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에… 당국, 대책 마련 추진
5대은행 긴급회의… 19일 실무 논의
장제원, 지방세법 개정안 대표 발의
현재 후속 법안 13개 중 8개만 통과
與 “남은 법안도 조속히 개정 완료”
김기현 대표, 피해자들과 만남 추진도
캠코, 미추홀구 소재 피해주택 210건 중
51건 매각기일 변경 신청해 ‘경매 보류’
“野정치인 연루” “이름 밝혀라” 여야 공방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의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 보증금 회수를 못 하는 문제와 관련해 경매를 신청한 금융 기관에 일시적으로 경매 연기를 요청하기로 했다. 금융당국도 금융기관의 경매 중단을 비롯한 지원 대책을 조속히 마련키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8일 국무회의에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으로부터 경매 일정의 중단 또는 유예 방안을 보고받고, 이를 시행하도록 지시했다고 대통령실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 3명이 잇달아 극단적 선택을 하는 등 임차인 피해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며 “전세사기 대상 주택에 대해 선순위 근저당권을 확보한 금융 기관이 채권(대출금) 확보를 위해 경매를 신청한 경우 일정 기간 매각 기일을 연기하도록 요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인천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 외벽에 퇴거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피해자들의 호소문이 부착돼 있다. 연합뉴스
이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채권자에게 채권 회수를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며 “경매 절차를 취하할 수는 없고, 기일 변경을 통해 경매 절차를 연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금융감독원은 은행연합회 및 5대 시중은행 주요 임원들과 이날 오후 4시30분부터 1시간 가량 긴급회의를 열고 전세사기 피해대책을 논의했다. 금감원과 은행권은 19일 은행연합회에서 실무진 회의를 열어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다. 금감원은 “금융기관이 전세 사기 주택의 선순위 채권자로서 대출채권 회수를 위해 전세 사기 주택에 대해 경매절차를 진행하는 경우 전세사기 피해자가 퇴거해야 하는 등 예상치 못한 주거불안에 노출될 수 있다”며 “경매절차 유예 등 피해자 주거불안 해소방안을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어 “은행권과 함께 경매 유예 등 다양한 방안에 대해 실무적으로 논의했으며 이번 논의를 바탕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세부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16회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경매 절차 연기는 임차인의 거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경매에서 낙찰이 돼 금융 기관이 채권 회수에 들어가면 세입자는 곧바로 해당 주택에서 퇴거해야 한다. 일정 기간 경매 절차를 늦춰 임차인이 정부의 지원책에 따른 대출을 받아 거주지를 옮기거나 임시 거주 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자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최근 전세사기로 인해 비통한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며 “이 전세사기는 전형적인 약자 상대 범죄고, 이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 역시 청년 미래 세대”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에게 “정부 대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하고 또 점검하라”고 당부했다.
◆與 “세입자 보증금 우선 변제”… 캠코는 경매 매각기일 늦추기로
전세 사기 피해자가 극단 선택을 하는 일이 잇따르자 여당도 분주하게 입법 작업에 나서고 있다. 전셋집이 경매·공매되는 경우 세입자(임차인)의 확정일자 이후 법정기일이 설정된 재산세 등 지방세보다 세입자 임차보증금을 먼저 변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전세사기 관련 대책으로 내놨던 개정안 중 아직 본회의를 통과하지 않은 5개 법안 처리에도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전세 사기 피해자 주택의 경매가 진행되지 않도록 최근 경매 매각 기일 변경을 진행 중이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친윤(친윤석열)계 핵심 인사인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인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은 18일 피해자 보호를 위해 지방세기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이철규·박성민·배현진 등 당 지도부 포함 총 48명이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개정안은 전셋집이 경매·공매되는 경우 세입자(임차인)의 확정일자 이후 법정기일이 설정된 재산세 등 지방세보다 세입자 임차보증금을 먼저 변제하는 내용이 골자다.
현행법은 전셋집이 경·공매될 때 해당 주택에 부과된 지방세를 법정기일과 무관하게 임차보증금보다 먼저 변제하게 돼 있다. 이 때문에 임차보증금을 돌려받아 당장 다른 전셋집을 마련해야 하는 신혼부부나 청년 등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임차보증금 회수 기일만 기다리는 실정이라고 장 의원은 지적했다.
눈물의 추모식 18일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앞에서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 관계자가 숨진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사를 하고 있다. 인천=뉴시스
앞서 국민의힘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정부가 네 차례에 걸쳐 22개의 전세 사기 대책을 세우고 실행하고 있지만 국민들께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통탄스럽다”며 “어떻게 해야 국민께 힘이 될지 더 큰 책임감으로 보완하고 개선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박 정책위의장은 “후속대책 법안 13개 중 8개는 개정이 완료됐지만 남은 법안도 조속히 개정 완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법안 개정 의지도 다잡았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월 발표한 범정부 차원의 ‘전세 사기 예방 및 피해 지원방안’에서 ‘전세 사기 방지 6대 법률’ 개정을 약속한 바 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주택도시기금법·민간임대주택법·공인중개사법·감정평가사법·지방세징수법 등 6개 법과 관련된 13개 개정안 중 이날까지 통과되지 못한 법안은 총 5개다.
임차인이 거주 중인 주택에 대해 보증에 가입한 경우에 한해 등록을 허용하는 이른바 ‘선 보증 후 등록’을 골자로 하는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과 공인중개사법 일부개정법률안 3건(△공인중개사 자격증 및 중개사무소 등록증 대여 알선행위 처벌 △부동산거래질서교란행위 신고센터 신고 사항을 무등록 중개, 공인중개사의 거짓 언행 등으로 확대 △중개업자가 임대차 정보제공을 요구할 수 있도록 허용), 감정평가사의 부동산 관련 범죄 가담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등이 상임위 심사 전이거나 상임위에서 계류 중이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전세사기 피해자대책위와 만나 상황을 직접 듣고 당 차원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캠코 인천지역본부는 전날 현재 본부가 관리 중인 인천 미추홀구 소재 주택 210건 가운데 3월 37건, 4월 14건 등 총 51건의 매각 기일 변경 신청을 했다.
캠코는 금융기관과 약정을 통해 부실채권(MPL)을 매입하는데, 이 가운데 이번 전세 사기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한 미추홀구 지역에서 근저당권을 설정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포함됐다. 캠코는 지난달 초 정부의 전세 사기 피해자 간담회 이후 피해자 지원대책의 일환으로 캠코가 부실채권을 매입한 전세 사기 피해 주택의 경매 기일을 연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천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아파트 각 세대 창문에 구제방안 마련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캠코의 경매 기일 연기는 세입자가 정부 지원책에 따라 대출을 받거나 임시 거주할 곳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여야는 전세 사기 사태를 두고도 정치적 공방을 벌여 빈축을 샀다.
국민의힘 이철규 사무총장은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이런 부동산 사기 범죄가 가능하게 된 배후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면서 “이 사건과 또 다른 지역의 유사 사건의 주범 배후에 인천 지역 더불어민주당 유력 정치인이 관련돼 있다는 제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이날 서면 브리핑에서 “연기만 피우지 말고 지칭한 유력 정치인이 누구고 해당 정치인이 전세 사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라”며 “근거없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라면 가능한 모든 책임을 물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경고했다.
◆“2주 전에도 안부전화 왔는데…” 유족 오열 피해자 살던 아파트 “보증금 반환” 현수막
“2주 전에 ‘건강은 괜찮으시냐’고 묻던 딸의 안부 전화가 마지막 통화가 됐습니다.”
18일 인천의 한 장례식장 지하 1층 빈소. 일명 ‘인천 건축왕’에게 전세사기를 당한 뒤 전날 숨진 채 발견된 피해자 A(31·여)씨의 빈소에서 그의 아버지는 이같이 말하며 흐느꼈다. 유족은 “(A씨가) 수도 요금도 못 낼 정도였는데, 가족에겐 괜찮다고 했다”며 “가슴이 찢어진다”고 털어놨다.
A씨가 생전 세 들어 살던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아파트에는 이날 ‘낙찰 장사꾼들 한번 해보자’, ‘전세사기 수사 중’ 등이 적힌 경고 문구 스티커들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아파트 발코니 외벽을 따라 ‘전세사기 보증금 반환하라’는 현수막도 내걸렸다. 한 주민은 “경매꾼이 우리 아파트를 두고 ‘노다지’라고 말하더라”며 “그런 나쁜 ××가 어디 있냐”고 분개했다.
18일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앞에 전세사기 피해를 호소하며 숨진 20·30대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는 빈소가 마련돼 있다. 이들 모두는 인천 미추홀구 일대를 중심으로 100억원대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 기소된 60대 건축업자, 이른바 '건축왕'의 피해자로 파악됐다. 뉴시스
미추홀구에서만 전세사기를 당한 1000세대 이상이 경매·공매에 넘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대책위)는 지난 11일 기준 34개 아파트·빌라 1787세대 중 1066세대(59.6%)가 경매·공매에 넘어갔다고 이날 밝혔다. 이 가운데 106세대는 이미 낙찰돼 매각 절차가 끝났고, 261세대는 매각이 진행 중이다. 대책위 미가입자까지 고려하면 전체 3079세대 중 2083세대(67.6%)가 넘어갈 것으로 추정된다.
보증금마저 떼인 피해자들은 자신이 살던 집을 낙찰받지 못하면 당장 매수자에게 집을 비워줘야 하는 처지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경매 중단·연기에 대한 행정명령을 내려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대책위 관계자는 “경찰 수사가 끝나지 않아 민사소송도 어려운 상황에서 경매가 이뤄진다면 피해자들은 강제 퇴거가 불가피하다”며 “실제로 일부 낙찰자들이 이사비 지급 조건으로 집을 서둘러 비워달라고 해 이들은 당장 거리로 내몰릴 판”이라고 주장했다.
18일 인천시 미추홀구 경인국철(서울지하철 1호선) 주안역 광장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가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에서도 오피스텔 250여채를 소유한 임대인 부부가 파산해 피해자 수십명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참여연대 등 65개 시민·사회단체는 이날 ‘전세사기·깡통전세 해결을 위한 시민대책위’를 출범했다. 이들은 정부와 국회에 △깡통전세 특별법 제정(공공매입과 피해 구제 등) △전세가격(보증금) 규제를 위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 △전세대출·보증보험 관리 감독 강화 등을 건의했다. 이들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는 사회적 재난”이라며 “세입자들의 잇따른 죽음은 벼랑 끝으로 등떠민 정부 정책에 기인한 사회적 타살”이라고 강조했다.
곽은산·박세준·이도형·박지원 기자, 인천·화성=강승훈·오상도 기자 ,세종=안용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