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후, 공주는 어떤 모습일까요?
거기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윤여관
지역의 자립과 지구의 생존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
지역은 세계차원의 모순과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주체입니다. 지역에서 역사, 문화, 자연환경, 정서와 자원 등을 공유하며 산다는 것은 공해와 오염 같은 환경문제, 빈부격차나 인간소외 같은 사회모순도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방인처럼 잠시 외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갈등과 토론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공통체인 것이지요.
45억년의 지구 역사, 수 백 만년의 인류 역사에서 지구의 지속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불과 100년 남짓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인간이 어떤 마음과 태도와 습관으로 살아왔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진단 위에서 30년 뒤의 공주는 어떤 모습이길 우리가 바라는지 구체적으로 설계해보고, 설계자로서의 시민의 자세에 대해 큰 그림을 그려보았으면 합니다. 현재 우리는 공주시민으로서 살아가며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을 공유하고 의견을 모으며 그에 따라 크고 작은 실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지구의 생존으로 연결되는 지역의 자립을 염두에 두고 멀게는 100년, 가깝게는 50년, 적어도 30년 뒤를 내다보는 것은 참여자치시민연대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의 실천적 삶에 마땅히 놓여야 할 주초(柱礎)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그대로 수준 있는 문화, 교육, 사회, 경제, 역사, 철학, 정치의 시간이기를, 그 하루하루가 이끼처럼 내려앉은 품격 있는 도시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씁니다.
사람들은 대개 정당하다고 생각되며 꼭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되는 일을 합니다. 예를 들면, 시장이 바뀔 때마다 도시의 경관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바뀝니다. 물질의 수명이 다해서가 아니라 결정권자인 시장의 취향과 선호에 따른 교체입니다. 그 결과 지방자치 2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리모델링의 주기도 무척 빨라졌습니다. 지방자치 초기에는 비교적 적었던 공사 금액이 이제는 수십 수백억도 보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돈을 들인 도시를 새로 선출된 시장이 뒤집습니다. 공주시가 벌이는 일들이 공주의 정체성이나 지속가능한 지구적 삶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시장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옳다고 판단하고 열심히 하는 일들도 지구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우리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며, 모순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단호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밖엔 없습니다.
공주의 고도특별법은 어설픈 고도흉내기입니다.
「고도보존과 육성에 관한 특별법개정안」(이하 고도특별법)이 통과되고 그에 따라 국토연구원의 기준과 몇 가지 계획안도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시재생법(도시재개발법의 변형된 개념)」도 통과되었습니다. 「고도특별법」은 근대화에 매진하는 동안 역사의 흔적들이 훼손되어 한 국가의 문화다양성이 빈약해지고 국토의 효율적 활용 역시 한계에 도달했다는 반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이 2차 대전 이후의 신생국들처럼 신도시 일색의 나라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역사의 흔적을 문화적 자산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재생법」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마을들을 다 부수고 근대도시로 개조해온 재개발법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만든 법입니다. 그러나 근대산업개발에 대한 성찰에 기반을 두고 입법된 법도 개발관성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법제정의 취지를 왜곡해서 여전히 개발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도특별법」은 고대국가의 수도로서 조상의 삶의 흔적들이 집중되어 있는 경주, 부여, 공주, 익산 같은 도시를 ‘고도(古都)’라 명명할 뿐 아니라, 실제로 과거의 흔적들이 현재의 일상에 녹아있는 도시로 만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공주지역에도 이와 관련된 여러 민간단체들이 만들어졌으나, 불행히도 중앙정부에서 책정된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 수개월 만에 급조된 단체들입니다. 시대적 요구에 대한 이해의 편차가 심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다수결로 사업을 제정하고 추진할 경우, 자칫 법 제정의 정신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주로 역사학전공자로 구성된 대학의 기구를 통해 시민교양교육이 함께 진행되고 있는데, 앞으로 진행해야 할 공주의 정체성 찾기와 실현을 위해 보다 큰 공론의 장으로 나가는 첫 걸음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 공주의 「고도특별법」은 어설픈 고도흉내내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옥마을’로 이름 붙인 펜션사업,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제민천 정비사업, 곰나루 주변 도로정비사업과 공주고・시청・공주중・공주교대의 한옥담장사업, 황새바위 처형지에서 시청까지 도로확장사업, 봉황초 인근 골목확장사업, 한옥 보조금사업, 고마센터, 정방뜰로 이전한 소방서와 의료원, 대통사지 인근에 신축한 노인종합복지센터 등, 일련의 진행과정을 보면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분만 고도특별법이지 실제 원리는 개발시대의 관성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지는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안에서 품어져 나오는 내용의 표상이 이미지입니다. 새순은 봄의 기운이 밀어 낸 표상이고, 낙엽의 아름다움은 가을의 쇠락한 기운에서 번져 나온 빛깔입니다. 낙엽에 초록을 입혀도 새순이 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가치관, 방식이 고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는 고도의 이미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통행해야 하는 도심,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된 건물들과 교량들, 아크릴과 알루미늄 간판, 아스팔트로 된 도로들로 뒤덮인 유럽의 어느 도시를 여행한다 합시다. 그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도시를 고도라고 홍보한다면 여행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거나 심지어 기만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을까요?
이런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곳이 공주입니다. ‘고도는 무엇이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지금까지 잘 해온 것일까?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전체 과정에서 무엇을 빠뜨렸기에 이렇게 되었을까?’ 등의 의문과 숙고 없이 여전히 고도라는 구호만 붙여 개발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현실 삶의 근거 없이, 사료에 오래됐다는 기록에만 의존해서 ‘천년 고도’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심지어 구석기 축제도 개최합니다. 사람만 많이 모이게 할 수 있으면 뭐든 상품화시키려는 ‘대물(최고, 최대, 최초 등) 콤플렉스’는 아닌지 내면부터 돌이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문화도시, 생태교육도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아테네, 로마, 카이로, 피렌체, 쿠스코 같은 역사문화도시, 일본이나 독일 등지의 생태마을, 생태 도시들. 이들과 공주를 비교하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겐 구호만 있을 뿐, 실상은 다르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현재 공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공주라는 도시와 역사・문화・교육・생태 같은 단어들은 큰 저항 없이 어울려 받아들여집니다. 성급하게는 공주를 역사문화도시, 교육도시, 생태도시로 명명하기도 합니다. 원론적으로는 이름값을 해야 이름이 붙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큰 이견 없이 도시의 정체성에 개념적으로나마 합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갈 길의 반은 간 것 아닌가 여겨집니다. 명실상부, 이름에 걸맞은 실제의 모습을 모색해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이미지 차원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옛 길, 옛 물길의 복원입니다. 요원한 일이지요. 길은 우리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옛 길의 폭과 구배는 지금 우리의 현실조건과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역사문화도시나 생태교육도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꾸려가던 것과는 많이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어떤 경우 기존의 습관과 강한 충돌이 일어날 만큼의 변화를 동반할 수 있습니다. 차 없는 거리를 만드는 도시들이 늘어나고 있는 유럽을 예로 들면, 처음엔 좁은 영역에 국한하고 작은 도시에만 한정적으로 시행하던 차 없는 거리의 범위를 점점 넓혀가고 있습니다. 독일 제2의 거대도시인 함부르크의 경우 거의 실험에 가까운 면적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 가려는 중입니다. 파리 서북부의 신도시 라데팡스는 애초에 차를 지하로 통행하게 하는 설계 위에서 만들어졌지만, 함부르크는 기존 도심 한복판을 대상으로 합니다. 수많은 이해가 얽힌 차도를 없앤다는 것. 이는 그 길에 얽힌 모든 이해를 충족할 수 있는 절차에 기반해야 한다는 면에서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공주의 구도심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자, 응급차와 대중교통을 제외한 모든 차가 구도심을 통행할 수 없게 하자고 한다면 공주를 생태도시라 부르는 시민들이 과연 쉽게 동의해줄까요?
제민천을 생태하천으로 만들자는 얘기도 있습니다. 각 가정에 빗물 저장탱크를 묻어 갈수기에 물을 흘려보내거나 각 가정에서 사용한 물을 1차 정화조를 통과시키고 2차 3차로 정화식물이 심긴 못을 거치게 해 도랑으로 흘려보내면, 도랑들이 연못을 이룬 곳에서는 부레옥잠이나 연과 같은 식물들이 자라고 그 연못은 물고기와 조류들의 서식지가 되겠지요. 이런 복원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요구할까요? 차량들의 소통은 어떻게 될까요?
3m폭이 되지 않는 골목들은 현행 한국의 도로법에서 확장정비의 대상입니다. 소방차와 청소차, 응급차등의 통행을 위한 조치를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대적 도시법들은 근대 이전의 도시 혹은 마을들의 형상과 충돌합니다. 그런데 근대가 훨씬 먼저 시작된 유럽에서 자전거 두 대가 비켜 가기에도 빠듯한 1.2m 폭의 골목들로 구성된 오래된 마을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을까요? 각 가정에서 청소차가 진입할 수 있는 광장까지 진공파이프를 묻었습니다. 소방수가 각 가정까지 연결되어 굳이 소방차가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사나 집수리에 있어 차량의 진입이 어려워 발생하는 비용증가분을 시에서 지원합니다. 사는데 불편함이 없어서 집값에 변동이 적습니다. 당연히 오랫동안 대를 이어서 살게 되며 자연스레 오랜 마을의 전통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차량중심 설계의 신도시를 유지할 것인지, 도보중심의 천 년 고도를 살 것인지,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패러다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거대자본과 결탁한 정치권력은 예술과 문화도 왜곡합니다.
집이라는 것은 건축비용과 유지비용,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낡아 가는 동안 보수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도시집중이 일어나면서 수 십 년간 집값이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유지비용이 적게 들고, 규격화된 일상의 수요에 최적화된 아파트가 건축시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아파트단지를 배경으로 조성된 상가에 소비가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오래된 상가와 단독주택들의 오름세는 덜하게 되는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재개발이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만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집값이 싼 지역에는 경제형편에 맞춰 특정계층의 개인, 혹은 집단들이 거주하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예술가집단입니다. 예술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표현과 공감, 그리고 매력으로 인해 예술가집단 거주지에 새로운 수요가 발생하면 이는 부동산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높은 세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술의 결과라 하기엔, 참으로 참담한 일입니다.
차이점은 있습니다만, 이는 도시화가 먼저 진행된 서구에서도 있는 현상입니다. 거대자본과 권력이 도시를 설계하면 중소자본과 개인수요가 돈을 따라 그 뒤를 떠받칩니다. 도미노가 넘어지듯 옆에 있던 구도시의 돈이 빨려들어 갑니다. PC나 휴대폰 같은 정보통신기기처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차이라고 한다면 정보통신기술의 수명에 비해 집의 수명이 길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이 있는 곳이 땅이라는 점입니다. 땅은 반드시 어떤 사연(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개인과 집단)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역사, 역사문화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것은 경제적 교환가치로 치환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돈만 많이 주면 다 판다’입니다. 조상묘도, 동네 정자나무도, 심지어는 마을도 통째로 말입니다.
거대자본과 결탁한 정치권력은 이 틈을 또 활용합니다. 예술가들에게 일종의 프로젝트를 던져줍니다. 다 밀어버리는 재개발엔 문제가 많으니까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구도시의 얼굴을 화장 혹은 성형하여 새로운 수요를 조장하면서, 특정도심부동산가치 하락을 늦추(연착륙)는 전위부대나 앞잡이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죠. 결국 집값, 방값은 오르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곳으로 이주 당합니다.
돈 없는 세입자들이 이러한 자본구조에 의해 등 떠밀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조건을 고민하는 것이 ‘문화’ 아닐까요? 살고 있는 집과 주변을 손보고 가꿀 수 있는 시간과 돈, 관계들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배려를 문화라고 일컫는 것 아닐까요? 복지라고 칭할 수도 있겠지요. 생존에만 모든 힘을 쏟아야만 하는 상태로 몰지 않고 여력의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물론 소비와 지출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어서 획일적으로 산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긴 합니다. 아마도 요즘 얘기되는 기본소득이나 생존과 관련된 기본재 (전기, 연료, 물, 쌀 등)에 대한 보장 논의 같은 것이겠지요.
민간이 지역을 디자인하다. -순환적 구조 속에서 상상하기
의식주가 지역 안에서 순환되는 공고한 고리를 지닌 지역들은 다국적 자본에 의한 지역경제수탈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각 공공기관이나 학교에서 사용되는 책걸상, 청소용구 등의 비품들이 대부분 중국산입니다. 산업은 사라지고 그저 단순 유통만 하면서 거품만 증가합니다. GE의 구조조정을 시작으로 미국 내에서 제조업이 전멸된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죠. 지역 안에서 생산된 원자재가 지역 안에서 가공되고 사용되는 순환구조를 복원해 내는 설계가 필요합니다. 물론 지역 내에 없는 원자재의 경우 외부 유입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요. 그렇지만 지금처럼 지역 내에서 얼마든지 유통 가능한 목재나 석재마저 외부에 의존한 채 손 놓고 있는 것은 모순을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공주시는 고도를 디자인한다고 하면서 과업지시서에 미리 과업의 한계를 정해놓고, 시각디자이너 명함을 갖고 다니는 이들에게 시각적으로 ‘완결된 어떤 상태’만을 의뢰 합니다. 이는 디자인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관은 민간의 디자인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개인에겐 각기 다른 형편과 디자인 의지가 있고 이는 민간의 영역입니다. 관공서의 간판이나 명패부터 공주시의 정체성과 산업에 맞게 되어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4~5년 전 공주시는 부산과 진안 등 지역의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국고개 일원의 간판을 일괄적으로 정비했습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몇 개 업체가 공사를 맡아 하다 보니 당연히 획일적이죠. 같은 업체의 것이라도 10년 된 간판, 30년 된 간판이 섞여있으면 그나마 덜 할 텐데, 단기간에 일률 집행하다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공주시 전역으로 확대한다고 합니다. 산업구조 개편을 통한 민간의 자발적 개선으로 시각을 돌리면 문제를 좀 더 합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습니다. 100년 전까지 사용했던 전통적인 재료 (돌, 흙, 나무, 철, 구리, 자기, 가죽, 짚 등)나 물질을 사용하는 사업을 지원하는 방안, 그리고 근대 이후에 생산되는 석유화학제품이나 신소재 등 가공된 물질들의 사용을 억제하는 방안은 전통적 산업을 부흥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도의 정체성을 찾아 가는 방향이기도 하구요. 공주에 공예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총산하 공예분과회원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논의해 나가다 보면 물꼬를 틀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가령 각급 공공기관의 간판과 명패들을 동이나 철, 목재, 가죽, 도자기, 천 등의 재료로 한정할 경우, 이와 관련된 기능보유자들의 공방이 공주에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고 여러 파생적 활동들도 가능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어떤 새로운 전형이 설득력을 얻으면 민간으로 확대되면서 도시의 시각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에도 어떤 방향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순환적 구조 속에서 상상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백제문화제 기간 동안 시청의 공무원들이 입는 옷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습니다. 요즘 말로 핏이나 테가 나지 않아 거적때기라는 혹평을 받기도 합니다. 옷이 잘 어울리면 행사 때나 입고 벗어던지지 않겠지요. 옷은 활용도가 높아야 제대로 된 옷입니다. 마을이나 면, 동 단위 혹은 각 동아리와 솜씨 있는 개인들이 참여하는 한복, 한복에 기초한 일상복, 혹은 백제문화제를 포함한 여러 행사복 등 콘테스트는 지역산업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을 위한 각종 기획과 워킹무대, 평론과 평가, 판매에 이르기까지 옷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여러 과정들이 공주에 마련되는 것이지요.
한옥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단위로 정자나 회관 등을 짓는 콘테스트를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지역 안에서 벌목한 나무들을 사용한다거나, 에너지효율이 높은 건물을 지향하는 등의 몇 가지 기준만 마련하고 다양한 건축형태를 유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중후기까지 대부분의 민초들은 움막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경사지에 배수로를 파서 물길을 돌리고 땅을 일정 정도 파고 들어가 벽을 삼고 중앙부위에 기둥을 세워 벽 쪽으로 서까래를 내린 후 초가를 얹는 형태였습니다. 부여 부소산에 복원해 놓은 병사들의 초막과 같은 형태입니다. 주택의 기단부를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보와 창방, 서까래 등을 얹는 건축형태. 보통 초가삼간이라고 불리는 집입니다. 이는 영・정조 이후 식량생산이 늘어나고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양반계층의 가옥형태를 따라하며 나타난 형태입니다. 비교적 반듯한 벽과 문이 생기면서 그곳에 양반들처럼 그림을 사서 갖다 붙였던 것이 민화인 것이고요. 그래서 민화가 200년에서 15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것이죠. 그 이전에는 민화의 자취를 거의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은 대부분의 가옥이 그림을 붙이기 어려운 형태였다고 유추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옥이라고 규정되는 건축물은 일본식 기술이 들어와서 기와집을 지을 수 있었던 신흥 부유층이 일종의 리모델링을 유행시키기 이전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기준은 그 이전까지 한옥이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과 자체적 개선과정 등을 생략하고 그 이후의 변화가능성도 닫아버리고 화석화시킨 것입니다.
형편과 지역에 따라 처마에 부연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고, 역시 지역과 형편에 따라 벽에 기둥을 세우기도 하고 흙으로만 벽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나무를 횡으로 얹기도 합니다. 지붕에 짚을 얹기도, 갈대, 너와 등을 올리기도 하구요. 지붕의 선도 북쪽과 경상도의 경우 좀 더 호가 강하고 옛 백제 땅에 해당하는 지역은 정림사탑이나 석가탑의 선과 비슷하게 추녀 쪽만 살짝 올라갑니다. 기단부도 역시 비가 많이 오거나 산세가 강한 지역의 경우 사람 한길의 높이까지 올라가고 완만한 지형의 경우 무릎이나 허리정도의 높이로 조성됩니다. 형편과 조건에 맞게 개개인의 디자인 의지가 발현되는 구조인 것이지요.
이 원리를 작위적으로 훼손하면 한옥은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축법은 국제협약에 따라 일반주택의 경우에도 에너지효율을 높이는 쪽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한옥을 지금처럼 협소하게 규정해 놓으면 대중성을 얻기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유행인 한류를 등에 업고 한옥, 한식(韓食), 한복을 세계화 하겠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세계화 보다 한국화가 먼저 아닐까요? 현재 한복도 그렇고 한식, 한옥이라고 규정된 것들은 문제가 많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이 마땅한데 화석화된 형태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왕래와 교류가 늘어나다 보면 밖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역으로 영향을 받기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음식이나 복식, 건축양식에 자꾸 국적을 뒤집어씌우고 소유를 주장하는 것의 근저에 변방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중소기업청에서 10년간 10조원의 돈을 들여 전국의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을 했습니다. 전국 어디나 똑같은 철골빔 골조, 철판과 투명 골판으로 덮은 지붕, 같은 글씨체로 통일된 아크릴 간판의 시공 과정에서 오랜 세월 각 지역에서 많이 사용되던 재료와 기술들은 사라지고 전통시장 이용률은 더 떨어졌습니다. 목재가 많이 생산되어 목재 다루는 기술자들이 많았던 강원도의 시장도,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고 역시 그걸 잘 다루는 기술자들이 많은 담양을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시장도, 강화도도, 갈대가 많은 강변 도시들도, 삼베, 모시, 유기, 철기, 도기 등도, 일상에서 밀려 났습니다. 중소기업청의 정책 하나가 전국의 전통시장에서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전통산업을 거의 다 말살시켜버린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전통시장은 단순 마켓으로 전락했습니다. 편의성으로만 보자면, 그것을 위해 특화시킨 대형 쇼핑몰을 시장이 어찌 따라갈 수 있을까요?
복제와 성형의 저급함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는 권선징악의 스토리와 무관하게, 배경과 인물 이미지에서 현대를 해석할 수 있는 몇 가지 상징들이 보입니다. 악령이 살 것 같은 숲과 늪, 거기에 사는 쭈글쭈글한 노파, 잔디를 다듬고 화사한 꽃들로 가꾸어 놓은 프랑스식 기하학적 정원, 그곳에 사는 쭉쭉 빵빵한 8等身백인여자가 그것입니다. 어려서 이 동화를 읽고 감동받으며 자란 세대는 컴퍼스와 삼각자를 들고 숲을 없애고 늪을 메운 자연개조의 주역입니다. 8等身, 젊음이라는 기준과 분별을 만들었고 미달과 늙음을 추악으로 분류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성형수술용 실리콘과 보톡스 등이 가장 많이 소비되고 뷰티산업이 성업인 나라입니다. 라파이유 박사가 기업들의 의뢰를 받아 상품판매촉진을 목적으로 소비자들의 특정대상에 대한 인지조사를 한 ‘컬쳐코드(the culture cord)’라는 책에 의하면, 미국에서 젊음의 컬쳐코드는 가면(mask)입니다. 미국인에게 젊음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가장할 수 있는 어떤 것, 실제 나이를 숨길 수 있는 어떤 것, 즉 가면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200년 남짓, 짧은 청년기문화이기 때문에 젊음을 찬양하고 그것에 매혹된다고 말합니다.
제가 아는 한국대중문화의 컬쳐코드 역시 미국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극단적입니다. 실제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동안(童顔)열풍은 가히 엽기적입니다. 이는 개인의 성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낡고 오래된 것을 혐오하고 대중의 일반적인 기호에 따라 새로울 것 없는 새로움, 비슷비슷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삶의 공간이 획일화 되어갑니다. 미국의 젊음에 대한 컬쳐코드의 해석근거인 짧은 역사가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역사에는 반만년이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압축적 산업화 50년, 한국의 얼굴에서 5천년 문명의 가치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상 시간과 공간에서 밀려나 화석처럼 모셔진 민속촌 같은 이미테이션 과거는 현재와 소통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 우리의 일상에 작동하는 역사는 2백년 남짓한 미국의 역사보다도 짧은 근대 100년이 전부인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로마가 2천년 된 도시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다른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서있는 곳 자체가 2천년의 두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로, 피렌체, 밀라노, 파리, 퀠른, 교토, 북경 같은 도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디트로이트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자동차문화의 산실입니다. 중앙선, 도시고속도로, 콘크리트고속도로 등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죠. 도로를 내거나 주 경계를 분할할 때 지도에 자 대고 그으면 됐던 그곳에선 캐딜락처럼 푹신한 서스펜션이 어울립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와 마을과 골목을 잇는 작업은 결코 지도에 자를 대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역사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돌로 만든 좁고 오래된 도로들에선 단단하고 쏠림에 강한 벤츠의 서스펜션이 어울립니다. 유럽인들이 장비와 기술이 없어서 울퉁불퉁한 좁은 돌길을 갈아엎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5천년 역사는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요? 자랑스럽거나, 부끄럽거나 간에 5천년이라는 시간 자체를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는 있을까요? 혹시 귀찮고 낡고 돈이 되지 않고 매력을 잃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동네 우리 집 바로 옆에, 아니 우리 집에 5천년 시간의 두께가 남아 있다면 굳이 역사책에서 온갖 유구하다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반만년 역사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특히 공주는 ‘두께’로 이야기되어야 할 고도이므로 얇게 성형되어가는 추세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서구근대를 복제함에 있어 작은 땅에 오래된 우리의 역사는 유럽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결코 짧은 역사에 광활한 땅의 미국과 같지 않음에도 한국의 도로와 도시계획, 교육과 문화시스템은 미국 따라 하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만년 역사의 주름을 2,30년 주기로 성형수술하면서 젊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벽돌 한 장을 놓더라도 지난 천년과 새로운 천년을 생각하면서 놓아야 하는 것이 고도의 얼굴을 찾는 길이 아닐까요?
자체적 물질순환의 자립마을
영국에서 17세기 성(城)을 현대식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17세기 이전의 방식으로 복원하고 있습니다. 석공들과 목수들, 대장간, 식당, 숙소 등이 생겼습니다. 그곳에 와서 배우는 사람들이 늘면서 일종의 학교프로그램도 진행됩니다. 독일의 퀠른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성당의 복원을 시작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산업사회의 재무회계구조가 만들어지고 자리 잡힌 영국과 독일에서 탈 산업사회의 방식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죠.
공산성 한쪽 구석에서 장비나 기계 없이 근대 이전의 인력과 축력 등으로 공사를 진행하는 상상은 어떨까요? 담이든 길이든, 장비나 기계를 사용하면 나올 수 있는 선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면의 평활도나 직선 곡선과 같은 기계적인 기하학적 선들입니다. 그에 비해 그런 현대적 장비들을 사용하지 않은 선들은 자연선에 가까운 느낌을 냅니다. 경지정리를 한 논과 다랑이논의 차이쯤으로 이해하면 될 겁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선은 내부 양감의 표면인 것이지요. 기록상의 축조시기와 공법의 이질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미테이션 같은 느낌을 줄일 수 있습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만큼 일자리도 늘어날 수 있고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행정구역단위인 동(洞)이라는 단어는 같은(同) 물(水) 혹은 같은 우물을 쓴다는 뜻입니다. 전통마을의 성격이 잘 담겨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물질과 에너지의 유입이 거의 없던 자체적 물질순환의 자립마을이었던 것이죠. 씨족마을의 경우는 공동체적 성격이 좀 더 강한데 제실이나 종중 땅 등 마을 공동자산이 있었고 지역의 환경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향약, 두레, 품앗이 등도 있었습니다.
인즉지, 지즉천, 천즉도, 도즉자연 (人則地, 地則天, 天則道, 道則自然)은 참 오래된 진리 아닌가 합니다. 사람은 땅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현재까지 사용되고 앞으로 발견, 발명될 기술들도 적극 활용하여 지역이라는 운명공동체에 재구조화시키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될 때 마을이 세상을 구하는 주체가 되고, 지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 열립니다. 간디는 70만개의 인도마을들이 자치, 자립하는 것이 진정한 인도의 독립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모아진 분뇨에서 나온 메탄가스를 도시철도와 시내버스의 연료로 사용하는 도시들이 있습니다. 태양광을 이용한 축전지로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곳도 있습니다.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 유통, 소비하는 순환구조를 마련하는 것은 지역자립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대청댐의 물로 여러 도시의 식수를 삼는 것은 비상시에 위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평상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비와 운영의 효율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관계가 다릅니다. 2001년까지 한국의 수자원 정책의 근간은 지역수원지 개발이었습니다. IMF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국내수자원기업을 육성해 해외로 진출시킨다는 목표로 그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광역상수도 정책으로 바뀐 것입니다. 공주에는 금강이 흐르고, 금강의 모래를 통과하면서 정화된 강변여과수와 지하수를 섞어 3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수원지가 있습니다.
자립마을의 주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혁명에 가깝습니다. 휴대폰, 자가용 승용차, 수세식 화장실, 전등, 수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서 생활필수품이라 이름 붙여진 것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가능케 하기 위해 아스팔트, 콘크리트, 각종 화학물질 생산 공장, 원자력까지 필요합니다. 나아가 생산에 필요한 인력을 기르고 관리하는 교육과 기관들, 그리고 다수결의 제도까지 연결되어 있지요. 애초부터 피부인 듯 익숙해진 생필품들에 의문을 품고 이 물건들을 필요악 정도로 여기는 태도가 싹틀 때 경제와 문화, 교육모순을 줄여나가면서 지속가능한 지역의 삶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적은 옛날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활습관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는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선택’입니다.
삐그덕 소리를 내는 문과 마룻바닥, 깨진 벽난로 옆에서 손목이 해진 스웨터를 입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 글을 쓰는 철학자들, 이가 거의 다 빠진 입으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거리와 빠의 가수들. 그들은 다만 경제적 연민의 대상일 뿐일까요? 몇몇 영화장면들을 떠올려 봅니다. 뉴욕의 음산한 뒷골목, 허름한 창고 같은 아파트에 낡은 소파, 고양이, 늙고 뚱뚱한 흑인할머니가 사는 집 이웃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듯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어떤 전문가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세상을 구원할 어떤 기술이나 정보를 갖고 있고, 영화주인공은 그런 사람들과 친구죠. 물론 극이죠. 드라마틱한 시각연출일 수도 있지만 음악이나 미술 쪽은 실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허름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모습의 이면에 있는 정신, 가치관, 문화적 태도를 보고 그 가치를 알아야 천편일률적인 도배질을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쇠락한 뉴올리언스의 재즈거리는 미국으로 잡혀와 노예가 된 아프리카 흑인들의 슬픈 역사가 만든 거리입니다. 기후가 전혀 다른 땅에서의 혹독한 노동으로 인해 미국 땅을 밟은 초기노예들의 평균 수명은 2년 8개월이었습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보내라는 청교도국가 미국 종교지도자들의 요구에 의해 그들은 일요일 하루 강제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이스라엘 노예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기록인 성경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가스펠은 유럽식 성가와 아프리카식 음률의 만남이고, 그 가락에 작사를 더한 음악이 재즈와 블루스입니다. 형 옷만 물려 입던 성장기 흑인 청소년들이 커다란 아버지 옷을 꺼내 입고 멋을 부리던 푸대 자루 같은 패션, 랩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신세한탄과 저항의 힙합, 달달한 R&B. 한이 쌓여 나오는 그 간절한 울림. 그것을 듣는 이 역시 인간이기에, 그것이 20세기 세계 대중음악의 중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잉글랜드에 짓밟힌 아일랜드 800년의 한(恨), 광활한 대지를 달리던 말발굽박자의 컨트리, 전쟁과 사회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저항, Rock… 다 어떤 사연들이 있는 것이지요. 처지가 비슷해지면 들리는 것이고요. 고통과 절망, 불운과 좌절의 시간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진정성에 따라 그 자체로 영혼을 울리는 예술이 됩니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생태도시라는 이름도 없던 100년 전엔 제민천 물을 그냥 마셨답니다. 역사문화도시라는 이름이 없던 그때에는 무너져 내린 공산성 성벽과 그 사이에서 자란 소나무들과, 왕릉에서 곰나루까지 길게 드러누운 공동묘지에서 스러진 왕도의 모습을 온전하리만큼 느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개념이 다른 사회였던 것이죠. 그땐 일상이었던 것이 지금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소중하고 힘겨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식에게 배반당한 의자왕이 끌려가고 백제부흥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처형했을 소정방의 주둔지로 추정되는 정방뜰, 그 뒤편의 왕의 무덤들. 어쩌면 왕릉 주변의 무덤들은 왕 곁에 잠들고 싶었던, 처형당한 저항군들의 유언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후로도 중앙권력의 감영이 있던 공주에는 처형이 많았습니다. 파렴치범도 있었겠지만 팍팍한 삶에서 이판사판 저항했던 민중의 목이 떨어졌던 곳이지요. 가장 최근의 처형이 황새바위 순교사건인 것이고요. 지금은 순교지로 전유되고 있습니다만, 그 언저리에서 1500년 동안 무수히 많은 처형이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무덤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문자로 확인된 무령왕릉이 발굴된 이후,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모든 무덤들은 사라지고 왕릉을 구경 오는 사람들의 주차장, 도로, 운동장, 체육관, 숙소 등으로 바뀌었지요. 이게 우리의 실체입니다. 민중의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부정과 삭제가 횡행하는 우리 땅에서 민중의 예술이 흐르는 재즈 거리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어쩌면 문화는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문화, 심지어 자연과 경관까지 성급하게 경제적 교환가치로 환치하려는 천박함이 오늘날 인류 생존의 위기에까지 도달한 원인이라는 문제의식 위에서의 선택 말입니다.
대전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 신관동, 월송동의 모습은 근대화 이후 그랬던 것처럼 세계와 한국의 어느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겠지요. 그 틈에서 석장리와 공산성, 곰나루, 왕릉, 소정뱅이, 우금티, 수원지, 공주의 옛 시가지도 속절없이 끌려 나가 상품화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구에다 장판을 깔 듯’ 자연(時와 空)을 통제 가능한 실내공간처럼 만만하게 여기는 마음과 태도와 근대적 행위가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석장리 같은 경우, 근대 이후 뿐 아니라 신석기 이후 인간문명에서 놓쳐버린 시원적 상상의 초월적 공간일 수도 있을 텐데, 주변이 도시화 될수록 숨통을 틔워주는 곳이 되어 갈 텐데, 걱정이 됩니다.
모두가 온전한 전체를 바라보기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공주를 얘기한다고 하면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얘기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나뭇잎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줄기와 가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나무 한그루가 온전히 뿌리내리고 잘 성장하게 하려면 모두가 온전한 전체를 봐야하지 않나 여겨집니다. 유럽의 나무도, 일본의 나무도, 한국의 나무도 각자 토양의 성분과 기후에 맞춰 쉼 없이 뿌리를 뻗고 가지를 뻗어 딱 그만한 규모에 맞는 잎을 피운 나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무와 토양과 기후를 함께 이야기해야 오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논의가 제대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실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논의 그리고 시민운동가들의 역할과 활동영역에 대한 합의도 병행해야할 것 같습니다. 실물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노동은 사실 어떤 경우에도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했지만, 혁명을 겪어보지 못한 사회였기에 지속적으로 소외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생존의 뿌리에 대한 고찰이 약했던 탓에 그 이후의 모든 논의들이 겉핥기로 끝나고 인문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거품만 가득 찬 듯합니다.
의식주라는 구체적 실물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다뤄왔는지, 어떻게 다룰 때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인지 돌이켜 보고 얘기해 봐야 합니다. 연봉이나 수입, 재산, 여가생활상품 등으로 인간실존이 대체되고 관념화 되면서 스스로에게 지구를 약탈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요? 글머리에서 얘기한 공주시의 사례가 꼭 공무원들과 시장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겁니다. 이들이 좀 더 조명을 받는 위치에 있는 것일 뿐, 보통사람들이라는 일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순환하는 사회의 다수에 굴복해 분열된 또 다른 내가 모순을 용인하고 쏠려가는 것은 아닐까요?
30년 후 공주의 모습을 함께 상상하고 나아가려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모여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모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겠지요. 앞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은 적확한 것이었는지, 이러한 이야기가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면 현실화시키기 위한 판은 어떻게 짤 것인지, 큰 이야기를 확산하고 진행하기 위해 어떤 작은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지, 이야기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할지, 이러한 이야기를 함께할 개인과 집단을 어떻게 만날지……. 매우 복잡한 고차방정식 같은 설계일 것입니다.
이 초기의 작업은 누구에게도 만만치 않습니다. 각자 혼자서 꿈처럼 꿨을 뿐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아직 해보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의식주의 실물을 자동 공급하는 무한의 도깨비 방망이쯤으로 여기는 소비사회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실물경제 보다 적게는 7배에서 14배까지 부푼 자본 경제 탓이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개체화된 전문가로 살아도 되는 사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진단위에서 집행과 결정의 권한을 갖고 있는 집단과 분야별 전문가집단을 연결하여 의제를 개발하고 토론을 이어갈 수 있는 역량 있는 시민단체의 필요가 대두됩니다. 오지랖과 불편함이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첫댓글 윤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원효사 카페로 퍼갑니다 해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