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한국 천주교 전래 이전의 상황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고려말기에 이르는 1천여년 동안은 불교가 우리민족 생활전반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면서 주자학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주자학의 한계가 드러나자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는 실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일본에는 1549 년 예수회 회원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그리고 중국에는 1581
년 경
마태오 리치가 많
은
서구의 문물을 가지고 들어가 천주교를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1605
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교 정책으로 혹독한 박해가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서양 신부들이 중국의 풍습,
관습을 존중하면서 전교를 함으로써 많은 주민들의 호응을 받게 되었으며 전교도 용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저술된 천주실의, 칠극, 교우론 등은 한국의 실학파들에게 전래되어 한국의 초기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7-2 한국의 복음 전래
동양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예수회는 일본과 중국에 전파한 후 조선에도 복음을
전파하려고 여러번 시도하였습니다.
근 백여년간 조선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오려고 애썼지만 한국의 폐쇄성을 깨기란 쉽지 않아 번번히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17 세기초부터 서양의 학술 서적들이 오가는 사절단에 의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마태오 리치가 한문으로 저술한 교리서인 '천주실의'가 진리를 찾던 소수의
실학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는 학적 연구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옮겨져 점차 신앙생활로 변하게 됩니다. 특히 이익과 그의 문인들이 천주교회의 교리를 천주학(서학)으로 연구하게 되고
경기도 천진암 주어사에서는 권일신, 권철신, 정다산 3 형제 등 20 여명에 이르는 남인 학파 학자들이 학문
연구를 하게 되고 1783 년에는 이벽이 이 강학회에 참여하면서 천주교 교리 연구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들은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유교의 경전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서학서에서 그 해결을 찾아보고
공감을 가지며, 이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생활로 직접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벽 외에는 모두 계속하지 못하였고,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진리를
전체적으로 깊고 넓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7-3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이벽은 천주교 교리를 배움에 여러 의문들을 느꼈고 이런 부족한 점들을 해결하고자 여러번에 걸쳐
북경에 사람들을 파견하려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남인파 학자인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 교리를 더 깊이 배워오게 했습니다.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한 후 북경 성당을 찾아가 시간이 있는대로 교리를 배워 1784
년에 그곳에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de Grammont)에게 베드로란 영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귀국길에 성화(그림), 성물, 많은 서적 등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을
가지고 연구한 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7-4 복음 전파의 시작
이승훈이 1784
년에 귀국하자마자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그것을 친척과 친지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해 음력 9 월부터 세례를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교회를 구성하게
됩니다. 또한 이벽은 정약전,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중인 계급에
전교하여 김범우, 최인길, 최창현, 지황 등을 입교시켰습니다. 또한 학문과 명성이 높은 권철신, 권일신
형제들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27-5 가 성직자 제도
1786년부터 지도급 신도들은 북경의 교회제도를 본따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아 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이것은 물론 불법이지만 아직 천주교의 제도들을 잘 몰랐으므로 선의적 뜻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를 집행하였습니다. 이 제도를 '가 성직자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승훈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과 정약종 3형제, 최창현, 이단원, 유항검
들이 신부가 되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고 성사를 집행했던 것입니다.
이 제도는 세계의 가톨릭 교회사상에서 유래가 없는 것으로서 당시 우리 선조들의 진리 사랑의 열심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제도는 약 2 년간 계속되었는데 그러던 중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관해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27-6 성직자 영입운동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천주교는 하나의 종교로써 받아들여졌고 신도들의 집회도 잦아졌습니다.
그 후 도처에서 박해가 일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도 신도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구베아 북경 주교로부
터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1794 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 교회에 파견되었습니다. 주신부의 노력과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의 결과로 조선땅의 가톨릭 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그의 입국 당시 4000
여명에
불과하던 교세가 1800 년경에는 1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신도들은 특히 명도회란 신심단체를 조직해서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특히 초대 회장인 정약종은 '주교요지'라는 순 한글로
된 교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27-7 조선교구 설정
천주교는 사상적, 사회적, 정치적인 이유에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사상적으로는 유교의 양반사상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마찰을 빚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천주교 신도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으므로써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집단으로 공격받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당파싸움의 방편으로 천주교를
이용하였습니다. 1801 년의 큰 박해로 주문모 신부의 순교 등 교회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도들은 점차 새로운 신도집단을 형성하면서 무엇보다 성직자 영입운동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교회 재건에 힘쓴 정하상, 신태보, 유진길, 조신철 등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또는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 주교에게 지속적인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황에게도
1811 년과 1825 년 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어 조선 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선교사 파견을 간곡히
요청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황청에서는 1831
년 9 월 9 일에 교황교서를 통해서 조선 교회를 북경교회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조선교구로 승격시키면서 초대 주교로 파리 외방전교회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땅에 입국하려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에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837 년에야 2 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게 되었고, 이로써 명실공히 독립을 이뤄 드디어 이 땅은
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
27-8 한국천주교회는 자생적인 교회
조선 땅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외국에서처럼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내던 우리 선조들
스스로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외국인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갈망하던 선조들이 천주교 진리의 참됨에 감탄하여 스스로 신앙인이 되었고 서로 노력하여 성장한
교회라는 점이 우리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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