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토탈앙 여러분. 좋은 밤입니다. 파스타 이야기 보따리가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이탈리아군 이야기를 잠깐 떠나 1943년 파시스트 정권 말기의 이탈리아 사회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정치와 일반사회 두 편으로 나눠 연재할 계획입니다.
브금은 넷플릭스 영화 <라 마피아(원제 Lo Spietato-무뢰한)>의 주제곡 '말라모레'입니다. 말라모레란 파스타말로 대충 "이뤄질 수 없는 사랑"쯤 됩니다. 오늘 연재할 내용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지만 그냥 파스타 나라 연재에는 파스타 노래를 넣고 싶어서요ㅋㅋㅋㅋ
이탈리아 공화국의 현 행정구역 지도입니다.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의 행정구역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만, 베네치아 옆에 보시면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주와 트리에스테 시가 보일겁니다. 원래 트리에스테가 속한 이스트리아(오헝제국 영토였는데 이탈리아가 1차대전에서 줄을 잘 선 덕에 얻은 영토죠.)반도도 이탈리아령이었는데, 2차대전 종전 후 유고슬라비아에게 뜯깁니다. 그 외에는 변경점이 없고요.
그러고보니 그냥 애초에 "1943년 이탈리아 주 지도"라고 쳤으면 됐을 건데... 방금 생각났네요...
저의 멍청함은 가볍게 넘기시고, 1943년이 되면 이탈리아는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패기롭게 시작한 전쟁이 모든 전선에서 패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으며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권위는 흔들리게 되고, 지지는 사라져 갔습니다.
사실 무솔리니의 권력기반은 굉장히 불안정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며 권력을 "쟁취"했고, 군부를 포함해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한 반면, 무솔리니는 운좋게 정권을 "탈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검은 셔츠단의 '로마 진군'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군 동원도 필요없이 경찰과 카라비니에리만으로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에 휘몰아치던 '빨간 맛'을 경계한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에밀리오 데 보노를 위시로 한 군 보수파가 무솔리니의 손을 들어주며 엉망진창이었던 쿠데타가 성공합니다.
독일의 '퓌러'와 달리 우리의 '일 두체'는 따라서 본인의 탄탄한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군부를 제대로 장악할 수도 없었고, 사회를 철저하게 통제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덕택에 이탈리아에선 안티파 세력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었죠. 무솔리니 집권 순간부터, 이탈리아가 해방되는 그 날까지요.
역사를 보면 내부 불안정이라는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가 외부로의 팽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솔리니 역시 이 방법을 택했습니다. '로마의 영광 재건'이란 프로파간다 하에 벌어진 '스파치오 비탈레'주장과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예죠.
전간기 무솔리니는 독일을 경계하며 프랑스, 영국과 함께 '스트레사 체제'를 구축해 서유럽에서 자국의 외교적 주가의 최대치를 달성했습니다. 영불의 묵인 하에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제국은 지중해와 홍해 일대로 팽창해나갔고 파스타들은 두체를 향해 진심을 담아 로마식 경례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제국이 전쟁으로 세워져 전쟁으로 망한 것과 같이, 두체가 이룩하고자 했던 '노바 로마'는 무력에 의해 세워졌고, 무력을 잃는 순간 모든 힘과 지지를 잃었습니다.
모든 전역에서 벌어진 이탈리아의 군사적 실패들과 이로 인해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앞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지쳐가던 파스타들은 두체를 향해 치켜들던 오른팔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축출된 이후 튀니지에서 날아오른 연합군 폭격기들이 처음으로 이탈리아 본토를 공습하기 시작했고, 전쟁으로 인해 더 망가진 산업력, 무능한 관료들에 의한 식량배급 실패 등 여러 악조건이 겹쳐 물가가 치솟았습니다.
게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추축군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소식은 이탈리아 노동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돌았고, 밀라노-토리노-제노바 세 공업집중지역의 공장들은 점점 빨갛게 변해갔습니다.
1943년 토리노 라세티 공장과 피아트 미라피오리 공장의 노동자들을 필두로 전세계의 파시즘 치하 국가에서 최초로 대규모 파업이 벌어집니다. 파업은 이틀새 아홉 개 공장으로 늘어났고, 노동자들은 경찰과 맞서며 "공습 피해와 높은 물가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3월 말에는 북부 공업지대 대부분의 도시들로 파업이 벌어져 무려 10만여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자신들의 소리를 냈습니다.
놀랍게도, 무솔리니 정권은 이를 무력진압하는 대신 자본계급과 함께 실질적인 양보안을 내놨습니다. 이는 파시즘과 이와 결탁한 부르주아들에 맞선 승리였습니다. 이 승리는 이탈리아의 적국과 동맹국 모두에게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지도자들에게 "이로 인해 파시즘 혁명이 20년은 후퇴했다"고 말했으며, 히틀러는 "그따위 불복종이 어떻게 용인될 수 있나 이해할 수 없다"라 했습니다. 라디오 런던에서는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승리했다는 찬사가 흘러나왔고요.
아직 노동계급을 제외한 다른 파스타들은 이런 거대한 투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파시스트들의 곁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가령 중부 이탈리아의 소규모 농장주들과 남부의 소작농들은 파시스트 정권의 보호를 받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며 강제징집, 지나친 세금, 곡물 가격 및 공급 통제 등의 억압을 받으며 두체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사무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점점 줄었고, 소비재 공장에서는 해고가 일상이었습니다. 그러자 자본가들도 손을 털기 시작했죠.
-이 시기쯤 피아트 역시 파시즘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다가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발을 딛는 순간 편을 바꿔버립니다. 그리고는 연합군 사령부의 지령을 받아 파르티지아노들에게 무기를 몰래 공급한다거나 하는, 무솔리니 입장에선 호박씨를 까며 기업을 유지했습니다.
이탈리아 내의 소요사태는 점점 늘어나고, 파시스트들의 지지기반이 빠르게 녹아내리는 동안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합니다. 19일에는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수도 로마에 폭격기가 날아와 두체에게 선물을 주고 갔습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이탈리아 방어를 위한 독일군의 추가 파병을 요청했지만 콧수염 시키는 상큼하게 씹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지난 편들을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왜 파스타 놈들이 지네 본토도 혼자 못 지킬 상황이었나 설명을 드릴게요.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에서 거진 30만, 동아프리카에서 30만, 러시아에서 20만을 잃고, 점령중인 유고와 그리스에 주둔군으로 60만을 짱박아놨습니다. 남은 군대가 없었어요... 병신들.
그래도 국토방위를 위해 무슨 수가 필요했고, 7월 24일 파시스트 대평의회(이하 대의회)를 소집합니다. '운명의 날'이었죠.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당의 최고 결정기관인 파시스트 대평의회의 모습. 머머리 쉨이 가운데 앉아있네요.
머머리 두체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대의회가 소집되기 전 늙은 여우새끼 두 마리가 짱구를 존나게 굴리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왕국군 전 참모총장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
이탈리아 왕국 국왕 사보이아 왕조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이 두 여우가 의회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던 겁니다.
1943년쯤 되면 이탈리아 군부 내에서 "쓰바 이러다가 우리 연합군에게 줘 터지고 점령당하겠는데? 1차대전 때처럼 얼른 편 바꿔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팽배해있었습니다. 여기서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반파시스트이자 청렴한 원칙주의자로 유명했던 엔리코 카빌리아 원수와 함께 총대를 맵니다. 근데 요 요망한 바돌리오 녀석은 혼자 몰래 국왕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딜을 하죠.
바돌리오: 폐하, 머머리 손에 왕국을 계속 맡겼다간 우리 다 ㅈ망함요
비토리오: 그러게 썅
바돌리오: 제가 카빌리아 원수와 짱구를 굴려서 대의회가 열리는 날 무솔리니 빵뎅이 걷어차기로 함요
비토리오: 그건 좀... 머머리쨩 없으면 누가 총리하는데
바돌리오: 나요
비토리오: 네가? 정말?
바돌리오: 폐하 잘 생각해보세요.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인 카빌리아 장군을 총리직에 앉히면, 우리 피곤해질걸요?
비토리오: 음... 그래 네가 최선의 선택이네. 근데 조건 있음. 나 골방에서 나와서 다시 정치활동 할래
바돌리오: VA BENE
이렇게 권력을 갖고 싶던 두 여우는 대의회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운명의 대의회 소집일 계획대로 바돌리오와 카빌리아 두 원수의 주도 하에 무솔리니를 강도높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장 아홉 시간에 걸친 토의 끝에 19 대 7로 머머리를 비판하는 발의가 가결됐습니다.
머머리는 이를 애써 무시했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한다 말했습니다. 실제로 바돌리니란 늙은 여우 하나로는 무솔리니를 실각시킬 힘이 없었죠.
25일 무솔리니는 국왕과의 주간 정례 회동을 위해 왕이 머무르던 왕가의 별장 '빌라 사보이아'로 향했습니다. 물론 국왕이라는 두 번째 여우가 이미 주판알을 튕긴 상태라는건 꿈에도 몰랐습니다. 무솔리니의 쿠데타를 승인하고, 그를 총리로 임명한 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였습니다. 왕에게는 무솔리니를 실각시킬 힘 역시 있었습니다.
왕은 이 자리에서 머머리에게 레드카드를 뽑아들었고, 바돌리오가 총리직을 이어받기로 했다 말합니다. 머머리는 ㅈㄴ멘붕상태에 빠져 터덜터덜 거리며 왕궁을 내려왔고, 미리 기다리던 병사들이 무솔리니를 체포했습니다. 로마 진군 이후 21년만에, 베니토 무솔리니는 권좌에서 축출됐습니다.
무솔리니 실각 소식이 퍼지자 반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파스케스와 독수리 등 파시즘을 상징하던 장식과 휘장등이 길거리와 공공시설 등에서 파스타들에 의해 뜯겨나갔고, 파시스트 본부는 불길에 뒤덮혔습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즉각적 종전을 요구하는 깃발을 만들어 행진했고, 여성들은 군인들에게 붉은 카네이션을 나눠줬습니다.
그러나 1943년 파시스트 정권의 몰락은 민중의 손이 아닌 위로부터의 쿠데타에 의해 붕괴됐습니다. 권력은 민중에게가 아닌군부와 부르주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전통적' 지배계급의 손으로 돌아갔을 뿐이었습니다.
바돌리오 수상 체제와 국왕은 민주주의 따위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아무런 계획도, 정책도 없이 일단 군부독재와 왕정을 유지하겠다는 목표 하나로 길거리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곧바로 연합군과 접선해 강화를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바돌리오 정권은 평화가 필요했는데,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던 둘 중 하나가 바로 전쟁에 지친 군대가 길거리에 있는 그들의 가족, 친구들과 함께 로마로 총부리를 겨누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치 독일이었죠.
연합군과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고, 바돌리오 정권은 독일군에게 정권이 바뀌었어도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을 배신하지 않는다며 구라를 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탈리아에 불어닥친 자유의 바람을 계엄군의 군홧발과 총검으로 무력화시키는 작업에 시작했습니다. 바리에서는 계엄군의 발포로 23명의 군중이 죽고 70여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밀라노에서는 공장 정문들에 기관총 분대가 배치되어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 참가를 저지했습니다. 파시스트 정권 이후 최초의 자유화 바람은, 이렇게 피와 함께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9월 3일, 드디어 이탈리아 왕국과 연합국과의 강화협정이 마무리됩니다. 협정 조항들은 사실상의 무조건 항복에 가까웠고, 이탈리아에겐 연합국과 전범국 사이 그 어딘가 애매한 위치의 '공동 교전국'이란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이전에 파르티지아노 편에서 설명드렸지만, 이 시기까지 바돌리오는 놀랍게도 군대를 장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원래 연합군의 계획은 로마가 위치한 라치오 주에 미군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탈리아 정부를 보호하고 독일군의 중부지역 진입을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위해서는 이탈리아 정규군의 직접적인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공수부대만으로 이탈리아 중부의 평야지대에서 독일군 기갑부대에 맞설 수는 없었으니까요.
여기서 놀라움의 연속으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군의 연합군 지원에 대한 확답을 회피했습니다. 강화협정이 끝난 다음인데도요!!
결국 연합군사령관 아이젠하워는 개빡친 나머지 로마 장악 계획을 취소하고 연합군을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의 살레르노에 상륙시켜 남쪽으로부터 직접 치고올라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9월 8일 이탈리아가 빤쓰런 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이는 파스타라면 치를 떨고 있던 연합군 사령부를 제외한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연합군사령부: 파스타 ㅆ새끼 이러면 어떻게 할건데 개객꺄
바돌리오&국왕: 아니 님아... 이러면 우린 우짜라고요...
독일: 씨벌럼이?????
전선의 독일군: 미친???
전선의 파스타: 맘마미아!?
시민 파스타: 오옼ㅋㅋ 전쟁 끝남??
결국 바돌리오는 그날 오후 공식적으로 이탈리아군에게 연합군과의 전투 정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사흘간 바돌리오와 국왕의 행보는 아주 눈물이 나올 지경입니다,
9월 8일 휴전 발표
9월 9일 로마 탈출 빤스런
9월 10일 반도의 발굽 부분인 브린디ㅅㅣ로 빤쓰런
네... 아까 제가 바돌리오 정권이 두려워하던 두 가지 중 하나가 낙지 독일이라 했죠? 개빡친 낙지가 잡으러 오기 전에 헐레벌떡 튄겁니다...
당연히 독일 역시 개빡쳤죠. 개같은 파스타 새끼들 절대 배신 안 한다더니 뒤에서 몰래 양키들이랑 협잡질이나 하고 있었으니 말이예요. 독일군은 즉시 '아크셰 작전'을 개시해 이탈리아 반도와 해외령들을 점령하고,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 시킵니다. 저항하는 파스타들은 학살당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후방에 있던 부대에서는 당연히 파스타들의 탈영이 줄을 이었지만, 낙지들과 함께 주둔하던 전선과 유고, 그리스 일대의 파스타들은 안타깝게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이 너무 빠르게 움직였죠.
하지만 많은 파스타들은 독일에게 개기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스 케팔로니아 섬에서는 1만명의 이탈리아군 수비대가 사단 투표를 통해 항전을 결정,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전투와 학살을 포함해 9천 6백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스와 유고 일대에 주둔하던 파스타들도 독일군에게 무장해제 당하기 전 현지 빨치산 애들을 몰래 불러 무기고를 오픈했습니다. 뭐 그리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뤘죠.
로마에서 브린디시까지. 바돌리오 놈 멀리도 도망갔죠? 위에서 까먹고 말 안했는데 이놈들 쫄보라 배타고 도망갔습니다. 육로로 가다가 낙지군 만날까봐요ㅋㅋㅋㅋㅋ
그리고 브린디시에서 작성된 바돌리오 정부 최초의 문건은 친필로 작성됐습니다. 뭐 거창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요, 문자 그대로 빤쓰런 하느라 타자기를 안 가져 왔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브린디시에 숨어있던 바돌리오 정권과 국왕은 10월 30일 연합군이 나폴리를 점령한 후 나폴리에서 이탈리아 남왕국 수립을 선포, 대독선전포고를 날립니다.
그란 사소
남이탈리아는 연합군의 수중에 있었지만, 독일군은 반도의 북부와 중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낙지 퓌러는 오토 슈코르체니와 팔슈름예거를 무솔리니가 억류돼있던 아브루초 주 그란 사소 국립공원 내의 한 산장으로 파견해 머머리를 구출해냅니다.
그리고는 북부 이탈리아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하 살로 공화국)을 세워 무솔리니를 거기 대빵으로 앉히죠. 살로 공화국은 낙지 독일의 명백한 괴뢰국이었고, 국가의 첫 명령은 이탈리아 내 유대인 색출 및 체포였습니다.
이탈리아 내전의 시작. 회색 영역은 이탈리아 남왕국, 중부의 노란색은 독일군 통제지역, 북부의 초록색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이탈리아가 점령중이던 크로아티아 일대는 말 잘듣는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권에 돌려줬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에는 두체가 돌아왔고, 남부에는 영미의 개가 된 바돌리오 정권이 나폴리에 둥지를 틀며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계속됐습니다. 오히려 잔혹한 독일군의 등장으로 무솔리니 정권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폭력이 반도 곳곳에서 발생했죠.
전체적인 상황은 개판이었지만, 이탈리아 통일 이후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었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새로운 정신이 반도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굴종에의 거부", "벨라 차오", 바로 파르티지아노 정신이었죠. 독일의 이탈리아 점령과 함께 위대한 민중해방 전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이 시기 이탈리아의 반 파시즘 세력은 세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비롯한 전통적인 조직적 안티파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무솔리니가 축출된 7월 25일 이후로 새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열렸다고 느끼기 시작한 이탈리아 청년층의 자생적 반응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파시스트들 사이의 반 파시즘으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편바꿈을 택했습니다.
주류는 당연히 첫 번째와 두 번째였습니다. 공산당과 행동당, 자유당과 기민당을 비롯한 좌우의 안티파 정당들이 파르티지아노 활동의 기본 틀을 만들었고, 두 번째의 이탈리아 청년들이 새 바람을 타고 해방전쟁에 투신했습니다.
좌파 내에서도 소련식 스탈린주의냐, 온건 사회민주주의냐가 갈렸고, 우파 내에서도 영국식 입헌군주제냐 미국식 공화제냐를 두고 노선 갈등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스페인 내전과는 다르게 모두 최우선 목표를 이탈리아 해방과 파시즘 축출로 잡았기에 전쟁에 지장이 갈 만한 충돌은 없었습니다.
-여담으로 네 주류 노선간 투쟁은 미국식 공화제와, 미국과 손을 잡은 우파의 기독교민주당의 승리로 끝납니다. 여기엔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체제를 놓고 영국과 미국의 알력다툼이 상당했습니다.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를 손바닥 안에 둘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영국의 말을 잘 들을 '강아지'로 바돌리오 수상과 국왕의 권위주의 체제를 지지했습니다. 반면 미국은 전후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동일한 이념적 정치체제, 즉 민주공화정을 지지했습니다. 지금 이탈리아의 풀네임인, "REPUBLICA ITALIANA" 를 보면, 아니 보지 않더라도 미국이 당시 연합국의 물주였음을 생각하면 이 알력다툼은 시작과 함께 미국이 이긴 거나 다름이 없었죠.
1944년부터의 파르티지아노 전쟁은 제가 이미 연재를 해둔 상태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찾아 읽으시면 될 겁니다.
이걸로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의 정치적 상황은 간략하게 서술이 됐네요 내일은 노동과 경제 등 일반 사회의 모습을 설명드릴 겁니다. 이탈리아가 얼마나 호구였고 얼마나 준비가 안 됐었고, 왜 그리도 찐따같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집약될 겁니다.
그럼 재밌게 읽어주셨음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