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35세, 1796년)
1
긴 장마 무더위 찌는듯하다
곤기에 부닥긴 몸 늦도록 누웠더니
한줄기 가을 바람 새로 불어오니
그 넓은 하늘이 쓸은 듯 맑을매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2
몰을 쌓고 둑을 지어 가로 막았더니
내리고 내리는 그 물머리가 돌고만 있다.
삽가래 잡고 모래 섬을 터뜨리니
쏜살처럼 흐르는 소리 우리 같더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3
주린 보라매 가죽 끈을 발에 달고
사냥하고 돌아와 몹시도 곤한 듯
북풍을 향하여 풀고서 놓으니
망망한 하늘 끝에 마음껏 날아간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4
청강에 배 타니 노 소리 빼걱빼걱
멱감는 해오라비 쌍으로 날더라
급한 여울에 뱃머리 쏘는 듯한데
서늘한 바람 봉창을 스치더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5
높은 산 오르매 다리도 피곤한데
겹겹이 덮인 운애 안계(眼界)를 막았더니
어느덧 한 줄기 서풍 불어 오니
만학 천봉이 일시에 드러난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6
파리한 나귀 바위 길에 비틀거리며
돌 서슬, 나무 가지게 옷자락 찢어졌다
나귀 바꿔 배타고 갑판에 걸앉으며
석양에 순풍 잡아 돛을 걸었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7
강 언덕에 나뭇잎 우수수 내리며
흰 물결이 검누른 하늘을 걷어 찬다
서늘한 바람에 소매 자락 펄펄 날리니
백학이 두 나래를 쓰다듬는 듯 하여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8
이웃집 마루턱이 내 문턱을 가로막아
더운 날 바람 없고 갠 날도 그늘진다
돈 주고 그 집 사서 당장에 헐었더니
먼산, 높은 봉우리 차례로 늘어선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9
지리한 긴 여름 더위에 부다끼여
땀 찬 파초삼(芭蕉衫)에 등허리 젖었다
시원한 바람 불어 오고 소낙비 쏟아지니
층암 절벽에 폭포수 줄줄이 나린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0
고요한 골짜기에 검은 밤 깊어지고
산귀(山鬼)는 잠들고 짐승은 노닌다
집채같은 큰 돌짝을 덩굴려 떨어뜨리니
천길 벼랑에 벽력 치는 소리 들리누나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1
만호 장안 좁고 후더운 홍진 속에
항상 병든 새 되어 농 안에 깃들었더니
채찍에 바람 내여 성문을 벗어나니
들 빛, 시내 소리 말 머리에 가득하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2
한잔 돌고 화전지(花箋紙) 펼쳐 놓고
녹음에 가는 비 그림을 보는 듯
서까래 같은 큰 붓 휘잡아 두르니
부용당(芙蓉堂) 먹발에 용사(龍蛇)가 비등하더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3
바둑의 승부를 내 일찍이 모르고
방관자 되어 국외에 앉았더니
흑백의 싸움에 안타깝기 그지없어
판 밀어 쓸고 보니 아무 것도 없더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4
대 수풀에 달 비치고 밤은 깊었는데
난간에 홀로 비겨 술병을 대했다
마시고 마시여 건드레 취한 다음
한 곡조 높이 불러 울분을 풀었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5
백설은 흩날고 북풍은 불어 오는데
여유와 토끼 숲속에서 절름거린다
긴 창 큰 활에 홍전립 눌러 쓰고
꼬리 잡아 안장 머리에 거꾸로 달더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6
어옹이 배를 저어 창파에 둥실 떴다
밤들어 술 마시고 돌아 갈 줄 모르네
기러기 한두 소리에 얕은 잠 깨고 보니
노화피(蘆花被) 서늘하고 달은 활 같더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7
밭 팔고 집 팔아 주린 사람 먹여주고
타향에 나그네 되어 구름같이 노닐더니
저문날 길가에 불우한 친구 만나서
손잡고 주머니 털어 돈 한줌 주었나니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8
검은 독사가 까치의 보금자리로 들어 간다
놀랜 어미까치 이 가지 저가지에서 우짖고만 있다
홀연히 긴 목에 긴 소리를 빼고 오는 모진 새는
세찬 톱으로 그놈의 대가리를 움켜 잡았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19
가윗달 뜰 무렵에 거문고 안고 왔더니
애꿎은 구름 조각들이 하늘을 덮는다
자리 걷고 손(手) 나누고 서글피 돌아가랴니
홀연히 동산에 구름 가고 달이 오더라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20
타향에 귀향살이 적막도 하여라
여관에 밤 들어 등잔만 돋우었다
새벽 창 머리에 편지 한 장 떨어지니
결봉에 쓰인 글씨 가서(家書)가 분명하다
또한 상쾌하지 아니한가?
원주)
부용당- 옛날 해주먹(海州墨)이 유명한데 「부용당」이라고 새겼다.(그런데 원문에는 부용당에 대한 언급이 없고 그저 먹물 이야기만 나온다. 최익한이 일부러 부용당의 사례를 활용한 듯하다)
노화피는 갈대 꽃을 솜 대신 넣어 만든 이불이다
음미하기)
중국 명나라 말엽, 청나라 초기에 문예 평론가이며 대문장가이기도 한 김성탄(金聖嘆)은 그의 서상기(西廂記) 평석집(評釋集)에서 「우리들 인생에서의 즐거움 33가지」(「불역쾌재(不亦快哉)」33칙)을 썼다.
1796년 11월 정약용은 이를 계승하되 칠언절구 연작 형태로 위에 소개한 시 <不亦快哉行 二十首>를 지었다. 당시 정약용은 금정 찰방에서 소환되어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고 이 해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직되었다.
이 작품에 대해 최익한은 [정다산의 시문학에 대하여(중)]에서 상당히 길게 해설한 것이 있다. 대략 내용은 정약용의 정치적 입장이 깊이 개재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를테면 정약용이 뜻하였던 정치적 및 문화적 혁신은 이미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사회와 정계의 모든 구속과 고통, 번뇌, 부패와 불유쾌한 현상들을 타파하고 쾌활하고 청신하며 자유, 상쾌 명랑한 세계를 동경하는 심경으로 그의 활발하고 낙관적인 기개를 노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정약용이 자연계에 대한 일련의 상쾌한 경험들을 인간 사회의 개변에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고 이같은 낙관주의적인 지향성을 자기 작품에 반영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는 몇 작품에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2수-돌로 둑을 쌓아 물을 가로막아 돌고만 있게 한 것은 극히 부자연한 현실이었기 터뜨렸더니 쏜살처럼 흐르는 소리가 우레 같다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를 순종하는 곳에서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3수-매 발에 달았던 가죽 끈을 풀어 놓아 망망한 하늘 끝에 마음대로 날아가게 하는 것은 피압박 인민을 자유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상이다.
8수-내 집 문턱을 가로 막아 몹시 답답하게 하던 이웃집을 당장에 헐어 버린 것은 사회의 개명을 장애하는 편협하고 봉쇄적인 제도와 습관을 타파하려는 사상이다.
10수- 산귀는 잠자고 짐승은 노니는 고요한 밤 골짜기에 집채 같은 바위를 천길 벼랑으로 딩굴어 떨어뜨려서 벽력치는 소리를 내는 것은 암흑과 적막에 쌓여 있는 중세기 사회를 혁명의 폭발로써 깨뜨리려는 개혁사상이다.
13수- 바둑의 승부를 일찍이 모르던 국외 방관자로 흑백의 싸움에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하여 판을 밀고 쓸어 버리니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은 당시 양반 사색당쟁의 판국을 국외 방관자로서 둘러 엎으려는 양반 반대의 평민사상을 말한 것이다.
18수- 까치 보금자리로 들어가는 검은 독사의 대가리를 홀연히 긴 목에 긴 소리를 빼고 오는 오는 모진 새가 움켜잡고 쪼아 먹는다는 것은 무권리한 인민을 사랑하고 옹호하는 선진 실학과 즉 작자 자신의 당파를 일망타진하여 버리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보수당의 흉악한 음모를 강력하고 영단성 있는 왕권으로써 압살하였으면 하는 비분 절박한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17수-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주린 사람을 먹여 주고 타도 타향에 자유로 노닐다가 늦으막하게 불우한 친구를 반가이 만나서 손 잡고 주머니 털어 돈 한 줌을 준 것은 재산의 누를 벗어난 자유의 몸으로써 이기심을 청산하고 구제심에 불타는 자기의 고상한 의협성을 말한 것이다.
대체로 정약용만이 아니라 정치인들은 대체로 시 한 수에도 그 자신이 처한 상황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도 상당히 정약용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2수를 자연의 이치에 대한 순종, 17수를 의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방할 것이지만 3수를 피압박인민을 해방시킨다거나 10수를 중세사회를 혁명의 폭발로써 깨뜨리는 개혁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시대정신이나 정약용의 의식을 지나치게 혁명적으로 본 듯하다.
아무튼 위에 언급한 20가지의 상쾌, 통쾌한 사연을 읽으면서, 나에게 있어서 상쾌, 통쾌한 일은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하다.
이 시 또한 최익한의 번역 특징이 잘 나타나지만 너무 길어서 다음 기회에 보완하기로 한다. 쉬운 표현이 많고 모두 재미있는 소재여서 그냥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不亦快哉>
1
跨月蒸淋積穢氛 四肢無力度朝曛
新秋碧落澄寥廓 端軸都無一點雲
不亦快哉
2
疊石橫堤碧澗隈 盈盈滀水鬱盤迴
長鑱起作囊沙決 澎湃奔流勢若雷
不亦快哉
3
蒼鷹鎖翮困長饑 林末毰毸倦却歸
好就朔風初解緤 碧天如水盡情飛
不亦快哉
4
客舟咿嘎汎晴江 閒看盤渦浴鳥雙
正到急湍投下處 涼颸拂拂洒篷牕
不亦快哉
5
岧嶢絶頂倦遊筇 雲霧重重下界封
向晚西風吹白日 一時呈露萬千峰
不亦快哉
6
羸驂局促歷巉巖 石角林梢破客衫
下馬登舟前路穩 夕陽高揭順風帆
不亦快哉
7
騷騷木葉下江臯 黃黑天光蹴素濤
衣帶飄颻風裏立 怳疑仙鶴刷霜毛
不亦快哉
8
鄰人屋角障庭心 涼日無風晴日陰
請買百金纔毀去 眼前無數得遙岑
不亦快哉
9
支離長夏困朱炎 濈濈蕉衫背汗沾
洒落風來山雨急 一時巖壑掛氷簾
不亦快哉
10
淸宵巖壑寂無聲 山鬼安棲獸不驚
挑取石頭如屋大 斷厓千尺碾砰訇
不亦快哉
11
局促王城百雉中 常如病羽鎖雕籠
鳴鞭忽過郊門外 極目川原野色通
不亦快哉
12
雲牋闊展醉吟遲 草樹陰濃雨滴時
起把如椽盈握筆 沛然揮洒墨淋漓
不亦快哉
13
奕棋曾不解贏輸 局外旁觀坐似愚
好把一條如意鐵 砉然揮掃作虛無
不亦快哉
14
篁林孤月夜無痕 獨坐幽軒對酒樽
飮到百杯泥醉後 一聲豪唱洗憂煩
不亦快哉
15
飛雪漫空朔吹寒 入林狐兔脚蹣跚
長槍大箭紅絨帽 手挈生禽側挂鞍
不亦快哉
16
漁舟容與綠波間 風露三更醉不還
歸鴈一聲驚破睡 蘆花被冷月如彎
不亦快哉
17
落盡家貲結客裝 雲游蹤跡轉他鄕
路逢失志平生友 交與囊中十錠黃
不亦快哉
18
噍噍嗔鵲繞林梢 黑質脩鱗正入巢
何處戞然長頸鳥 啄將珠腦勢如虓
不亦快哉
19
琴歌來趁月初圓 無那頑雲黑滿天
到了整衣將散際 忽看林末出嬋娟
不亦快哉
20
異方遷謫戀觚稜 旅館無眠獨剪燈
忽聽金鷄傳喜報 家書手自啓緘縢
不亦快哉
첫댓글 '不亦快哉'를 최익한은 '상쾌하지 아니한가'로 번역한 반면, 남쪽에서는 '통쾌하지 아니한가' 또는 '통쾌한 일' 등 통쾌로 번역한 사례가 많다. 상쾌인가 통쾌인가? 쾌하다는 상쾌, 통쾌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다만 상쾌는 좀 시원하다는 쪽이라면 통쾌는 격렬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20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18수처럼 강렬한 사례는 통쾌쪽일 수 있지만 대부분 상쾌한 쪽이 더 많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