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소나기 172 호 번영 신학을 경계하라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5,26)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업의 성공을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땅에서 주님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잘못된 신념 속으로 예배자들을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축복받는다”는 번영신학이 기독교를 미신으로 만들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빈곤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까지 팔리고 있습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와 생명이 필요한 사람에게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는 번영신학은 우상숭배를 가르칠 뿐,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베들레헴 침례교회 존 파이퍼 목사는 마지막 퇴임 설교에서 “예배시간에 그리스도 안의 기쁨을 누리는 체 하며, 부와 안락함, 건강과 행복, 그리고 쾌활하고 낙천적으로 흥미를 끄는 농담을 하며 사람들을 유혹한다면 큰 교회를 만들 수 있지만, 그 영광 속에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도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과 기쁨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행복, 즉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기쁨을 보고 느껴야 할 것”이라며 “번영신학을 절대로 경계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호화로운 집과, 차와 옷으로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려 하지만 이것은 신약성서에 한 번도 기록된 적도 없고, 사도 바울이 사람을 인도한 방법도 아닙니다. 바울이 고난의 한복판에서 도 결코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예수를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오직 주 밖에 없으니 하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영원한 분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보이게 합니다. 이 땅에 번영신학이 사라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땅입니다. -글 강병국 목사- 우리 사람들은 땅입니다. 토지란 말입니다. 곡식과 실과들을 싹틔우고 자라게 하는 양분을 가진 땅처럼 우리의 마음도 하늘이 내려주시는 비와 양분을 빨아들이고 있는 땅입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사 44:3,4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시는 대상은 갈한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단비에 목마른 자들입니다. 풀들 중에서도 시냇가에 심겨진 버들처럼 싱싱하게 자라기를 사모하는 자들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을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비를 받고 자라는 식물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신 32:1,2 “봄비 때에(늦은 비)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슥 10:1 우리는 땅입니다. 땅은 가장 기본적인 창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에 제일 먼저 땅과 물을 만드셨지요. 땅은 물을 받아 머금고 있어야 창조 받은 그 기능을 발휘하며 존재할 수가 있는 물질입니다. 땅은 무엇을 생산해 내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다른 생명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양식들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만들어 진 물질이지요. 우리는 땅입니다. 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비와 이슬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넣어두신 각종 양분들과 원소들을 다 빼내어 주면서 다른 이들의 양식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어떤 땅은 채소를 내고 어떤 땅은 과일을 내며 어떤 땅은 아름다운 꽃들을 피웁니다. 그러나 그 존재의 목적은 한 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땅은 가장 하찮은 것이지만, 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의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땅입니다. 우리는 사막이나 황량한 광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을 수 있고 샘물을 파 낼 수 있는 곳,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많은 양분을 머금고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교훈을 듣도록 항상 주의하도록 해야 합니다. 거룩한 말씀을 받아 마음을 항상 적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는 방법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반역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한 이후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양심과 이성을 가진 기가 막힌 인격체를 만드신 겁니다. 이러한 놀라운 지성적인 존재를 만드신 것이지요. 왜 사단이 범죄하여 반역한 이후에 인간을 만드신 것일까요? 그것도 흙으로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서이지요. 훌륭한 천사들이 반역하여 타락하였을 때에, 심지어는 흙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는 존재를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하신 것입니다. 강제로 하는 기계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이성과 양심이 있고,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완전한 유 선택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자기가 원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러한 인격체 말입니다. 흙이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보고 사랑에 빠져서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되는 그러한 사람 말입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7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사단의 반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미물 같은 존재, 흙에서 나온 존재라도 그에게 이성과 자유 의지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과 품성을 알게 하기만 하면 자연히 그 사랑에 감동되어 감사와 찬송이 우러나오게 되고 창조해 주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사람들… 이 사람들은 천사들까지도 이해하며 알기를 원하기에 계속 지켜보며 연구하는 대상이 되고 있는 놀라운 존재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의 이슬을 먹고 성령의 단비로 채워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단비에 갈급하십니까? PART 1. 성령에 대한 연구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슥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새 생명의 수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봉사를 하기 위하여, 우리는 “거듭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적대적인 우리의 선천적 기질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남녀들로 만들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낡고 새로워지지 못한 삶은 사랑과 신뢰, 그리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새 삶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런 변화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 3:7),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신 하늘 왕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업에 결함이 있게 될 것이고, 세상적인 계획들이 도입될 것이고,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이상한 불이 그분께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불안과 근심이 가득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불행할 것입니다. 중생으로 대표되는 마음의 변화는 오직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하심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우리를 모든 부정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고 꼴 짓도록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식별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이 나라에 들어감을 얻을 수 있기 전에 이루어야만 할 변화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만과 자아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을 대항합니다. 영혼의 모든 선천적 경향은 자기중심적 기질과 자만에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비함으로의 변화를 반대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영생으로 가는 길을 가려고 한다면, 자아의 속삭임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과 회오 가운데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탄원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의 소나기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슥 10:1). 동방에서 이른비는 파종기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씨가 발아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기름지게 하는 이른비의 영향 아래, 부드러운 새싹이 움터 오릅니다. 그 계절의 거의 끝에 내리는 늦은비는 곡식을 익게하고 추수를 준비시킵니다. 주께서는 성령의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이러한 천연계의 작용을 사용하십니다. 이슬과 비가 먼저 씨를 발아시키고, 그 다음에 곡식을 익게 하고 추수를 준비시키는 것처럼, 성령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영적인 성장 과정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곡식의 익음은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우리의 품성 가운데 온전히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형상(Likeness)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비를 받아들이기에 상당 부분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공급해 오셨던 모든 은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부족된 것이 늦은비에 의해 채워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가장 풍요한 은혜가 부여되는 그때에, 그들은 그것을 받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자 하나 그들이 심각한 잘못 가운데 있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그분의 빛과 지식을 주심으로 시작하신 그 일은 계속 진행되어야만 하기에 그러합니다. 각 사람은 분명히 자신의 필요를 인식해야 합니다. 마음은 모든 불결을 비우고, 성령께서 거할 수 있도록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부어짐을 위해서 죄의 고백과 포기, 열렬한 기도와 하나님께 자신들을 헌신함으로써 준비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동일한 일이, 보다 더 깊게 지금 행해져야 합니다. 그런 후에, 인간 대리자는 단지 축복을 구하면서 주께서 그에 관한 일을 완전케 하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온전케 하면서, 그의 일을 마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심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은 모든 진정한 기도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간구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신다는 것을 배워 왔습니다. 이런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며, 그분의 뜻에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롬8:26)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병자나 다른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모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우리가 하나님께 배운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시된 뜻에 일치되게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분의 뜻에 순복하는 가운데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간구해야 하며, 귀한 말씀을 의지하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거룩케 하는 성령의 감동을 주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그분의 백성들에게 생명력 있는 감화를 불어넣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금부터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나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 대리자들 안에 사시고, 우리의 재능을 통해 일하시고 우리의 역량을 통해 활동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고, 사는 것이 더 이상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되도록 성령과 함께 활동해야만 합니다. PART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1, 2장의 교훈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신 복음은 오직 하나의 복음 뿐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가르친 방법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15:1)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외적으로 받는 할례는 이미 믿음으로 받은 의의 표로써 주신 것입니다. 이 할례의 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셨다는 표이므로 만일 우리가 율법을 범할 때에는 그 사실이 조롱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롬 2:25~29 참조).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오늘날에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지와 같은 구원론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쓰시고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셨다고 설명하며(갈2:21, 롬 8:3,4 참조) 구원 받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생명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고 행하여 그 율법의 의로움을 보여주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7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사도 바울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묻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3절 말씀을 히브리 원문으로 살펴보면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요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완고함과 거역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우상에게 숭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옛적에 행해졌던 이 마술과 사술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강신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강신술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영과 교통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사단의 영들과 교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근본 정신인 속임수, 기만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전 9:5)기 때문입니다. 강신술 하는 자와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는 그 자신을 사단의 지배 아래 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신술을 부인하고 비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붙들지 않는다면 앞으로 있을 강한 기만에 휩쓸려 갈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써만이 지구에 다가오는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계 3:10 참조). “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은 적그리스도의 영인 사단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 기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 깨달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이 구절이 그저 사도 바울이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말이며 그들의 상상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과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이 십자가의 사건을 실제로 볼수 있었습니다(고전 1:17,18 ; 2:1~4 참조). 이 경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꼭 있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떨어지는 낙엽과 새 잎들이 이 일에 증인이며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있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도 이 일에 증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눈으로 직접 보고 순간마다 그 십자가를 볼 수 있기까지는 복음의 실체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 갈라디아서의 연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눈이 열려 이 복음의 실체를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질문에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다만 듣고 믿음으로써 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요 7:39, 엡 1:13 참조). 그리고 이 질문은 이 서신을 읽을 갈라디아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시작하는 길은 바로 이길 뿐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창조시에도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운행 곧 생명이 있을 수 없음을 스가랴 4장 6절(“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만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실 수 있으며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인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호흡을 만들어 내어 살게 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바울이 이 서신서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들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그를 영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보고 영접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어리석다는 말은 아주 미약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능력이 없는 것은 그 일을 마칠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내디딜 힘이 없고 혼자 서 있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 달리기 경주에서 이길만한 힘이 있겠습니까? 누가 스스로 태어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이 없지만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신생아가 터트리는 첫 울음소리를 내는 그 연약한 힘도 그 아이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힘과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닌 전적으로 다른 분으로부터 오는 힘과 능력입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우리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성령으로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이 일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성경은 확실하고 단호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 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4,5). 이 질문으로 우리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의 큰 경험이 있었으며 그 결과로 핍박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그런데 그런 그들이 지금 그리스도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곧 진리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 됩니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구하고 있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믿고 기사를 행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듣고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믿음의 순종으로 된 것이었습니다(롬 10:17 참조). 이와 같이 바울의 수고와 갈라디아인들의 처음 경험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경험과 아주 일치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 사실의 증거로 할례 받을 것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그러나 바로 그 주장이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였”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의 의를 졌었습니다(롬 4:11 참조).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고 그의 믿음이 “의를 행하”(히 11:33)였기에,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6,7). 이 사실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이 지금도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사 람들에게는 징조를 실제로, 목적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이해가 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그들은 의가 선한 행실에 드러난다고 보며 선한 행실은 의를 가져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얻은 의, 일하지 않고 이루어진 선행은 그들에게는 비실제적이고 환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실제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자처하며 어떤 일을 이루는 유일의 길은 그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은 극도로 “연약할 때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므로 먹으라고 가져다 주는 약조차도 일어나서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에게는 그 일을 해보라는 그 어떤 권면도 비실제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의를 위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 오직 참 믿음을 가진 자들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단 하나 유일의 실제적인 일은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생길 때 우리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 다”(시 37:5,6)라는 말씀을 실제적으로 믿고 따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 11:33). PART 3.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표 성소에 대한 이해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시 29:9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다(KJV) 미 6:9 너희는 매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 지니라(KJV) B. 성소에 대한 주제의 중요성과 연구 방법 우리들은 성소에 관한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현 위치와 시대 시대마다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칭의, 성화, 영화)을 깨달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빛에 비추어서만 우리들은 우리의 실체를 눈으로 보고 알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들은 이 시대에 필요한 믿음을 활용하는 일에 큰 부족이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우리의 위치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히브리서 참조)에 관한 문제들은 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아주 중요한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이 가까운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어떤 시대의 사람들에게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충분히 연구하고 깨달아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능히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a. 사도 바울의 진술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하늘 성소에서의 승리의 봉사를 히브리서를 통해 생생하게 진술하였습니다. 이 일은 그가 지상 성소에 대하여 충분히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성소의 표상들을 이행하신 일에 대한 그의 진술은 오로지 구약을 통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분명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의 진술들은 먼저 있은 구약의 빛으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구약(지상 성소)과 신약(하늘 성소)을 통해 모아진 가르침들은 성소를 통해 전해 주고자 하는 구원의 계획을 밝히 비춰주는 큰 빛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b. “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받으시기 전후에 침례 요한에 의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두 번씩이나 언급되었습니다(요 1:29,36). 아무 이유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 보십시오. 그것은 어떤 의미를 우리 마음에 불러 일으킬까요? 하늘 아버지께서 세상을 위하여 죽도록 내어 주는 부드럽고 친절한 우리 구주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성소를 연구함에 있어 이런 거룩한 상상력을 모든 표상과 상징들에게 적용시켜 볼 것입니다. 이 거룩한 상상력을 통한 연구는 우리들을 현실적으로 성소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경험케 할 것입니다. 모세와 이사야와 우리 구주께서는 희생제물인 어린 양에 대해 세밀한 주의와 관심을 돌리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모든 종류의 희생물에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은 순결하고, 어리고, 흠이 없어야 하며 “천산의 양떼”의 주인이신 큰 소유주에 의해서 값없이 제공된 것이어야 하였습니다. 어린 양은 자발적으로 죄를 뉘우치는 자에 의해서 제단에 바쳐졌으며 그는 그것을 줄로 묶어, 땅에 내던져, 진흙 속에서 그의 온 무게에 짓눌리게 합니다. 그런 다음 신중하게 그의 무력한 대속물을 도살합니다. 우리들이 도살하는 칼날 위에 태양의 번쩍임을 인식하게 될 때, 그리고 그 몸서리치는 죽음의 고뇌와 목구멍으로부터 흘러내리는 피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의 거룩한 상상력은 우리들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취급하였는지에 대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줄 것입니다. 이처럼 성소의 표상과 상징들 속에 깊이 새겨진 사상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 행하는 실체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c.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상상력만이 요구되어 집니다. 이 같은 마음의 상상력은 성경 기자들의 펜에 의해서만 나오지 않으며, 그런 감정 또한 그들의 말만 가지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기록된 문자보다도 훨씬 더 힘있고 웅변적인 표현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불어 넣어주어야 일어나게 됩니다. d. 성경의 사상들은 실제적으로 내 안에서 구체화 되어져야 합니다. 밝게 비춰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이 마음속에 새겨지기까지 우리들은 하늘 성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일례로, 희생제도의 의미가 밝히 드러나게 될 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사상이 실제로 우리들의 가슴을 저미도록 아프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의 죽음을 죄 없는 희생제물이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죄를 포함해서 세상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게로 향하게 됩니다. 무죄하신 구주께서 우리 때문에 갈보리에서 고통 중에 돌아가셔야 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에 실제적인 사건으로 각인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갈보리에서 보여진 큰 사랑을 느낄 때에 실제적으로 우리의 죄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흔들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죄를 가증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e. 그리스도인은 성막을 척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진정한 모본이시며 그분의 자아 희생적 삶은 우리 삶의 모본이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모본이 거의 연구되어 지지 않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생각이 깊은 신앙인이라면 건물과 기구와 제사장 직분과 의식과 같은 사건들 너머로 구주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시 29:9)라고 외쳤습니다. 에스겔의 성전에서 하늘의 감독자가 사용하고(겔 40:3참조), 하늘 성전을 척량하도록 요한에게 전달되었던 거룩한 척량 “장대”(계 11:1,2)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장대”로 불리워지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rod)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다”(사 11:1, KJV), “너희는 매(rod)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 지니라”(미 6:9, KJV). 우리는 그분의 생애와 봉사를 척량자로 성소의 의미를 척량하며 우리 자신의 삶 또한 거룩한 척량자로 척량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단련되고, 사전과 문법과 문맥에 의하여 훈련 받고, 역사의 통찰력과 지리와 계시된 과학적 사실에 의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우리의 통찰력은 낱말의 명료한 의미를 더욱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PART 4.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알고 행해야 하는 교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분, 기질, 사상, 말, 성향, 목적 및 행동 등을 면밀히 비판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 건강 상태를 확증해 보지 않고 어떻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 지혜롭게 요청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 생활 가운데서 걷기 어려운 굽은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해이하고 아무렇게나 올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믿음에 있는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교훈 4. 봉사하는 자의 태도 멸망해가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마음이 충만해 있는 사람들은 봉사하게 될 기회를 찾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봉사하려는 자는 아무리 그일이 작고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지위에 처하게 되더라도 자기의 사명을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한 겸손의 정신을 가지고 주님을 위하여 일하여야 하며 살아가는 동안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 혼란과 어려움들 속에서도 견실한 믿음을 굳게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당신을 섬기도록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일상 생애의 원칙으로 삼지 않을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의 올무가 됩니다. 주님의 사업과 관련되어 있는 자들은 확고 부동한 성실성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언제나 자기 앞에 주님을 모셔야 하며 성경 말씀이 증거하는 모든 문제들을 끊임없이 연구하여야 합니다. 경건하고 엄격한 성실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인간을 해이한 원칙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환경 속에서 살면서도 자신의 그리스도인적인 사상을 보존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성품을 계발시키는 일에 있어서 오늘날의 이 세상은 노아의 시대보다 조금도 유리한 것이 없습니다. 노아의 시대는 죄악이 너무나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창6:7~9)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타락한 세대의 부패속에서도 노아는 그의 창조주께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 날 곧 죄와 부패로 가득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노아처럼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는 자로 살아야 하며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벧전 2:9)이신 주님께 찬송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하늘 아버지께 올린 기도 가운데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하셨습니다.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기꺼이 바치신 주님께서는 어떤 것을 가장 고상한 봉사로 평가하실까요? 무한하신 사랑을 소유하신 그분께 어떤 사업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님께 가장 큰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멸망하여 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을 가져오시기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사업을 전진시키기 위하여 그분과 협력하며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기울여 일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무리가 하늘 보좌의 주위에 서게 될 때 구세주의 기쁨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흑암의 세력은 맹렬한 세력으로 역사하고 있으며 해마다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에 속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경고도 받지 못하고 준비도 없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보다 뚜렷하며 더욱 결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들에게,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이들에게 ‘그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가?’하고 물어보십시오. 선교적인 분야의 일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극기와 자아 희생적인 정신으로 일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지 물어보십시오. 기적인 우리들의 행동은 믿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경고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백, 수천만의 영혼들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두 번째의 은혜의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때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은혜의 기간 뿐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구원은 지금 이 생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그렇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신 주님의 정신으로 가차 있다면 우리들은 주님과 협력하게 될 것이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열렬하고 자아 희생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일 2:4)다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커다란 각성이 우리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기별을 전해야 할 자들은 열심으로 주님을 찾아야 할 것이며 당신의 성령께서 풍성히 임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우리들은 영혼들을 위하여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 5. 경고의 기별을 전해야 함 우리는 순수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진리에 대한 실제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반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을 따라 실행에 옮길 것입니다. 온 세계에 이 시대를 위한 징조들이 성취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은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맑고 뚜렷하며 분명한 경고들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을때 우리는 우리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건들을 연구해야 하며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며 유전이나 외람된 오류들을 좇는 것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며 서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목적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머리 되시는 주님의 지도를 따라 연합하여 일하여야만 합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사 58:1)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진리를 불완전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위하여 영혼으로 외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마음 문을 연다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교훈 6. 우리는 사단을 정복할 수 있음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의에 이르는 순종을 나타내 보일 때에 하나님의 천사들은 우리들의 심령이 의에 이르도록 활약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단의 대리자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던 모든 기간 동안에 하늘의 천사들은 주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사단과의 투쟁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마 4:4)를 전적으로 의지하셨습니다. 주께서 당하신 시험은 실제적인 유혹들이었으며 허위적인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히 2:18)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사단과의 투쟁에서 가지셨던 모든 도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정복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주님을 통해서 보다 큰 정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고전 6:19,20)다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가입니까? 인성을 쓰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인간을 공격하는 모든 유혹들 곧 격렬하고 겉으로 보기에 압도적인 시험과 씨름하셨는데 그 시험들이란 식욕의 방종,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는 일에 나타내는 주제넘은 모험심, 이 세상의 우상 숭배, 이생의 현혹적인 쾌락 때문에 영원한 축복을 희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을 것이로되 우리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받도록 허락하시지 않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활한 원수를 대항할 수 있으며 패배시킬 수 있습니다. 하늘 천사들은 시련을 당하고 시험을 받는 영혼에게 도움을 주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위하여 시험과 시련을 견디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단 중 누가 우리들의 임금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들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큰 시련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모든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십자가는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린 바 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영혼들을 위한 넉넉한 도움이 준비되어 있다는 보증으로 서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단의 대리자들을 정복할 수 있으며 반면에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대항하려는 세력과 합세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계속적으로 우리의 행동과정을 살피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예리한 식별력이 필요하며 우리 자신의 실제적인 삶의 경건을 통하여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늘의 사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인간들의 약점을 도와주고 도덕적이며 육체적인 위험에서 모든 영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들이 저희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비로소 인간의 정신에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일하며 그분의 계획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늘 천사의 보호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열렬하고 통회하는 기도로써 하늘의 도움들이 우리 편이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과 권세를 가진 천사들은 겸손하고 온유하며 낮은 자들과 함께 일할 것이라는 약속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히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PART 5.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 계 2 2 : 2 0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4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하늘의 경고 우리 주님의 위대한 예언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과 인자의 오심이 있기 전에 일어날 징조들에 관해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전체는 그리스도 재림 전에 있을 사건들에 관한 예언이며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 세상이 불로 최종적으로 완전히 멸망할 것을 예표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감람산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재림 전에 있을 무서운 심판의 장면들을 열거하셨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이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으며 마지막 때에 더욱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징조들 흑암의 왕이 진두지휘하는 큰 박해 끝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리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4:29 참조).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다시 오심에 대한 징조를 알리셨고 그분이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때를 우리가 알 수 있다고 그분께서는 선언하셨습니다. 이 징조들을 보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4). 예수께서는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곤고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눅 21:25, 마 24:29, 막 13:24~26, 계 6:12~17 참조). 주님의 강림의 전조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마24:33)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염려와 두려움 가운데 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폭풍 가운데서 “내니 두려워 말라”(막 6:50, 요 6:20)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들 중의 하나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마 24:11)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백성들을 속이며 많은 사람들을 광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마법사들과 요술사들은 놀랄만한 능력을 보이며 백성들을 끌고 한적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예언들 역시 현 시대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꿈들, 거짓 이상들을 대면할 것을 경고하셨으므로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하여 항상 진리 위에 우리의 두 발을 견고히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는 말씀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현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려 하며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에게 맡기신 일이 없는 사업에 몰두하여 많은 사람들을 진정한 복음에서 떠나 잘못된 것에 미혹되도록 하는 혼란을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나 어떤 지도자에게 우리 자신의 귀한 영혼을 맡기거나 영생을 의탁하는 일은 아주 위험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큰 열심을 내어 진리의 말씀을 펴고 연구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폭식과 부절제 폭식과 부절제는 이 세상의 도덕적 타락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시조 아담을 범죄케 한 그 방법으로 현재 우리의 시대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식욕에 방종케 하므로 건강을 해치는 것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단축시키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외모를 치장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전염병처럼 번져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오늘날의 무질서하고 방탕한 상태는 이세상 역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음을 성경은 분명한 음성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약속한 때가 임박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급속히 타락하여 노아 당시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폭력이 난무한 시대 노아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의 반대편에 섰고 거짓에 현혹되었습니다. 땅에는 강포가 충만했습니다. 전쟁, 범죄, 살인, 강도, 약탈 등이 그 시대의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현 시대를 보는 듯합니다. 노동조합들은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즉시 데모를 선동하며 노사분규와 함께 폭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들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과학적 이론도 사단의 지휘 아래 꾸준히 전진하는 행악의 무리들을 설명해낼 수 없습니다. 모든 폭력과 무력을 수반하는 행동들의 이면에는 그들에게 폭력을 충동질하는 악한 천사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베드로를 책망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잔인함과 죄악이 극에 달하였으므로 노아의 시대와 같이 세상의 사악함이 그 한계에 이르렀고 곧 죄악의 잔이 넘쳐 하나님의 공의가 이 지구에 실현될 순간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매일 뉴스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고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들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오늘이 주님의 다시오심을 맞기 위해 우리의 심령을 살피는 철저한 회개와 개혁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마련하러 가신 처소에 들어가기 위한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또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