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스 드빌레르는 철학자이다. 그런 그가 바다를 이야기했다. 그저 바다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절묘하게 우리의 삶과 바다를 등치시켰다. 그리고는 하나하나 우리 삶의 아픈 곳을 짚어내며, 우리에게 삶을 관조하라고 말한다.
바다를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저자의 발상이 참으로 신선하다. 스물 네 꼭지 이야기마다 우리의 굴곡진 삶을 하나씩 들추어내며 때로는 다독이고, 때로는 질책을 하면서 마침내는 삶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집은 바닷가이다. 부엌 창문으로 내다보면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보인다. 온통 고층건물이 자꾸 들어서는 바람에 바다가 조금씩 사라지기는 하지만 석양빛은 너무 아름답다. 이틀에 한 번씩 그 바닷가로 운동을 하러 나간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다는 그저 무덤덤하다. 바닷물이 넘실대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고 갈매가가 날고, 저녁 시간이면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든다. 내가 보는 바다는 그것이 전부다. 그런데 저자는 그 똑같은 바다에서 삶을 길어 올렸다.
더러는 경구 같기도 한 그의 이야기는 동네 할아버지의 말처럼 친근하다. 밀물과 썰물을 보고는 인생도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다며 다독인다. 요즈음은 하루가 다르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의 이야기는 바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바다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바다로 떠나라고 주문한다. 바다는 숱한 우여곡절을 품고 있다. 바다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거친 파도와 잔잔한 물결은 일상이다. 그러므로 바다는 인생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생의 굴곡진 삶의 형태와 닮았다는 말이다. 그것도 무한으로 이어지는 인생이다. 그런가 하면 바다는 인생의 방향을 상징하기도 한다. 바다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바다는 그런 인간 누구에게나 인생의 의미를 들려준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그가 주는 응원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우리에게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파도를 헤치고 앞을 똑바로 보고 전진하라고 한다, 운명의 주인이 되어 생각의 방향을 스스로 조종하는 선장이 되라고 말한다.
인생은 멀리 떠나는 항해와 같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이라는 항해를 제대로 하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 바다의 노래가 시작된다. 스물 네 꼭지의 이야기 소재는 모두 바다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저자는 무인도에서도 삶의 이야기를 주워서 보여준다. 로빈슨의 이야기를 통해 환상과 현실을 일깨운다. 아름다움을 쫓아다니지만 말고 아름다움을 통해 예상치 못한 감동을 느낄 수 있게 감각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어루만진다.
험난한 바닷길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용기를 가질 것을 말해주는가 하면, 난파선 이야기를 통해 폭풍 속에 내몰린 배위의 선원들 이야기를 한다. 선원들은 안전 장비를 확인하고 대피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해적과 해적질이라는 글에서는 요즈음 민주당의 젊은 국회의원이 떠올랐다. 그의 해적질에 전 국민이 분노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해적질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자의 전직이 변호사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게 대한민국이다.
한편, 섬 이야기를 통해 바다 위의 섬처럼 인간도 각자 하나의 섬이라고 하는 표현도 흥미롭다. 획일적인 대중과 대항하는 섬, 지구상에 나와 같은 인간은 없다. 누구도 나와 같지 않다. 나는 나일뿐이다. 섬이 혼자인 것처럼. 섬은 마침표와 같다. 나는 나일뿐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선언이다. 자신에 대한 선언이다. 나답게 사는 것은 어렵지만 이처럼 뿌듯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것. 잠시 누구의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결국은 우리가 고유한 존재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나약해져 가는 내 자신을 추킬 수 있는 경구처럼 들린다.
수영을 통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엮어낸다. 바다 속에 들어가면 내 몸이 가벼워진다. 과학적으로 보면 그건 이미 고대의 아르키메데스가 밝힌 바 있다. 어떻든 가벼움은 예술이다. 평소 우리는 수천 가지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과거, 잃어버린 행복, 실연, 현재 이뤄야 할 것들 등. 그리고 무엇보다 자아라는 무게에 눌려 있다. 견디기 힘든 가장 무거운 것은 자아다. 자아가 무거운 이유는 지금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모습 때문이다.
등대 이야기를 통해서는 각자 흔들리지 않는 삶의 좌표를 만들라고 다독인다. 등대는 바다에서 배에게 길을 안내한다. 우리에게도 삶을 밝게 비춰주는 당당한 등대가 필요하다. 등대는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모범이 되기도 하며 자신 있는 가치를 상징한다.
우리 인생의 위로가 되어주는 등대들을 목록으로 정리해보자. 책, 친구, 고향, 신, 부모님, 오랫동안 간직한 꿈, 목록을 만들고 카드에 붉은색 글씨로 써보자. 인생에 암초가 나타나 위협하고 바다가 사나워질 때 이 목록을 떠올려보자. 그것들이 나의 마음속에서 흔들림 없이 단단한 고정점이 되어줄 것이다.
바다색은 푸른색이다. 그러나 사실은 무색이다. 그런데도 바다는 푸른색뿐만 아니라 장소에 때에 따라서 푸른색이 아닌 다른 색을 내기도 한다. 바다는 예술가다. 우리도 바다처럼 일상에서 예술가가 될 수는 없을까? 빛을 조절해 나만의 색을 멋지게 꾸밀 수 있지 않을까?
평범한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내 몫이다. 삶에 다채로운 색깔을 칠하는 것이다. 다채로운 색으로 칠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삶을 푸른색으로 칠하자. 삶이라는 그림을 펼쳐놓고 직접 붓을 들고 직접 색을 칠하자.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일상으로 채우자.
소설 ‘백경’의 모비 딕과 에이해브 선장 이야기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클로즈업 되었다. 일본이 모비 딕이라면 우리가 에이해브 선장쯤일 것이다. 우리는 늘 우리에게 피해를 준 일본의 목줄을 쥐려고 덤벼든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무릎 꿀렸다고 해서 우리의 국민소득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원래대로 수습할 수 없다. 그러면 혹자는 말한다. 독일 수상은 수차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고 말이다.
물론 독일도 주변의 나라들과 독일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유로화를 사용하고 유럽연합을 구성하고 있다. 주변국들은 독일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니 독일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사과하라는 말 대신에 일본인들이 미안하게 만들면 안 될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두 가지 방안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국부를 더욱 끌어올려 세계 제일이나 적어도 일본 보다는 월등한 수준으로 키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과 더욱 친밀하게 상호협조하면서 지내는 길을 꾸준히 모색함으로써 마침내 일본이 스스로 미안한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이다. 적대적 사고는 반감만 불러올 뿐이다. 그건 사실 정치가들의 장난일 수 있다. 다행히 요즈음은 한일관계가 조금씩 회복되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세이렌의 이야기도 오늘의 정치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세이렌의 유혹처럼 요즈음은 온 사방이 가짜뉴스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보다 거짓에 쉽게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다.
그 감언이설이 세이렌의 노랫소리다. 율리시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선원들에게 귀를 막고 갑판의 승강구를 닫으라고 했다. 선동하는 방식과 세뇌하는 의견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은 텔레비전을 보면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넘쳐난다.
책을 읽으면서 아쉽게 여겼던 것은 번역 문제다. 프랑스어를 모르기 때문에 원문을 알 수는 없으나 가독력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봐서 너무 정직한 번역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직역을 할 때 읽는 부담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게 내 독서능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