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린 고구려역사를 중국이 주워들고 자기들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중국 정부와 학계가 노력이 집요하고도 적극적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사람이라면 우리의 선조들이 세운 하나의 왕조에 해당하는 고구려 왕조는 7세기 말 신라와 당나라의 협공으로 멸망하고 다시 그 땅 위에 대조영이라는 장군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발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왜냐하면 지금도 뉴라이트를 표방하면서 실제적으로 거의 매국노 집단에 해당하는 자들이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하는데 정신이 없는 자들의 발호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역사에는 지금의 중국의 동북지방이라고 부르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대부분을 영토로 했던 고구려,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과 중국의 동해안 지역을 영역으로 하고 일본에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던 해양국가 백제, 그리고 한반도 남단의 동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신라가 공존했던 시대를 우리는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700여 년을 넘게 공존했던 삼국시대는 신라가 당나라라는 외세를 불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협공함으로 해서 백제의 한반도 땅은 신라의 내부식민지화 되고 광대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 있었던 백제의 영토는 중국의 영토에 속하게 되고 만주의 고구려 땅에는 발해라는 고구려의 후계국가가 세워져 250여 년 존속했다가 만주지방에서 흥기한 거란에게 멸망당했다는 기록이 정사다. 그런데 외세에 의존하여 동족국가를 멸했던 신라로써는 자신들의 매족행위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그들은 신라사관이라고 포장한 사대사관이라는 독특한 역사관을 만들어냈다. 첫째가 작은 나라는 작은 나라답게 큰 나라를 받들어야 하고 그리고 한반도 남부의 조그만 부분만을 차지한 후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하나도 놓지 않고 골품제라는 신분제를 유지하며 백제 유민을 노예화시켜 놓고 통일신라라는 용어로 미화했다. 한반도 내의 백제 땅을 점령한 행위를 통일이라고 한다면 당나라에 넘어갔다가 다시 그 땅위에 세워진 발해라는 나라는 전혀 우리 한민족과 상관없는 국가가 됨에도 그들은 전혀 개의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두고 이중성이라고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버렸는데 만주의 고구려 땅과 그 땅 위에 세워진 발해의 존재는 우리 역사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지는 자명하지 않는가? 즉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의 신라사관과 식민사관을 신봉하는 주류역사학자가 버린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주워들고 그렇담 우리가 가져야 되겠다고 말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 어려운 것이 민족문제보다도 이념전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남북한의 정치권력들도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명분이 되고 있다.
2. 중국과 한국의 최초 국경조약 및 조약 이후에 불거진 한중 두 나라 후계국가 사이의 영토분쟁
신라의 요청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백제 및 고구려는 물론 신라까지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세 나라에 각각 도독부를 두고 총독을 파견했다. 이에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7년간의 전쟁 끝에 당시 티베트에서 흥기한 토번과의 분쟁으로 당나라는 한반도의 당군을 철수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와 당나라는 휴전하기로 합의하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상 최초로 국경조약을 체결했다. 신라는 대동강 이남으로 영토를 제한하며 대신 당나라는 신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가 그 중요 내용이었다. 대동강 이남의 땅으로 만족하겠다는 보증으로 신라는 멀쩡했던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철저히 파괴하여 흔적도 없이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200여 년 후에 한반도에는 신라가 망하고 새로 선 고려왕조는 고구려의 후계국가를 천명하고 국호도 고려라고 했다. 그 사이 중국 대륙에서는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서고 중국의 북방에서 흥기한 거란족의 요나라는 발해를 멸하여 병합하고 중국의 송나라와 남북으로 대치하는 정세가 조성되었다. 그 사이 고려는 드디어 대동강을 넘어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자 북방의 강국으로 등장한 거란이 고려에 도전해왔다. 즉 발해를 병합한 거란과 고려 사이에 고구려의 후계국가라는 지위를 놓고 대립한 것이다.
당시 거란의 상황은 당나라가 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수습하여 다시 중국에 통일왕조를 세운 송나라를 주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의 배후에 해당하는 고려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에게 고구려의 후계국가라는 지위를 인정해주고 후방의 안전을 꾀하려고 했던 거란은 대동강 이북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당시에는 여진족의 활동무대였던 땅에 대한 영유권을 고려에 양보했다. 그래서 고려의 영토는 신라와 당나라가 대동강과 동해의 원산을 잇는 선을 경계로 맺은 국경조약 이후부터 원나라에 항복하기 직전까지 신의주와 함흥을 잇는 선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만주지역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요나라가 망하고 다시 몽고초원에서 일어난 몽고족이 송나라의 지원 하에 금나라를 멸하더니 마침내 한족 왕조인 송나라마저 점령하여 원제국이 탄생했다.
3. 매국노들에 의한 대동강 이북 지역에서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의 설치
1) 쌍성총관부의 설치
1258년(고종 45년) 원나라의 장수 산길(散吉)과 보지(普只)가 동여진(東女眞)을 경유하여 고려의 천리장성 이남을 넘어 화주에 이르자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楮島)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竹島)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은 등주 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 부사 김선보(金宣甫) 및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은 원래 중국의 영토로써 고려가 나당간에 체결된 국경조약을 위반하여 점령했다고 하면서 그 땅을 들어 원나라에 바치고 투항했다. 중앙 정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사건으로, 원나라는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총관에 조휘를 임명하여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다스리게 했다. 쌍성총관부의 총관은 한양 조씨 집안이 세습하여 조휘의 아들 조양기, 손자 조림, 종증손 조소생이 세습하였고, 그 밑의 천호도 탁청의 후손이 세습하였다.
2) 동녕총관부설치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대동강 이북지역의 고려 영토인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최탄 역시 대동강 이북지역의 땅은 원래 송나라의 후계국가인 원나라의 영토라고 원나라 황제에게 탄원했다.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 칸은 자비령을 경계를 삼아 그 이북의 영토를 모두 원나라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 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 이에 고려 원종은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로 입조하여 쿠빌라이 칸에게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1275년(충렬왕 1년)에는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된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인 원나라는 1290년 쌍성총관부에 대한 영유권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의 치소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4. 공민왕에 의한 대동강 이북 지역의 실지 회복
1) 쌍성총관부
쌍성총관부 탈환은 1356년(공민왕 5년)에 시작되었다. 1356년 음력 4월에서 음력 8월 사이에 추밀원부사였던 유인우(柳仁雨)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공민왕으로부터 쌍성총관부 탈환을 명령받고 대호군 공부보(貢夫甫), 종부령 김원봉(金元鳳),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 등과 함께 출정했다.
이때 조휘의 증손자인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조휘의 손자인 조돈(趙暾) 및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의 성문을 열었다. 쌍성총관부는 함락되었고, 조소생은 도망갔다. 이후 유인우는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하여 나머지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관할 지역을 수복했다.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운 이자춘은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쌍성총관부의 초대 총관이었던 조휘의 후손인 조돈도 쌍성총관부 함락에 적극 협력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조상의 배신을 청산하고 새로이 고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조돈은 조선 건국에도 관여하여 개국 공신에까지 이르렀다.
2) 동녕부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고려에서 참형당한 그의 부친 기철에 대한 보복으로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 주둔하면서 고려를 침공하려고 했다. 1369년(공민왕 18년) 12월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원수,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 원수로 삼아 군사 1만 5천을 주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이성계는 1370년 음력 1월에 동북면에서 황초(黃草), 설한(雪寒)의 두 영(嶺)을 넘고, 압록강과 파저강(婆猪江)을 건너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부근 주민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결국 요하(遼河) 동쪽의 땅은 명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5. 원나라의 후계국가인 명나라의 철령위반환 요청과 요동정벌 그리고 위화도 회군
1368년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대륙에 한족 왕조를 세운 명태조 주원장이 철령 이북의 땅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임으로 명나라에 귀속시켜 철령위를 설치하고 병참군영으로 만들 계획이라는 사실이, 명나라에 다녀온 설장수(偰長壽)를 통해 알려졌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 곳에 성(城)을 신축하여 대비케 하는 한편, 박의중(朴宜中)을 다시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 ·고원(高原) ·영흥(永興) ·함흥(咸興) 등과 공험진(公險鎭)까지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철령위 설치를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최영(崔瑩)이 중신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논의한 결과 명나라와 화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 3월 명나라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왕득명(王得明)을 고려에 보내 요동(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70여 개의 병참(兵站)을 두는 철령위 설치를 정식으로 통고해 오자, 급기야 우왕(禑王)은 요동 정벌을 명하게 되었다. 이에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우군(右軍)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左軍)도통사로 삼아 3만 8천여 명의 군사를 평양에서 출격시켰다. 결국 이성계의 회군으로 요동 정벌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철령 이북도 명나라에 귀속되지는 않았다.
6. 백두산정계비와 간도영유권문제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은 백두산 정상에 국경을 짓기 위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조선은 청의 요청으로 조청간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압록강을 거쳐서 백두산 그리고 두만강 지역을 조사했다. 이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조,청을 남북으로 구분하는 기준 중 서쪽 압록강은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하는 것이 명확해서 문제가 없었으나 동쪽 두만강은 백두산 방면으로 서두수, 소홍단수, 대홍단수 등 많은 소하천이 있었는데 이 중 어느 것도 백두산 천지와는 무관했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과 청은 백두산 지역을 조사 후 정계비를 세우고 다시 백두산 동쪽경계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토문은 두만을 뜻하거나 조선, 청의 경계를 두만강으로 인식한 많은 자료가 있다.
19세기 말 고종 때 한반도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몰래 간도로 이주했다. 비슷한 시기 청은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에 대해 경계하면서 만주(동북)지역에 대해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대대적 이민을 시행했다. 청과 조선은 각각 1878년과 1881년에 봉금을 풀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간도지역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간에 마찰이 생기면서 청과 조선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토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백두산정계비에는 청과 조선의 국경을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청이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하는 한편 조선은 이를 비석에서 더 가까운 쑹화강의 상류라고 주장했다. 이때 을유(1885년), 정해(1887년) 강계회담을 통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1903년(광무 7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간도(북간도)지역의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았는데, 청나라는 서구 세력 때문에 이를 신경쓰지 못했다.
한편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가 일본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하게 되고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대한제국의 행정,사법에서 군, 경찰에 대한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회령에 집결했던 일본 소속의 헌병, 경찰이 간도로 들어간 후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지역을 직접 관할하게 되었다.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 사이에 간도 협약이 맺어지는데 같은 날, 만주 5안건 협약을 청,일본간에 체결되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간도협약으로 철도부설권, 탄광개발권 같은 조항들이 포함되었는데 중요한 내용들은 별도의 만주5안건협약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만주5안건협약의 시초는 러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이 조약에 장춘 이남 지역에 대한 철도부설권이 일본에 주어지고 일본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며 이 회사가 중심이 되어서 남만주철도를 관리,운영한다는 내용이다. 이와 더불어 여순, 대련항의 조차는 포츠머스 조약상 청의 승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여러 이유로 청과 일본은 최종적으로 만주5안건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병합된 뒤에 일본의 식민정책에 의해 쫓겨나서 이주한 간도는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에 일제는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일본 국적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 지역에 경찰을 두어 치안을 유지해야 하겠다고 주장하여 헌병과 경찰을 파견했다. 1931년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간도에 '간도성'을 설치하고 성도는 연길에 두었다. 현재 간도지역은 1962년 조중변계조약으로 중국의 영토로 확정되어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되었고 주도는 연길이다.
7. 남북통일 후 간도영유권 주장의 근거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以其人之道還治其人之身(이기인지도환치기인지신) 즉 말을 한 사람에게 그 일을 직접 시키야 한다는 뜻이다. 36계 중 “상대방의 계책을 이용하여 상대방으로 상대방을 을 이용하여 자신의 계채을 쓴다”는 뜻의 장계취계(將計就計)라는 고사성오도 같은 말이다.
1997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행정구역은 홍콩(Hong Kong Ireland), 구룡반도(九龍半島), 신계(新界:New Territory) 등으로 되어있다. 즉 홍콩은 협의로 말하면 홍콩아일란드를 말하고 광의로 말하면 구룡반도와 신계를 합친 특별행정구를 뜻한다.
홍콩행정구의 연혁을 살펴보면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의 결과 1842년에 채결된 남경조약으로 80㎢ 넓이의 홍콩섬이 전쟁보상금 명목으로 영국에 영구적으로 할양되었고, 다시 1860년 2차 아편전쟁의 결과 체결된 1차 북경조약으로 47㎢ 면적의 구룡반도가 추가로 영구할양되었으며 후에 청일전쟁으로 참패하여 더욱 허약해진 청나라 정부를 압박하여 1898년에 맺은 2차 북경조약으로 신계와 235개의 부속도서 총 976㎢에 달하는 면적의 땅을 1898년부터 1997년까지 99년 간 조차했다. 이윽고 신계의 조차기간이 가까워지자 1982년 영국의 대처수상이 중국을 직접 방문하여 홍콩의 반환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영국의 당국자들이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외교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즉 영국은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아편전쟁의 전쟁보상금 대신 영국에 영구 할양되었기 때문에 반환대상에서 제외되고 신계에 대해서만 반환하겠다고 나섰다. 당황한 영국은 당시의 실권자 등소평이 나서서 유명한 ‘등소평선언’을 대외적으로 공포했다. 등소평선언은 ‘제국주의시대에 중국과 행해진 모든 불평등조약은 모두 무효다!’ 가 주요골자다. 제국주의 영국이 추악하게 자행한 아편전쟁에 대한 자괴심도 있고 홍콩섬을 지키기 위한 물리력 사용에 한계를 느끼게 된 영국은 어쩔 수 없이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포함한 일체의 땅을 중국에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등소평선언의 골자가 제국주의시대에 맺은 불평등선언은 무효라고 공포한 중국의 주장은 먼 훗날 한국이 한 나라로 통일되었을 그대로 중국에 적용시킬 수 있다. 즉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뺏은 후에 한국정부의 의사에 반하여 청나라와 맺은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가 됨으로 그들의 자연히 간도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음은 중국 스스로가 주장한 것이다. 이런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만주에 기반을 두었던 고구려라는 나라를 자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학계를 점령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의 제자들을 몰아내는 일이 전제조건이다. 도대체 고구려를 포함시키지 않는 3국을 신라가 한 나라로 통일했는데 어떻게 만주 땅이 우리 영토라고 주장할 있겠는가? 중국의 동북공정의 이론적인 토대는 실제로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이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는 결코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입도 뻥긋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