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전월산-원수산-오산 연계산행
- 세종시의 주산 원수산... 명산 전월산 -
날짜: 2024년 5월 19일(일)
산행 코스: 세종전통문화체험관(광제사) -> 전망대 -> 며느리바위 -> 전월산 -> 상여바위 -> 무궁화공원 -> 형제봉 -> 원수산 -> 오산 -> 항서바위 -> 세종소방서 -> 세종전통문화체험관(광제사)
산행 거리: 8.8 km
소요 시간: 3시간
고도차: 240m
*유의사항:
없음
산행지 차량 주차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모롱지로 94 (세종전통문화체험관)
속도:보통...약간 빠르게...
날씨:맑음
참가자 : 2명 (풀때기,법운)
대전세종 산사랑 산악회 (https://cafe.daum.net/djsjsan)
차량지원자: 풀때기
참가비:0원
점심식사 장소: 지족동 고박사냉면초계막국수
식당 주소: 대전 유성구 지족로364번길 40
식사 메뉴: 초계물비빔막국수 , 물비빔냉면
*. 법운님께서 점심식사 전액 결제.
일정
대전 수산물 시장 오전 8시 30분 출발
문화체험관 오전 9시 05분
전망대 산행시작 27분 경과
며느리바위 산행시작 32분 경과
전월산 산행시작 38분 경과
상여바위 산행시작 52분 경과
원수산 등산로 입구 산행시작 1시간 16분 경과
형제봉(가짜) 산행시작 1시간 50분 경과
원수산 산행시작 1시간 56분 경과
오산 산행시작 2시간 15분 경과
항서바위 산행시작 2시간 29분 경과
하산완료 산행시작 2시간 34분 경과
문화체험관 산행시작 3시간 종료
대전 점심식사 오후 12시 40분
세종 전월산
『여지도서』에 "관아의 남쪽 10리에 있다. 그 위에 신기한 약효가 있는 샘이 있는데 비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는 곳이다. 줄기가 공주 무성산에서 뻗어 온다."라는 기록이 있다.
청류부곡(淸流部曲)이 있던 구을촌(仇乙村) 앞이 되므로 '구름다리'라고 하다가 한자로 '전월산(轉月山)'으로 표기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월산은 산의 동쪽이 금강과 미호천의 합류부여서 강물이 삼태극의 형상으로 돌므로 달밤에 이 산에서 동쪽의 강을 내려다보면, 강에 비친 달이 돈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 정상의 '용천'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으며 우물가에 버드나무가 있는데 이 버드나무가 커서 강 건너 금남면 반곡리(盤谷里)를 넘어다보면 반곡리 아낙들이 미치거나 바람이 난다 하여 반곡리 청년들이 몰래 산에 올라 버드나무 가지를 잘랐다고 하며, 반면 양화리 사람들은 버드나무가 잘 자라야 마을에 재앙이 없이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 버드나무 가지를 베지 못하게 한다고 전한다. 산 아래에는 동촌 마을이 배산임수의 입지를 하고 있고, 산 앞으로는 장남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일러두기 및 '충청권의 지명' 총론 목차
세종 원수산
남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동쪽으로 전월산, 서쪽에는 국사봉이 솟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미호천이 감싸고 있다. 산의 남쪽에는 덕성서원과 덕암사가 있으며, 남면 소재지가 인접해 있다. 현재 이 산을 중심으로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원수산에 대하여 "원수산(元帥山)은 현 남쪽 5리에 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있어 매우 오래된 지명임을 보여준다. 『여지도서』(연기)에는 "줄기가 공주 무성산에서 뻗어 온다."고 수록되어 있다. 왼수봉, 왼수산, 원사봉(元師峰)이라고도 불렸으며, 형제봉(兄弟峯), 작은형제봉, 큰형제봉, 부모산(父母山)이라고도 불렸고, 붓의 모양과 같다 하여 '문필봉'이라고도 불린다.
향토지리지에 의하면, 이전에는 원수산 아랫 마을 사람들이 원수산이란 이름을 잘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전설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에 두 형제가 근동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살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주인이 사이가 좋지 않으니 하인들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작은 집 하인과 큰 집 하인이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었는데, 하인들까지 참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곡괭이, 몽둥이 등이 등장하더니 마을이 마치 전쟁터처럼 치열한 전투장으로 변하였다. 두 형제의 싸움에서 아우집이 이겼고, 형은 아우와 매일 이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이곳을 떠났다. 그때 형과 아우는 마을 뒷산의 산봉우리가 되었는데, 둘 사이가 좋지 않아 이 산을 원수봉(왼수봉)이라 불렀다." 이러한 내용이 입에서 입을 통하여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니 이곳 마을 사람들은 원수산 아래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부끄러워 누가 어디에서 사냐고 묻거나 마을 뒷산을 무엇이라 부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고려사절요』에 수록된 연기대첩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제2의 전투지로 원수산이 확인됨에 따라 이 지명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원수산은 원래 산의 모습이 뾰족한 붓끝같이 생겼다 하여 문필봉이라 불렀는데, 연기대첩 이후 이곳을 원수산(元帥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일러두기 및 '충청권의 지명' 총론 목차
스마트폰용 GPS 산길샘 어플로 기록한 자료.
2012년도에 세종 전월산-원수산-오산 첫 탐사시 기록한 지도.
이 당시는 gps 어플 같은게 없는 오로지 지도보고 독도법으로 이동하는 시절.
( 이 자료 이후로 세종 전월산-원수산 등산로가 본인이 탐사한 길과 비슷하게 만들어 지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본인이 인위적으로 파란색 동그란 점선 원으로 표시한 부분이
정말로 청와대와 국회 이전 후보지로 결정되었다는것... ^^;
2024년 5월 19일(일) 이날 원주 명봉산 산행을 기획했지만 참여자 부족으로
세종 전월산-원수산-오산 산행으로 급변경하다.
산행 시작 기점으로 세종전통문화체험관(광제사)으로 설정.
세종전통문화체험관 내부.
세종전통문화체험관을 나와서 산행을 시작하다.
세종 임난수 은행나무.
수령 600년.
양화리 은행나무는 고려 말의 충신 임난수(1342∼1407) 장군의 일화에도 나오는데, 임난수 장군의 굳은 충절을 기리는 것처럼 600년이 지난 지금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임난수는 고려 말에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부안임씨의 중시조이다.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여러 번 벼슬을 주며 청했으나 응하지 않고 양화리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임난수가 숭모각 앞에 심은 2그루의 양화리 은행나무는 수령(樹齡) 670년으로 웅장한 괴목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이곳의 나무를 베려고 했는데 은행나무가 울어 결국 베지 못하였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월산 등산로로 진입.
전월산 중턱에 위치한 전망대.
산행시작 27분 경과.
세종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며느리 바위.
32분 경과.
며느리 바위 전설.
아주 먼 옛날 이 곳에는 "장자소"라는 연못이 있었다. 연뭇 앞에는 큰 부자집이 있었는데 소 문이 날정도로 유명한 부자집이었고 동네사람 대부분이 부자집 논밭을 경작하며 세경을 바치면서 살아가는데 해마다 부자집의 곡간은 쌀 가마가 그득히 쌓여 재산은 날이 갈수록 불어 났다. 그런데 부자집 인심은 고약하여 소문이 날 정도였다. 부자집 식구 모두가 욕심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주인대감만이 유독 욕심이 많았다. 부엌에서 하인들이 밥을 지을 때 먹나, 안먹나를 감시하고 심지어는 소작농의 논과 밭에 가서 농작물의수확상태를 점검하여 가을걷이 후 세경이 적으면 호통을 치면서 더 내놓도록 하는 소문난 구두쇠였다.
구두쇠 부자집에 경사가 났다. 이웃마을에서 새색시가 들어온 것이다. 며느리는 소문난 효녀 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렵게 살아가는 소작농가였지만 천성이 착하여 다들 며느리감으로 탐을 내던 터에 부모가 병에 걸려 치료를 받아야하나 약을 구할 돈이 없다 중매장이의 소개 로 부자집에 딸을 시집보내고 양식과 돈을 얻어 아버님 병도 고치고 생활을 조금은 풍족하 게 할 수 있었다.
착한 며느리는 시댁에 들어와 아랫사람들을 위해 베풀었다. 시아버지 몰래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슬기롭게 해결해 주는 고마운 상전이었다. 어느날 이곳에 스님 한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하기를 권했다. 낮잠을 자던 주인대감은 목탁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두엄을 치다가 말고 왠 스님이 시주하기를 권한다고 아뢰자 주인 대감은 두엄을 치는 하인의 쇠스랑을 뺏더니 두엄을 한삽떠서 스님의 바지가랭이에 넣어주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며느리는 기겁을 하며 숨었다가 스님이 마을을 벗어나려 할 때 쌀 한되박을 들고 쫓아가서 시아버지의 행동에 사과를 하였다. 스님은 며느리의 기특한 행동에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일 모래 뒷산 전월산에 올라가 정상까지 가 보시오. 가는 도중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아니됩니다. 어떠한 소리가 나더라도 앞만 보며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스님은 어데론가 사라졌다. 며느리는 기이한 일이라면서 스님이 가르쳐 준 날에 전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높고 가파랐다.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려는데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천둥번개가 치는 것이었다.
며느리가 오르는 산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소리로 보아 산아래 마을에는 많은 비가 내 리는 듯 했다. 며느리는 불안하였다. 산 아래 마을에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리고 있으며 집은 무사한가 당장 뒤돌아 확인하고 싶었지만 스님이 한말이 생각나서 한발한발 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며느리가 산 중턱에 올랐을 때 이번에는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는 이 비명소리가 분명 마을 시댁쪽에서 났기 때문에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마을이 온통 물속에 잠기어 마치 넓은 바다의 작은 섬에 와있는 것처럼 많은 비가 내려서 마을과 시댁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뒤돌아 본 며느리의 모습이 바위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스님의 말을 거역하여 바위로 변해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며느리 바위라고 부르면서 이루지 못한 일이 있으면 며느리 바위 밑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전월산 정상에 도착하다.
38분 경과.
전월산의 용샘.
용샘의 전설.
옛날 금강 맑은 물에서 자란 이무기가 승천(昇天)을 하기 위하여 이곳 전월산 정상 용천까지 굴을 파고 올라와 백년을 기도하면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승천하게 된다는 고려 초엽 얘기가 전해온다.
용천에 올라온 이무기는 승천하기 전까지는 몸가짐을 깨끗이 하여 티끌이 하나없는 맑음이 있어야 하고,
용천 물빡으로 나와서는 안되며, 승천할 때 아이를 밴 여자가 보면 안된다는 옥황상제의 주문이 있었다.
승천날에 임박한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피고 전월산이 온통 어둠에 휩싸였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들러더니 "이무기는 승천하라!"는 옥황상제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하늘에서 줄줄기가 내려와 그 물줄기를 타고 한참 승천하는데 갑자기 물줄기가 멈추고 다시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무기는 이상해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에서 노한 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에 바보같는 녀석아! 임신부를 주의하랬잖아. 건너마을 반곡의 임신부가 너를 쳐다보고 있지 않느냐!" 이무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충격을 받고 이곳 용천으로 떨어져 버드나무가 되어버렸다.
버드나무가 되어버린 이무기는 반곡을 바라보며 원망이라도 하듯이 무럭무럭 자라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반곡을 쳐다보면 반곡 여인네들이 바람이 나고 양화리(陽化里)를 쳐다보면 양화리가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래서 반곡 청년들은 밤이되면 전월산에 올라와서 몰래 버드나무를 베어버리고 또한 양화리 사람들은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감시를 하여왔다.
<또한, 이 용샘은 고려충신 임난수(林蘭秀) 장군이 은둔하면서 상여암(想麗岩)을 오르내릴 때마다 이 샘물을 마셨다고 하며, 지금도 명주실에 돌을 달아 용샘에 넣으면 금강으로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전월산 정상석.
높이 259.8m
법운님.
무궁화공원 방향으로 향하다.
상여바위 위에서 바라본 세종시.
무궁화공원으로 하산완료.
원수산 등산로로 진입하다.
1시간 16분 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