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르코 1.1-8)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his pa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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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느님의 명을 장엄하게 노래한다. 또한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 주님의 영광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한 소리를 전한다(제1독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고 기다리는 하느님의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죽을 운명에 놓인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다(제2독서). 마르코 복음서는 그 시작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곧 세례자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선포한 내용을 전한다. 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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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모두 66개의 장으로 엮인 이사야서의 제2부에 해당하는 40-55장의 내용은, 아시리아와 대립하고 있던 히즈키야 임금 시대에 활약한 이사야의 예언을 전하는 39장까지의 내용과는 달리, 유다 민족의 바빌론 유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40-55장의 예언을 본디의 이사야와는 다른 인물인 ‘제2 이사야’에 귀속시킵니다. 제2 이사야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를 전하며 임박한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과 해방은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만의 해방이나 구원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어느 예언서보다도 탁월하고 감동적으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이의 구원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 이후 비로소 그의 예언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자렛 예수를 향하고 있음을 믿었으며, 또한 이사야 예언서를 마음을 다해 다시 읽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2 이사야’의 네 개의 ‘주님의 종의 노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사야서를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메시아의 도래라는 옛 예언자들의 약속이 빠짐없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그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시작입니다. ‘위로하라’는 감동의 울림으로 시작되는 제2 이사야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으라고 외치는 ‘한 소리’를 전합니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그 소리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직감한 대로 세례자 요한을 뜻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전의 생활 습관과 혼돈된 생각에서 벗어나 회개하여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를 통해 광야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터전’이 됩니다. 이제 대림 시기의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이사야 예언자와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첫발을 내딛겠다는 굳은 다짐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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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존엄한가
-박재식 신부-
요즘 농촌 들녘은 황량함 그 자체입니다. 생명으로 넘쳐나던 논밭은 이제 자신들의 모든 역할을 마치고 텅 빈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거센소리를 내던 나뭇잎은 이제 마지막 흔적조차 모두 내려놓고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생명을 위한 봉사를 마치고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모습입니다. 제가 너무 인간 위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 모든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려라”(창세 1,28) 하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묵상해보았습니다.
인간이 도대체 무슨 존재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경시하고 파괴를 일삼는 인간에게 특권을 주셨을까요? 하느님은 왜 인간을 대화 상대자로 선택하셨을까요?
이 그림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Masacre en Corea)’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간 황해도 신천군에서 마을 주민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383명의 무고한 양민이 잔인하게 학살된 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가해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겁에 질린 여인들 표정, 어머니 뒤로 몸을 숨긴 아이의 모습, 먼 길을 끌려온 모습, 이리저리 무너진 집,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일말의 눈물과 갈등도 없이 기계와 같은 표정으로 불쌍하고 나약한 여인과 아이들에게 총을 겨눈 군인들 모습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지 느낄 수 있습니다.
2009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20여만 명의 양민이 군ㆍ경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발표한 보도연맹사건을 비롯해 제주 4·3사건, 광주 민주화 항쟁 등 한국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권 상실’의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마음 아픈 기억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살과 이념 전쟁은 지금도 매일 벌어지고 있는 슬픈 상황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하는 인류를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존엄하다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갈등이 일어납니다. 비단 조직이나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 삶을 살펴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납니다. 질투와 욕심으로 독을 품고 생명을 파괴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 모습입니다.
인간 존엄에 대해 고민을 하던 중 창세기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인간 존엄에 대한 근거를 찾게 됐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인정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인간이 지성을 갖고 있고 언어,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 존엄성의 근거는 아닙니다. 인간 존엄성의 근거는 우선 창조 때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대화를 나누시는 협조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동물을 사랑한다 해도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진실한 대화는 동일한 본성끼리 가능합니다.
두 번째 근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모상에 대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과 함께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물질적 구조는 흙에서 왔기에 모든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존엄합니다.
세 번째 근거는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부자, 가난한 사람, 죄인, 의인, 병자나 건강한 사람 모두를 초대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존엄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말씀으로 마음에 있는 편견을 버리고, 곧은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느님 모상인 원수와 의인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 저에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두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닮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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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서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복음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한다고 말하면서, 구약성서의 탈출기(23,20)와 말라기서(3,1)와 이사야서(40,3)를 한 구절씩 차례로 인용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는 묘사는 열왕기 하권(1,8)이 전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르코복음서는 이사야 예언서에 이미 예고된 세례자 요한이며, 엘리야 예언자를 닮은 요한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이사야와 엘리야는 잘 알려진 권위 있는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요한은 예수님을 예고하는 인물이지만, 예수님에 비하면 종의 자격도 없다는 말입니다. 신발 끈을 푸는 사람은 종입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가 요한을 자리매김 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였을 때,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운동에 가담하였던 사실은 그들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살아 있는 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자기들의 선생, 요한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요한에 대해 분명하게 자리매김을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서민을 대상으로 세례 운동을 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몸을 물로 씻으면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요한은 그 시대 세례 운동가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세례는 다른 세례 운동가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세례는 죄를 씻는 정화의례이며, 일생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것은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회개하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약속하며 받는 세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변하는 곳에 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으니, 회개하여 삶을 바꾸라고 가르쳤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함께 계심을 사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고 예수님은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며, 병이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은 죄를 용서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고치고, 살리고, 용서하는 분이라,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한 사람은 자기의 주변을 새롭게 보고, 삶의 자세도 바꿉니다. 우리 안에 있는 힘은 남을 제압하고,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은 우리만 편하고, 사람들 앞에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 이웃을 돕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은 우리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삶을 바꾸어 회개하라고 선포하였고, 예수님은 그 회개가 자비와 사랑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섬김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그 자비와 연민과 사랑을 목숨 바쳐 실천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다.”(루가 17,21)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와 사랑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그것을 실천한 우리 삶의 순간들은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것을 당신 안에 거두어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고백한 초기 신앙인들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교리를 믿고, 성사(聖事)에 충실하고, 성직자들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교리와 성사, 성직자는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깨닫고, 우리가 새롭게 사는 데에 도움을 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마태 7,21)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있습니다. 그 실천은 우리가 자유롭게 또 자기 방식대로, 다양하게 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물로 베푸는 세례는 물 안에 사람을 잠기게 하면서,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던 과거에 죽고, 물에서 다시 나오면서 하느님과 더불어 새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받는 세례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이제부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며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성령은 역사 안에 새로움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삶이 태어났고, 성령으로 자비와 사랑을 사는 새로운 공동체, 곧 교회가 태어났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비와 사랑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어떤 특정인에게 특별한 혜택이나 기적의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로마 2,11)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자비와 사랑으로 실천하는 섬김이 우리의 인간관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성령은 이 자비와 사랑의 섬김이 나타나게 하는 원동력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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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윤승식 신부-
“인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일본의 모리 가즈히로 주교님이 쓴『눈을 뜨고 사랑을 보라』라는 책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지난달, 울산 효 사관학교 강의에서 제가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대답이 없어서“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라고 하니, 건강, 신뢰, 사랑… 하다가 누가“돈!”이러니까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다들 웃습니다. 돈이 우리 세상에서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제가“생명”이라고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입니다.‘돈이면 다 된다’하지만 생명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만들어 팔지도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선물로 주신 생명을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인권의 기본이고, 교회가 오늘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는 이유입니다.
신분 제도가 있던 조선 시대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성경을 통해‘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되었기에 평등한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후장상, 사농공상, 반상의 구별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신분제 철폐는 국가기강을 무너뜨리는 역적의 주장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꼭 필요한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하느님의 소명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양반과 상놈의 신분 제도가 없어지고 모두가 한 형제 되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예언자적 소명으로 박해를 받으며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를 통해 얻어진 우리 사는 세상은 어떤가요? 신분 제도는 없어졌다지만 인권이 제대로 서 있습니까? 세월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양상은 생명보다는 돈이 우선이었습니다. 4대강, 쌍용차 노동자의 해고와 가족들의 고통, 용산 참사, 제주 해군기지 강정마을, 밀양 원자력 발전소 송전탑,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들은 사람의 생명보다는 돈의 욕망이 더 컸던 결과가 아니던가요? 유신 시대나 군사정권보다는 낫다지만, 돈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진다면 나을 게 없습니다.
사제 가문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요한은 돈(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듣기 위해 광야로 나갑니다. 거친 낙타 털 옷이 살을 긁어도, 박한 음식인 메뚜기와 들꿀을 얻기 위해 추운 새벽 땅을 뒤지더라도, 하느님의 소명을 듣는 예언자의 삶을 살았기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어,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살아야 합니다. 정의의 편에 서서 평화와 인권을 지키며 주님의 길을 함께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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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오시니 회개하십시오
-노영환신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하늘나라의 삶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삶의 방향 을 주님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서 주님의 모습을 찾는 신앙인들은 곧 이웃 에게로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그들을 주님처럼 섬기는 것, 이것이 곧 회개의 내용입니 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주님처럼 소중히 대하기보다는 소홀히 대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믿고 도우며 살아가야 할 이웃을 속이며 이용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일본의 원전사고 후에 생선의 수요가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원전사고가 난 곳의 생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겠지요.
그동안남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 늘나라에서 살아야만 된다면, 그곳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생지옥이겠지요.
어떤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극진한 영접을 하면서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하고 길을 안내했습니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주님이 계신 큰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숨 막히는 적막감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형제여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맘껏 즐기며 지내도록 하게나. 세상에서 원했던 것은 다있으니 맘껏 즐기도록 하게’ 일생을 열심히 산보람을 느끼며 행복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궁금했던 것을 물었습니다. ‘주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나요?’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사람들이라니? 너에게도 이웃이 있었나? 너와 나밖에 없지 않았나? 너는 세상에 있을 때, 나에게는 성실했지만 이웃과는 어울린 일이 없지 않은가?’
혼자 살아갈 그에겐, 하늘나라가 더 이상 천국일 수가 없었다. 회개란 우리의 삶을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를 이웃과 나누며 살아갈 때 하늘나라는 구원이고 생명임을 알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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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과 실체로 살아가는 사람
-이기정신부-
외형과 실체는 전혀 다르지요? 빛 좋은 개살구처럼 말입니다.
얼굴 몸매 화장 의상 정복 같은 외모와 사람의 마음 됨됨이 말입니다.
물은 사람의 모든 외모를 적시거나 빨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못합니다.
외형과 실체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인품의 가치는 실체이지 외형이 아닙니다.
외형만 씻고 닦고 가꾸기에 열 올리지만 실체의 품을 위해선 무얼 하나요.
세례때 물로 씻는 의식은 외형, 마음준비와 기도는 실체의 성령세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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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상실, 좌절 속에 깃든 축복
-박영식신부-
“강물은 사막을 건너갈 수 없었다. 사막은 그에게 바람을 타라고 권했다. 강물은 자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사막의 제의를 싫어했다. 그러나 결국 강물은 바람에 몸을 맡겨 증발되어 버렸다. 바람은 사막 건너 언덕 밑에 강물을 놓아 주었다. 강물은 수증기와 비로 변해 다시 자기 본래의 모습인 강이 되어 흘러갔다.”
위 자연현상은 우리에게 자기를 버리는 것이 자기를 구하는 방법임을 가르쳐준다. 예수님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고 메시아의 자질을 갖추셨다. 당신을 낮추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부활하여 모든 피조물의 주님으로 임하셨다. 베네딕도 성인(480-547년)도 예수님을 본받아 도시의 혼란과 방종을 보고서 수비야꼬 광야로 가서 은수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로마누스라는 은수자가 가져다 준 음식을 받아먹고 3년 동안 동굴생활을 했다. 이곳에 열두 수도원들이 세워지고 일과표에 따른 노동과 엄격한 수도생활로 영성과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처럼 베네딕도 성인은 광야에서 위대한 영성을 일으키고 유럽 문화를 이루고 보존하고 발전시켜 오늘 유럽 문화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예레 2,2)
내 마음이 시련과 정화의 장소인 광야처럼 되어야 자존심과 이기심에 어둔 눈을 뜬다. 마음을 비우고 눈을 감아야 하느님, 사랑, 우정, 인정을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욕심쟁이의 마음속에는 하느님과 이웃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법이다. 두 손에 황금 덩어리를 쥐고서 어떻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이웃을 축복할 수 있겠는가? 보리를 두 손에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는 법이다. 평생 움켜쥔 주먹을 펴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곁으로 모아 행복해진다.
우리의 하루나 한 평생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 말고는 먹고 자고 일을 계획하는 시간뿐이다.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가거나 성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 가운데 성공과 성취와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성취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을 비워 하느님과 이웃이 마음속에 살아 계실 수 있게 해야 하겠다.
마음을 비우는 희생은 고통과 눈물겨운 시련의 연속이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생명이 없다(토마스 아 켐피스, 준주성범). 우리는 고통을 받아야 참된 인간이 될 수 있고, 고통 속에만 기쁨과 구원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이웃의 십자가를 대신 져주자. 하느님,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스승, 제자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참된 축복은 흔히 고통, 상실, 좌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면, 머지않아 제대로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Joseph Addison, 1672-17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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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위한 준비 >
-전삼용신부-
한 부부가 2년 동안을 망설이다가 이혼을 결심하고 상담자를 찾아갔습니다. 극심한 성격차이, 서로의 취향과 습관, 그리고 이상이 맞지 않아 도저히 결혼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상담자는 그들의 싸움동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추적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발단은 사소한 비누 하나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꼼꼼한 성격이라 비누를 항상 말려서 뽀송뽀송하게 쓰는 것을 좋아했고, 부인은 비누를 말려두면 딱딱하다고 싫어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비누 문제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성격차이, 교육수준, 가정환경, 부모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져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습니다.
상담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애기를 듣고 이렇게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앞으로 비누를 두 개 놓고 쓰세요.”
몇 달 후, 그들 부부는 다시 상담자를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제법 밝아보였습니다. 서로의 손을 맞잡은 부부는 상담자에게 이혼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장자옥 목사, 지하철 사랑의 편지]
사실 우리가 어른이 되고 경제생활을 하게 되면 결혼할 수 있는 나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 결혼할 수준이 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비누 하나 쓰는 일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결혼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즘 ‘터미네이터 5’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된 이병헌이 얼마 전에 있었던 좋지 않은 문제로 다시 인터넷 뉴스를 달구고 있습니다. 결혼하고도 모델들의 집에서 술자리를 하고 본인은 농담이었다고는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를 나눈 동영상이 찍혀 그것으로 곤혹을 치루고 있습니다. 결혼은 상대에게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합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진정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 또한 그 모습을 비판할 수 있는 처지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합니다.
신세대 주부의 60%정도가 결혼 후에도 남자 친구를 사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주)태평양은 25-35세 기혼여성 7백 58명과 10-28세 미혼여성 9백 80명 등 전국 1천 7백 58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성의 남자친구에 대한 의식조사’를 내놓았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신세대 주부는 조사 대상자의 22%가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으며 41%는 현재 남자친구가 없으나 사귀고 싶다고 응답, 63%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결혼을 했음에도 누군가를 또 만나고 싶다면 그것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랑만큼 우리 텅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면 그것 자체가 아직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아닐까요?
제가 사제가 되어 강론을 처음 할 때는 ‘신자들이 어떻게 평가할까?’라는 생각으로 떨렸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결국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닌 나의 영광을 위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이 무대공포증이 극복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내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사람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할 때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까? 인정받고 칭찬받고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고 사랑해주는데도 우리는 아직 부족한 것입니다. 그분과 혼인했음에도 여전히 다른 사랑이 그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들어 높임을 받는 것이 하느님 눈에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치 아내가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를 찾는 사람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그분을 만나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 세례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떠나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과 결심인 것입니다.
한 나라의 아름다운 공주가 신랑감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3명의 남성이 남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달릴 때 자신을 쫓아오며 자신의 발목을 잡으면 그 사람과 혼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달리고 있는데 미리 놓아둔 돈덩이가 있었습니다. 한 남자는 그 돈덩이를 주우려고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커다란 금덩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남자도 그 금덩이를 주우려고 멈추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지나쳐 오직 공주만 바라볼 수 있었던 한 남자만이 남았고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회개란 바로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책임을 감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과의 애정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결심이 안 된 상태라면 그분을 만나도 실제로는 받아들인 것이라거나 참으로 만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이제 상대의 뜻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나의 뜻은 버려야함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남자가 바람을 피기를 원하며 그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하기 전에 서로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결심하고 만나야 온전한 결혼생활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위해서 하느님은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에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 한 ‘사자(천사, 메씬저)’를 보냈습니다. 그가 외친 것은 다름 아닌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복음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란 그분을 만나 그분의 뜻대로 따른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한 아내를 얻었으면 그 아내만을 사랑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이 앞서 그 신의를 어기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믿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그런 추문에 한 번 휩싸이면 그 아내는 남편을 믿기가 더 힘들어지고 그래서 결혼생활은 참으로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약 600만의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모두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한 유태인 의사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고민을 깊이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리조각 하나를 줍게 되었습니다. 매일 그는 그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면서 살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나치는 매 시간마다 가스실로 보낼 유태인들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매번 새파랗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활기찬 젊은 의사를 끌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가스실행이 하루 이틀 이렇게 미뤄지다가 드디어 독일이 패망했고 젊은 의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마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적어도 면도를 하는 정도의 시간을 할애할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얻기 위해 성당에 나오고 그 가치에 합당한 헌금을 하는 것처럼, 그만큼 귀중한 것을 얻으려면 그만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하루에 화장하는 시간만큼이나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성체조배를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이제 그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세상 모든 것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으신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준비가 되지 않아 언제 바람피울지 모르는 신부와 누가 결혼하려고 나타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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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소명에 따라 산 사람
-고준석 신부-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한 나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이제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 후에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로서 헌신적으로 일하여 세상에 ‘백의의 천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느 날 어떤 기자가 그녀에게 “당신의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신 소명에 따라 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닦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광야에서 낙타 털옷과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벌꿀만을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대대적인 세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면서 곧 다가올 하느님 나라와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세례운동이 군중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많은 추종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메시아이길 바랐고, 또 그렇게 기대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과 곧 오실 분, 곧 주님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렇듯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또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아는 진정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생활과 나의 음성만을 듣는 생활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음의 선택에서 한 발자국 전진하여 몸으로 하는 선택, 즉 나의 생활을 방향 짓는 결단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나의 이름을 불러 개인적으로 맡겨 주신 하느님의 목적을 자각하는 데서 더욱 크며 가치 있게 발전됩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과 나이팅케일의 삶처럼….
예수님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친 인물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즈카르야 사제의 외아들로 태어나 당연히 유다 전통에 따라 사제직을 계승하고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며 살아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광야로 나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오로지 예수님의 길을 닦으려고 광야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하며, 예수님 앞에서 한없이 작은 사람임을 드러냈습니다. 요한의 손가락은 늘 예수님을 가리켰고(요한 1,38 참조),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하며 구원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사라졌습니다.
요한이 자신의 명성과 신념만을 위해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광야에서 가난과 금욕적인 삶을 내세우며 명성을 누리고 사람들의 스승 노릇이나 하며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구원 역사 속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 투신한 사람들을 위해 삶의 본보기를 보여 줍니다. 진정한 투신은 요한처럼 광야를 선택하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광야는 추위와 가난과 온갖 유혹을 견디는 삶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복음적 가치를 선택한 삶을 말합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리킵니다. 신앙 때문에 커 보이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작아 보이는 삶을 삽니다. 그들은 자기가 있던 자리에 주님을 초대하고 소리 없이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위해 투신한 사람들은 그 사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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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신학자로 유명한 본회퍼(Bonhoeffer, Dietrich)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교회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지요. 아무튼 이분은 나치즘에 저항해서 결국 1945년에 교수형을 당했지요. 교수형을 당하는 날, 교도관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동료들에게 “먼저 갑니다. 천국에서 기쁘게 만납시다.”라고 말하며 문밖을 나섰다고 합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큰 감명을 얻었지요. 즉,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평화로울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나치즘에 저항했고 또한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겼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친 그를 많은 이들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1980년 3월에 폐수종 진단을 받아 병원에 입원했는데,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서 같은 해 4월 15일에 죽기까지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둘 다 신학적으로 또한 철학적으로 뛰어난 명성을 날렸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비교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이에 대해 목사였던 본회퍼는 자신이 돌아갈 곳이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고,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샤르트르는 신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내놓습니다. 즉, 돌아갈 곳이 ‘있다’ ‘없다’의 차이가 평화를 간직하게 되는지 아니면 두려움을 간직하게 되는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내가 돌아갈 곳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까?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지금을 힘차게 살고 있습니까? 또한 그런 믿음을 갖게끔 해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까?
대림초가 두 개 켜진 대림 제2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1독서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주님의 길을 닦은 사람으로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지요. 그가 황량한 광야에서 좋은 옷이 아닌 낙타 털 옷를 입고 가죽 띠를 두르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한 왜 좋고 맛있는 음식이 아닌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았을까요? 바로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돌아갈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의 길을 닦는데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내 모습을 반성했으면 합니다. 마치 이 세상의 삶이 모두이고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근시안적인 모습을 말이지요. 그리고 나중에 돌아갈 하느님 나라를 기억하면서 지금의 삶을 주님께 맞추며 살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지금의 삶도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좋은 스승이란 촛불과도 같다. 자기 스스로를 소비해서 남들을 위해 불을 밝힌다(아타투르크).
주인의식을 높이세요(‘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한 마을에 ‘모두’와 ‘누군가’, ‘아무나’, ‘아무도‘라는 이름을 가진 네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심각한 문제가 생겨 네 사람이 회의를 했다.
토론 결과 ‘모두’가 그 일을 맡아 해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모두’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누군가’ 화를 냈다. 그것은 ‘모두’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모두’는 ‘누군가’를 책망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즉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누군가가 할 것이라면서 자신의 일을 회피하고 있으며 그래서 아무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모두가 빠짐없이 해야 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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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모 단체에서 수학능력 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한 학생들에 대해서 연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한 학생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었나 봅니다. 대부분 의사나 변호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들의 삶은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삶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삶의 만족도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수학능력 시험이 전국 1등인 것이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은 수학능력과는 큰 관계가 없어 보였습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누군가를 도와주고,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학습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이 로또에 당첨되어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된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과연 그분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삶이 더 엉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건강을 해치기도 했고, 빚이 늘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정에 불화가 생겼고, 이웃과 다툼도 자주 생겼다고 합니다. 도박으로 가진 것을 탕진하기도 했습니다. 돈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 주는 도구이지만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잘 모르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난해서 늘 배고픈 사람,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 마음이 아픈 사람, 사고로 다친 사람,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공부가 힘든 학생, 풍족하고 넉넉하게 사는 학생, 어려서부터 신문을 돌려야 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얼굴이 잘 생기고, 건강한 학생, 키가 작고 운동을 잘 못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꽃밭에 많은 꽃들이 있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환경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꽃은 시들듯이, 물이 부족한 식물들이 메말라가듯이, 우리 주변에는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노숙자들은 늘어간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인데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불법체류를 한다는 이유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영적으로 메말라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죽는 사람, 너무 힘들어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깎아져서 평평하게 되리라.’ 교만과 욕망의 산을 깎아서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둠과 절망 그리고 고통과 걱정은 희망과 사랑 그리고 나눔과 봉사로 메워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처럼 그런 꿈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시인 안도현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해야 할 일이 무언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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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푸스 데이
-인영균신부-
오늘 아침 ‘하느님의 일’에 생각이 머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 곳곳에서 ‘오푸스 데이’(opus Dei), 곧 ‘하느님의 일’을 강조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는, 우리 수도자들이 매일 바쳐야 하는 공동기도인 시간전례(성무일도)를 가리키지요. 기도 종 소리가 울리면 하던 일도 중단하고 기도하러 성당에 가야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공동 기도가 제일 중요하기에 최우선으로 두어야 합니다. 넓은 의미로는 수도자의 모든 삶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시간뿐만 아니라 일상 삶 전체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자고 먹고 기도하고 일하는 것이 모두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은 시각에서 ‘하느님의 일’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 ‘우리를 통해’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 ‘우리를 위해...’ 하느님 친히 하시는 모든 일이 됩니다.
마르코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첫 장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길을 마련하는 사람, 길을 닦는 사람, 길을 내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요한의 모든 삶은 주님을 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곧,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오실 주님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무화(無化)가 아닙니다. 주님을 드러내었지만 주님 안에서 세례자 요한은 찬란히 빛나는 등불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 전체는 바로 ‘하느님의 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집중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부지불식( 不知不識) 중에 갈라져 있습니다. 교회의 삶은 이렇게 하고 사회의 삶은 저렇게 합니다. 서로 다르게 삽니다. 성당 안에서는 거룩한 사람으로 살지만, 성당 밖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이 삽니다. 우리의 일상 삶 전체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모두 주님의 길을 닦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의식으로 살면 깨닫게 됩니다. “아, 나의 삶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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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영성
-기쁨의 삶-
-이수철신부-
수도원만 사막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사막입니다.
이젠 모두 사막의 영성을 살아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오아시스 하느님을 만나 생명수를 마시면 기쁨의 낙원에 성인(聖人)이지만
오아시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울의 지옥에 폐인(廢人)입니다.
성인과 폐인, 그 중간은 없습니다.
오늘은 사막같은 세상에서 기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단순과 가난, 겸손이 사막의 영성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기도, 사랑이 사막의 영성입니다.
이런 사막의 영성을 살 때 샘솟는 기쁨입니다.
사막의 영성은 바로 기쁨의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예전 수도원을 방문했던 분들이 자주 묻는 질문입니다.
"신부님, 이 수도원에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갑니까?“
늘 사막 같이 단조로운 수도생활에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는 지 궁금했었나 봅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슨 기쁨, 무슨 맛, 무슨 재미로 이 사막같은 인생을 살아갑니까?
큰 기쁨이 아니라 작은 기쁨이 중요합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있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작은 기쁨들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지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이 작은 기쁨들이 강을 이루고 마침내 기쁨의 바다를 만듭니다.
기쁨도 습관입니다.
이런 작은 기쁨의 발견을 습관화할 때 기쁨의 삶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가장 특징적 삶이 기쁨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삽니다.“
즉시 나온 답변입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근본적 기쁨은 '찬미의 기쁨', 이것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은 기쁨의 샘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맛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저는 뉴튼 수도원에서 거의 1개월 생활하면서 많은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신부님, 털 신을 신으셨네요.“
여기 수도형제의 따뜻한 관심의 말 한마디가 저를 기쁘게 했습니다.
두 형제가 같은 인사를 했습니다.
어느 착한 분이 사다 준 털 신이였는 데 이를 예리하게 발견한 형제의 '사랑의 눈'이었습니다.
"신부님, 저 때문에 못들어 오셨습니까?“
저녁기도 전 성전 안에서 한참 정리를 하던 한 형제가
성전에서 나오다 성전입구에 머물러 있는 저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말입니다.
"아, 좋아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저녁기도 전 여기서 이렇게 잠시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참 좋습니다.“
요즘 대림시기를 맞아 '기다림의 기쁨'을 많이 깨닫습니다.
미사든 기도든 항상 10분 이상 먼저 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가는 것 보다 백배 영적 유익이 있습니다.
대림의 영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다림의 기쁨'일 것입니다.
환히 빛나는 2개의 대림 촛불이 상징하는 바,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기쁨입니다.
오늘 대림2주일 강론은 사막의 영성, 기쁨의 삶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주님의 길을 닦는 기쁨입니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또 세례자 요한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내어라.“
삶의 광야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막막한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제가 막막할 때 가장 많이 바라보는 것이 하늘인데 이 또한 길을 찾는 갈망의 반영입니다.
훤히 난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길을 닦아 나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는 삶은 구체적으로 회개의 삶을 뜻합니다.
세레자 요한도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통해 회개의 진정한 표지는 가난과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매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그의 가난이,
또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고백에서 그의 겸손이 잘 드러납니다.
한 번뿐 아니라 평생 회개의 세례를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주님의 길을 닦을 때 가난과 겸손입니다.
다음 이사야의 말씀 역시 회개의 삶을 상징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끊임없는 회개의 수행을 통해
열등감의 골짜기는 메워지고 교만의 산과 언덕은 낮아져야 온유와 겸손의 평탄한 길이요,
배가되는 기쁨의 삶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아가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바로 이게 기쁨의 원천입니다.
주님 역시 당신의 길을 닦으며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큰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대림시기 주님의 길을 닦는 우리에게 이사야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참 아름다운 비전입니다.
이런 착한 목자 주님과의 상봉을 기대하며 기쁨에 넘쳐 주님의 길을 닦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회개를 통해 주님의 길을 닦는 우리 모두가 주님을 기쁘게 선포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바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주님의 길을 닦는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하고 말하여라.“
아, 그렇습니다.
주님의 길을 닦는 오늘 바로 지금 여기 기쁨의 샘이신 우리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해 주님의 길을 닦는 기쁨으로 충만한 대림시기의 우리들입니다.
둘째,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입니다.
어제 영어 화답송 후렴이 생각납니다.
'Blessed are those who wait for the Lord(행복하여라,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
주님을 기다림이 영원한 기쁨의 원천입니다.
기다릴 주님이 없다면 무슨 기쁨, 무슨 맛으로 광야 인생을 살아갑니까?
과연 여러분은 누구를, 무엇을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릴 때 기쁨도 열정도 솟아납니다.
주님을 기다림이 사라지면 기쁨도 열정도 사라집니다.
기다림이 없는 삶은 살아 있다 하나 실상 죽은 삶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대림시기는 우리 모두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시기입니다.
기다림은 기도입니다.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깨어 기도할 때,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자 기쁨의 연속임을 깨닫습니다.
끝없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 역시 '기다림의 사람'이 됩니다.
성인은 한결같이 기다림의 대가이자 기도의 대가입니다.
살아갈수록 남는 얼굴은, 기도한 얼굴이냐 기도하지 않은 얼굴이냐 오직 두 얼굴뿐입니다.
세상에 기다림의 인내 없이, 기도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 기다리는 이들에겐 하루하루가 전부이며 영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참고 기다리십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에 우리 삶의 날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삶은 무가치한 삶, 무의미한 삶입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옵니다.
그러니 대림시기만 아니라 1년 12달이, 평생 깨어 기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의 대림시기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티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기쁘게 기다리며 살도록 노력합시다.
셋째,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기쁨입니다.
위로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다음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가 됩니다.
마침 어제 토요일 영어미사 입당시 오늘 이사야서 서두 말씀,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로 시작된 성가(Warship:60)도
메마른 가슴을 위로로 적셨습니다.
"Comfort, comfort ye my people,
Speak ye peace thus saith our God;
Comfort those who sit in darkness,
mourning' neath their sorrow' load.“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평화를 선포하라, 우리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위로하여라, 어둠 속에 앉아있는
슬픔의 짐 아래 신음하는 이들을!
'위로의 샘'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여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찾아 끊임없이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성당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우리 또한 이웃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많이 받을수록 주님의 위로도 큽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충고나 질책보다는 공감하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위로의 사랑입니다.
위로하는 사랑이 우리을 치유합니다.
하여 위로의 사람들은 결코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어떤 형태로는 공동체를 이루어 도반이, 길벗이 되어 살아갑니다.
이런 도반관계의 공동체에서 위로의 사랑보다 더 좋은 사랑은 없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위로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궁극의 위로는 하느님의 위로뿐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위로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여 우리는 위로자 성령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 친히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정녕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위로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우리를 위로하시기에 우리 또한 형제들을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뉴튼수도원에서 확정한 생각은 단 하나입니다.
남은 생애 사막의 영성을 공부하고 사막의 영성을 살자는 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하느님에게서 샘솟는 기쁨의 생명수입니다.
이 생명수를 끊임없이 마셔야 기쁨의 삶이요 황량한 사막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살아있음의 빛나는 표지가 기쁨입니다.
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책 제목도 '복음의 기쁨'입니다.
우울하기로 하면 끝이 없고, 기쁘기로 하면 또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우울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특히 대림시기는 더욱 그러합니다.
주님은 대림 2주일 사막같은 세상에서 우리 모두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주님의 길을 닦을 때,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고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릴 때,
끊임없이 '위로의 사랑'을 실천할 때,
샘솟는 기쁨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인생 사막에서 당신의 길을 닦으며 깨어 기다린 우리 모두를 환대하시며 위로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시편85.8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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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기경호신부-
한국 천주교회는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과 대량 구속 사태 등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존엄한 인간의 권리가 짓밟히는 현실을 깊이 걱정하고 그 희생자들의 호소를 들으면서 1982년 대림 제 2주일을 ‘인권의 날’로 제정하였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창세 1,20-27) 존귀하며,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될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인간은 참으로 가장 위대하며 가장 고귀한 존재로서 우주의 중심이며 구원사의 핵심이자 하느님의 벗이다. 따라서 그 어떠한 사람이나 세력도 인간을 짓누르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과 응답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만 선을 지향할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35).
그런데 우리는 생명경시(자살, 낙태, 성매매 등), 자본을 생명보다 더 우선시하는 무차별한 규제완화와 의료민영화,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자본의 우상화와 경제 정의의 실종, 학대와 성폭행 등 자유를 억압당하는 부당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며 곧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새로움을 가져다주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국가나 법, 제도 등이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하여’ 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인권은 인간 각자가 지닌 존엄성에 뿌리내리고 있다(사목헌장 25). 따라서 인간이 결코 체제나 제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모든 사람은 함께 또 개인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인권의 궁극적인 원천은 바로 인간 자체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53). 인권은 모든 인간이 지니는 보편적인 것이며 침해할 수도 양도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수호되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53-154 참조).
인권은 국가의 중대한 책임이기도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실천 차원에서 우리 이웃의 인권과 존엄성을 존중할 책무를 지고 있다.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인간 존엄성의 출발점이자 근거이다. 따라서 인권은 우리 각자의 생활 영역에서, 가정, 교회, 직장에서 그리고 생활 속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실천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웃을 경쟁 상대로서만 여기고 이해관계를 따져 무관심하게 지냄으로써 도구화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의 비인간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부터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서로를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게 될 때에 세상 안에서 인권 존중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은 물론 거리나 시장에서 만나고 스쳐가는 모든 사람에게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경외심으로 배려와 친절을 베푼다면 더욱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노동자, 실직자, 행려자, 노숙자, 결손 가정 아동 등의 문제들의 생계유지를 넘어 인간다운 삶이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려면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히 법 앞의 평등만이 아니라 개개인은 그 자체로 존엄성을 지닌 동등한 인격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차별하는 일이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른 차별, 농촌과 도시 등 지역적인 차별, 교육정도에 따른 차별, 남녀의 차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등 온갖 종류의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국가의 법체제는 물론 사회 모든 분야의 생활을 개선해나가야겠다. 인권 보장과 인간 존엄성의 실현은 국가권력만의 책임이 아니라 참된 공동체 건설에 참여하는 우리 각자의 연대 책무이다. 가정, 교회, 학교, 직장과 일상 시민생활 등 작은 일에서부터 인간 존중의 문화를 이룩하도록 새로이 다짐하도록 하자. 서로서로가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깊이 인식하도록 하자. 이웃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하자. 아니 또 하나의 예수님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도록 하자. 그래서 모두가 살맛을 느끼는 그러한 세상을 이루어 가자.
우리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말씀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혹 사회적 갈등의 현장에서 인간다운 삶과 생태보존, 정의를 외쳐대는 이들을 분란을 조장하는 이들로 판단하고 대하지는 않는가? 과연 내가 추구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음은 창조주 하느님의 본성일진대 이를 외면하며 산다면 살아있으나 썩은 송장과 다를 바 없음을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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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신부-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따뜻한 사랑에 목말라 하기보다는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생명의 탄생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가장 빛나는 선물입니다.
생명을 접할 때마다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삶이란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삶이란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생명의 힘일 것입니다.
충만한 생명은 충만한 사랑임을 주님 사랑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사랑은 생명의 기본적인 표현입니다.
사랑하기에 길을 마련하고 사랑하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리를 하며 산다는 것은 사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언제나 당신 먼저 우리를 존중하시고 신뢰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성탄의 신비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생명존중의 문화는 세례자 요한처럼 요란하지 않습니다.
결코 주님의 길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주님사랑과 하나되기 위해 사랑의 길위에서 함께합니다.
이웃과 형제를 탓하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나자신부터 사람의 도리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인권은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문화는 사랑과 존중의 문화입니다.
생명을 진정 살리는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우리자신부터 바르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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