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오층석탑
유부초밥 몇 개로 아침 겸 점심까지 때웠으니 허기가 질 법했지만 많이 보고 싶은 욕심이 앞서 애써 참아낸다. 그리고 서동과 선화의 능을 떠나 다음으로 찾아 간곳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내가 정식 답사라는 명목으로 처음 시작한 것은 석탑이었다. 문화재 답사나 우리의 옛것에 대한 지나치게 편율된 사랑과 미적의식을 문화재에 접목시켰을 뿐이지만 그렇게 된 이유도 몇 있다. 구한말에 대한 역사책이나 드라마를 포함하여 당시를 되돌아 볼 때마다 늘 가슴이 답답해져와 애써 피해 다니곤 했었다. 역사란 말이다. 잘난 구석이 있어야 하고, 신나고 통쾌한 사실이 있어야 즐겁게 접근할 수 있다. 아프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내 스스로가 무기력해 지는 것 같은 역사를 구태여 느끼고 싶지 않았다. 전문가 식견을 갖춘 학자도 아닌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느끼고 싶은 것만 느끼는 요리조리 저급한 문화적 사치만 길들여져 왔다.
그러다 요즘에 와서야 그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간다. 근대사에 대한 작은 관심이 시작되어 ‘역사의 현장’이라는 더 넓고 깊은 배움에 가끔 한계를 느끼는 시점이기도 하지만 이왕에 시작한 것 갈 때 까지 가보자는 심산이다. 누구의 말씀처럼 답사에서 진화한 것이 역사의 현장을 찾는 것이라 하더라만, 내가 진화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관심의 축이 넓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 작품을 전시장에서 감상만 하는 것과 달리 작가의 총합적 작품세계를 이해한다던가, 작가가 살아온 시대와 삶을 이해한다는 식의 비유가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넓게 영역을 지우다 보니 지적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답사의 마지막을 언제 무엇으로 끝낼지 늘 궁금하다. 그러나 지금도 탑을 보면 가슴이 설레어 오는 것은 여전하다. 언젠가 답사쟁이 아우님이 한 말이 내 귀에 맴맴 돈다.
“형님, 답사는 말이지요? 유홍준을 벗어나야 결과에 도달 할 수 있어요!”
내가 아껴둔 말을 지가 먼저 해버렸지만 몇 권의 책과 몇 번의 답사로 쟁이 인 것처럼 사치에 거들먹거리는 나를 위한 충고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막연하게 바라보고 빈약한 답사지도에 답답해하던 내게 참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며, 온 국민을 문화재 사랑에 푹 빠지게 만든 그분의 공로는 충분히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를 벗어난 답사를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미적美的으로 길들여진 내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답사기에 발악하듯 지식자료를 많이 언급하는 까닭이다.
그럼 발악하듯 지식자료를 언급해 본다. 왕궁리 절터는, 절이 먼저였을까? 왕궁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기똥차게도 궁궐 속에 절이 있었을까? 또한 그곳에 있는 오층석탑은 백제시대 탑일까 고려시대 탑일까? 아니면 백제의 멋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고려탑일까? 그보다 진화된 백제와 신라를 아울러 고려시대 백제후손이 만든 탑일까?
얇은 지붕돌과 그리 크지 않은 지붕돌 모서리의 반전, 지붕돌 낙수면이 아래서 보면 평지와 다름없이 보이는 차분함, 급하게 줄어들지 않은 몸돌의 크기, 지붕돌 층급받침과 제일 위 지붕돌이 별개의 돌로 짜 맞춘 것 등 두루두루 백제탑의 양식을 닮아있다. 특히 부여 정림사지 석탑과 비슷하게 생겨 시기를 가늠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 때문에 고려시대에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한 석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또 있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삼단이다. 이것은 신라 초기의 석탑에서 유행했던 정형화된 양식이니 이 또한 의문투성이의 석탑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삼단의 층급받침만으로 신라초기석탑으로 보는 것에는 반대한다. 전체적 모습이나 목탑에서 변화된 여러 개의 석재를 이용해 만든 양식 등, 다른 요소적 양식에 있어 백제의 유형을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름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백제의 땅에 백제의 후손에 의해 신라의 양식을 접목하여 고려시대 초기에 만든 탑이다. 가 나 다를 모두 아우르는 참 쉬운 내 방식이다. 이 탑에서 고려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사리함과 사리병, 청동여래입상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하니 손쉬운 접근이 정답일 때가 가장 많은 법이다. 하여 어찌 되었던 고려탑이 성립이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왕궁리는 옛날 어느 옛적에 왕궁이 있었을 법한 터란 말이며, 그곳에 우뚝 솟아있는 석탑이 왕궁리 석탑이다. 때 아닌 눈이 내렸던지 눈이 녹은 땅이 질퍽해 하얀 운동화가 황토에 푹푹 빠진다. 그곳에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발굴이 한창이라 사건의 현장에 폴리스라인을 친 것처럼 통제를 해 놓았다. 역사적 현장에 발굴라인이다. 때문에 가까이서 올려다보고, 탑돌이 하고, 조목조목 뜯어보는 수고를 하지 못했다. 다만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범생이가 한 방향에 최대한 가까이서 바라보았을 뿐이다.
하늘이 맑다. 한겨울의 투명한 하늘을 닮아있어 석탑의 모습이 그림같이 다가온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느낌이지만 한 걸음 다가갈수록 가로의 지붕돌이 편안하며 모서리 반전에 세련미가 묻어있다. 토단의 황토색과 석탑에서 발하는 색상이 동일 계열이라 전체적 이미지가 편안하다. 황토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우리 민족의 색상, 즉 한恨의 색상이니 아련히 가슴에 잡혀오는 우리 민족 고향의 색이요, 우리 엄마 가슴에 맺혀있던 세월의 색이요, 더 넓게는 700년 이루지 못한 꿈, 백제의 색이라 할 수 있다. 한이란 원한 원수 등 상대방에게 원인을 돌리는 원怨과 달리, 자책하고 아우르며 자신의 가슴에 담아내는 우리 민족의 부드러운 심성의 색일 수 있다. 자연히 다리를 한 곳에 고정했던 것은 질퍽한 땅 때문만은 아니었다. 반짝 빛나는 유리 같은 질감의 금산사 오층석탑과 다르고, 대둔사 부도밭의 적잖은 세월에 묵은 석재들과 질감을 달리하니 말없이 서있는 탑에게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손대면 포슬포슬 황토가 묻어날 것 같은 따스한 질감이다.
우뚝 솟아있는 토단 위에 지대석을 확인 할 수 없지만 약간의 기단이 보인다. 모서리 기둥 우주가운데 두 개의 탱주를 기단과 일층 몸돌에 있다. 하나의 돌로 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듯 해 놓아 탱주와 면석이 따로 떨어져 있거나 혹은 하나의 석재로 조각해 놓았으니 요리조리 짜 맞추는 재미가 있다. 켜켜이 올라가며 단정한 모습이며, 상륜부 노반과 복발이 남아있어 섭섭한 마음이 약간은 줄어든다.
왕궁리 절터는 ...
백제 무왕의 힘이 모여 있는 곳이다.
고구려의 남하를 힘으로 맞서 지켰으며,
신라의 팽창에 온 힘을 기울여 공격했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요,
신라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니
그의 노래가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국경을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노래일 뿐.
이웃 일본에 문화적 지식까지 전해준
역사와 찬란한 문화의 뒤안길에
힘없는 백성들의 희생이 강요되기도 했다.
군대를 자주 동원해야 했으며,
궁궐을 증축하고, 사찰을 지어 불력에 의지하며,
아울러 선화부인과 춤과 노래를 즐겨 국력이 소모되니
결국 아들 의자왕 대에 와서 660년 역사를 마감한다.
세상이 혼란하면 종교가 넘쳐난다.
바단 불교만이 아니다.
신라 말년에 경주가 절반이니
한 집 건너 절이었다는 말이다.
궁궐 속 절집이 절집만 이어오다
누구의 손에 이리 변했을까 만은
승자들의 역사에 오류가 진실이 되는 비애가 있다.
그러나 우뚝 서 있는 석탑에
진실이 묻어있고, 소이연所以然 이 담겨져 있다.
그것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흔들리지 않는 석탑은 처연히 허공만 바라본다.
좀 바라줘 봤으면.......
미련한 나는 돌에다 애정을 구걸한다.
- 잡사가 쓴 잡문. -
돌아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① 이것 말고도 왕건과 도선에 얽힌 개의 꼬리에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한 이야기가 있다. 후백제 견훤을 견제하기 위해 완산주(지금의 전주)가 개의 형상이라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눌렀다. ②
애제라, 이 석탑이 완성 되던 날 하늘이 흐리고 울었다고 하니 사실 여부를 떠나 백제인들의 못다 핀 왕국의 한이 맺혀있는 곳이다. 백제 무왕이 익산 출신이라 궁궐 속에 절집을 세우니 백제 말기까지 내려오다가 신라에 와서 사찰로 자리 잡고, 고려대에 지금의 오층석탑을 세웠다. 지금의 터에서 발굴된 유물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 고려의 유물까지 출토되니③ 세월을 거슬러 질기게 목숨을 연장하다 사라져간 역사적 현장이다.
잠시 연합뉴스 2008년11월10일자 기사를 옮겨보자면,
[20년 가까운 발굴조사는 아울러 왕궁리 유적이 왕성에 버금가는 규모였음을 드러냈다. 성벽 혹은 담을 기준으로 이 유적은 동서 폭 240m에 남북 길이 490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밝혀진 것이다. 그래서 이 유적을 요즘은 왕궁성(王宮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백제 무왕대에 조성된 궁성유적인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 조사 결과 백제시대 궁성 정원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조경시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 문화재청 제공 >>
그렇다면 이 왕궁성은 누가 무엇을 위해 쌓은 것일까? 이와 관련해 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라는 지리서의 기술 내용은 기존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김정호는 대동지지의 '익산'(益山) 항목에서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 성을 쌓고는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고 적었다. 무강왕이란 바로 백제 무왕(武王.재위 600-641)을 지칭하며, 별도(別都)란 쉽게 간단히 말해 제2의 도읍이란 뜻이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백제 무왕 시대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에 제1 도읍을 두고 익산 지역에는 부수도(副首都)를 둔 셈이다. 사비는 청와대가 있는 서울이고, 익산 왕궁리는 주요 정부기관이 입주한 과천 정부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김정호가 무엇에 근거해 익산 별도설을 주장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른 무엇보다 김정호 자신이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후략.④
사실 발굴은 역사적인 면을 확인하는 작업이지만 의문을 둔 그 상태를 나는 좋아한다. 가까이 있는 박물관에 선듯 들어서기가 망설여지는 이유가 표본처럼 만들어 놓았거나 강요해 놓은 학습적 효과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신비감이 떨어지는 때문이다. 다분히 감상적인 나만의 답사방식을 여전히 고집하기 때문이지만 출토유물들이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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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토지박물관대학http://caseylee2.com.ne.kr/6IkS/C.htm)
(②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1』돌베개)
(③ⓒ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
(④연합뉴스/네이버 검색)
동고도리 석불
고도리, 일본말로 고는 다섯을 뜻하고, 도리는 새를 뜻하는 화투장에 있는 고도리가 아니다. 동고도리란 동네 이름일 뿐이다. 바로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리에 넓은 들판 가운데 옥룡천이 흐르고, 100여 미터 떨어진 양 옆으로 우뚝 선 석불상 두기가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불상이라 하기엔 돌장승에 가깝다. 벅수, 즉 전라도에선 돌장승을 벅수라 부른다. 벅수는 약간 모자란 사람을 빗대어 부르는 말이다.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남의 집 변소를 깨끗하게 퍼주는 착하고 순박한 사람을 벅수라 부르는 지역도 있다. 지역을 떠나 어디나 비슷한 우리의 생활에 면면히 이어온 흔적이다.
장승은 우리 긴 역사를 내려오면서 우리 민족의 민속 신앙물로 뿌리 깊게 자리매김 하여 왔다. 솟대나 선돌 신목神木 등과 함께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의 원시 신앙물인 장승은 유목과 농경문화의 민속 공통적 염원을 담고 외래 신앙인 불교가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 정신세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이것이 석불로 인식되는 것은 바로 민속신앙과 불교가 자연스럽게 접목되어 온 부드러운 심성의 우리 민족의 상징물이다. 비록 지배계층의 문화에서는 소외를 당했지만 우리 민초들의 풀뿌리 문화 속에 도교나 불교나 유교가 민간신앙의 선돌문화와 결합되어 순수히 접목되는 부활을 맞게 된다. 마을입구의 장승과 사찰 입구의 호법 장승으로 변모하며 도가 조금씩 넘어서면서 세분화 되어 가기 시작 했다.
불교의 장승들이 마을로 내려오면서 미륵신앙의 소산으로 장승인지 미륵불인지 편하게 접목 되어갔으며, 풍수에 접목 되면서 비보裨補의 역할과 함께 지기를 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 지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심성에 따라 여유나 장난기가 넘쳐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나 바보 같은 형상, 익살스러운 과장된 얼굴모습, 데생이 맞지 않은 얼굴비례, 그러나 가끔 험악한 인상을 한 벅수도 볼 수 있다. 귀여운 새색시 모습의 순창 군청 뒤의 돌장승, 무지 험악한 남원실상사 입구의 호법장승, 웃기고 장난스러운 나주 불회사 입구 돌장승, 까랑까랑한 노인네 모습을 한 창녕 관룡사 돌장승, 상주 남장사의 바보 같은 고승처럼 생겨먹은 돌장승, 정읍 원백암의 한이 많아 보이는 돌장승, 부안 군청 앞에 조잘조잘 할 말 많은 돌장승 등 전국 곳곳에 많이 있지만 유순하게생긴 화순 벽나리 민불과 이곳 석불이 많이 닮아있다.
우뚝 솟은 토단위에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시선은 먼데 서방님을 일편단심 바라보고 있다. 사이에 내川가 가로막혀있다. 그것도 보통 내가아닌 옥룡玉龍이 가로 지르는 천이다. 중간에 최근에 만든 무지개 모양의 나무다리가 이어주지만 소설을 쓰자면, 누가 지켜보고 있을 때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밤이나 고요한 낮에만 다리 가운데서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눈다. 옛날에는 다리가 없었으니 날개도 없는 돌장승이라 섣달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옥룡천에 얼음이 얼고야 만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니 새벽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얼마나 싫었을까?
이 역시 흐르는 물의 지기를 누르기 위한 비보의 성격이 있다. 삼 면이 산으로 되어 있으나 남쪽 한편으로 트인 들판에 물길을 따라 흐르는 기운을 잡아두기 위한 도선 이전부터 생겨난 자생 풍수의 모습이다. 가벼운 곳은 눌러주고 무거운 곳은 들어주는 자생풍수가 이것이다.
동쪽에 긴 사각의 둥근 돌기동에 머리에는 다분히 도교적 냄새를 풍기는 네모난 갓을 올려놓고 있으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몸 기둥이 조금씩 넓어진다. 얼굴은 오똑한 콧날에 선명한 눈썹과 가는 눈매가 부드럽고 곱다. 입은 한쪽으로 살짝 벌려진 상태로 저 멀리 마주하고 있는 서방님을 향해 배시시 미소 지으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양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그나마 불상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양 손은 다소곳 배꼽위에 마주하고 있으며 몸은 오픈식 장삼을 걸친 형태다.
몇 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사랑의 전령자가 되어 가로놓인 다리를 타박타박 건넌다. 꼬부랑 콧수염을 한 서방님 미륵(혹은 벅수)이 점점 나를 반긴다. 동쪽에 있는 미륵불과 같은 크기와 같은 크기의 귀모양, 같은 손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사뭇 표정이 다르다. 근엄한 얼굴 모습에 살짝 벌어진 입, 가늘게 뜬 실눈은 웃고 있지는 않지만 속 깊고 천진난만한 표정이다. 오목히 서 있는 발모양이 통통하게 살이 올랐으며 발가락에 힘을 준 느낌이다. 머리에 올려진 갓만 다른 석재로 되어있을 뿐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하나의 돌로 조각을 해 놓았다. 조성 당시에 도공의 모습을 닮지는 않았을까? 손재주 뛰어난 도공이 아니라 이곳 마을에서 재주가 있다는 석수쟁이를 불러다 정성들여 만들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니 연세가 벌써 얼마이신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던데 이때까지 눈비를 고스란히 맞아가며 일편단심 서로를 바라보는 이 두 분은 서로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더욱 그리운 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공간은 문제가 되지 않는 법이다. 그 봐라 지금도 누군가가 그리운데....... 돌아오는 다리 중간에서니 정겨운 기운이 햇살에 비춰온다. (20100323)
*순창 군청 뒤 벅수
화순 벽나리 민불
요기에 벅수 하나 더 있습니다^^..
음악은 이 방 어느 님 것이옵니다~
첫댓글 상감마마님..감사합니다.
처음보는 동고도리 석불, 옆에서 찍은 사진속의 미소가 편안하고 참 좋습니다.
올려주시는 글...늘 귀하게 읽으며...공부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_()_
벅수이시옵니까?....벅수상감마마라....아주 좋네요....^*^
저도 작년 8월 왕궁리갔었지요 탑사진과 고도리석불 사진찍었는데 상감마마님 사진은 항상 좋으네요 그리고 공부도 무지 많이하시는것 같아요 많이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