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1685-1750)
헨델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둘은 만난 적이 없음
10세에 고아가 되어 삼촌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오르간 전문가로 엄청난 작품을 남겼고 <평균율곡집>을 만듦
<토카타아 푸가 D단조>와
<리날도> 작품에 등장하는 <날 울게 하소서>가 유명함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바흐가 죽은 뒤 한 상점에서 포장지로 발견된 명곡이며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은 바흐 사후 160년
스페인 상점에서 13세 꼬마가 발견하였으며
이 꼬마가 첼로의 거장 파블로카살스이다
모차르트(1756-1791)
모차르트의 부모는 7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딸 마리안나와 볼프강만 키우게 됨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 옆에서 흉내를 내는 3살짜리 볼프강에게 관심이 옮겨감
볼프강이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는 일화가 그림으로 남아있는데 이때가 놀랍게도 4살이었음
바이올린 교본을 만들던 아버지가 볼프강에게 바이올린까지 가르침
아버지와 함께 연주여행을 하게 된 6세의 볼프강은 궁전에 연주하러 갔다가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준 소녀에게 청혼을 하는데 그 소녀가 프랑스혁명 때 처형된 마리앙투아네트였음
8세에 교향곡, 12세에 오페라, 14세에 현악사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해 23개의 작품을 남김
피아노 변주곡은 22개가 남아 있어 그중 21번 <엘비라 마디간>은 영화 주제곡으로 유명
모차르트는 22세에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프랑스의 구전동요 12곡을 바탕으로 만든
피아노 변주곡<아, 어머니 말씀드리죠>는 우리가 아는 작은 별이다
한 신사가 죽은 자를 위한 <레퀴엠>을 작곡해 달라는 부탁에 거절하기 위해 비싼 값을 불렀으나
어쩔 수 없이 작곡하는 도중 쇄약 해져서 제자 쥐스마이어가 받아 적었으나 작곡 도중 사망함
베토벤(1770-1827)
16세 때 일 년 정도 하이든의 제자였으나
과제를 자주 베껴가거나 작은 선생을 두고 숙제를 하거나 대신 써준 과제물을 내거나
이미 제출했던 것을 다시 내서 분노한 하이든이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는
베토벤에게 무관심했다고 함
29세(1797)에 비창을 발표,
이후 만들어진 24개의 피아노소나타(모두 32개)는 피아노의 성경으로 불림
유명한 피아노소나타 14번 <월광>과 같은 제목의 드뷔시의 피아노곡도 역시 아름다움
베토벤이 32세 때 남긴 하일리켄슈타트 유서는 귀가 들리지 않는 고통을 적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창작을 위해 살겠다는 의지를 적었으며 실제로 훨씬 오래 살았고 유서는 죽은 뒤에 발견됨
그 이후에 유명한 <영웅> <전원> <황제> 등을 작곡하였고,
청력을 완전히 잃은 40세에 <엘리제를 위하여>
54세에 <합창>을 발표
죽기 전에 만든 5개의 현악사중주 곡 <대푸가>는 최고의 걸작임
슈베르트(1797-1828)
지저분하고 씻지도 않고 유행에도 관심이 없고
시도는 했으나 여자친구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음악에만 열중하게 됨
그의 성격은 아주 급해서 작곡할 때도 아침에 시작한 곡을 저녁에 끝내버렸고 곡을 쓸 때는 항상
다음 곡의 구상을 떠올렸으므로 쓰고 있던 곡을 서랍에 집어넣고 다음 곡을 작곡하는 일이 잦아서
8번째 교향곡 (미완성교향곡)을 포함한 여러 개의 작품들이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았음
1827년 평생 동경하던 베토벤을 병상에서 만났으며
베토벤 버금갈 만큼의 현악사중주를 작곡했고 그 깊이까지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함
멘델스존(1809-1847)
하이든이 77세로 사망한 1809년 태어남
은행가 집안의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꽃미남은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음악원 교장이며 동시에 오케스트라 지휘자였음
16세에 작곡한 현악기연주자에겐 꿈같은 현악팔중주곡 <옥텟>
20세에 작곡한 현악사중주 1번 <칸초네타> 2번 <그것이 진실인가요> 도 많이 연주되며
전주가 거의 없는 <바이올린협주곡>도 가장 사랑받는 곡이다
여행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여행 중 보았던 핑갈동굴을
화가 수준의 <핑갈의 동굴>을 그렸고 <핑갈의 동굴 서곡>을 작곡하였음
음악에 소질이 있는 누나 파니가 자신의 작품이 출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곡 도중
피아노 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마지막 작품인 현악사중주 <파니의 죽음>을 작곡
스승 괴테의 죽음을 이겨냈지만 유달리 사이가 좋던 누나가 죽자
자신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6개월 뒤 38세에 눈을 감았음
슈만(1810-1856)과 브람스(1833-1897)
멘델스존보다 한 살 어린 슈만은 음악 재능을 살릴 것이냐
부모님이 좋아하는 법률가가 될 것이냐 고민하다가 음악의 길을 선택함
자신의 딸을 피아니스트로 키워낸 비크교수에게 배우다가 무리한 훈련 탓에
손가락이 부러져 우울증이 시작됨 그래도 첼로와 작곡을 배우기 시작
"모자를 벗어라, 천재다"
이 말은 피아노를 치는 쇼팽에게 한 말이며, 또 한 명의 천재 피아니스트 브람스를 호평함
친구 멘델스존과 영향력을 넓히던 슈만은 1834년 잡지사를 차려 <신음악시보>를 만들어
음악과 글쓰기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으며 놀랍게도 이 잡지는 오늘날까지 발행되고 있음
여유를 찾은 슈만은 이미 약속한 약혼을 취소하고 9살 차이 나는 클라라와 결혼하려 했으나
아버지 비크 교수는 강력하게 반대하며 6년 안에 결혼하면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는다는 서류를 작성함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결혼드라마는 6년의 지루한 소송 끝에 마무리,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기에 빠질 즈음 친구 요하임(1831-1907)이 브람스를 소개,
슈만과 클라라와 함께 삼각관계를 유지하였음
슈만의 피아노오중주 <장송행진곡>과 아름다운 피아노사중주 <안단테 칸타빌레>를 작곡했으나
정신병 증세로 라인강에 뛰어들어 자살 시도 후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클라라와 브람스가 계속 간호했으나 46세로 사망함
브람스는
긴 수염 덕분에 산타클로스를 연상시키며 자신보다 나이 들어 보였음
그가 만든 현악육중주 1번 <클라라에게>였고
피아노오중주 OP.34는 브람스의 젊은 열정을 보여주며
그 당시 대중음악이었던 <네 손을 위한 16개의 왈츠>를 작곡
그중 15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곡임
피아노 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브람스의 대표곡 피아노연탄곡 중 하나인 <헝가리 무곡>
20여 개의 현악사중주곡을 만들었으나 세 개만 출판하고 나머지는 모두 찢어버렸다고 함.
그중 OP,51 1번 <절규>는 어머니와 사별 후 작곡
2번 <F, A, E>는 독일어로 frei aber eisam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 라는 뜻
잠시 좋아한 연인 바로 슈만의 딸에게 실연당했으며
사랑했던 클라라 슈만이 사망한 다음 해 평생 독신이었던 브람스도 떠남
드뷔시(1862-1918)
정확히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순간 받은 느낌을 화폭에 담는 미술의 인상파 용어를 빌려와
새롭게 만든 인상주의 음악을 시작하고 완성함
10세에 뛰어난 교육자 프뢰벨여사에게 피아노를 베우기 시작
11세에 파리음악원에 입학
12세에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2번을 협연
17세에 악보 초견 대회에서 1등 수상
22세에 학교가 휴강하자 자신이 직접 학생들에게
현란한 양손 트릴, 새로운 화음의 연속, 환상적인 아르페지오 등을 강의하다가 교장에게 진압됨
그때 교장에게 새로운 발상이지만 그 방법으로는 로마대상은 힘들 거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고
곧바로 로마대상을 수상함
(로마대상은 파리음악원 주최로 베를리오즈는 4번 만에, 라벨은 부패한 심사위원 때문에 수상에 실패)
32세(1894)에 현대음악의 이정표라 할 수 있는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 전주곡>과
벨기에의 극작가 베테를 링크의 원작을 오페라 <텔레아스와 멜리장드>로 이 곡엔 아리아나 중창이 없음
<피아노를 위한 영상>과 <노다메 칸타빌레>에 등장한 <기쁨의 성>은 치기 힘든 난곡이라고 함
드뷔시는 10년을 함께한 동거녀를 두고 결혼하려다 동거녀가 권총자살을 시도하였으며,
첫째 부인과 이혼할 때도 이미 다른 사람과 교제 중이어서 부인이 권총자살을 시도하였음
딸을 위한 피아노모음곡 <어린이의 세계> 중 6번 <골리워그의 케이크 워크>는 유명하나
딸 슈슈는 이곡 발표 1년 후 병으로 죽고 1918년 드뷔시도 암으로 사망함
라벨(1875-1937)
14세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드뷔시와 반대로 대중의 지지는 얻었으나 정작 음악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함
관현악, 화성악, 피아노음악의 대가로
신기한 화음을 많이 만들어 현대 화성의 아버지로 불리나 자신은 화성학 수업에 낙제
피아노의 대가로 유명하나 피아노 수업에도 낙제하여
자퇴 2년 후 작곡과에 재입학하여 가브리엘 포레의 수업을 듣게 됨
1899년 스웨덴의 공주가 죽자 추모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을 작곡
1905년 로마대상은 라벨사건으로 탈락,
구노와 로망롤랑이 장부에 항소하여 부정한 교장이 해임되었으나
다음 해에 대신 돌아온 더 좋은 레종드뇌르상을 보기 좋게 거절함
39세 때 1차 세계대전에 운전병으로 참여하나 다리부상으로 제대 후
1917년 피아노곡 <쿠프랭의 무덤> 작곡
무소르크스키가 작곡한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는데 원곡보다 더 유명해짐
1953년 53세에 <볼레로>는 관현악 기교를 발휘한 걸작으로 남음
독신이었던 그는 어머니를 잃고, 많은 영향을 많았던 드뷔시가 사망한 후
택시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부분 기억상실로 작곡을 하지 못하고 1937년 62세로 사망함
코른골트(1897-1957)
영화음악은 영화제작을 위해 새로 작곡된 곡과
원래 만들어진 음악을 삽입하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코른골트는 어린 나이에 바그너 수준의 작곡 실력에 도달했고 낭만주의의 성숙한 작곡기교를 지녔음
코른골트는 7세에 작곡을 시작
말러는 9세 신동을 챔린스키(1871-1942)에게 소개함
11살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눈사람>을 작곡
최초의 피아노삼중주곡을 13세에 출판 인상주의적인 선율은 이미 어른이었음
15세에 작곡한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곡에 피아노가 추가 악기로 편성된 <신포니에타>를 들은
시벨리우스는 '젊은 독수리'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우리의 미래다'라고 극찬함
19세에 <폴리크라테스의 반지>와 불륜을 소재로 한 관능적 오페라 <비올란타>를 작곡한 것도 놀랍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고 정신적으로 성숙하였음 이때 만난 루지와 27세에 결혼함
오페라 <죽음의 도시> 중 <마라에타의 노래>는 푸치니 냄새를 풍기면서도 현대 감각이 빛나는
감동의 선율을 들은 푸치니는 '독일음악의 위대한 희망'이라고 극참함
현악사중주 1번 <생명>의 느린 악장 <아다지오 콰지 판타지아>는 푸치니와 레스피기, 라벨을
모두 만나는 환상적인 느낌의 곡
1933년 현악사중주곡 2번 <아침>을 완성 피치카토와 스케일을 사용하여
꾸밈음처럼 꺾어지는 화음을 사용하는 기법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잘하던 과거를 말해주며,
마지막 악장은 격렬하고 기교적인 사중주를 위해 작곡한 유일한 왈츠곡
1935년 <한여름 밤의 꿈>을 훌륭한 편곡한 것을 계기로 영화음악 작곡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함
1936년<안소니 어드버스>로 아카데미 작곡상
<로빈후드의 모험>으로 2번째 아카데미 상 수상
46세에 미국 시민권 획득하였으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귀향하여
자신이 만든 영화 음악 선율을 모아 만든 걸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만들고
빈에서 클래식 작곡가로 활동하려 했으나 12 음기법의 음악이 지배하고 있어 인정받지 못함
60세에 사망하자 오페라하우스에서 사과의 의미로 조기를 게양하였으나
미망인 루지코른골트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늦었어"
스트라빈스키(1882-1971)
아버지의 권유로 법대에 갔으나 음악에 정신을 팔다가 졸업 후 님스키코사코프의 제자가 됨
첫 번째 작품은 <교향곡 E플렛 장조> 2년 뒤 관현악곡 <꽃불> 이 곡을 듣은
디아길레드가 발레곡을 의뢰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불새>를 작곡
쇤베르크의 충격적인 성악곡 <달에 홀린 피에로>를 듣고
발레곡 <봄의 제전>은 나중에 오케스트라 연주곡으로 재편집되어 성공을 거둠
스트라빈스키의 전위적 실험으로 성악 발레곡 <여우>
내레이션이 삽입된 앙상블 <병신이야기>
바로크 음악으로 착각할 만한 발레곡 <풀차넨라>
발레곡 <결혼>에는 민요를 작곡하더니
그리스 문학에 빠져 시인 소포클레스의 작품으로 만든 오라토리오 <오이디푸스왕> 작곡
이때부터 신고전주의를 표방하며 바이올린 솔로가 등장하는 <뮤즈를 이끄는 아폴론>
다윗의 시편을 토대로 <시편 교향곡>이 탄생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출생했지만 24세에 그리그처럼 사촌 동생과 결혼하고 프랑스에 살았음
55세에 자서전을 집필하고 <음악시학>이라는 책을 남겼으며
친분이 있던 피카소가 초상화를 그려 주었음
1938년 맏딸이 결핵으로 다음 해에 아내와 어머니마저 병으로 죽자 큰 슬픔에 미국으로 이주함
사이가 좋지 않은 쇤베르크가 죽자 12 음기법에 관심을 가져 무조음악주의자가 되어
발레곡 <야곤>을 작곡하였으나
말년에는 작곡보다 돈이 되는 지휘를 더 많이 했으며 1971년 89세로 세상을 떠남
윤이상(1917-1995)
일제강점기에 경남 산청에서 출생, 3살 때 통영으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냄
3년간 서당공부를 하였으며 13세에 라벨의 현악사중주를 듣고 감동
18세에 일본 유학
20세에 귀국하여 통영에서 초등교사로 재직하며 작곡한 <윤이상동요집>
1941년 다시 일본 유학을 하려는데 조선인 참전 명령으로 징집되어 곡식창고에 배치됨
독립운동으로 폭탄제조법을 연구하다가 가택수색 중 우리말 악보가 발견되어 두 달간 옥살이
다시 곡식 창고에 배치되었으나 첼로를 들고 도주하다가 1945년 28세에 광복됨
부산에서 시립고아원을 운영하며 음악교사로 재직하다가 33살에 당시 국어교사와 결혼
부인 이수자는 나중에 <내 남편 윤이상>이라는 책을 집필함
1959년 40세에 자신이 보았던 책의 저자를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 다름슈타트에서 열리는
현대음악강습회에 참가하고 이곳에서 슈토크하우젠, 노노, 케이지 등 많은 예술가와
젊은 백남준(1932-2006)도 만났으며 이곳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고 유명해짐
44세에 5.16 군사정변으로 반공문화가 팽배할 때 북한에 사는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고
동경하던 강서고분 벽화도 볼 겸 1963년 북한에 다녀옴
1966년 처음에 '딱'하는 박소리로 시작되는 <예약>을 발표하고
1967년 북한의 지원을 받아 간첩활동은 했다는 동백림사건(동베를린을 음차함)으로
윤이상은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재심, 삼심으로 10년형)
이수자여사는 7년형(나중에 집행유예로 석방)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에 시달려 자살 시도
옥 중에서 실내악 <영상>과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작곡
그중 <나비의 미망인>은 독일로 보내져 무려 31회의 커튼콜을 받으며 성공함
한편 유럽 음악계에서 주목받던 음악가가 끌려가 간첩으로 수감되었다는 소식에
수많은 예술인(지휘자 카라얀, 오보에 연주자 훌리거, 스트라빈스키를 포함 161명)이
탄원서에 서명하고 한국 정부를 압박하여 결국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서독으로 추방
윤이상은 젊어서 사랑한 첼로로 웅장한 <첼로 협주곡>과
<대왕의 주제에 의한 바이올린 솔로>라는 무반주곡을 만들며
어느 음에서 출발해도 결국 한 음으로 돌아간다는 동양의 음악과 일맥 상통하며
현대음악처럼 조성도 가지지 않는 중심음기법을 구축함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 악화되어 갈 때
루이제 린저가 인터뷰한 책 <상처 입은 용>이 출간되어 그의 일생과 음악관이 자세히 알려짐
기독교 신자였으나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다양한 종교음악도 남겼고
사회문제에도 침묵하지 않았던 그는 1980년 한국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관현악곡 <광주여 영원하라>를 발표하지만 북한에서만 윤이상 음악회가 개최되고
남한에서는 정치상황이 변하고 나서야 연주금지령이 해제됨
아코디언에 관심을 두어 아코디언과 현악사중주를 위한 <콘체르티노> 작곡
거대한 교향곡 다섯 곡 중 15분짜리 <현악사중주 5번>이 가장 많이 연주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위해 교향시 <화염 속에 천사>, <에필로그>를 만들고
드디어 1994년 한국에서 윤이상음악제가 개최되나 건강악화로 귀국하지 못하고
다음 해 폐렴으로 별세
2002년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한
통영국제음악제가 시작되고 2006년 과거진실규명위원회의 동백림사건이 재조명되며
다음 해 미망인 이수자여사가 고국으로 돌아왔음
첫댓글 음악에..작곡에
유난히 조예가 갚으신
동연님으로 보입니다
윤이상님의..동백림사건이
재조명 된다는 소식등
잘 읽고 갑니다..
세월이 흘러 묵히고 삭히다 보면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뜬금없이 떠올라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 짖게 하는 것들을 "추억"이라 얘기합니다.
며칠 동안 동연씨의 글을 뒤쫒다 보니 많은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시, 심리학, 그림, 음식,음악, 심지어 치마까지...
그럴 때면 예전에 지적 포만감을 채워주었던 책들이 떠올라 책장을 뒤적이게 됩니다.
후미진 구석에서 켜켜이 덮어쓴 먼지 만큼 세월의 두께를 견디곤 누렇게 색이 바랜 책 속에
딴엔 중요하다며 붉게 밑줄 친 단락을 접하면서 가끔은 지금의 저의 생각과
너무나 달라진 것들을 접할 때면 작은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저에게 "고마움"이란 어쩔 수 없이 미소 짖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음악은 고등학교 시절 브라스밴드부에서 클라리넷 파트를 담당한 것이 전부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음악평론가 강헌씨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란 책에서 접한 음악사에서의
역사적인 장면들이 퍽이나 흥미로웠습니다.
저처럼 클래식의 초보인 사람의 입문서로써 민은기의 "클래식 수업 1~2"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소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