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경대의 흔적을 찾아서
중국의 유명한 소상팔경을 빼어 닮았다고 자랑하던 사상(沙上)의 회산(晦山) 팔경대(八景臺)는1740년도 간행된 동래부지(東來府誌) 고적조(古蹟條)에 의하면 부산의 경승 8대(臺)중의 한 곳으로 불릴 만큼 명성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18세기에 제작된 영남지도 동래부, 지승 동래부, 여지편람 동래부 등의 지도에 팔경대가 표시되어있음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평사낙안(平沙落雁 : 하늘을 날다 모래펄로 내려앉는 기러기) 운수모종(雲水暮鐘: 운수사에서 들려 오는 저녁 종소리) 등 '사상팔경'이라하여 8가지의 경치를 팔경대에서 즐겼다는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팔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동래부지에 기록되고 여러 고지도에 표시된 팔경대가 있는 회산이 사상역 앞에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paran.com%2FBLOG_505147%2F201004%2F1271150442_%EC%8A%A4%EC%BA%940037_conv.jpg.jpg) '지승' 동래부(18세기 중엽 채색본 사본) 지도의 왼쪽 낙동강변에 팔경대가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1970년대 전국적으로 개발 붐이 일던 때 회산은 사상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사상공단이 조성되면서 사라지고 만다. 회산이 깎이면서 저지대였던 학장지역의 지반 매립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숱한 세월속에 이 고장을 묵묵히 지켜오던 회산은 지역의 경제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후손들의 손에 의해 역사의 수레바퀴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역민을 위해 제 몸을 바쳤다고나 할까...
회산이 깎일 때 마을의 발전과 지역민의 안녕을 빌었던 할배, 할매 당산은 철거하여 사상역 뒷편 언덕으로 옮겼으나 '팔경대'라고 써 놓았던 소중한 팔경대자연석은 이름없는 바위로 취급되어 없어졌다. 그런 가운데 임진왜란때 지역민으로 의병에 참가하였다가 돌아 와 마을 재건에 힘쓴 9인의사를 기리는 '사상9인의사연구제단'은 연구계에서 사상역 뒷편 백양로 변으로 옮겼다가 1988년 연구재단중수 때 새로운 비석으로 대체 된 것은 팔경대자연석과 달리 주인격인 연구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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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면서 회산의 팔경대에서 즐겼다는 '사상팔경'은 낙동강제방축제와 곳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자연환경이 바뀌게면서 하나 둘 사라지게 된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팔경대의 장소인 회산이 없어지면서 '팔경대'와 사상팔경을 석각한 팔경대자연석도 회산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짧은 공사기간 동안 흔적 조차 없이 사라진 것은 정말 안타깝기 짝이없다. 이웃 강서지역의 칠점산의 경우 낙동강제방용으로, 비행장 공사용으로 긴 세월에 걸쳐 파헤쳐 졌지만 작은 흔적 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발 제일주의 시대였다고 할지언정 작은 공원형태라도 회산의 흔적을 남겨 둘 생각을 왜 못했을까? 만약 해 놓았더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지금의 서부터미날 앞 마을인 창날(또는 동괘)과 사상역앞 마을인 괘내에 살았던 어르신들이 기억하는 회산에 관한 이야기를 사진을 중심으로 팔경대의 흔적의 실마리를 엮어 보기로 한다.
오랜 세월의 흐름속에 빛바랜 흑백사진이야말로 그때 그 시절을 확실하게 대변해주는 증거물로서 소중하기 그지없다. 몇장의 빛바랜 사진처럼 지난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아래 사진은 괘법동에 살고있는 이익근씨(61)가 보관하고 있는 귀한 사진으로서 감사를 드리면서 회산에 관련된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 분들의 연락을 손꼽아 기다린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7%3F1294289824.jpg) 팔경대자연석 정면에는 사상팔경(沙上八景)과 왼쪽에는 팔경대(八景臺)라고 음각으로 써있다. 이곳이 지난 날 팔경대 자리였음을 말해주는 자연석으로, 왼쪽에 팔경대(八景臺)라고 음각으로 써놓은 글씨가 뚜렸하게 보인다.
이 자연석이 있었던 곳은 소나무 숲이 있던 근처로서 할배당산을 기준으로 30여보 남쪽으로 두개의 무덤이 있었으며, 무덤 옆 10여보 위치에 팔경대자연석이 위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팔경대자연석 옆에는 사각형으로 다듬어진 돌 제단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넓직한 제단 돌위에서 바둑을 두면서 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팔경대 자연석은 회산(晦山)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사상공단조성 시 회산의 흙이 사용할 때 팔경대자연석의 가치를 그누구도 깨닫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당시 배고팠던 시절이라 팔경대 자연석을 한갖 바위덩이로 보았을까? 아무튼 팔경대자연석은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챙겨 둘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부산의 경승 중의 한 곳으로 불리었던 팔경대라고하면 분명 누각도 있었으라 생각되지만 그 어디에도 흔적 조차 찾을 길 없다. 다만 누각이 있었다고 추정해보면 회산(晦山)에서 가장 경치가 좋고 사상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그곳은 바로 아래 두번째 사진의 소나무숲 주위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001%2F2008%2F09%2F08%2FPYH2008090803680005100_P2.jpg)
고운 최치원이 남겼다는 동백섬의 자연석에 새겨놓은 '해운대' 석각처럼 위의 사진처럼 사상 회산의 자연석에도 '팔경대'와 '사상팔경'을 새겨 놓았다.(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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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11%3F1294289824.jpg) 회산을 파내는 공사현장(1970년대 초반) 해발 1백여m인 회산은 1974년 사상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사상공단을 만들면서 회산의 흙을 저지대였던 학장지역의 지반매립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위의 사진은 회산의 흙을 깍아내는 마지막 공사현장이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0%3F1294289824.jpg) 할배당산 회산의 소나무 숲속에 할배당산이 있었다. 약 40여년 전 이익근씨의 부친께서 당시 허물어 지다시피한 할배당산의 당집의 지붕 기와를 이었다고 한다. 할배 당산은 창날(동괘) 사람들이 관리하였으며 괘내사람들이 관리하던 할매당산은 할배당산에서 괘내쪽으로 30여보 아래 있었다. 지금은 사상역앞 왼쪽 절개지 언덕위에 할배,할매당집이 함께 있다. 이 사진은 할배당산에서 동남쪽 방향(포부대쪽)으로 보고 찍은 사진이며, 왼쪽의 소나무 뒤에 괘내마을의 지붕이 일부 보인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5%3F1294289824.jpg) 창날마을 기와집과 초가집이 보이며 검은 부분은 공터이다. 뒷산이 회산(晦山)으로 키가 큰 소나무숲 가운데 아래에 할배당산 지붕의 윤곽이 보인다. 이 사진은 1968년 7월에 찍은 사진으로 당시 사상지구구획정리로 인해 첫번째 철거될 주택모습으로 지난 날 창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몇안되는 사진중의 하나이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3%3F1294289824.jpg) 창날(동괘)마을의 왼쪽 작은 산이 소나무 숲이 우거진 마을의 왼쪽은 서괘로 이어진다. 검게 보이는 부분은 소나무 숲이다. 앞에 보이는 것은 논으로 논바닥에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선 겨울철에 찍은 사진임을 알 수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1%3F1294289824.jpg) 창날마을의 중앙 정면 뒤에 보이는 산이 삼각산이고 왼쪽이 백양산이다. 삼각산은 사상초등학교 교가속에서도 나오며 사상지역에 살아오면서 가장많이 바라 보았던 산으로 누구나 한 두번쯤은 올라 간 기억을 갖고 있다. 사진의 오른쪽에 검게 치솟은 것은 유리병을 만들었던 초자공장의 굴뚝이며 이 뒷편으로 동괘에서 괘내로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이 있었다.그리고 사진의 오른쪽의 검은 부분이 할배 당산이 있었던 소나무 숲이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2%3F1294289824.jpg) 창날마을의 오른쪽 뒤에 보이는 산위에는 1950년대 후반까지 포부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오른쪽 모퉁이에 崔氏열녀비각이 있어 밤에 그 앞을 지날 때면 머리가 쭈볏서곤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이 모퉁이를 돌아서면 서감마을이 나온다. 사진의 왼쪽은 신흥상공사가 자리잡고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6%3F1294289824.jpg) 가뭄으로 모내기를 못한 괘법동 들판(1968.7.9) 1968년의 가뭄을 60년만의 대한발이라 낙동강 본류를 제외하고 모든 지류는 말라 버려 아래의 사진과 같이 수로가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이없어 모내기를 못해 농심을 한없이 울렸던 해의 사진이다.
사진속을 살펴보면 높은 굴뚝이 한눈에 띄는 것이 신흥상공사 건물이다. 군납용 단화를 전문적으로 만들었던 신흥상공사는 서괘에 있었던 일반 서민용 신발을 만들었던 왕표 신라고무와 함께 사상지역의 경제에 큰 역활을 담당하였던 고무신 공장이었다. 치솟은 굴뚝은 당시 영남지역에서 높이가 가장 높았던 굴뚝이었다. 위치는 지금의 사상역앞 도로변의 삼성생명 자리이다.
논가운데 2열로 세워져있는 검은 말뚝처럼 보이는 것이 전신주이다. 뒤에 2개의 검은 줄처럼 보이는 것이 낙동강제방과 십리줄대밭이다. 앞에 보이는 줄이 십리줄대밭이고 뒤줄이 낙동강제방이다. 제방 너머로 낙동강둔치를 보상지 또는 새마을로 불렀렀던 지금의 삼락 강변공원의 벌판과 그 너머로 낙동강도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도로가 주례방향로 가는 간선도로로서 넓혀졌지만 위치는 지금도 그대로 이다.
농수로와 돌다리 '돌따게' 라고 부르는 수로를 건너 다니는 다리이다. 수로를 건너 다닐 수 있도록 양쪽에서 수로 중심으로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메웠는데 가운데 1m 남짓은 물이 흐를수있게 평편하고 길죽한 돌을 깔아 놓은 것은 것이다. 농사를 짓기위해 건너 다니는 작은 길이었다.
이 지역은 십리줄대밭 안쪽으로 샛강과 연결된 농수로(農水路)가 있어 풍부한 강물을 이용하여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수가 있었다. 밭둘(둑) 또는 십리줄대밭으로 불리었던 작은 제방은 낙동강제방이 있기 훨씬 이전인1788년에 당시 이 지역민들이 동래부사에게 청원서를 올려 제방을 쌓았다고한다. 덕포동 상 강선대 아래쪽에서 부터 학장초등학교 부근까지 길이가 10리나 되어 십리줄대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해마다 여름철이면 수해로 인해 농사피해를 입어야만 했던 이지역을 수해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었다.
십리줄대밭의 구조는 윗폭은 약1.5m, 아래폭은 약5m, 높이가 약 3m 가량의 사다리꼴의 둑으로서 양측면에 키가 작은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뿌리가 엉키는 성질을 이용하여 둑을 튼튼하게 하고 붕괴를 막도록 한 것이다. 십리줄대밭을 쌓을 때 인근 양산지역의 장정까지 동원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그 당시로서는 큰 공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줄대밭을 쌓아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이경일 동래부사를 비롯하여 3명 부사의 공덕을 칭송한 혜민비(惠民碑)가 덕포1동 상강선대(上降仙臺/할배당산)에 현재까지 세워져있는데 비석의 비문에 축제(築堤)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5%2Fb2%2Fbluewave1004%2Ffolder%2F9%2Fimg_9_75_8%3F1294289824.jpg) 대홍수로 간선도로에 차량통행이 금지되자 리어카로 행인을 실어나르고 있다(1969.9.15) 위의 가뭄사진과 대비되는 사진으로 가뭄으로 모내기 조차 못해 농심을 울렸던 아픈 기억이 잊혀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대홍수로 피해를 입었다. 사진의 장소는 창날앞 도로로서 지금의 터미날앞 시내버스 정류소 부근이다. 참고로 10년전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새벽 전국을 덮친 A급 태풍 사라(SARAH)호의 피해는 사상지역에도 예외없이 수많은 피해를 입혔으며,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
첫댓글 블로그링크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저작권 존중과 우리 카페 분들이 참고 할만한 내용이 다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부득이 링크를 했음을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산 사상구와 북구에 엄청난 도움이되고 자료가 되는 좋은 정보를 찾아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링크는 개의치마십시오. 저작권 존중과 기타 지켜가야 될만한 사한은
최대한 그렇게 하는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긍정"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짝짝, 짝~짜짝... "절~~~~대긍정"...짝짝, 짝짜작...^^
뿌~~~우~~~ (부부젤라 등장 ^^)
대단하십니다....지금은 산복도로가 생겼지만 친구집이 산복도로 생긴 부근에 있어 몇번 사상역 주변을 가보았지만 회산은 몰랐네요...늪,미나리광이랑은 많이보았는데...
60년대 중후반부터 70년대초까지 사상역에서 범일역까지 기차 통학 가끔하면서 본 회산, 벼락산이라고도 했던가?
그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야후 서비스 종료로 원본 출처가 사라져 볼 수가 없네요..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