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불쑥 떠오른 그 노인 오늘 아침 뜬금없이 십여년전 저 세상으로 건너간 그 노인이 내 마음속에서 나타났다. 가을 계곡의 물 같이 맑고 정결한 분이었다. 그 노인은 재벌의 아들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조선의 이름난 갑부였다. 집안도 훌륭했다. 그 노인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경주 최부자와 뜻을 같이해서 동아일보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는 고려대학교 설립자금을 내놓고 경주 최부자는 대구대학을 세웠다. 두 조선 부자는 조선인들만 주주인 경성방직주식회사를 만들어 일번기업과 경쟁을 벌였다. 그 노인의 아버지는 경성방직을 맡아 경영하면서 만주까지 사업을 확장해 나가 그 시절 조선인 최초로 재벌이 되었다. 그 노인는 중학생 시절부터 재벌인 아버지의 자금을 담당했다. 금수저인 그는 어떤 인생을 살다가 갔을까. 이따금씩 그가 살았을 때 내게만 했던 말 중의 일부 조각이 떠오르곤 한다.
“일제강점기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였소. 담임선생이 전체 학생들 앞에서 나를 지목하면서 조선 최고 갑부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 그런데 나는 내가 그런지를 몰랐어. 아버지는 다른 가난한 집 아이들하고 나를 똑같이 키웠으니까. 떨어진 바지와 양말을 기워서 입고 신고 했으니까. 필통도 녹슬고 쭈그러진 양철이었지. 선생이 말하니까 나도 부잣집 아들인 걸 안거요. 실감은 못했지만”
노인은 한마디를 허투루 하지 않는 신중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노인이 한 말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아버지는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주석에게도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박사에게도 돈을 몰래 보냈지.아버지는 남노당 최고 지도자였던 박헌영도 광주 벽돌공장 인부로 숨기 전에 줄포에 있는 우리 집안 정미소에 숨겨줬으니까. 그렇지만 증거가 없으니까 세상에 대고 할 말은 아니지. 그 시절은 오히려 증거가 남을까 봐 걱정했던 때니까.”
정직한 노인을 통해 나만 아는 역사가 생긴 순간이었다. 그 노인은 대학생이었던 해방 무렵 부잣집 아들의 신세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좌익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학교를 장악하고 있었지. 그때 나는 재벌 아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계급적인 적이었소. 수시로 나를 몰아세우고 때립디다. 많이 맞았지.”
그 노인의 집안은 현재까지 삼대 사대 내려가면서 그룹을 이끌어가는 대한민국의 백년기업이다. 그 노인은 기업이 장수하는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시대와 권력이 바뀌어도 절대로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지. 권력과 가까이하면 사업을 하기 우선 편할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거야. 권력 측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집안 사람을 정치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
경쟁기업에서는 노조를 움직여 공장이 가동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 불을 지르게도 했지. 그런 모진 세월이 있었소. 내가 자식을 키울 때 권력을 잡은 장군이나 정치인 집에서 아들 중매도 들어왔소. 그런 것도 다 거절했소. 그래야 집안이 오래가는 거요.”
그 노인의 한마디 한마디는 기업을 하는 사람을 위한 잠언같았다. 나는 그 노인의 평상의 삶을 관찰했다. 그 노인은 깨끗하게 빤 면바지에 하얀 농구화를 신고 다녔다. 양복을 입는 날엔 삼십년 가까이 입은 쟈켓에 캡을 썼다. 그의 사무실은 소박함을 넘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소파의 찢어진 부분을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놓고 있었다. 노인의 방에 있는 철제금고나 책상 도장통 등은 백년이 넘는 쓰던 물건들이었다. 노인의 차도 이십년 넘게 써 온 단종이 된 차종이었다. 부품조차 구할 수 없는 고물차라고 했다. 그 노인은 절대로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룹의 회장은 동생이 했다. 노인은 죽기전 자기의 시신을 의대생 실습자료로 기부했다.
나는 그 부자 노인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부처는 평생을 맨발로 탁발을 하면서 다녔다. 스스로 선택한 아름다운 청빈이었다. 그 노인도 비슷한 것 같았다. 내가 믿는 예수도 무욕의 생애였다. 술책을 쓰지 않는 생애. 바른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세속의 요구에 양보하지 않는 생애였다. 변호사란 직업은 예상 못한 사람들과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는 직업이다. 이 세상에서 한 순간 스쳐 지나간 그 노인의 뒷모습에서 예수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어째서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