙종 28) 11월12일 대정현에 머물면서 시행한 강사(講射)의 장면 |
▲대정강사
- 부기의 내용을 보면, 강사(講射)에는 도훈장(都訓長)에 현감을 역임한 문영후(文榮後), 각면(各面) 훈장 5인, 각면 교사장(敎射長) 5인, 강유(講儒: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42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21명의 사원(射員: 활 쏘는 사람)이 활을 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정현 성안에는 각종 깃발이 도열되어 있고 이형상목사는 객관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주안상이 있고 또 사원들이 그 앞에서 배례를 올리고 있다. 유강들은 붉은 옷차림으로 사원들과 함께 늘어서 있다. 객관 좌측에는 기수들이 잡고 있는 각종 깃발이 도열해 있는데 과녁과 물림폭이 시설되어 있고 그 옆에는 판정관가 활의 적중여부를 알리는 사령 3명이 신호기를 눕힌 채 엎드려 있다.
성 밖의 남쪽으로는 좌측으로부터 산방산, 바굼지오름(破軍山岳), 송악산이 있고 섬은 우측으로부터 가파도(盖波島), 마라도, 형제도가 있으며 봉수로는 저성망(貯聖望), 마을로는 모슬포의 초가가 보이고, 성 밖에도 초가가 있다. 특히 바굼지오름 남쪽으로 문묘(文廟) 즉 대정향교가 보인다.
대정현성 내의 건물 위치와 아울러 주변의 송악산, 형제도, 산방산, 파군산, 모슬포, 가파도, 마라도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파군산 뒷편에 향교의 모습이 보인다. 저별망이 저성망(貯星望), 가파도가 개파도(蓋波島), 마라도(馬羅島)가 마라도(摩羅島)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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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모슬점부(慕瑟點簿) 1702년(숙종 28) 11월13일 모슬진 군대를 점검하는 그림 |
▲모슬점부
- 이형상 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군관 전만호(前萬戶)와 유성서(柳星瑞)를 대신 보내 점검했다.
목사가 친히 점검하지 않고 장부상으로 확인한 경우는 이를 구별해 ‘점부(點簿)’라 한 듯하다.
점검 결과 모슬진의 조방장에 오세인(吳世仁), 방군(防軍), 기병, 보병이 24명이었다.
대정현성에서 모슬진에 이르는 주변 지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수연대와 모슬봉수의 위치, 모슬촌의 민가가 표기되어 있다.
모슬진은 원형의 성으로 성문이 동문 하나만 있다.
동문과 남성 사이에 객사와 병고가 조금 떨어져 ‘ㄴ’자를 형성하고 있고
동문과 북성 사이에도 ‘ㄴ’자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모두 우진각 초가로 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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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차귀점부(遮歸點簿) 1702년(숙종 28) 11월13일 실시한 차귀진의 조련과 점검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차귀점부
- 이형상 목사가 친히 점검하지 않고 당시 군관(軍官)으로 있는 사과(司果) 홍우성(洪遇聖)을 대신 보내어 점검하도록 하고, 이형상 목사는 문서상으로 확인하고 있다. 점검 결과의 내용은 차귀진(遮歸鎭) 조방장 김국준, 방군(防軍) · 기병(騎兵) · 보병(步兵)이 20명이며, 그 외로 군기도 점검하였다.
이 그림에는 차귀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차귀진 소속의 당산봉수, 우두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참나무가 있는 모동(毛同) 지경과 우자장(宇字場) 목장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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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명월조점(明月操點)1702년(숙종 28) 11월14일 명월진 성정군의 훈련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그림 |
▲명월조점
- 명월진성 내의 천(泉) · 별고(別庫) · 서별창(西別倉)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주변의 지형을 상세히 표기하였다. 즉, 우둔촌(牛屯村)과 수류천촌(水流川村) 민가의 위치, 만조봉수(晩早烽燧) · 마두연대(馬頭烟臺) · 배령굴(排令窟) · 월계과원(月溪果園)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또한 명월진의 해안변에 위치한 논 등도 상세히 그려져 있다. 명월진 내에 말을 점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을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지방관겸중군(地方官兼中軍)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명월진 조방장 강세건(姜世建), 성정군(城丁軍) 412명, 목자 · 보인 185명, 말 1,064필, 창곡의 곡식 3,300여 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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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명월시사(明月試射)1702년(숙종 28) 11월14일 명월진성에서 활쏘기 시험장면을 그린 그림 |
▲명월시사
- 앞의 ‘명월조점’ 그림과 흡사하며 우면(右面) 교사장(敎射長) 17인, 활 쏘는 사람(射員) 141명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주위에 대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명월진성은 본래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중종 5년(1510) 장림(張林) 목사가 축조하였고 그후 선조 25년 이경억 목사가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3,050척, 높이가 9척, 3문(동 · 서 · 남)이 있으며 문 위에는 루(樓)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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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애월조점(涯月操點)1702년(숙종 28) 11월14일 애월진의 군사와 말을 점검하는 그림 |
▲애월조점
- 1702년(숙종 28) 11월 14일 순력(巡歷) 및 숙소. 애월진(涯月鎭)의 군사와 말을 점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애월진 · 애월리 · 고내봉수(高內烽燧) · 애월연대(涯月烟臺)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애월진 내에는 군기 등의 건물 다수와 말을 점검하기 위한 사장(蛇場) 및 원장(圓場)이 설치되어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제주판관, 조방장 남해거(南海擧), 성정군(城丁軍) 245명, 목자와 보인이 181명, 말 1,040필이다. 애월진은 둘레가 549척이며, 성문은 남쪽과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1개 봉수와 2개 연대를 관장하였는데, 고내봉수 · 애월연대 · 남두연대(南頭烟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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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주조점(濟州操點)1702년(숙종 28) 11월15일 제주읍성에서 성정군의 조련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 |
▲제주조점
- 가중군(假中軍: 임시로 임명된 중군) 이항, 성장(城將) 4명, 치총(雉摠) 2명, 민호 7,319호, 전답 3,357결, 성정군(城丁軍) 1,236명, 창고의 곡식 30,0400여 석, 향교의 제기(祭器) · 제복(祭服) · 서책(書冊), 군기(軍器) 등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당시 제주목의 편제는 읍 3리, 동면 34리, 서면 53리, 남면 5리 등 3면 95리이다.
일반적으로 지방 관아의 소재지를 읍치(邑治)라고 한다. 읍치의 주위는 대개 성곽으로 둘러있고 그 안에 거의 모든 관아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행정적인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을 읍성(邑城)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는 관덕정(觀德亭) · 객관(客館) · 옥(獄) · 향교(鄕校) · 서원(書院)의 위치 그리고 서과원(西果園), 중과원(中果園), 남과원(南果園), 북과원(北果園), 별과원(別果園)의 위치 등 제주읍성 안의 관아건물의 위치가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어 당시 읍성 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제주읍성 밖 남쪽에는 모흥혈(毛興穴), 연무정(演武亭), 사직단(社稷壇)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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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제주사회(濟州射會)1702년(숙종 28) 11월18일 실시된 활쏘기 장면 그림 |
▲제주사회
- 사회(射會)는 활쏘기를 하는 모임으로 활 쏘기 전에 관덕정 앞에 정렬해 있는 모습이다.
그림 아래 설명에 따르면 절제사인 이형상 목사를 비롯해 중군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 군관 15명, 주무(州武, 고을의 武學으로 제주목의 무인 출신) 23명, 그리고 각청 관리들이 정렬했다.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들 모습에 긴장감이 감돌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들을 표현해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느껴진다. 상세하게 그려진 제주읍성의 관아건물들도 흥미롭다.
관덕정 동 북쪽으로 우연당, 영청, 상아, 망경루가 자리하고 이들 건물로 드나드는 외대문, 중대문, 내대문, 후문이 차례로 나타나며 애매헌, 군관청, 군기고 등도 표시되어 있다. 관덕정 동남쪽으로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아건물인 관청, 목관, 목관으로 통하는 외대문, 내대문, 군관청, 민가들의 모습들도 눈길을 끈다.
제주목사의 동헌으로 통하는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가 있고 그 위에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본래 이 사장(射場)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1448년(세종 30) 제주목사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하였다.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 하여 ‘관덕(觀德)’이라 이름하였다. 관덕정이란 현판은 처음에는 안평대군이 썼다고 하나 현재의 현판은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이다.
현재 관덕정 내 두 개의 대들보에 가로 650㎝, 세로 50㎝의 작자와 연대 미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두보취과양주귤만헌(杜甫醉過楊州橘滿軒)」, 「상산사호(商山四皓)」, 「홍문연(鴻門宴)」,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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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주전최(濟州殿最)1702년(숙종 28) 11월17일 제주목사가 관하 각 관리의 치적(治績)을 심사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제주전최
- 제주목사인 절제사가 관덕정 중앙 상좌에 사모를 쓰고 엄숙히 좌정해 있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 오른쪽에 주안상이 놓여 있고 두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다. 절제사의 정면에는 장고, 북 등 악기를 연주하는 기녀들과 사당패가 앉아 있고, 그 좌우에 판관, 두 고을 현감, 군관과 많은 고을 무사들이 앞에 주안상을 놓은 채 나란히 앉아 있다. 관덕정 앞 계단과 뜰 좌우편에는 사령들이 깃발을 들고 도열해 있으며, 관덕정 좌측 높은 깃대에는 수(帥)자기가 깃봉 없이 게양되어 있다.
제주읍성의 관아 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왼쪽의 종(鐘)이 매달려 있는 작은 건물은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이다.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릴 때 이 종을 울렸다고 한다. 전면에는 긴 집채[回廊]만이 그려져 있고 관덕정 중앙 정면에는 물림폭이 그려져 있다.
관덕정 북쪽으로 우연당(友蓮堂) · 영청(營廳) · 상아(上衙) · 망경루(望京樓)가 보이며, 이들 건물로 드나들기 위한 외대문(外大門) · 중대문(中大門) · 내대문(內大門) · 후문(後門)이 차례로 나타나 있으며, 애매헌(愛梅軒) · 군관청(軍官廳) · 군기고(軍器庫) 등도 표시되어 있다. 관덕정 동남쪽으로는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아 건물인 관청(官廳) · 목관(牧官), 목관으로 통하는 외대문 · 내대문 · 군관청(軍官廳), 그리고 민가(民家)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제주지방의 군대는 속오군(束五軍)과 마대(馬隊)로 구분되는데, 속오군은 3부(部) 6사(司) 30초(肖)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림 아래의 기록에 따르면 각 부의 책임자 천총(千摠), 각 사의 책임자 파총(把摠), 각 초의 책임자 초관(肖官), 마대(馬隊)의 책임자 별장(別將), 각 진(鎭)의 조방장(助防將), 성장(城將) 8명, 교련관(敎鍊官) 13명, 기패관(旗牌官) 94명, 도훈장(都訓長) 유학(幼學) 양유혁(梁維爀), 각면(各面) 훈장(訓長) 8명, 각면 교사장(敎射長) 22명, 강유(講儒) 302명, 사원(射員) 322명, 모두 800명이 넘는 인원이 모두 당시 전최(殿最: 공적 심사)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최(殿最)'란 '포폄(褒貶)'이라고도 한다. 법적으로는 경관(京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으나 대개 지방관의 경우를 일컬었다. 지방관이란 백성을 직접 대하는 관원으로서 그 잘잘못이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임명과 감독에 신중을 기하는 한편 나쁜 지방관은 파면되기도 했던 것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는 전야(田野)의 개간, 호구(戶口)의 증가, 부역의 균등, 사송(詞訟)의 간결, 도적의 근절 등 5가지 면에서 지방관의 성적을 판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이미 지방관의 고과법(考課法)을 제정하여 실적을 선(善) · 최(最) · 악(惡) · 전(殿)의 4등급과 여기에 세밀한 등급을 붙여 조사·보고하도록 하였다. 그 후 기준은 다소 달라졌으나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하여 관찰사가 지방관의 실적을 몰래 조사하여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렇게 하여 재직 중에 받은 성적은 승진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이 제도도 후기에 들어와서는 전최과정에 정실이 개입되는 일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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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제주양로(濟州養老)1702년(숙종 28) 11월19일 제주목에서 이형상 제주목사가 동헌 앞에서 양로연을 실시하는 광경 |
▲제주양로
- 동헌 뜰을 중심으로 망경루(望京樓), 마방(馬房), 귤림당(橘林堂), 애매헌(愛梅軒), 동헌의 모습이 상세하다. 이형상 목사는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제주목의 80세 이상 183人, 90세 이상 23人, 100세 이상 3人의 남녀노인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정의현감, 전 대정현감 문영후, 전찰방 정희랑, 군관 15인원, 三學 등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들은 이형상 목사의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의 수령은 노인들을 초청하여 경로의 잔치를 베푸는 양로연을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한 직분이었다. 양로연을 베풀 때에는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노인들의 좋은 말을 들어 정치에 반영했다.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 이를 존경하는 것은 조선왕조를 다스리는 근본이었다. 제주도의 경우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어사가 양로잔치를 베풀었다. 이형상 제주목사에 이르러서는 정기적으로 봄가을로 나누어 양로잔치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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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병담범주(屛潭泛舟)1702년(숙종 28) 11월19일 이형상 제주목사가 취병담(翠屛潭), 곧 용연(龍淵)에서의 뱃놀이모습을 그림 |
▲병담범주
- 취병담(翠屛潭)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곳은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로 용연야범(龍淵夜泛)이라 하여 휘영청 밝은 밤에 용연을 찾아와 밤 뱃놀이를 즐겼다. 그래서 취병담에는 다른 명승지와 마찬가지로 제주목사 · 제주판관 · 유배인들이 풍류를 즐기다가 바위나 절벽에 유람의 흔적을 남긴 기념비적인 마애명(磨崖銘)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형상 자신도 이곳을 상당히 인상적으로 여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이형상 제주목사와 관련된 마애명은 확인되지 않으나, 그의 학문적 재능이나 풍류로 볼 때 마애명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마멸 또는 탈락된 것이 아닌가 싶다.
취병담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본 산의 지형이 상부 중앙의 백록담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그려져 있고, 취병담에 배를 띄워 놓고 기녀들과 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대천(大川) 우측에 민가의 모습, 용두암 부근에서의 목욕을 즐기는 광경, 연대 등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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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건포배은(巾浦拜恩)1702년(숙종 28) 12월20일 향(鄕)품(品)문(文)무(武) 300여 명이 관덕정 앞과 건입포(健入浦)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 즉 조정을 향해 배례하는 모습과 제주의 각 마을에 있었던 신당(神堂)의 일부가 불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
▲건포배은
- 향품문무(鄕品文武) 300여 명이 관덕정 앞과 건입포(健入浦)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즉 조정에 배례하는 모습과 제주의 각 마을에 있는 신당(神堂)이 불타는 모습을 그렸다. 산의 형세 및 하천의 흐름이 상세하다.
배례장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유난히 서늘해보이는 한라산과 성 밖 각 마을에 있는 신당(神堂)들이 불타고 있는 장면이다. ‘건포배은’과 ‘신당 파괴’의 두 사건을 한 도면에 표현한 것으로 그림 아래에는 불에 타 없어진 신당이 129곳, 훼손된 사찰 5곳, 285명의 무격(巫覡, 남녀무당)을 농업을 본업으로 삼도록 조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제주도는 일찍부터 북방신화의 바람길과 남방문화의 물길이 휘감기면서 교차하는 중심에 위치한 1만8천 神들의 고향으로 신화와 전설이 가득한 신비의 섬이다. 신당과 사찰을 불태우며 미신타파를 위해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당시 도민들의 정서는 이와 반대였겠지만 이형상 목사는 신당혁파 자체를 커다란 업적으로 생각하며 신당 및 사찰을 훼손한 것에 대해 도민들이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과 <탐라계록초>에 이 두 사건의 내용과 전후가 밝혀져 있다.
건포배은은 이형상 목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음으로써 그동안의 민폐가 상당히 줄어든 것에 대해 국은(國恩)을 입었다 하여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린 것이다.
<남환박물>에 의하면 건포배은이 후에 향품문무 등은 이형상 목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리며 국은에 감격한 백성들은 그 은혜와 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섬의 어리석은 몇 가지 풍속을 스스로 금하겠다고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였던 것이다. 결국 신당 파괴는 이형상 목사와 향문문부들과의 만남이 있은 다음날의 사건이었다. 두 사건을 한 도면 안에 표현한 것은 당시 제주도민들의 정서는 정반대였겠지만 이형상 목사는 신당혁파 자체를 큰 업적으로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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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비양방록(飛揚放鹿) 1702년(숙종 28) 10월11일 사슴을 생포하고 1703년 4월28일 비양도로 옮겨 방사(放飼)하는 그림 |
▲비양방록
- 이 그림은 무엇보다도 제주목 서면의 53개 마을의 위치가 한 장에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의 서문(西門)에서 명월진에 이르는 지형을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해안의 지형, 봉수, 연대의 위치, 애월진과 명월진, 토성(土城)의 위치가 잘 드러나 있다.
그 외 병문천(兵門川, 屛門川) · 대천(大川) · 무수천(無數川, 無愁川) · 정자천(亭子川)의 흐름이 보인다.
그리고 비양도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음을 그림으로 강조하고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1702년 10월 11일 사슴을 생포하고 1703년 4월 28일에 비양도에 방사(放飼)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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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호연금서(浩然琴書)1703년(숙종 29) 보길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호연한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며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한라장촉(漢拏壯囑)>과 짝을 이루는 그림. |
▲호연금서
- 좌측에 원당망(元堂望), 우측에 사라망(沙羅望)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중앙의 진성(鎭城)은 화북진성(禾北鎭城)에 해당한다. 몇 척의 배가 별도포(別刀浦)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당시 육지 지역과의 주요 통로로 조천포(朝天浦, 朝天館浦)와 함께 별도포가 널리 이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제주도와 주변국가
제주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해상 중심에 위치한 섬이다.
따라서 제주도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들은 1950m의 한라산을 항해의 이정표로 삼고 동중국 해상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그러나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는 불안한 상황의 연속이었고 제주부근을 항해하는 선박이 제주도에 표류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선박과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표류민을 통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보 획득은 국가의 입장에서 매우 유용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국가의 외교사절단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이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표류를 통한 것이었다.
제주인들은 고기잡이, 미역채취, 제주도 연안 항로를 이용한 물품운반, 감귤, 말 등의 공물운반, 과거응시나 장사를 위해 육지로 가다가 중국, 일본, 유구, 안남 등지에 표류하였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제주도에 표도하는 사례가 많았다.
- 디지털 탐라순력, 탐라문화관에서(『제주의 역사와 문화』)
***** 참고
경향신문 윤민용 기자가 <탐라순력도> 각 장면을 미술사적으로 조명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석사학위 논문인 ‘탐라순력도 연구’에서
역사적 자료로써의 가치는 높이 평가 받지만 ‘그림’으로 접근한 경우는 드물다고 하면서 “이렇다 할 준법이 사용되지 않고 채색과 선묘로 경물, 경관을 표현했으며, 평면적이고 과장된 측면이 강하다”며 “이는 서양화법까지 받아들일 정도의 중앙화단과는 차별화되고, 양식적으로도 개성적 표현이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회화적 특징으로는 기록화, 회화식 지도, 실경산수화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제작배경은 임진왜란 · 병자호란을 겪은 당시 사대부관료와 지역 사림들이 국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면서 지역의 역사 · 문화를 글 · 그림으로 남기려는 기록 욕구의 시각적 결과물로 분석된다. 그러나 사대부관료 이형상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화첩은 유교적 질서에 편입된 이들과 편입되지 않은 이들을 철저히 구분, 서민에 대한 묘사는 배제하고 자신의 치적을 강조하는 공적행사 위주로 구성하고 장면을 배치했다.
논문은 탐라순력도의 의의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기록화이자 지역의 개성적 조형의식이 반영된 시각기록물”이라고 주장했다.
또 윤기자는 “제작 300년이 지났지만 지방 기록화라는 이유로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져 상세한 분석, 해석은 물론 성격, 제작배경 등에 관한 규명은 이뤄지지 않은 실정”이라고 했다.
- 2010년 8월 2일,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