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원들과 함께, 뒤줄 오른쪽 두번째 필자)
□ 참전 동기
국민의 의무(국방)중에 공교롭게 후반기 교육 수료 후 특전사로 배치되어 부대의 교육계획이 순차적으로 나가고(파병) 들어오는(귀국) 훈련으로 이루어져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는 군정하의 시대적 상황에서 “월남파병" 이라는 국가의 거스릴 수 없는 방침에는 예외가 없었다. 자국방위도 아닌 이역만리 타국의 전쟁터에 뛰어 들어야 하는 심정을 회상하면서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숨 막히는 고비 고비의 순간들을 늦게나마 피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
□ 참전으로 국가에 미치는 영향
베트남 전쟁 참가는 지난 우리나라의 존망이 달려있는 6. 25 전쟁에 참가한 연합우방 국가들에게진면모를 보여 주었고 국내적으로는 파병된 외화수입으로 국가산업발전에 초석이 되었으며 우리군의 전력을 증강 시키는 등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영원이 각인 되기 바랍니다
<병영 전반기>
나이 22살 1969년 8월 초 무더운 여름날 전남 광산군에 소재한 31사단(상무대)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여 6주의 기본교육을 받고 후반기 교육대인 원주 통신훈련소(소장 노도빈 대령)로 배치되었다 광주 역에서 9월 27일 학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야간 군용열차를 타고 서울 용산 역 용사의 집에 다음 날 새벽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는 소속 부대의 장병 수송트럭으로 원주통신훈련소에 입소하여 무선통신교육(ROC)에 들어갔다 무선통신은 수준이 높은 연대급 이상 소요되는 장비(ANGRC/87)로서 장비운용 교육을 4개월(16주)가량 받는다. 무선통신은 사회에서 주로 외항선에 운용되고 있으며 주로 모르스부호 송수신을 숙달하여야 한다. 교육의 수준에 따라 일등병으로 부대 배치를 받는다. 1969년도 겨울은 유달리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무릎이 넘친 날이 많았다 ROC 420기는 A, B반으로 구성되어 B반 반장을 하였고 졸업 때는 기장을 하였다 지금도 알고 지내는 전우가 있다 김연암, 김재철, 김현중 동기생들이다
원주 통신훈련소에서 후반기 교육 수료 후 부대 배치를 경기 부평에 있는 특전사로 받았다 특전사 설립 한 동기는 간첩 김신조가 청와대 가까이 침투하여 인왕산에서 체포되는 등 국방강화를 위한 특수부대로 창설되었다 사령부의 입시막사에서 2주간 콜레라 방역으로 격리하여 별도의 텐트에서 지냈다
이후 남원 제2유격여단으로 배치되었다 특전사령부 소속하에 김포 공수여단, 삼척 제1유격여단, 남원 제2유격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전사는 인력구조가 팀으로 구성된다 팀장 대위 부팀장 중위 이하 10명의 하사관 및 병이 각자 주특기 별로 구성된다(정보 : 이일남 중사 최승렬 병장, 의무 : 김영렬 병장 이영식 일병, 통신 : 양기수 중사 위경돈 일병, 병기 : 이중사 박승종 하사, 폭파 : 김재환 하사 서병무 하사) 이렇게 사수와 조수로 구성되어 팀(12명)임무를 수행한다. 부대에 배치되자 바로 팀 구성에 의한 예정된 교육이 시작 되었다 나는 일등병으로 부대 및 팀에서도 가장 졸병이다 하지만 팀원은 각자 자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 내무반 생활도 각자 자기가 정리한다.
공수 교육장은 김포 오정리 미군부대 옆 공수여단에서 받았다 공수 기초훈련으로 창, 칼 던지기, 기마 싸움, 태권, 복싱, 각종 장애물교육 등 지상훈련은 모두 받아 보았다 특히 아침 구보가 힘이 들었다 단거리 보다 장거리에는 심장이 약해 죽을 맛이다 뒤에는 엠브란스 구급차가 따라 오지만 힘이 들어도 이겨내야 한다. 완주를 못하면 부대 들어가 더 힘든 기압 받기가 두려워 참고 견디어야 한다. 특히 복싱 훈련은 얼굴이 만 진창이 되어 입술이 터지고 눈 부위는 밥풀눈이 되어 시퍼렇게 멍이 드는 등 무자비한 교육을 받아왔다
이제 기초훈련을 마치고 4주간의 공수훈련으로 들어갔다 팔자돌림 및 모형탑(막타워)에서 점프훈련은 공포감을 없애기 위해 자세가 될 때까지 한다 훈련중 10분간 휴식을 줄때는 펄펄 흐르던 땀이 휴식으로 땀이 식고 얼어서 일어서려면 차라리 휴식이 괴로울 정도다 우습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훈련소에서 피우기 시작한 화랑담배가 괴로움을 달래기에는 그만이다 휴식은 바로 그 자리에서 취한다. 꼼지락 딸싹하기가 싫어 옆에 동료한테 야! 불 좀 달라니까 필터가 달린 담뱃불을 내 앞에 내민다. 주위를 보니 제대장(3개 팀을 관장)중령이 불을 준 것이다 웃으며 많이 힘들지 하면서 서로의 결속을 다져 주었다 모형 탑에서 낙하산줄(라이쟈)에 목이 스치고 철모에 턱이 받쳐 피가 터지는 등 힘겨운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공수 점프에 들어갔다
생에 비행기는 처음 타보는데 이것도 밖으로 뛰어 내리는 비행기를 타니 참으로 기가 막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어찌 이루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팀 중에 어느 동료(김만일 동료 고향이 경남 산청)는 3번 비행기에서 점프하고 죽어도 점프할 수 없다고 드러눕는 바람에 김포비행장으로 다시 내리는 사연도 있었다. 결국 그 동료는 수료를 못하였다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문환 사령관도 교육생들 속에 같이 점프를 한다. 가장 어려웠던 점프는 껌껌한 야간 점프 때 군장을 메고 김포백사장에 뛰어 내린다 이러한 용기를 주는 것은 역시 심히 훈련으로 달련된 몸이 아니면 이겨낼 수가 없다 이렇게 힘든 훈련 중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고향 사촌 여동생이 있었다. 6년 전에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객지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알았겠는가? 일요일이면 빵을 한 움큼 사서 면회를 자주 와 주었다 살아 있을 때 많이 잘 해 주지 못해 안타깝다
교육 중 또 재미있는 일인데 일요일 선임하사 및 팀원 몇 명이 외출을 나갔는데 취사반에서 라면을 정량으로 너무 많이 끊여 숨이 차도록 먹고 괴로웠다 지금 이렇게 하는 말이지만 아마 그때 죽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배운 진리가 있다 넘치면 모자라는 것 보다 못하다는 것을, 항시 배가 고픈 열악한 주식 부식 실태의 결과라는 변명은 굳이 하고 싶지 않다
지상 공수교육을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실고 허공에 점프를 한 후 낙하산에 의하여 허공에 떠서 앞, 뒤, 지상을 바라보는 광경이란 실감을 느껴보지 않으면 모른다. 지상에 접지하여 먹다 남은 모래 섞인 빵을 다시 먹으며 살았으니 먹게 되는구나 하면서 씹는 맛도 그만이다 5회 점프가 끝난 후 공수전 수료(제57기, 1970. 3. 21)를 하고, 특수전 수료(제14기)후 남원여단으로 이동하여 유격훈련에 들어갔다 그때 고향집 맏형님이 면회를 왔다 나 보다 3살 위다 내가 눈물을 흘려보기는 2번째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5남매가 어머니슬하에서 지내다 도시 광주로 올라와 방을 얻어 학교 다닐 때 형님의 편지를 받고 눈시울을 지워 본 기억과 이때였다 이후부터는 형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형님도 30살 중반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디로 돌아가셨다 면회 온 형님이 나를 보고 새까맣게 바짝 바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못다 한 고생이 이다지도 많은지 내 얼굴 꼴을 보고 아마 동생하나 버린 심정으로 뒤돌아 가셨다
전북 남원 운봉 지리산의 산악지대에서 유격여단이라는 이름 그대로 유격훈련은 너무 힘이 들었다 특히 외줄이나 세 줄보다는 두 줄 타기가 왜 그리 힘이 들고 위험한지 지금도 그 때의 상황이 생생하다 유격훈련을 마치고 나면 월남파병을 하여야 한다. 따라서 10여일의 휴가를 준다.
<참전준비>
휴가가 끝나면 전쟁터인 월남으로 간다. 더구나 일반 육군 병사와는 달리 전쟁터에서의 특전대는 적진의 선봉에 서야 하기 때문에 휴가 나온 기분은 휴가가 아니라 근심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집을 나설 때 인사가 혹시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자주 들어 괴로웠다 마을 뒷산 조상의 묘소에 인사하고 앞 산봉우리 앞마당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까지 다시 볼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 마다 달리보이고 새롭고 마지막이라는 느낌뿐이다 파월 후 가족들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사진사를 불려 가족사진을 찍어 가져갔다
휴가를 마치고 남원 유격여단으로 귀대하여 짜여진 제대 팀을 구성한 후 월남을 가기 위해 군용트럭을 타고 남원 역에 도착하였다 역시 가족 동료 등 기차역은 전송과 눈물바다로 분위기는 뜨겁다 기차는 강원도 오음리를 가기 위해 청량리 역을 향해 달렸다 군용열차를 타면 주로 밤에 탔는데 이렇게 낮에 창밖을 보면서 이동하기는 처음이다 역시 창밖의 들녘에 논밭과 짚더미 가끔 들판에 어미 소와 송아지 산의 나무 등 산천이 다르게 보일 뿐이다
기차는 청량리 역에 도착했다 역시 사전에 연락된 친지 친구들로 역 주변은 만원이다 우리는 기차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통제되었다 사람을 찾으려면 긴 막대에 피켓을 달고 그곳에 찾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들고 다녀야 한다. 나도 동생 명숙이 한데 연락을 했지만 혹시나 해서 나왔을까하고 밖을 두리번거리던 중 그때 내 이름의 피켓을 보고서 만났다 다시는 못 볼 친척의 한 사람을 만났으니 이 어찌 반가움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이하 생략
강원도 오음리에서 파월을 위한 훈련을 받는 중에 뒤에서 군용트럭이 브레이크 고장으로 행군중인 우리 팀 뒤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곧바로 나는 빨리 피할 수 가 있었는데 미처 못 피한 동료는 그 무거운 군용차 바퀴에 머리가 깔려 현장에서 즉사한 광경도 생각난다. 시뻘건 피가 땅에 흐르고 있는 병사를 붙들고 중대장은 부둥켜 앉고 흔들어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파병으로 가슴조인 상태에서 이런 광경을 보니 탈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 굴뚝같았다
교육을 마치고 군용트럭을 타고 춘천 역에 도착했다 부산 역으로 가야 한다. 춘천에서 부산까지 가는 열차 속에서 오만 잡다한 생각들이 떠올라 만약 내가 문학적인 소질이 있었다면 그때의 심정을 잘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속으로만 삭이고 창밖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이러한 광경을 본 철로 주변의 민간인들은 긴 막대기 끝에 자기 주소를 적어 주며 외로울 때 편지 하라고 창쪽으로 내민다.
부산 역에서 항구로 이동 한다 바로 밖을 통하지 않고 큰 군함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함상에 올라와 보면 지상 아래에 친지 친구들에 의하여 부두는 꽉 차서 소식이라도 전하려면 긴 줄에 고무공 같은 것을 끝에 묶어 함상위로 던져 줄이 잡히면 아래에서 줄에 묶어서 편지나 음료 같은 것을 들어 올려 전하기도 한다.
함선 한쪽으로 전송 나온 인파를 향하여 파견병력은 쏠려있으며 환호 함성 등 분위기 속에 군가는 더 용기를 고조 시킨다 “아느냐 그 이름 무적이 사나이 세운공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 정의의 십자군 깃발을 높이 들고 백마가 가는 곳에 정의가 있다 달려간다. 백마는 월남 땅으로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드디어 뱃고동소리가 울리고 말았다 뿌웅 뿌웅 뿌웅 3번 울리고 나면 도착 때 뿌웅 뿌웅 뿌웅 3번 울리면 항해는 끝이다 함선 안에서의 일이다 침상은 1층부터 4-5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가 고참 침대다 알고 보니 움직임이 위가 심하기 때문이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 차례 줄이 끝나면 바로 다음 차례 줄이 점심이며 그 다음 차례 줄이 저녁이다 식사는 양식이며 이런 음식이 양식이라는 것을 처음 먹어 보았다 지루한 항해로 함상에 올라와 자고나도 망망 바다만 보일 뿐이며 가끔씩 물위에서 갈치 고기가 군함 옆으로 뛰어 오르기도 한다. 1주일 향해 후 월남 나트랑에 도착했다
<참전기>
갈매기가 하나 둘씩 날기 시작 한다 이것은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멀리서 육지가 보였다 월남이라는 땅이다 큰 군함에서 작은 배로 나누어 타고 육지인 나트랑 항에 도착했다 우리 군 병력을 환영하기 위해 고국의 군악대가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고 부두에 대기하고 있었다. 군악대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와 백마가가 가슴을 찡 울리며 얼어붙은 마음을 부모 형제처럼 앉아주는 기분이다 역시 “외국 전쟁터에서 보는 태극기에 대한 존경심” 이때처럼 태극기가 위대하고 자랑스럽다는 것을 느껴 본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찡하며 핑 도는 눈물을 삭이고 계획된 작전트럭에 올라 캄란 백마30연대로 이동하였다
이제 캄란 30연대(1856부대 동보부대)수색중대로 공수특전대가 파견되었다 당시 상황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열심이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는데 "이게 왠 일" 컴퓨터가 그만 갑자기 다운되어 자료가 날아가 버렸다 다시 기억을 되살려 쓰려고 하니 분위기가 깨져 머리가 아프고 맥 빠진다
우리 특전대는 4개소로 나누어 백마사령부, 28연대, 29연대, 30연대로 배속되었다 우리 3개 팀(제대 또는 지역대)은 30연대 캄란으로 배속되었으며 비교적 안전하고 보급품 등 대우가 좋다고 한다. 유일하게 신병교육대에서부터 같이 다니던 친구(김연암)는 29연대로 갔다 사령부 가까이 있어 좀 고달프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무반은 방카로 되어 있으며 1개 팀이 생활 한다 가끔 도마뱀이 내무반을 기어 다닌다 어느 날 저녁 취침에 들었는데 우리 방카 가까이에 적 포탄이 떨어진 것이다 유리나 판자가 조각나는 굉음소리로 피해는 없었지만 강화된 경계 속에 심상치 않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식사는 자유배식에 의하여 미군들이 지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배불리 먹어야 먹는 것 같이 직성이 풀리는데 열량이 높은 고기류만 먹으니 적게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우리 팀의 화장실은 야전에 드럼통 절반 잘린 것으로 나뭇가지 양쪽에 걸쳐 용변을 보는데 아마 그 드럼통이 차 본적이 없다 그렇게 배설물이 적다는 것이다 주로 C-레이션에 있는 햄류 과일류 초코렛류 등 부피가 작고 열량은 높다 물론 커피는 공동식기에서 마신다. 보급품은 반납이 없다 K-레이션도 보급되는데 참 맛이 그만이다 가끔 국내 공연단이 와서 공연도 해주는데 볼 때는 흥취 되어 모든 것을 잊고 즐겁지만 공연단이 떠나고 나면 어찌 그리 닭 쫒는 개같이 마음이 허전한지 속이 텅 비어 향수에 젖는다.
작전은 보통 15일 동안 한달에 한번 정도 나 간다. 우리 특전대는 선발대로 적진지에 투입되어 미리 작전지역을 수색 정찰한 후 상황본부를 설치한다. 이어 본진이 투입 된다 적진지에 MD500헬기가 지상 가까이 닿으면 뛰어 내린다 내린 자리가 잘 안보이면 먼저 배낭을 던지고 배낭 위로 뛰어 내린다 갈대숲이 키 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뛰어 내린 후에는 동료와의 간격이 벌어진다. 헬기는 날아가고 암호신호를 통하여 흩어진 우리 대원들은 일정한 곳으로 하나 둘씩 모인 후 팀장의 작전지시에 들어간다. 헬기는 전투병 투입과 철수 및 작전 중 보급품을 공급할 때 이용한다. 나는 무전병이기 때문에 무전장비(주로 P25)와 예비 배터리에 자신의 비상식량을 항시 배낭에 지녀야 한다. 작전은 중대단위 또는 특전대 단위로 베트콩(베트콩 정규군 지령에 움직이는 첩자)정찰 수색하며 군데군데 산속에서 은거한다. 은거해 사는 베트콩첩자 발견 시 팀장의 완수신호에 따라 집중 연발(초기 원활한 작동을 위해 20발 탄창에 17-18발 장진)사격을 가한 후 들어가 은거지를 수색한다. 1제대(3개팀) 단위로 작전을 펼치며 무기는 개인화기로 M79유탄발사기 1정, M16소총, 장진된 탄창 10개, 탄창대 양쪽에 수류탄 4발, 크레모아, 무전기(예비 밧테리 포함), 비상식량, 식수 등을 지니고 작전에 임 한다 대부분 헬기의 소리를 듣고 미리 깊이 숨어 있으므로 빈집이 많다 집에 들어가 배창, 무기류 등을 획득하고 수색이 끝난 후에 움막에 불을 질려 소탕 시킨다 돼지, 닭장의 움막에도 불을 지른 후 다른 은거지 수색하며 이동 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전쟁터에서 사용하던 용어가 희미해 쓰기가 쉽지 않다
산이 온통 거친 가시 풀숲으로 억세고 가시 돋은 나무다 정말 사람의 발길이 처음 닿은 신천지 같은 적막한 숲 속은 자연 그대로의 냄새 속에 가시덩굴을 헤쳐 길을 만들어 이동 한다 이동 중 잠시 휴식 상태에서 나의 전투복장을 점검해 보니 탄창 집 옆에 매단 수류탄이 덩굴 숲에 의하여 안전핀 고리가 떨어져 있었다. 만약 반대쪽에서 핀이 뽑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자신의 몸이 갈기갈기 분해 될 번 하였다 오싹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탄장 집에서 분리하여 멀리 던져 버렸다 가끔 이동로에 부비츄렙이 설치 되어있다 함정을 파놓고 땅속에 대창을 꽂아 놓는다. 대창 끝은 파상풍이라는 독침을 발라 놓기 때문에 살에 닿으면 썩어 들어간다. 야전에 있는 물은 먹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로 헬기에서 보급한 155미리 빈 탄통으로 공급 하고 식량 등 보급품도 헬기로 2~3회 지원 받는다 약 15일 동안을 숲 속에서 정찰 수색 매복을 하다보면 서로 얼굴을 보면서 나는 동료 보다 새까맣지 않겠지 하지만 모두가 똑 같다 입술 주위에 수염이 자라서 돼지가 구정물을 먹고 찌꺼기가 입술 옆 수염에 끼는 것처럼 사람 꼴이 찾아볼 수 없지만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 있다 정신만 뚜렷하면 된다는 신념이다 야간 매복 중 우리 매복조 보다 더 많은 베트콩 정규군이 이동 할 때는 그냥 통과시키기도 한다. 섣불리 임했다간 그 이후의 참담한 양상을 상상하기가 솔직히 두려워서다
작전 중 야간은 매복으로 대비 한다 전방에 크레모아를 중첩해서 설치하고 1조에 2-3인으로 구성하여 조끼리 서로 인계철선으로 연락하며 한번 당기면 상황 주시, 두 번 당기면 적 발견, 세 번은 상황개시 등 약속에 의하여 밤을지샌다 나는 무전병이기 때문에 팀장하고 주로 야간근무를 한다. 그런데 팀장도 고단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코를 골거나 하면 모래를 뿌리거나 방독면을 씌워버린다 때론 방독면이 울려서 오히려 소리가 클 때도 있다 깜깜한 밤이라 눈만 감았지 뜨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며 귀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나뭇잎 소리인지 적의 이동 소리인지 총소리만 듣고 위치 및 피아식별을 할 수 있다 총의 종류까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실전경험으로 고참과 신병의 차이가 난다 나뭇잎 소리에 놀란다거나 돌도 던져보고 실험도 해 본다 정말 말이 일등병이지 전쟁 중에는 각자 임무는 확실하지 않으면 죽음 뿐 이며 자신의 죽음을 떠나서 팀 및 제대에 까지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어느 날 매복 중에 있는데 우리의 은거지가 노출되어 밤중에 따다당 탕탕탕 연발 집중 사격이 매복지를 향해 공격을 당하였다 먼저 적을 알면 살지만 먼저 노출을 당하면 죽는다. 허겁지겁 은폐 엄폐 겨를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반격 사격을 하는데 총소리 나는 곳을 향하여 무차별 응사 한다 접전상황은 30초~1분30초 길면 2분 사이에 1차 끝난다. 그 사이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신의 살을 꼬집어보고 전우와 말을 걸어본다 날이 밝아 지난밤의 전투상황을 살펴보니 정말 아찔하다 아니 오싹하다 아마 오래 살 목숨인가 보다 하늘을 보며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가 총알을 옆으로 유도 시켰나 보다 별별 생각이 난다 바로 매복 참호에 있는 나의 배낭이 뚫려 있지 않는가? 적의 탄알이 지나갔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사는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작전 와중에서도 커피는 끊여 먹는다. 또한 화장지와 이쑤시개는 C-레이션속에 있다 대수롭게 생각 할지 모르지만 필요한 부속품이다 커피를 끊일 때는 레이션 B2 빈 깡통에 물을 넣고 고체연료나 크레모아를 분해해 콤포지션(연기가 안 나며 부피가 작고 오래 탄다. 연기가 나면 적에게 노출됨)으로 불을 지핀다. 맛이 그만이다 작전 일정이 끝나고 철수 때는 무전으로 랜딩장소를 연막탄으로 알리며 헬기 요청을 한다.
지금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쓰지만 실지 상황은 처참하리만치 힘들다 전우가 부상이나 사고를
당하였을 시 배낭과 전우를 등에 어깨걸이로 이동하여 보면 안다 생사고락을 한 전우가 나의 목숨과 같고 나의 살이요 피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헬기에 몸을 실고 부대 진지 가까운 장소로 내려와 전우들과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야! 무사히 또 한 고비를 넘겼구나 하면서 부둥켜안고 남은 연막탄 예광탄을 퍼뜨리다(아래 사진) 이러한 작전을 한달에 한번 이상을 수행해야 한다.
부대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기 위해 휴양소로 간다. 나는 술을 잘 못하기 때문에 콜라 같은 음료로 대신 한다 향수를 달래기 위해 억지로 맥주(17캔)을 마셔 보았는데 소변이 술술 나도 모르게 나왔다 아직까지 그렇게 술을 마셔 본적은 없다 마치 연대본부 PX에 아는 고향친구(노병천)가 있어 단골로 먹기 일쑤다 그때 맥주 한 박스가 2불 20센트이고, 한산도 11갑이 1불이며 금강 한 보루에 1불이다 용돈은 17불정도로 33불은 강제 적금으로 항시 용돈이 부족하다(상병 봉급이 50불정도) 귀국 선물을 준비하는 동료들도 있지만 특히 전투요원은 돈이 없으니 그림에 떡이다 귀국 1달 전에 승선 번호가 나올 무렵 그때 각자 귀국박스 T/O가 배정되지만 가지고 갈 것이 없으며 더불Bag이라도 채워 가면 다행이었다. 따라서 나에게 배정된 B박스(장교 A 박스)를 22불에 팔았다 겨우 준비한 선물은 라디오 1개와 SP에서 지급된 용품 몇 가지다
월남이라는 곳은 날씨는 항시 여름 같고 우기 철은 하루에 한번 정도로 소나기가 왔다가 곧 그친다 한번은 몇 일째 계속되는 우기로 인하여 식량수령을 위해 보급창에 갔는데 도로에 트럭높이 절반까지 물로 잠기어 양쪽 전봇대를 기준으로 어림잡아 도로 가운데로 운행하여 수령해 오기도 했다 군용트럭이 성능이 좋아서 인지 배기가스가 나오는 곳으로 물이 연기처럼 품어 나왔다 기후는 지열이 거의 없어 그늘진 곳은 시원하고 낭만적이다 또한 밤공기도 지내기에 아주 서늘하고 좋은 기온이다 이렇게 살기 좋은 지역에서 인지 강대국(미. 소)이 서로 점령하려고 하는가 싶다 산과 들에는 스스로 자란 바나나 야자열매 등 손쉽게 구 할 수 있다 기후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움직임이 느리고 변화가 없어 보인다. 자국민들은 장기전쟁으로 국토 보존에 대한 애국심이 없다 전쟁 중에도 자국민들은 그저 태평하게 낚시질이나 하러 다니며 낮이면(우국) 밤이면(공산진영)의 이중 행동을 하는 등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왜 이런 타국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보초를 서면서 고향 쪽 하늘을 보며 달래본다 귀국 마지막 작전 때는 승선번호를 달고 나가기 때문에 두렵고 몸이 잘 안 움직여지는지 그 용감하던 기백은 찾아 볼 수없다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귀국이라는 생각에 꽉 차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고가 잘 날 수 있다 드디어 모든 작전을 마치고 이제 귀국을 하게 되었다 우리 제대(3개팀 36명) 파월하였는데 27명이 귀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병영 후반기>
1971. 3. 3 제비가 온다는 날 부산항에 도착했다 항해 기간이 1주일이 소용되므로 2월 25일 승선했다 올 때(나트랑)와 달리 캄란 항에서 출발했다 얼마나 긴장 속에서 살았는지 승선과 동시에 몸은 긴장이 풀려서 시름시름(말라리아 병 증세)하였다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부산 제3병원으로 입실되어 버렸다 3일 동안 회복을 차린 후에 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때 나의 병적기록카드가 특전사령부에서 빠져나와 103보충대로 배치되다 이후 특전대 친구들은 나 보고 청탁이나 돈을 써서 빠져 나왔구나 반문 한다 그만큼 특전대의 훈련이 고달프다는 것이다 물론 파병하는 것도 훈련과정중의 하나다 특전대의 대열 속에 환자가 아닌 이상 빠져 나올 수가 없다 귀국을 하고 나니 너무 빨리 파월하여 군 복무를 마치려면 1년가량 남았다 휴가 중 동네 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로 어머니는 자식이 귀국하기 전까지 사립문에 태극기를 꽂고 장독대에 정안수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사를 빌었다고 한다.
아직 완쾌 되지 않는 상태에서 휴가를 보내고 103보충대로 향했다 강원도 화천에 있는 27사단 이기자부대(6171부대)수색중대로 배치 받았다 전방의 지원부대로 6개월씩 전방 철책선 근무가 교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7사단 전방 근무지가 DMZ 제7문으로 기억하고 있다 민간통제구역을 지나 구불구불 비상 도로를 따라 장시간 운행 후 우리 대원들이 철책근무를 하고 있었다. 부식수송이 원 거리이므로 닭고기를 먹으려면 살아있는 닭으로 수송 된다 여가시간에 곡괭이로 바둑판 작품 만든다. 밤이면 DMZ안에 들어가 문을 열어주고 열쇄로 잠겨 버린다. 매복 후 아침 되어야 문을 열어준다 물론 그 안은 조사가 안 된 폭발 매설물이 많기 때문에 우리 군만이 아는 길로 다녀야 한다. 주변에는 자연 그대로의 야생 동식물을 볼 수 있다 늦가을 서리 내리는 낙엽 위에 다래 또는 머루는 꿀맛이 따로 없다 산딸기 더덕 등 그 맛 아직도 생생하다 야간 매복 중에 가끔씩 OP에서 비쳐보는 써치라이트가 매복조를 훤하게 밝힌다. 월남에서 다져진 전쟁경험으로 전혀 두려움은 없었다. 군 장비는 소대에 M16소총 몇 자루 지급된 수준이며 아직 칼빈 소총이나 재래장비로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월남에서는 최첨단 장비를 다루어 보았고 실전 전쟁경험으로 우리군의 실태를 비교하면 부족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방의 지역이 악산으로 한참을 행군해도 별로 이동거리는 늘지 않았다 대성산에서의 행군에서는 자면서 걷다가 넘어지고 신발을 벗으면 다시 못 신을 정도다 부풀었던 발이 아파서다 다시 신을 수가 없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가려면 맨발보다는 나으니 신어야 한다. 접속산에서 행군 때 겨울눈이 내려 있는데 눈 위에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날이 밝아 눈 떠 일어나 보니 드러눕는 땅에 그림자처럼 누운 자리만 눈이 녹아 나타났다 그래도 훈련으로 인하여 단련된 몸은 감기 등 몸이 아파 본 적은 없다 화학산의 행군은 어찌 그리 추운지 아마 대한민국의 냉장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반 근무를 마치고 나서 사단장(윤흥정 준장) 숙소(화천 사창리) 초소 경비 후 98연대로 배치되었다 진지구축을 위해 장기간 부대이동을 한다. 춘천 소양강변 후평동 뒷산, 강촌 역 앞산 진지구축(방카를 만듦)에 필요한 자재(물, 시멘트 자갈, 나무, 호파기 등)를 옮기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전남 광산군 소재 상무대 31사단 신병교육대를 시작으로 후반기 원주 통신훈련소, 부평 특전사령부, 김포 공수여단, 남원 유격여단, 양구 오음리 파병훈련, 베트남 전투, 화천 27사단 수색중대(7사단 MDZ 순환근무), 춘천 방카 기지구축 등 6~8개월 이상 머무는 곳 없이 “짧으면서도 굵게 짙게 고비 고비 굴곡이 너무 많았던 군 복무”를 마친 후 1971년 7월14일 31사단에서 만기 전역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때 월남전에 같이 참전했던 김연암(서울 강서) 김영렬(서울 도봉) 최승렬(전남 완도) 정진원(경기 가평) 전우는 알고 지내고 있다
(복무기간 : 1969. 8. 12 ~ 1972. 7. 14)
이렇게 서투른 글 솜씨(용어, 철자 등)에 생각과는 달리 질곡의 순간을 피력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체 펜을 접습니다. 끝.
필자 약력
소속 : 백마30연대(1856부대) 수색중대 공수특전대
파월기간 : 1970. 8. 25 ~ 1971. 3. 4
군별 : 육군
계급 : 병장
군번 : 2106****
성명 : 위경돈
|
첫댓글 대한민국 영웅 이시다 ~~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건강 하십시요 단 결 ~~
수고 하셨습니다 선배님 ...
귀중한 월남파병경험담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요.
고생하셧습니다.공수100기 특수전 42차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12.05 19:50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