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조금이라도 애국적인 경향을 보이면 느닷없이 들이닥쳐 잡아가곤 했는데 <<산사람의 무덤터인 조선의 형무소는 늘 대만원이였다. 여기서만은 불경기를 모르는 대성황을 이루어 죄수들이 두세발도 몸을 움직일수 없이 꽉 들어찼었다.>>1918에 감옥에 같힌 애국투사만해도 14만2천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즉결처형당한 애국자만도 7만1,278명에 이르렀다. 또한 일제의 <<사립학교규칙령>>으로 해마다 800여개소의 조선인학교가 문을 닫고 <<토지조사사업>>으로 하여 조선인은 경작지의 54%를 일제에게 빼앗겼다. 땅을 빼앗기고 민족의 혼마저 빼앗긴 조선인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품고 두만강을 건넜다.
온성에서 회막동으로 들어오자면 해란강과 두만강이 합치는 합수목과 늪지사이의 약 5리남짓한 구간에서 강을 건너야 한다. 합수목아래는 강폭이 넓고 물살이 세다. 그리고 늪지상류로 건너자면 범진령을 넘어 회막동으로 들어와야 하기때문이다. 우기를 앞두고 한패의 행렬이 남부여대하고 강을 건넌다. 저 멀리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다. 수분하와 라자구에 주인없는 기름진 땅들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는 소문에 귀가 솔깃하여 한 마을전체가 가마솥을 뽑아 지게에 졌다. 이들은 온성에 이르러 새우잠을 자고나서 일찍 일어나 강을 거슬러 남양에 이르렀다. 아직 일찍한 시간이라 배도 없고 사공도 없었다. 장년들은 가마를 등에 쥐고 가슴에는 어린것을 안았다. 여인들은 머리에 큼찍한 보따리를 얹고 저마다 한손을 휘저으며 강을 건넌다. 이들이 강을 건너 대오를 살피면서 짐을 풀어 놓느라 분주할때 누군가 소리를 친다.
<<아니 조것이 뭐이꼬. 주먹밥이 아닌겨?>>
<<어매, 여기 짚신도 있는기라.>>
<<아이고 이리 고마울수가...>>
사람들은 앞다투어 주먹밥을 쥐여들고 먹기 시작했다. 오래동안 쌀밥을 구경하지 못한 이들인지라 곡기에 벌써 어지럼증이 날지경이였다...
먼 발치에서 이들을 몰래 지켜보던 수월스님은 그제야 일광산으로 향했다. 잠이 없는 수월스님은 꼭두새벽부터 밥을 지여 주먹밥을 만든다. 그리고 해가 뜰 무렵이면 주먹밥과 짚신을 담은 지게를 지고 산을 내린다. 수월스님은 강가에 도착하여 가마니를 펴고 주먹밥을 무져놓는다. 땅에 단단히 박은 장대기에는 짚신을 걸어놓는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 길을 걸어온 조선인들은 짚신을 골라신고 가마니와 넓적바위에 쌓여있는 주먹밥으로 주린 배를 채워가면서 주림과 두려움으로 움추러들었던 가슴을 조금이나마 펴본다.
똑- 똑- 똑- 뭇별이 총총한 가을의 밤하늘을 가르며 목탁소리가 구슬프게 울린다.
<<스님!>>
불현듯 누군가 수월을 부른다. 정좌하여 염불할때에는 누구든 방애를 하지 않건만 어지간히 다급한 모양이다.
<<누군겨?>> 스님은 천천히 머리를 돌리며 묻는다.
<<저..>> 눈이 크고 머리가 텁수럭한 20대의 한 젊은이가 떠듬떠듬하며 말을 잇는다.
<<저, 연해주로 가는 길이거든요…>>
아마 관심법을 알고 있는지 수월스님은 사람을 보면 곧 의중까지 알아본다. 그래서 수월스님은 더 묻지도 않고 20대의 젊은이를 이끌고 객실로 들어가 따끈따끈한 차를 권한다. 차라야 보리를 닦아 슬쩍 가루를 낸 차다. 차를 둬 모금 마시고 피곤기가 조금 가신듯한 젊은이가 그제야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20대의 젊은이는 황해도와 평안도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면서 왜놈을 쳐부시던 평산의병의 한사람이였다. 평상의병은 김정환의 지휘밑에 장수산전투와 그외의 평산전투에서 수백명의 왜적을 소멸하였다. 이에 질겁한 조선총독부의 데라우찌총독은 <<조선주둔군>>의 나까무라려단장에게 수천의 보병과 2개중대의 기병 그리고 수백의 헌병경찰을 내몰라 의병을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평산의병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유격전을 벌리면서 타격을 주었으나 나중에는 력량과 장비의 차이로 대부분 전사하였다. 젊은이는 황해도 서흥에서 있은 반토벌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이다. 그는 서흥을 빠져나와 묘향산에 올랐는데 묘향산에서 그는 법력이 높으신 수월스님이 묘향산 중비로암에서 3년을 참선하다가 지금은 일관산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젊은이는 왜놈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연해주를 바라고 길을 떠났다. 당시 연해주에는 신채호. 이동희. 이갑등이 <<광복회>>를 세우고 그 활동범위를 환인과 안동 그리고 국내로 확대하여 갔다. 젊은이는 무산쪽으로 해서 두만강을 따라 내려왔다. 그는 밤새도록 수월스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상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의군부>>의 림병찬등이 체포되여 사형당한 일이며 <<산직계>>가 일제에게 략턀당하고 있는 산업을 되찾고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이며 손병희등의 활발한 움직임이 큰일을 이룰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월스님은 눈을 지긋이 감고 듣기만 하다가 나중에야 겨우 한마디를 한다.
<< 장기를 잘 둬야 하는디.>>
수월스님에게는 나라일이 장기를 두는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장기는 한수만 잘못 두면 지게 된다. 나라일도 마찬가지이다. 조금만 서뿔리 행동했다가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숱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된다. 나라를 찾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으니 오래동안 힘을 길르고나서 왜놈에게 <<장훈>>을 쳐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른 아침 새우잠은 자고난 젊은이가 눈을 떠보니 수월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비탈을 따라 쭉 자리잡은 회막동이 한눈에 안겨온다. 조선서 보아온 마을이다. 두만강을 내려다보니 기다란 뗏목이 떠 내려가는데 뗏목우에는 도롱이를 걸친 3명의 뗏몰이꾼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1911년에 일제는 <<삼림령>>을 내려 1,300만정보의 삼림을 <<국유림>>이라고 정해놓고 제멋대로 략탈하여갔다. 그리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에는 뗏목이 끊임없이 강을 타고 내렸다.
<<깨였군그려.>> 수월스님이 물통에 물은 가득 담아들고 들어오면서 알은체한다.
젊은이는 물통을 받아 물을 항아리에 쏟아넣는다. 화엄사옆에는 두개의 샘이 있는데 하나는 동쪽에 있고 하나는 서쪽에 있다. 서쪽의 샘은 겨울이 되여도 물이 가지 않는다. 둘은 주먹밥으로 아침을 대충 먹었다. 아침을 먹은후 수월스님은 다락에서 질그릇 하나를 내리우더니 거기에서 뭔가를 꺼낸다. 젊은이가 보니 낡은 보자기에 싼 돈이였다.
<< 가져다 긴히 쓰란께..>> 수월스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돈을 내여놓는다. 아마 수월스님에게는 이런 일이 오늘뿐이 아닌듯 싶다.
수월스님에게는 이 암자가 <<온마니반메흠>>을 외우면서 참선을 하는 곳만은 아니였다. 회령을 거쳐서 자강도?에서 오는 백성들과 경원을 거쳐서 강원도와 경산도에서까지 찾아오는 백성들의 병을 봐주는 병원이기도 하다. 처음에 회막동의 사람들은 수월을 스님이라기보다도 의원으로 여기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가 정좌하여 마음을 모으고 참선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서 불심이 깊은 스님임을 알고 힘을 모아 암자를 지었다. 암자의 이름은 수월스님의 요구에 따라 화엄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법당에 올라 제자를 가르치거나 찾아온 시주에게 열렬하게 불법을 토해낸적이 없었으며 지어는 시주를 하라고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수월스님은 그냥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고 동네 맡형같은 자세로 백성들과 어울려 한담을 하면서 가르치는 분이다.
<<기도를 들어줄 부처는 없는기라. 기도를 하는것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스로 부처가 되는거여...>>
<< 머리를 깍고 안 깍고가 뭐가 중요해. 마음에 부처가 없으면 10년을 공부해도 부질없는 짓이여…>>
수월스님의 말씀인즉 허식을 따지면서 입으로만 부처를 외우지 말고 진심으로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얄팍한 사람들의 <<미덕>>을 배우지 말고 진심으로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야만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말씀이다. 일광산기슭에서 수월스님은 그 누구에게도 자기의 이름과 법호를 얘기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에게도 주먹밥을 만들고 짚신을 삼어 강가에 놓은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부처님께 감사하라거나 부처님을 찬미하라는 부질없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수월스님은 어쩌면 자신의 주린배를 채우려고 밥을 지엇고 자신의 아픈 발을 감싸려고 짚세기를 삶았을뿐일지도 모른다. 주먹밥을 먹고 짚신을 갈아신고 떠나는 사람들이란 수월스님에게는 바로 남이 아닌 자신의 모습였다. 깨달은 이에게는 온 세상의 중생이 자신의 몸과 둘이 될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수월스님에게는 감사를 받을 나의 모습이나 감사를 해야할 너의 모습이 따로 발 붙일 구석이 없었다. 숲속의 나무 한 그루가 도끼에 맞아 쓰러지면 온 숲이 함께 떨며 아파한다고 한다. 이렇듯 자비와 지혜는 앎의 세계이기보다는 느낌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참된 보살은 아파하는 중생을 보면 혀를 찰 틈도 없이 바로 중생의 아픔과 한몸이 되여버린다고 한다. 수월스님은 바로 나라와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몸과 함께하는 참된 스님이였다.
수월스님이 회막동에 있을때에는 회막골과 남쪽의 북새골, 그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 다라자와 합수목 안산에 각기 수십호에서 백여호에 이르는 마을들이 있었다, 일광산 남쪽으로 마패 석건평 백룡 걸만 등 곳에도 20-30여호에 달하는 작은 마을들이 있엇는데 마패와 석건평 백룡에는 사립학교까지 있었다.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여 빼앗긴 <<봄>>과 빼앗긴 <<들>>을 찾아오려는 취지에서 세워진 학교들이다. 수월스님은 글을 모르나 아껴먹고 아껴 입은 돈을 늘 학교에 보내주어 교수용품을 사도록 도와주었다. 수월스님이 삼년남짓이 일광산에 거처하는 동안 두만강연안의 마을들에는 학교가 륙속 일떠서서 수월스님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만큼 괴뢰파출소와 왜놈의 헌병분견소들도 잇다라 세워졌다.
수월스님은 밤을 타서 학교에 나무단을 쌓아준다. 또 홀로있는 로인이거나 과부집마당에도 나무단을 놓고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을이면 가을걷이를 깜쪽같이 해놓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침이면 먼저 밭에 나온 아낙네들이 서로 주고받는다.
<<간밤에 스님이 또 고생을 했다이..>>
<<스님이야 잠이 없으니 별수 없잼두.>>
수월스님은 일생을 로동으로 살았다. 그는 연암산의 춘장사나 금강산의 유점사, 지리산의 천은사, 오대산의 상원사 묘향산의 중비로암등 사찰에서 행자수업을 하든 보림수행을 하든 또 조실로 있든지간에 늘 나무를 하고 밭일을 하였으며 지어 불도 지피였다. 사찰의 스님들에게 비치는 수월스님의 모습은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만 하고 밤에는 절구통처럼 오똑 앉아 온밤을 밝혔다. 인사를 해도 대꾸하는 법이 없었고 쓸데없는 빈말에는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모습이였다. 일광산에서도 수월스님의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수월스님은 아이들과만 어울릴뿐 먼저 말을 건네는 법이 없고 물어보아도 별로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월의 참모습을 누구도 모른다.
수월스님이 일광산에 나타난후부터 저 범진령고개의 호랑이가 사람을 물지 않았고 회막동의 강아지가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월스님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수월스님이 짐승과 가축을 순하기 길들인다는 이야기는 홍성군 천장사에 있을때나 라자구 화엄사에 있을때에도 전설처럼 전해졌다. 당시에는 특히 중국인 마을들에서는 짐승과 비적들의 마을 출몰을 대비하여 사나운 강아지를 기르었는데 이주민들이 북만이나 서간도로 떠날때에는 이 놈의 강아지들때문에 동냥도 못하고 먼길을 에돌아 가야만 했다. 수월스님이 이주민들속에 끼여 수분하로 떠날때에 중국인마을의 강아지들이 미친듯이 짖어대면서 달려들다가도 스님이 나서면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여 땅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수월스님을 뜛어지게 쳐다보기도 하였다.
<<저 거지할배는 귀신인겨 사람인겨?..>>
범진령은 호랑이가 자주 넘다든다고해서 법진령이라고 했다. 수월스님이 오기전에는 해마다 호란으로 마을이 뒤숭숭했는데 수월스님이 일광산에서 참선을 하면서부터 호랑이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마을의 강아지들도 짖지 않았다. 회막동사람들은 너무 신기하여 <<스님은 전생에 호랑이였는가보다>>고 스스럼없이 주고받았다.
수월스님이 일광산에 오른지 어느새 3년철을 잡았다. 그 사이에 가까운 걸만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 춘화사에 꽤나 큰 왜놈의 헌병파출소가 들어앉았다. 파출소에서는 조선인앞잡이들을 내세워 조선인들의 활동을 살피군했는데 수월스님이 있는 암자도 요시찰대상에 들었다. 어느날 수월스님은 암자뒤산에 올라 며칠전에 찾아온 반일대원과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 무엇이든 한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를 해야하는디, 이것이 꼭 밥먹기와 매 한가지여. 똑같은 밥 반찬이라도 어떤 사람은 배불리 맛있게 먹지만 어떤 사람은 먹기 싫고 또 억지로 먹으면 배탈이 나는 법이거든. 공부도 마찬가지여 염불을 열심히 해야할 사람이 딴 공부를 하니 잘 안 되는겨. 중이 되면 처자권속을 버려야해 아버질 생각한다든지 어머닐 생각한다든지 가족을 생각할것 같으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거든. 무슨 공부든지 일념으로 해야 해. 일념이 없으면 이것저것 다 쓸데없는겨…>>
스님은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뚝 그치고 머리를 뒤로 돌리더니 바위쪽에 대고 말한다.
<<여지껏 그러고만 있을거유. 나와도 괜찮은디..>>
그러자 바위뒤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괜찮으니께 자네도 여기 와서 듣게나..>>
<<아니구만 밤이 차거우니 몸이 상할가 념려되서… 저 그만 가볼게유..>> 정체불명의 사람은 산애래로 미끄럼질하며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