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속는 자와 속이는 자
(1)
뎅뎅뎅……!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한적한 숲속의 산사였다.
천일기와 왕소우는 까마득한 천애절벽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대초원의 푸른 하늘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놈일세."
천일기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응축돼 있었다.
한 줌의 재로 화(化)해 너무나 가벼운 고독검의 몸은 천일기의 손가락 사이에서 은색 눈가루가 되어 저 아래의 세상 위로 흩뿌려졌다.
'어쩌면 바람은 그의 몸을 실어 대초원으로 그를 데려다 줄지도 몰라!'
천일기는 간절하게 바랐다. 죽어서라도 그의 꿈이 이뤄지기를……
"평생을 함께 한 아우였네. 이 못난 사람을 신이라도 되는 양 철석같이 믿어주고 자신의 일보단 나의 일을 더 소중하게 여겨주었던……."
딱히 왕소우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고독검을 자기 가슴에 묻는 의식이었다.
"나를 용서하라, 아우여……!"
언제부터인가 그의 볼 위에는 뜨거운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재마저 바람 속에 날려보낸 뒤 천일기는 갑자기 우욱! 하면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쿨룩 쿨룩!"
격렬히 어깨를 떨며 밭은 기침이 토해졌다.
왕소우는 음울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잠시 후 기침이 멎었다.
천일기는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빌어먹을…… 겨우 가슴에 상채기 조금 난 걸 가지고 기침이라니……."
왕소우는 눈길을 절벽 아래로 돌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알기로 혈음신장에 당하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만하길 다행인 줄 아시오."
천일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신음과 같은 소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금황독존! 하늘에 맹세코 네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없애고 말겠다!"
* * *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핏빛 노을이……
천일기와 왕소우를 넓은 어깨로 감싼 이름 모를 산은 먹빛으로 물들어가며 막 비가 내린 뒤처럼 축축한 습기를 내뿜고 있었다.
중턱까지 밋밋하게 얕은 경사를 이루다 갑자기 깎아지른 봉우리 너머로 애기 볼보다 빨갛게, 해가 잠기고 있었다.
노을빛은 좁은 오솔길 위를 오르는 두 사람의 그림자 꼬리를 기일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왕소우가 딱딱하게 굳은 천일기의 옆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어디 가서 며칠 쉬어가지 그러시오?"
천일기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우들과 약속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왕소우는 알 것 같았다. 지금 그의 가슴 속에는 금황독존에 대한 노여움과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
산의 중턱쯤 올랐을까?
산 모서리를 돌자 갑자기 눈앞이 시원해졌다.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북쪽으로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두 사람은 갈래길 앞에서 동시에 멈춰 섰다.
천일기가 먼저 물었다.
"자넨 어느 쪽인가?"
"왼쪽이오만……."
"잘 가게."
짧은 말 한 마디로 이별을 고하고 천일기는 북쪽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그의 목 뒷덜미에 왕소우의 목소리가 와 닿았다.
"딸을 찾는다고 했소?"
천일기는 발을 멈추고 우울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 평생의 숙원이지. 이십 년이 넘도록 딸아이를 보지 못했거든……."
"이름이 뭐요?"
천일기는 왕소우의 얼굴을 돌아다봤다.
짧은 만남이지만 그는 왕소우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 것을 안다. 그리고 함부로 남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왕소우는 멋쩍은 듯 입 꼬리에 미소를 그렸다. 웃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냥…… 그냥 물어보는 거요."
천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하지 못할 것도 없다.
"천연명…… 오른쪽 귀밑에 콩알만 한 붉은 점이 있는 아이일세."
"기억해 두리다."
이번엔 천일기가 물었다.
"자네 아내의 이름이 금아라고 했나?"
왕소우의 눈가에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걸 어떻게……?"
천일기는 희미하게 웃었다.
"밤마다 잠꼬대를 하더군. 뜻밖이었네. 자네 같은 사람의 가슴속에 그렇게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왕소우는 허무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미 삼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외다. 공허한 짝사랑일 뿐이지요."
천일기는 의외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죽었을 줄은……
"죽었다고……?"
"검에 찔려 죽었소.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귀검수의 아내가 다른 것도 아닌 검에 맞아 죽었단 말인가?"
왕소우의 얼굴에 자조 섞인 웃음이 섞여 나왔다.
"내가 죽였으니까……."
천일기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왕소우는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려 천일기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나 말을 끝맺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칼에 미쳐 있었소. 다른 건 돌아볼 겨를이 없었소. 오직 검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것만이 내 삶의 이유이자 내가 살아야하는 목적의 전부였소."
길은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길옆의 앙상한 침엽수림 사이로 조용한 밤기운이 흘러나왔다.
"물론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오. 허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게 칼이었소. 그래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늘 그늘이 깔려 있었지만 나는 그것까지도 철저히 무시했소."
왕소우는 결코 빠르지 않게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난 꿈에서조차 상상도 못했던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야 말았소."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털어놓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얘기는 재미없었다. 그러나 무척 음울한 얘기였다.
"축하합니다. 임신하셨군요."
그 말은 왕소우에겐 청천벽력과 같았다.
의원을 호들갑을 떨며 여러 가지 얘기를 했지만 고막이 터져버린 듯 귀가 멍멍했다.
시쳇말로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당시 그는 오직 검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금아는 아무 말 없이 죄인처럼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의원은 도망치듯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방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었다. 너무나 고요한 정적이 두 사람 가운데를 흐르고 지나갔다. 방안의 공기는 무겁고 무서웠고 적막했다.
왕소우는 천천히 일어섰다.
"말이 필요한가?"
그녀에게 물어보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치미는 배신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이 뽑혀졌다.
언제나 새파랗게 날이 서 있는 검.
"아녜요!"
금아는 낯빛이 파랗게 질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그럴 리가 없어요! 이건 뭔가 잘못 됐어요!"
"나를 배신하고 목숨을 버려도 좋을 만큼 사랑했던 사내가 있었더냐?"
너무 감정이 격했던 탓일까?
남편의 목소리는 평소 보다 더 담담하게 들렸다.
금아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아녜요! 절대로 그런 게 아녜요!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아요! 제발…… 제발 절 믿어 주세요!"
왕소우는 냉소를 머금었다.
"불륜의 씨앗을 뱃속에 가진 탕부(蕩婦)의 말을 믿어 달라는 건가?"
금아는 눈을 부릅떴다.
"지……지금 절 탕부라고 하셨나요?"
왕소우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최소한 절개와 거리가 멀다는 건 증명되지 않았나?"
금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빤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갑자기 미친 듯 깔깔깔 웃어 제쳤다.
"그래요, 전 탕부예요! 독수공방이 싫어서 아무 놈이나 닥치는 대로 껴안고 뒹굴었던 음탕한 계집이라구요."
마치 봇물을 터뜨리듯 말을 쏟아냈다.
"그러는 당신은 뭐죠? 눈만뜨면 아내보다 검을 먼저 찾는 당신은 과연 남편 노릇을 제대로 했다고 생각하나요?"
수줍은 성격에 내성적인 아내였다. 말 한 마디도 아꼈던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은 결국 왕소우였지만 그러나 지금 그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검이 좋으면 평생 검이나 껴안고 살 일이지 계집은 뭐 하러 끌어들였어요? 그까짓 검이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왕소우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번쩍 튕겨 나왔다. 그는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계집!"
고함과 함께 검을 쉬잇! 내리쳤다.
스팟!
단 일획에 아내의 이마가 반쯤 쪼개지며 피가 툭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아내의 가슴팍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벌겋게 적셔졌다.
왕소우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아!"
맹수 같은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 검을 휘둘렀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머리 속을 공백상태로 만들었다.
"그까짓 검이라고? 욕정에 눈이 멀어 아무 놈에게나 가랭이를 벌려주는 계집년 따위가 감히!"
아내의 전신에 난도질하듯 사정없이 내리쳐지는 검, 검, 검……!
"다시 한 번 지껄여 보거라, 계집!"
"당신을…… 죽도록 사랑했어요. ……."
금아는 피투성이 얼굴 위에 서글픈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나보다 칼을…… 사랑했지만…… 난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소중했어요.…… 그렇기에…… 난 죽음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당신 외에……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걸……."
왕소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벌써 아내에게 검을 내리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여섯 살 조막만한 손으로 검을 잡은 이후 최초로……
아내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 호흡이 벅찼다.
"사랑……해요…… 어제도…… 앞으로도…… 영원히……."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마침내 비가 쏟아졌다.
천일기가 물었다.
"아내의 결백을 믿나?"
왕소우의 표정을 봤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는 음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모든 게 모호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믿소. 그녀가 나를 사랑했듯이 나 또한 죽도록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왕소우의 눈은 자기도 모르게 축축히 젖어 들고 있었다.
"그렇소.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무덤 속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나는 절대로 그녀를 잊지 못하게 될 거요……."
쏴아아아아……!
비는 갈수록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한 덩어리로 뭉쳐질 듯 앞이 보이지 않도록 쏟아져 내렸다.
(2)
휘영청 떠있는 만월.
거대한 산세를 등지고 산기슭 중턱에 자리한 엄청나게 큰 장원의 웅자가 원경으로 보이면서,
중주신검문(中州神劍門)!
지난 백여 년에 걸쳐 한 자루 검으로 강서성 일천리를 호령하며 고검주유만승불패(孤劍周遊萬勝不敗)의 무적신화(無敵神話)를 이어가는 무림제일의 철혈검문(鐵血劍門)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구파일방의 으뜸이 소림이라면 육문오가의 으뜸은 중주신검문을 손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중주신검문의 장원은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어디선가 삼경(三更)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익……!
무서운 속도로 비조 한 마리가 날아 중주신검문의 본관(本館) 지붕 위에 착 달라붙었다.
달빛이 지붕을 비쳐주고 나서야 지붕에 엎드린 그것이 비조가 아니라 사람임이 드러났다.
다름 아닌 석비룡……
근 이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경공술의 소유자가 그 이외에 어느 누가 있겠는가.
석비룡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만한 규모면 황궁은 아니더라도 무림맹의 규모는 능가할 것이다.
장원 안은 곳곳에 등불이 걸려 있어 사위가 훤했지만 이곳에서 살지 않는 이상 수많은 고루(高樓) 전각(殿閣)과 크고 작은 길을 일일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인데 석비룡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방향을 가늠한 후 지붕을 따라 도둑고양이처럼 재빠르게 몸을 옮겼다.
석비룡은 이렇게 한 번도 길을 헤매지 않은 것에 대해 만박신승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때 만박신승은 석비룡과 벽소운을 앞에 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게 천하 삼대신음의 하나인 광마신소(狂魔神笑)를 가르쳐준 사람은 티벳 최고의 성자인 타린이란 분이었네. 무려 십 년을 배우고 나서야 가까스로 터득하게 되었지."
세 사람 주위는 촛불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돌아가실 때 그분은 내게 한 가지 예언을 남기셨네. 장차 미증유한 피의 혼돈이 중원을 뒤덮으리니 그 중심은 현현교가 될 것이며……."
석비룡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바싹 긴장되는 것이다.
만박신승은 계속 말했다.
"연후 그 힘이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매 새외의 모든 지역이 혼돈의 폭풍에 잠기리라……."
석비룡이 물었다.
"다른 말씀은……?"
"안 그래도 내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네. 성자께선 아무 말씀도 없이 웃기만 하셨지."
괜한 기대를 가졌나 보다. 석비룡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그렇다면 그 성자의 예언대로라면 세상은 피의 혈겁을 피할 길이 없단 말인가.
만박신승은 석비룡을 쳐다보며 슬며시 웃었다.
"허나…… 끝으로 한 마디는 하셨네."
"……?"
"삼음(三音)이 합쳐지면 공음(空音)이 되나니 이것이 곧 천하(天下) 구제(救濟)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석비룡과 벽소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만박신승이 석비룡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자넨 현현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석비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등룡왕부와 설혜의 사건 이후 지금까지 줄곧 현현교를 추적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그렇다면 현현교의 진정한 실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작 그런 질문을 받자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그……그러니까 그것이……."
만박신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알고 싶으면 언제고 중주신검문(中州神劍門)을 찾아가 보게."
석비룡과 벽소운은 거의 동시에 되물었다.
"육문오가의 중주신검문 말이오?"
만박신승은 자신이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무릎을 으드득 펴고 일어섰다.
"백 년 전 중주신검문은 현현교와 결전을 앞두고 개방을 비롯한 무림의 수많은 정보조직을 이용해 현현교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네.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이 구성원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현교의 핵심인물에 대해선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서 한 권의 책자에 담아둔 것으로 알고 있네."
금시초문이었다.
석비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책자만 얻는다면 현현교에 관한한 더 이상의 궁금 점은 없으리라 믿네. 문제는 그 책자를 손에 넣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데 있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등룡왕부의 멸망을 비롯해 사부의 죽음까지……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치고 현현교와 연관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만사의 우선이 현현교부터 철저히 해부하는 것!
만박신승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 책자를 손에 넣어야 한다!'
석비룡은 만박신승이 일러준 대로 본전의 지붕을 타고 넘어 만경각(萬經閣)쪽으로 접근해 갔다.
그는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왔다 .
"니미럴……! 이젠 이 짓도 지겨워서 못해 먹겠군. 아무리 둘러봐야 그게 그건데 허구한 날 이놈의 서고(書庫)를 순찰하라는 이유가 대체 뭐냔 말이야!"
"그만큼 이곳이 중요하다는 뜻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겠나? 영광인 줄 알아, 이 사람아! 천하에 중요한 책이란 책은 모조리 모여 있는 이런 곳을 순찰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아?"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책 나부랭이가 중요해 봤자지 뭐."
"무식한 놈!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책이란 걸 모르다니……."
"쳇, 누가 들으면 책 꽤나 읽은 줄 알겠네. 제 이름 석자도 못 쓰는 까막눈 주제에."
"까……까막눈이라니! 너 말 다했어?"
석비룡은 지붕 위에서 몸을 날렸다.
스르르……
그의 신형이 문틈 사이로 연기처럼 스며들어갔다.
소림의 장경각과 비교될 만큼 거대한 규모의 서고였다.
석비룡은 먼저 서가에 꽂힌 책들의 방대한 규모에 놀랐다. 그 다음에는 책들의 진귀함에.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문제는 빼곡히 들어찬 수십 수백만 권의 장서 가운데서 그가 원하는 그 책 하나를 어떻게 골라내느냐 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가르쳐 주려면 완벽하게 가르쳐 줄 것이지……."
애꿎은 만박신승에게 욕을 해댔다.
"이쪽은 아닌 것 같고…… 이쪽도……."
서가를 쭉 훑어만 봐도 날이 밝을 것 같았다.
"현현교의 책이라면 아무래도 무림사(武林史)에 관한 서가에 있을 것 같은데……"
말이 무림사지 그것만 해도 일 만여 권이 넘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
'무조건 부딪쳐 보는 수밖에!'
그의 손과 눈길은 거의 동시에 책제목들을 빠르게 훑어갔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그에 따라 마음도 조급해졌다.
덜컥!
손가락 끝에 책 한 권이 걸렸다.
제목이 적혀져 있지 않은 두툼한 책자. 최근 누가 건드린 적이 있는 듯 살짝 뽑혀져 있었다.
석비룡은 주저 없이 책을 뽑아들고 촤르륵 아무곳 이나 펴 들었다.
석비룡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바로 이거다!'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와르르!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이게 무슨 소리야?"
석비룡은 충격에 휩싸였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살갗에 싸늘한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현영…… 좌현영……! 그가 현현교의 교주인 좌엽선의 아들이라니……!"
석비룡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노야는 내 아버지가 현영이라 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현현교에 뿌리를 둔 좌씨의 핏줄이란 말인가? 거기다 내가 노야에게 배운 환상진을 창안한 사람이 현현교의 대장로(大長老)인 종천로(鐘天露)라면 노야가 곧 종천로일 수도 있다는 얘긴데……."
현기증에 머리가 핑 돌았다.
'어떻게 된 건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됐기에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때 불쑥 등 뒤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곽상…… 유곡…… 이제 보니 거기에 있었구나.……"
석비룡은 황급히 책자를 품속에 쿡! 쑤셔넣고 돌아섰다.
술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화장기 짙은 얼굴의 아름다운 미녀였다.
나이는 대략 스물 한 둘쯤 되어 보일까?
눈에 확 띄는 녹색(綠色) 경장차림에 늘씬하게 큰 키, 머리는 갈래를 땋아 양쪽으로 늘어뜨렸고 유난히 흰 얼굴에 색기(色氣) 찰찰 흐르는 요염한 눈,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요염했다.
여인은 술병을 든 채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왔다. 걸을 때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옷 사이로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3)
"바보야…… 여기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야지…… 한참 찾았잖아……"
그녀는 엉망으로 취해 비틀비틀 석비룡에게 다가왔다.
"순찰도 그래…… 대충 둘러봤으면 냉큼 나와서 술이나 마실 일이지, 뭘 꾸물거리냔 말야…… 장사 하루 이틀 했어?"
석비룡의 발치 앞까지 다가오더니 게슴츠레한 눈을 치떴다.
"어?"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내 눈이 잘못됐나? 그 못 생긴 놈팽이들이 왜 갑자기 미남으로 보이는 거지?"
그의 얼굴이 흔들려 보이는 것이다.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그래도 안 되자 손으로 그의 턱을 잡고 얼굴을 고정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너…… 곽상 맞지? 아냐, 아냐! 유곡이던가?"
여인은 찐득찐득한 손길로 석비룡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가 봐? 네가 왜 이리 잘 생겨 보이는 걸까?"
석비룡은 멍청히 그녀의 손에 얼굴을 내맡기고 있었다.
천하의 색골서생 앞에 지금 떡판지게 한 상 잘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금 처지는 적진 한 가운데 놓인 꼴이 아닌가?
"아이, 너…… 오늘 왜 이렇게 뻣뻣해?"
여인의 보드라운 팔이 그의 목에 걸렸다. 얼굴을 자꾸 석비룡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좋아…… 이 넓은 가슴…… 날 안아줘, 으응…… 꼭! 꼬……옥!"
석비룡은 그녀의 허리를 와락 안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엉성하게 손을 갖다대는 데 그쳤다.
몸에 좋은 약인지, 나쁜 약인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먹을 수는 없쟎은가 말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나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 여인은 뺨을 석비룡의 몸에 비벼대며 봉긋한 젖가슴을 그의 가슴에 바짝 밀착시켰다.
석비룡이 '어어!' 하는 사이에 여인은 더운 듯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이……이 여자 미친 것 아냐?'
하면서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리기 싫었다.
왜냐하면 보고 싶었으니까.
여인의 몸이란 것은 신기한 것이어서 세상의 반이 여자이긴 하지만 지문처럼 몸의 특징 또한 저마다 달랐다.
"소저, 이, 이러면……."
그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겉옷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여인의 옷이 끌러지며 속에 받쳐 입은 옷들이 흐트러졌다. 보송보송한 것이 만지면 으스러질 것 같이 연약한 속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혼혈(混血)로 향하던 손이 스르르 힘없이 내려지며 그녀의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며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젖가슴은 석비룡의 손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만큼 푸짐했다.
"흐윽!"
여인은 교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터뜨렸다.
석비룡의 몸이 그녀를 덮쳐왔다.
"아아…… 날 어서……."
그녀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석비룡의 몸을 안으려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석비룡의 손이 그녀의 혼혈을 찌르고 말았다.
풀썩!
반쯤 들려졌던 여인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석비룡은 그녀의 몸 위에서 일어섰다.
"미안해. 다음에 만나면 그때 화끈한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하지. 지금은 기분이 영 아니거든."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휙 몸을 돌렸다.
앞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다시 교태어린 음성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봐 당신……"
석비룡은 흠칫 놀라며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혼혈을 잘못 짚었을 리는 없을 텐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인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잔뜩 흥분만 시켜놓고 그냥 가면 어떡해?"
석비룡은 그제야 눈치 챘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혈도(穴道)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정도라면 보통 고수가 아니었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우욱! 몸을 틀어 번개같이 여인의 혈도를 찔러갔다.
여인은 피식 웃더니 발을 앞뒤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유성표환보(流星飄幻步)!"
석비룡은 크게 놀란 듯 여인의 얼굴을 새롭게 쳐다뫘다.
"중주신검문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되는 가전비학(家傳秘學)을 어떻게……?"
"까르르르……!"
여인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더니 안목도 보통이 아니네?"
석비룡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까불지 말고 이쯤에서 정체를 털어놓지 그래!"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흥! 코웃음을 쳤다.
"어머머!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웃기는 양반이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남의 집 담장을 넘어온 주제에 주인에게 정체를 밝히라고?"
그러다가 곱게 눈을 흘기며 큰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고 크게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좋아, 좋아! 잘 생긴 얼굴을 봐서 용서할 테니 어서 뜨거워진 내 가슴이나 식혀 줘!"
석비룡은 냉소와 함께 우뚝 선 자세 그대로 몸을 날렸다.
"식혀주지. 그것도 아주 차갑게……!"
쉬이익……!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 앞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석비룡을 보고 여인은 깜짝 놀랐다.
"뭐, 뭐가 이렇게 빠른 거야?"
마치 닭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쪼아대듯 손과 손이 부딪쳤다간 풀리고 다시 부딪쳤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삼십여 합을 나누었다.
타타타탁!
타타탓!
갈수록 기와 힘의 차이는 나타나기 마련. 석비룡은 여유 있게 공격을 해 가는 반면 여인은 뒷걸음질을 치며 방어에만 급급했다.
"어디 이번엔 본격적으로 한 번 해볼까?"
석비룡은 일부러 악독하게 손을 그녀의 가슴 쪽으로 슈우욱! 뻗어냈다. 마치 가슴을 와락 움켜잡을 듯.
여인은 기겁을 하며 허리를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석비룡의 손을 피해냈다.
"비겁하게 아녀자의 급소를 노리다니!"
여인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지며 무섭게 빠른 속도로 재차 공격을 가해왔다.
"용서하지 않겠다! 이 치한!"
석비룡은 어이없다는 듯 허어, 하고 웃었다.
"만지라고 내밀 땐 언제고 철천지원수처럼 설쳐대는 건 또 무슨 경우야?"
"닥쳐라, 놈!"
여인의 공격이 한층 매서워졌다.
이번엔 석비룡이 수세에 몰려 피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얼굴에는 여유가 흘러 넘쳤다.
"팔선원앙각(八仙鴛鴦脚)인가? 무게도 적당하고 연결동작도 무난한데 다리를 지나치게 들어 올리는 게 눈에 거슬리는군!"
"강학일하(江鶴一下)! 정수를 터득하긴 했으나 힘이 조금 모자라는 것이 애석해."
멀쩡하게 피하며 훈수까지 두는 것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석비룡이 지금 펼치는 보법은 천하무쌍(天下無雙)의 보법이 아닌가.
여인은 쏜살같이 공격을 가하는가 싶더니 뒤로 훌쩍 뛰어 사오 장을 벗어났다.
"환공보법(幻空步法)! 설마하고 생각했더니 천리무영 석비룡이 틀림없군."
석비룡은 눈을 치켜 뜨며 자못 놀랐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호오……! 가슴만 매력적인 줄 알았더니 보는 눈도 꽤 수준급인 걸?"
그는 여인의 눈썹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았어. 중주신검문에 일곱 아들이 있지만 정작 문주의 총애는 하나뿐인 딸이 독차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바로 너였어. 이름이 갈홍예(葛弘芮)라 하던가?"
갈홍예는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어, 맞어! 내가 바로 홍예야!"
"고귀하신 중주신검문의 문중보옥(門中寶玉)께서 아랫것들과 술타령이나 하자고 이런 곳을 기웃거릴 리는 없고……."
석비룡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갈홍예는 화끈하고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답게 선선히 인정했다.
"그것도 정답이야. 당신이 여기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거든."
석비룡의 턱이 딱딱해졌다.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무슨 말인가?
자신이 이곳에 오는 것은 천면귀승과 벽소운, 임단하 뿐이거늘……
갈홍혜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당신이 온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난 갑자기 가슴이 뛰면서 묘한 흥분에 휩싸였어. 당신은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당신을 만나고 싶어 했는지……웬 줄 알아? 난 당신을 꺾고 싶거든."
석비룡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거 어떡하지? 내겐 별로 시간이 없는데……."
"그래, 마음껏 웃어. 웃을 수 있을 때 웃어야 후회가 적겠지."
갈홍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녀의 몸에서 싸늘한 한기(寒氣)가 물씬 뿜어져 나왔다.
갈홍예의 손에는 길이가 한 자 가량 되는 짧은 검이 쥐여져 있었다.
끄그그……!
마치 쇠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나며 한 줄기 백색기류가 뻗어 나왔다.
석비룡은 뜻밖이라는 듯 적잖이 놀랐다.
'저건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의 기수식……?'
이때 갈홍예의 귓속으로 한 줄기 전음이 전해져왔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어서 검기를 거두어라!'
물론 석비룡은 전혀 눈치를 챌 수 없었지만……
갈홍예는 야무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싫어요!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란 거예요!'
석비룡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중주신검문이 무림제일의 검문이라지만 저 나이에 벌써 이기어검술까지 터득했으리라곤……!'
갈홍예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셋을 셀 여유를 줄 테니 피할 방도를 마련해 봐. 무림에서 가장 빠르다는 천리무영이 과연 얼마나 빠른지 두고 보겠어!"
석비룡은 마치 회초리를 든 어머니 앞에서 엄살을 떠는 아이처럼 말했다.
"셋은 너무 빠른데 다섯까지만 세면 안 될까?"
갈홍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석비룡은 갑자기 진중한 표정을 하고 땅이 꺼져라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도 예쁘고 가슴도 크고 무공도 강한데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흠이로군."
갈홍예는 숫자를 세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그게 뭐지?"
석비룡은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갈홍예 앞으로 다가가며 거리를 좁혔다.
"그게 뭔고 하면……."
말끝을 흐리다가 갑자기 양 주먹을 쏜살같이 앞으로 뻗어냈다.
"어떤 미친놈이 이런 상황에서 한가하게 셋을 셀 때까지 기다리냐?"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없었다.
석비룡은 단순히 일권을 내뻗었지만 그의 주먹은 수백 개로 변해 갈홍예를 덮쳤다.
"무, 무영권!"
갈홍예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퍼퍼퍼퍼퍽!
수십 권이 몸에 적중했다.
갈홍예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그녀는 뒤로 날아가서 서가 하나를 넘어뜨리고 바닥에 처박혔다.
와르르르!
갈홍예의 몸 위로 수백 권의 책들이 쏟아졌다.
"이……이런…… 치사한……!"
책 무덤 속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책을 헤치며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그 뿐이다.
무릎을 꺾고 풀썩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대로 기절해버린 것이다.
석비룡은 손을 툭툭 털며 빙긋이 웃었다.
"아쉽지만 전설의 이기어검술은 다음 기회에 감상하도록 하지."
"역시 풍부한 실전경험이 무공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는군."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석비룡은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흐릿한 유등(油燈) 아래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석비룡은 약간 놀랐다.
목소리에 정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쉰 살은 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노인의 얼굴은 예순을 훨씬 지나고 있었다.
하얀 수염을 앞가슴까지 드리우고 쪼글쪼글한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
노인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고요히 기도를 갈무리한 채 슬며시 미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석비룡은 생각했다.
'추측하기 어려운 무한대의 폭발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정제된 기도!'
그는 만만히 보지 못하고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중주신검문의 큰 어르신 같소만……."
노인은 허허 웃으며 포권을 하여 인사를 받았다.
"일세에 대명을 떨치고 있는 천리무영을 만나게 되어 영광일세. 이 몸이 중주신검문의 문주 갈백형(葛栢亨)이네."
석비룡은 픽 웃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가는 데마다 사방으로 들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천리무영이란 별호를 버리고 백보유영(百步有影)이라고 불려야겠군."
백보유영, 백 걸음 걸을 때마다 그림자가 드러난다는 뜻.
갈백형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자네가 아무리 빨라도 오는 걸 미리 알고 기다리는 사람의 눈까지야 어찌 피할 수 있겠나?"
석비룡은 눈을 치떴다.
"대체 내가 이곳에 온다는 건 어떻게 아셨소?"
갈백형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무림맹의 연락을 받았네."
석비룡으로서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검계제일인(劍界第一人) 갈 문주께서도 무림맹의 척살객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갈백형은 얼굴에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내가 척살객이었다면 현현교에 관한 자료를 일부러 서가에 남겨두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네."
석비룡은 즉시 되물었다.
"지금 일부러 남겼다고 했소?"
갈백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지. 만박신승이 그렇게 해주길 원했네. 비록 서문 맹주를 거치긴 했지만……."
석비룡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씹어 내뱉듯 말했다.
"이제 보니 이 모든 게 그 사이비 땡초가 꾸민 짓이었구나!"
"만박신승의 깊은 뜻을 안다면 자넨 절대로 그를 땡초라고 부르지 못할 것이네."
석비룡의 투덜거림을 반박하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스스스……!
이때 갈백형의 등 뒤에서 마치 땅 위에서 솟아오르듯 나타나는 인영이 있었다.
낯이 익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모습.
과거 석비룡에게 만박신승을 만나보기를 권유했던, 얼굴이 있으되 없는 사람 백면귀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