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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사랑글 스크랩 4월, 강원의 인물편
산사랑 추천 0 조회 135 12.04.25 22: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색빛깔 농어촌 | 우리고장에 이런 인물이!

 

 

4월
강원의 인물편

 

 

글 | 권용재(홍보실) 자료제공 | 강원도청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춘천시의 청풍 ‘김유정’

 

 

 

 강원도 춘성군(현재 춘천시)출신으로 아버지 춘식과 어머니 청송심씨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12세 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으나 중퇴, 1932년에는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35년 단편소설〈소낙비〉가 조선일보에〈노다지〉가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올랐다. 그리고 구인회의 일원으로 김문집, 이상 등과 교분을 가지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그는 등단하던 해에 〈금 따는 콩밭〉〈떡〉〈산골〉〈만무방〉〈봄봄〉등을 발표하였고, 그 이듬해인 1936년에〈산골 나그네〉〈봄과 따라지〉〈동백꽃〉등을 발표하였으며, 1937년에는 〈땡볕〉〈따라지〉등을 발표하였다.

 

 

조선중기 학자이며 사임당 신씨의 아들, 강릉시의 ‘이이’

 

 

 

이이는 1564년,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아흡 번 장원 급제한 기록을 세웠다. 1569년,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이라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1년, 청주 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가 서원 향약을 짓고, 백성들의 자치 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73년 7월에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 승지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부승지로 옮겨 성학의 대요를 적은 책 <만언봉사>를 지어 올렸다. 1583년 2월에는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시무 6조를 임금께 올리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주의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후 병을 얻어 1584년 1월 새벽에 4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조선의 명장, 원주시의 ‘임경업’

 

 

 

조선의 장군.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민(忠愍). 본관은 평택(平澤). 판서(判書) 정(整)의 후손.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어 청나라 군사를 국경에서 막으려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金自點)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남한산성이 포위당하기에 이르렀다. 1642년(인조 20) 청나라가 명나라의 난징[南京]을 함락하자 드디어 청나라에 잡히었다. 청나라에서는 복귀 후 인조는 그가 모반에 관련이 없음을 알고 석방하려 했으나 반대파인 김자점의 모함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1968년 8월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그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군사학을 연구한 독립운동가, 철원군의 ‘박용만’

 

 

 

박용만은 1881년(고종 18년) 철원읍 중리에서 태어나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하던 중 1910년 나라를 잃게 되자 독립운동에 몸바쳐 오다 1928년 48세 때 중국에서 이해봉에 의하여 암살 당하였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의 특징으로 이승만은 외교에, 안창호는 교육과 문화에 힘을 쏟았지만 박용만은 군사적 실력을 통한 독립운동에 힘썼다. 미국 네브라스카주에 있는 헤이스팅대학 정치학과와 군사학을 연구하여 1910년 졸업한 후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2년 하와이에 건너가서는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하여 박용만이 군단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박용만은 중국에 들어가 국사 교육뿐만 아니라 1927년 ‘초등국어’책도 만들어 중국 교포의 국어 교육에도 이바지 하였다.

 

 

시인이자 종군기자로 활동한, 인제군의 ‘박인환’

 

 

1926년 8월 15일 소양강 상류에 위치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강촌 마을에서 4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1세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황해도 재령령에 있는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해방을 맞으며 그는 지금의 파고다 공원 인근 교동골목입구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열었다가 2년만에 문을 닫았다. 1946년 『군상』을 발표 『아메리카 영화시론』등 영화평을 쓰기도 하였으며, 1949년 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기수로 활동했다. 1949년 경향신문의 기자와 1951년 종군기자로 활약하였으며, 이때『박인환 선시집』이 간행되었다. 1956년 3월20일 저녁9시 그는 세종로의 자택에서 눈을 감지 못한채 심장마비로 급사하였다.

 

 

한국적 독창성을 발휘한 화가, 양구군의 ‘박수근’

 

 

 

아버지 향지와 어머니 윤복주 사이에서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세가 몰락하게 되자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된 이후 1936년부터 1944년의 마지막회까지 공모 출품을 통하여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1952년 월남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대한미협전을 통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특이한 구성미와 현대적 조형성을 더욱 충실하게 이룩하였으며, 그가 이룩한 회화 세계는 그가 죽은 뒤에 1965년 10월 중앙공보관에서 열렸던 유작전과 1970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을 계기로 재평가되어 유화로서 가장 한국적 독창성을 발휘한 작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단편소설 작가, 평창군의 ‘이효석’

 

 

 

경성 제1고보(현재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현재의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조선지광》에 단편《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작가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행진곡》《기우》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에 참여,《돈》《수탉》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가 된 후《산》《들》등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시골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장미 병들다》《화분》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마라토너 삼척시의 ‘황영조’

 

 

 

1970년 3월 22일에 부친 황길수 모친 이만자의 아들로 태어나, 궁촌초등학교, 근덕중학교, 강릉 명륜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고려대학교 체육과에 재학 중 1990년 육상 경기에 입문하여 장거리의 기대주로 데뷔했다. 그 1년 뒤인 1991년 제62회 동아 마라톤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 2시간 12분 35초의 기록으로 3위에 입상하여 마라톤에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대회 마지막 종목으로 열린 마라톤에서 2시간13분23초로 우승하여, 몬주익의 영웅이란 호칭까지 얻으며, 한국 마라톤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으며, 이후 1994년 아시안게임 우승, 1994 보스턴 마라톤에서 한국최고기록인 2시간8분9초를 세웠다. 현재는 국가대표 마라톤 감독과 해설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출처 : 흙사랑 물사랑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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