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마지막 입맞춤
빙하지부의 지하 연무관.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가 고루 갖추어진 병가(兵架) 하나가 서 있다.
묘가난은 원족(遠足)이라도 나온 양 들뜬 표정이었다.
그녀는 은(銀)으로 만든 앙증스러운 일 척 오 촌 소검(小劍)을 지니고 있
었다.
일컬어 빙하착정검(氷河錯情劍)이라는 검으로, 불멸옥녀의 신표가 되는
물건이다.
백무영은 병가에서 병장기를 고르고 있었다.
"어떤 병기를 골라도 무방해요. 어차피 난 일 초 만에 이길 수 있으니
까."
묘가난은 비무가 시작되는 즉시, 끝난다고 단정짓고 있었다.
백무영은 병가에 꽂힌 절세기병(絶世奇兵)을 쭈욱 바라봤다.
은하신도(銀河神刀),
벽라유성추(碧羅流星鎚),
자묵천홍검(紫墨天虹劍)…….
상고시대의 신병이기들이 어지럽게 널리어 있다.
그 가운데 백무영의 눈길을 끄는 건, 끝이 뭉툭하고 무거워 보이는 철검
이었다.
그는 그것을 거머쥐고 흔들어 보았다.
손아귀에 상당한 중량감이 느끼어진다.
"썩 마음에 드는군."
그가 철묵검을 비스듬히 내려들고 묘가난 쪽으로 돌아서자, 묘가난의 입
가에 함박꽃 같은 웃음이 피어났다.
"병장기를 보는 눈이 있군요. 그건 용형뇌검(龍形雷劍)이라는 것으로, 보
물에 욕심을 내고 왔다가 얼어 죽은 적지곤룡왕(赤地困龍王)의 물건이지
요."
용형뇌검은 극패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게가 너무나도 엄청난
지라, 완력이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용형뇌검을 쉽게 사용할 수 없
다.
어찌 되었든 백무영은 용혈뇌검을 쳐든 채 묘가난을 바라봤다.
묘가난의 눈길이 그의 얼굴에 집중될 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검을
흔들어 보였다.
순간, 용혈뇌검에서 은색 검홍(劍虹)이 피어 올랐다.
분수처럼 피어 오르는 검기.
묘가난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가운데, 돌바닥에 검흔이 세 치 깊이로 패여
졌다.
백무영은 검강을 일으켜서 바닥에 금을 그은 것이다.
"내, 내공을 회복했군요?"
묘가난의 얼굴빛이 시꺼매졌다.
"그렇소. 내공을 회복했소. 낭자에게 그 사실을 미리 알려 두는 바이오."
백무영은 내공을 절반 가량 회복한 상황이었다.
그가 금모신후에게 심장을 연달아 격타당한 이유는, 금모신후의 힘을 이
용해 막힌 혈도를 풀기 위함이었다.
"어이해 그 사실을 내게 밝히시나요?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나를 패
배시키는 게 나았을 텐데……."
"묘가난이 너무 착하기에, 감히 묘가난을 속일 수 없었어."
"바보 같기는……."
묘가난은 백무영의 남자다움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백무영을 패배시켜, 그가 여생을 이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하리라 작정하는 눈치였다.
"자, 먼저 덤벼요."
"묘가난이 먼저……."
"호호… 내가 공격하면 손쓸 틈이 없을 텐데요?"
"꼭 그렇지는 않을 거야."
백무영은 눈길을 지그시 내리떴다.
그는 관조의 상태에 들어선 노승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그의 시선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 어
떠한 물체도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았다.
"오래 끌 필요 없는 승부야."
"아……!"
"내가 알고 있는 하나의 초식이 있지. 그 초식을 꺾는다면, 나는 패배당
하는 거지. 아니, 중원천하 전체가 빙하왕국에 무릎을 꿇는다 해야 할
까?"
"설마, 단 일 초로 승부를 내겠다는……?"
"훗훗… 바로 그래. 단 일 초로 승부를 내자는 거지."
"미, 미쳤군요."
묘가난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평상시의 언행이 말괄량이라고는 하나, 일신의 무공은 강호계의 어떠한
기인이사보다도 초절한 묘가난이다.
그녀와 단 일 초로 승부를 내겠다니?
"호호… 좋아요. 정히 빨리 패배하기를 바란다면……."
묘가난은 내심 몇 초 양보해 준 다음에 승리를 할 예정이었는데,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녀는 특이한 검결(劍訣)을 취했다.
두 손바닥을 하나로 합한 다음에 검을 높이 쳐드는 자세.
마치 신불(神佛)을 향해 공양을 들이는 산화녀(散花女)라도 된 듯한 자세
이다.
묘가난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기이한 것은, 몸이 움직이되 보(步)는 내딛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녀는 부동신보(不動神步) 비슷한 보행술을 써서 신체를 미끄러뜨리는
것이다.
"빙하천리(氷河千里)!"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묘한
환상을 일으키게 한다.
"……."
백무영은 의연한 자세로 머물러 있었다.
그는 태산이 바로 곁에서 허물어진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의지견정(意志堅定)한 자세를 유지했다.
묘가난의 몸뚱이는 서른여섯 개로 갈라져서 일대를 휘어 감았다.모두가
허상(虛像)이고, 또한 실체(實體)이다. 서른여섯 명의 묘가난은 모두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빙하왕국의 검결은 환(幻)의 검이다. 그리고 쾌(快)며 급(急)이다.
천 년 간 누구도 깨뜨리지 못한 빙하천검(氷河千劍)!
묘가난은 빙하대제의 영혼을 수호하는 불멸옥녀답게 빙하대제의 검을 완
벽히 터득하고 있었다.
연무장 안이 검세에 휘어 감기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 올 창문도 없거늘, 미세한 떨림이 시작된다.
그리고 백무영의 옷자락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심(無心)!'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자 했다.
삼라만상에 대해 일말의 미련을 갖고 있다면, 마음을 올바로 쓸 수 없다.
그의 검은 이미 심검(心劍)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마음이 이동하면 바로
검이 움직인다.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면, 검은 본래의 위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의 원(圓), 그는 마음 속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노랫소리, 흐느낌
소리, 가쁜 숨소리가 심마가 되어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다.
만에 하나, 심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정확한 원을 그리지 못할 것이
다.
묘가난은 점점 더 다가섰다. 그녀의 분신(分身)은 일흔두 개로 쪼개어졌
으며, 연무장 안이 환영에 완전히 뒤덮였다. 어디를 보아도 묘가난의 몸
그림자가 있다.
팔괘(八卦) 육십사효(六十四爻)의 자리가 모조리 묘가난의 몸그림자에 뒤
덮였다.
묘가난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백무영의 검은 한 치도 움직이
지 않았다. 묘가난은 그의 검이 떨치어지기 이전에, 백무영의 옷을 베어
내리라!
묘가난은 혼신 내공을 다 발휘하였으며, 그녀의 몸은 뿌연 회색 기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스스슷-!
한순간 그녀의 분신이 백팔 개로 늘어났고, 더 넓은 지역이 묘가난의 환
영에 사로잡혔다.
백무영의 손이 조용히 쳐들렸다.
그의 손은 거대한 원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손에 쥐인 검은 따라서 거대
한 원호(圓弧)를 그려 가기 시작했다.
변화가 별로 없는 단순한 동작.
묘가난은 무수한 초식을 알고 있으되, 지금 백무영이 시전하는 검초는 알
지 못하고 있었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거대한 원.
그리고 보라! 원 속으로 나타나는 무수한 불영(佛影)을.
수만 개의 크고 작은 부처상이 원 속으로 떠오르며, 허공으로 꽃그림자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만월심극혜검(滿月心極慧劍)!
백무영은 망아지경에서 만월심극을 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무수한 동심
원이 만들어지며 묘가난의 몸을 휘어 감았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은색 원호의 숫자는 묘가난이 만들어 내는 환영의 숫
자보다 훨씬 많았다.
"내, 내가 지다니… 말도 안 돼."
묘가난은 거대한 원호 속으로 휘어 감기며 머리카락을 빳빳하게 하였다.
절대절명의 순간.
"하아아앗! 빙하천추공(氷河千秋功)!"
묘가난은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전신 모공에서 엄청난 진기를 폭출시키기
시작했다.
휘류류류류-!
극지의 눈보라 같은 설풍이 일어나 백무영의 몸뚱이를 향해 휘몰아쳐 나
가기 시작했다.
연무장 천장을 떠받치고 있던 아름드리 돌기둥이 끊어져 버리고 사면의
벽이 얼음에 뒤덮이면서 연무장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콰르릉- 쾅-!
대벽력!
가히 천지개벽의 순간 같은 파멸이 시작되는 가운데, 백무영의 몸뚱이가
얼음 덩어리에 갇힌 채 붕 떠올랐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용형뇌검은 산산이 바수어졌으며, 가슴팍은 피떡
으로 뭉그러졌다.
묘가난의 혼신 내공이 발휘되는 찰나, 그가 실낱처럼 가늘게나마 유지하
던 선천현문강기(先天玄門强氣)가 으스러지고 만 것이다.
백무영은 무너지는 돌더미 속으로 퉁기어 가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
다.
'이제야 검의 이치를 알았다!'
그는 승패를 떠나 자신이 만월심극혜검을 깨우쳤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창궁법사의 후계자임을 증명한 것이다.
"내가… 이겼다!"
백무영은 혼절하며 그렇게 소리쳤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백무영이 깨어난 장소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종유동굴 안이었
다.
그는 오색 향훈에 휘어 감기어 있었다.
향훈은 뭉게구름처럼 피어 오르고 있는 바, 향훈이 일어나는 장소는 거대
한 다섯 개의 향로였다.
"오행신로(五行神爐)."
백무영은 입을 따악 벌렸다.
오행신로는 전국시대의 보물이다.
오행신로는 다섯 개의 황금 화로를 말하는 바, 다섯 개의 화로는 각기 다
른 성질을 지니고 있다.
금수목화토(金水木火土).
오행신로는 각기 다른 기운을 일으키며, 다섯 가지 기운이 하나로 합쳐진
다면 오행강기가 이룩된다. 오행강기를 익히게 되면, 검장권을 시전할 때
다섯 가지 내공을 자유롭게 시전할 수 있다.
'아아, 묘가난의 정성이 지극하군.'
백무영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희미한 오색 반흔이 손바닥 가운데 나타나 있었다.
백무영은 오행신무를 흡입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오행강기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났으며, 순간 몸뚱이는 무서운 속도로 퉁기어 올라 동굴
천장까지 떠올랐다.
"어엇?"
그는 기겁을 하며 겨우 몸의 자세를 바로잡아 머리가 돌천장에 부딪치는
걸 피했다.
그는 허공에서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가운데 용행구천(龍行九天) 일 식
을 발휘하며 재차 떠올랐으며, 이어 소림사의 답허공공(踏虛空空)을 시전
하며 사뿐히 날아 내렸다.
이어 그는 권장을 제멋대로 휘둘러 대기 시작하였다.
손과 발이 떨어질 때마다 파공성이 요란하게 터져 나오며, 집채만한 바윗
덩어리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프핫핫… 드디어 내공을 회복했다. 프핫핫……!"
용의 부르짖음.
그렇다. 백무영은 너무나도 오랜 세월 동안 폐쇄되었던 내공을 완전히 되
찾은 것이다.
역천행공으로 겨우 유지되던 내가잠력이 과거의 상태대로 회복되었다.
천지현관이 개통이 된 이상, 이제 그의 내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가공하게 신장이 되리라.
드디어 웅비(雄飛)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너무나도 기다려 왔던 웅비의 순간이!
안개가 자욱하다. 상춘지곡(常春之谷) 전역이 짙은 안개에 휘어 감기어
있었다.
백무영은 암벽에 뚫린 굴에서 빠져 나와 백석로를 따라 걸었다.
밝고 화려해 보이던 정경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게 변화되어 있었다.
백무영은 길을 따라서 시전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묘가난이 어이해 나를 오행굴에 넣었을까? 그리고 왜 그녀의 모습은 보
이지 않는 것일까?'
백무영은 다각도로 생각하면서 걸음을 내딛었다.
얼마를 갔을까? 금모신후 한 마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금모신후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으며, 백무영에게 손수건 한 장을 전했다.
백무영의 손에 쥐어진 작은 손수건에는 달콤한 체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묘가난의 글이다."
백무영은 손수건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작고 꼼꼼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떠나요! 그대는 떠날 자격이 있어요. 그대는 승자니까!
내가 그대를 쓰러뜨린 이유는, 그대보다 내공이 강하기 때문.
초식의 대결에서는 그대에게 패했습니다.>
백무영은 손바닥을 꽈악 쥐었다.
'묘가난은 아름답고 착하다. 그녀의 출신이 흉폭하고 독랄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성녀(聖女)처럼 고결하다!'
연무장의 싸움에서 이긴 쪽은 백무영이었다.
그의 만월심극혜검은 묘가난의 빙하천리검을 흩트려 버렸다.
일 초의 승부에 이긴 쪽은 백무영이었다.
묘가난은 일 초 승부에서 패하게 되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빙하천추공
을 시전해 백무영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묘가난은 자신이 패배했다는 점을 솔직히 자인한 것이다.
손수건 말미에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금모일공(金毛一公)이 출구를 일러 줄 겁니다.
나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상공이 나가고 난 후, 출입구는 폐쇄가 될 겁니다.
다시는 나를 만날 수 없을 겁니다.
나는 패자, 결국 불멸옥녀의 자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뒷부분의 글씨는 어지러운 필체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손수건에는 눈물
방울이 떨어진 흔적이 역력했다.
그녀는 말괄량이였으되, 또한 오연(傲然)한 성품이었다.
그녀는 백무영이 곁에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으면서도, 신의를 지키기 위
해 백무영이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문득 햇살이 눈을 시리게 한다. 그리고 자욱하던 안개가 어느 틈엔가 사
라져 버린 것이다.
백무영은 금모일공이라는 금모신후를 바라봤다.
금모신후는 전후 사정을 다 아는 듯,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끄으- 끄으으-!
금모일공은 길을 안내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무영이 어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그는 금모일공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내디디고자 하였고, 문득 금모일
공의 눈빛에 처연한 빛이 떠도는 걸 보았다.
'설마, 묘가난이……?'
그의 마음이 갑자기 파문에 휘어 감겼다.
창궁법사가 지목한 대로 그는 냉정(冷情)하다기보다는 다정한 성격이었으
므로, 그로 인하여 여난이 가중되는 것이다.
백무영은 떠나고자 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나를 궁전 안으로 안내해 다오."
금모신후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백무영의 눈에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내공을 회복한 백무영의 눈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위맹했다.
"어서!"
그가 엄숙히 말하자, 금모일공은 찔끔 하는 표정을 지으며 몸의 방향을
틀었다.
어두운 방이다. 휘장이 창이란 창을 모조리 가로막고 있다.
휘장을 제친다면 채광이 잘될 것이다. 그리고 유리로 된 즙기가 햇살을
받아 찬란히 반짝거리리라.
방 가운데, 술병이 뒹굴고 있다.
원왕주(猿王酒)라고 불리우는 술로, 인간이 만든 술이 아니라 자연이 만
든 술이다.
온갖 과일로 만들어진 원왕주의 향기는 꽤나 달콤하다.
하나, 원왕주는 한 모금만 마신다 하더라도 얼큰히 취해 버릴 정도로 지
독한 술이다.
가냘픈 손에 술병이 쥐어진다.
벌써 일곱 병째다.
어지간한 사람은 이미 술에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취하지 못했다.
"……."
그녀는 한숨을 쉬어 가며 술만 퍼마셨다.
이제 그녀는 고독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도 그녀를 위해 웃음을 보내 주지 않을 것이며, 그녀는 아침에 일어
나 차(茶)를 끓여다 줄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또다시 술병이 비워졌다.
"세속 사람들은 술로써 시름을 잊는다던데, 나는 술을 마심으로 시름이
더해진다."
뺨이 창백하다. 유난히 긴 속눈썹 끝에는 새벽 풀밭에서 볼 수 있는 맑은
이슬이 매달리고 있었다.
"아무도 나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나의 숙명(宿命)인 걸 어
찌하겠는가?"
그녀는 손을 내밀어 또 한 병의 술병을 쥐고자 했다.
한데, 그녀의 손은 허공을 스칠 수밖에 없었다.
술병은 한 남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과음은 곤란해, 묘가난."
"아……?"
미소녀 묘가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서지는 햇살, 어느 틈엔가 휘장이 제쳐졌으며… 방 안 그득히 햇살이
작살 떼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남자의 어깨 위에는 오월 햇살이 흰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그대가 어이해……?"
묘가난의 얼굴은 빨간 빛에서 흰빛으로 물들었다.
"주선(酒仙)의 경지에 도달했던 이백(李白)이라면 모를까, 술은 혼자 마실
때보다 둘이 마실 때 맛이 나는 법이야."
"왜 떠나지 않았나요?"
묘가난은 애써 눈길을 돌렸다.
나이가 어리고 가냘픈 체격이라 하더라도, 위대한 전통에 따라 길러진 묘
가난이다.
변황의 몽고부족에게 있어, 그녀가 누리고 있는 권위란 몽고왕이 절을 해
야 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백무영은 떠나가야 할 사람, 더욱이 그는 중원인이 아니던가?
사랑이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서로 함께 사랑할 때에는 영약일 것이되, 둘 가운데 하나만 사랑을 할 때
에는 독이 되는 것이다.
"어서 떠나요. 날 동정하지 말아요. 동정을 받을 정도로 초라한 여인은
아니예요."
묘가난은 입술이 잘강 씹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애써 감
추고자 했다.
"난 빙하왕국의 대리인. 나는 영원히 이 곳에 머물러야만 하는 운명이에
요. 그대는 나와 더불어 머무르기를 거절한 사람. 더 이상 나를 조롱하지
말고 떠나가요."
"묘가난을 조롱한 적 없어."
"없다고요?"
묘가난은 고개를 돌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백무영은 글씨가 가득 적힌 손수건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
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로 인해 상심해선 안 돼, 묘가난."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요. 어서 떠나요. 일각 안에 떠나지 않는다면,
금모신후들에게 명령을 해서 죽이게 하겠어요."
묘가난은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백무영은 그 표정을 대하며 연민의 정을 짙게 느꼈다.
"묘가난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난 중원여인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묘
가난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어."
"바보 같은 분! 돌아와서는 아니 되시거늘……."
묘가난은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그녀의 눈빛이 더욱 뜨거워졌다.
남녀의 마음 사이에 흐르는 정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높
은 뚝방으로도 막지 못할 해일이다.
백무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으며, 묘가난은 저항하지 않고 가슴 속
으로 안기어 들었다.
묘가난은 홑옷을 걸치고 있었는지라, 백무영이 손을 가볍게 내림에 따라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하이얀 피부이기는 하나, 건강미가 넘치는 피부가 나타난다.
달빛 아래 빛나는 배꽃이 이처럼 흴까?
바람에 파드득 흩날리는 밤의 갈대꽃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하는 여체.
백무영은 손을 내밀어 봉긋한 젖가슴에 손을 대었다.
젖가슴은 지극히 탐스러운지라, 한 손으로 만지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팔은 어느 새 묘가난의 잘룩한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백무영은 저도 모르는 감흥에 사로잡히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덮치어 내렸다.
묘가난의 입술이 비 온 후의 꽃송이처럼 탐스럽게 벌려졌다.
입술 사이에서 향기가 흘러 나왔다.
달콤하고도 비릿한 향기이다.
입맞춤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백무영은 손바닥을 내려 팽팽히 부푼 그녀의 풍만한 둔부를 더듬어 내렸
다.
묘가난은 촉수처럼 다가서는 손바닥이 은밀한 부분을 스칠 때 마다 몸을
파르르 떨었다.
사랑은 정신이 아니라, 육체로 증명이 되는 것일지도…….
두 사람의 애무는 점점 격렬해졌다. 그러던 한순간, 묘가난의 눈빛이 다
시 반짝거렸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버려야 해!'
그녀는 백무영의 몸이 자신의 몸을 쓰러뜨림을 느꼈다. 그는 육체의 갈망
으로 인해 이성을 거의 잃고 있었다. 그의 몸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마음의 벽을 허물어뜨리지 않는 백무영이었으되, 묘가난
앞에서는 마음의 벽을 쌓지 않고 천진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대하는 것
이기에… 쉽게 정념(情念)에 휘말려드는 것이다.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다.
묘가난의 깨끗하던 동체 구석구석에 푸른 멍이 잡히기 시작한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물가의 수초처럼 축축 늘어졌으며, 기나긴 머리카락이
백무영의 얼굴을 간질이고 가슴팍을 간질였다.
묘가난은 천천히 손을 쳐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백무영의 척추 끝에 닿았고, 그 순간은 백무영이 너무나
도 격정적인 열기에 사로잡히는 순간이었다.
한순간 묘가난은 손가락으로 척추 끝을 점하였으며, 백무영은 흑! 소리를
내며 천천히 쓰러졌다.
묘가난은 백무영의 몸 아래 깔리어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 나왔다.
햇살이 눈부시다.
백무영은 기이한 지역에서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그가 깨어난 곳은 빙하
의 골짜기였다. 어디를 봐도 얼음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화려하고 환상
적이던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빙하곡 밖으로 나오다니……!"
백무영이 누워 있는 곳은 빙하지곡의 초입 부분이었다.
묘가난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일 마장 정도 떨어진 지역.
그 곳 하늘에서는 천 년 내내 떨어져 내렸던 회색 눈발이 거위털처럼 나
부끼고 있었다.
백무영은 몸 가에 떨어진 하나의 금궤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그는 흠칫 놀라며 금궤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여러 가지 물건이 안에 담기어 있었다.
우선 보이는 것은, 양피지(羊皮紙)로 만든 세 권의 소책자였다.
<빙하신경(氷河神經) 제일권(第一卷) 천권(天卷)>
<제이권(第二卷) 지권(地卷)>
<제삼권(第三卷) 빙권(氷卷)>
소책자에는 그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이것은 빙하대제의 비록!"
빙하대제는 일생 내내 연구한 무공절학을 세 개의 소책자에 나누어 기록
했다.
천권에는 빙하천추공(氷河千秋功)으로 대별되는 음극진기(陰極眞氣)의 발
출법, 회수법, 기문토납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연무장 안에서 백무영을 날려 보냈던 그 수법이었다.
두 번째 비급인 지권에는 빙하천리검(氷河千里劍)을 비롯하여 팔식일검결
(八式一劍訣)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빙하천추공을 익힌 사람만이
시전할 수 있는 절기들이었다.
제삼권 빙권의 내용은 묘가난마저도 터득하지 못했던 최고의 절학들로,
대부분 극도에 달한 살인절기들이었다.
"어이해 이 비급을 내게……?"
백무영은 흠칫 놀라며 금궤 안을 다시 살펴봤다.
여러 개의 영과가 눈에 띄었으며, 한 줌의 칠채묘안주(七彩猫眼珠)도 눈
에 띄었다.
그리고 세 개의 약병이 들어 있었으며, 밀지 한 장이 곱게 적혀 놓여 있
었다.
<상공을 떠나 보내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상공을 제 곁에 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상공은 대륙무림계(大
陸武林界)에 필요하신 분. 제가 어찌 상공을 곁에 잡아 둘 수 있겠습니
까?>
간곡한 어조로 쓴 글이다.
<저는 상공을 내보내며 빙하곡을 폐쇄시켰습니다.
다시는 빙하곡에 들어오시지 못하십니다.
상공에게 빙하신경을 전함으로, 저의 조상이 중원기인들을 유혹하여 죽인
죄를 씻고자 합니다.
빙하곡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빙하신경 안의 무공을 완전
히 터득하고 초인적인 내공으로 빙하대진(氷河大陣)을 파괴하는 방법뿐입
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바로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의 경지에 도달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빙하심경은 외우고 난 후, 태우십시오.
그리고 빙하심경의 주인으로 두 가지 일을 처리하여 주십시오.
그 중 하나는 빙하대제의 숙적인 절대무존의 후예를 찾아서 그와 절기를
비교하는 것.
또 하나는 몽고의 평화를 이룩해 달라는 것입니다.>
맺고 끊는 바가 분명한 글귀이다.
사적인 정감보다는 공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억제하며 글을 적어 내린 것이다.
"아아, 빙하제국은 위대한 곳이다."
백무영은 한순간의 정에 이끌려 묘가난 곁으로 되돌아갔던 자신의 모습
을 기억하며 얼굴을 붉혔다.
묘가난이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묘가난과 더불어 살면서 강호로
복귀하지 못한 것을 내내 후회하게 되었을 것이다.
묘가난은 불멸옥녀다운 권위와 판단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빙하왕국과 중원무림 사이의 오랜 갈등을 씻기 위해 백무영을 강
호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며, 그에게 빙하대제의 비급을 아낌없이 전한 것
이다.
우르르릉-!
골짜기는 광풍(狂風)에 휘어 감기어 있다.
백무영은 혼신내공을 발휘하여 안으로 들어서고자 하였으나, 허사였다.
그는 태산을 허물어뜨릴 듯한 기세로 치솟아 오르는 눈보라에 휘말려 번
번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묘가난은 또다시 고독한 나날을 시작할 것이다.
백무영이 진세를 깨뜨리고 그녀 곁으로 가지 않는 한, 그녀는 그 안에서
늙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이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백무영은 눈보라 속에서 있으되 추위를 느끼지 않았
다.
그의 내공은 전에 비해 세 배 이상 고강해졌다.
그는 무공을 잃고 떠도는 사이, 세 가지 종류의 무공을 터득한 것이다.
그의 무공은 측량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진 것이고, 남은 것은 시간을 내
어 모든 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언제고……."
백무영은 빙하지곡을 보며 중얼거렸다.
"돌아가리라."
그는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 갔다.
끝없이 내리는 눈발.
땅도, 하늘도, 허공도, 모두 얼어붙었다.
백무영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건, 모두 눈에 뒤덮여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