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무집행정지가처분신청 원인추가
(2014재수18 대통령선거 무효소송 사건)
채권자
성 명 : 김현승
주 소 :
송 달 지 :
휴 대 폰 :
이 메 일 :
성 명 : 탁향우
주 소 :
송 달 지 :
휴 대 폰 :
채무자
성 명 : 박근혜
주 소 :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 1 대통령실 (우) 110 - 820
신 청 원 인 추 가
1.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제 18대 대선은 총체적 관권부정선거입니다.
채무자 박근혜는 가짜 당선자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부정선거를 덮고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서, 국민의 눈과 귀를 덮는 사건ㆍ사고를 일으키는 등 국민의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2013년 1월에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신임 남재준 원장과 공모하여 공안정국과 여론몰이로 부정선거를 덮기 위해 간첩조작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2014년 4월 15일 서울고등법원의 간첩혐의 무죄 확정과 국정원과 공안검사의 간첩사건 증거조작이 대검찰청의 구속수사로 이어진 것에 대해 남재준이 사과를 한 다음날인 4월 16일 오전에 곧바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세월호 침몰 직전, 해경이 진입했다면 다 살릴 수 있었다’는 검찰의 판단, 세월호 선체 기울기를 분석한 결과 ‘해경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단원고 학생이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낸 오전 10시 17분까지, 47분간 선원과 승객을 충분히 전원 구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 세월호 참사 사고대책을 위한 검경합동수사본부의 결론입니다.
또, 검찰은 해경이 적극적인 구조활동을 외면했던 동영상도 다수 확보한 상태입니다.
채무자 박근혜는 해군참모총장이 4월 16일 오전에 명령하고, 당일 오후에 계약서와 각서까지 체결한 해군의 최신 구조함인 ‘통영함’의 구조 투입을 4월 16일 오후에 막았습니다.
또, 채무자 박근혜는 4월 17일 진도 체육관에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자신이 통할하는 김석균 해양경찰청장과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자신과 세월호 희생자 가족, 그리고 실시간 생방송으로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구조 정보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묵인하고 용인하였습니다.
김석균 해경청장은 1)구조에 투입된 잠수부가 500명이라고 수차례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 세월호 침몰 현장을 2차례 방문하고 사진 기록을 근거로 거짓말이라고 지적했음에도 김석균 해경청장의 거짓말을 묵인하고 용인하였습니다.
2)재 정이 부실한 특정 민간업체(언딘)을 ‘최고업체’하고 직접 발언하였고, 그리고 해군의 통영함과 UDT/SSU에 비해 기술력이 크게 열등한 해당 민간업체의 바지선(언딘 리베로호)을 라고 과장되게 발언하여 해당 민간업체를 비호하는 것을 묵인하고 용인하였습니다. 특히, 침몰 현장에는 현대 보령호 등 더 안정적이고, 구난/구조 경험이 많은 ‘현대 보령호’ 등이 현장 도착 직전이었음에도 당시 설계 대비 건조 상태에 심사 및 승인도 안된, 17일 당일 오전에야 진수한 ‘언딘 리베로호’를 위법하게 투입 명령을 했고, 또 위법한 행위를 대통령과 국민 앞에서 홍보하는 것을 묵인하고 용인하였습니다.
3)천 안함 구조를 (지휘했던) 지휘관과 구조에 투입된 경험이 있는 해군 200명이 구조에 투입되었다고 수차례 거짓말했습니다.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해군은 16일, 17일 당시를 포함하여 단 한차례도 구조에 투입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해경이 해군의 구조 투입을 통제하고 세월호 100미터 이내로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4)천안함 구조에 참여했던 해군 200여 명이 현장에 와 있다고 채무자 박근혜에게 귀앳말을 하여 채무자 박근혜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이상 김석균 해양경창청장이 위법하게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채무자 박근혜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도록 종용한 것을 묵인, 용인하고, 채무자 박근혜가 사실 확인없이 직접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주영 해양수산부장관은 1)16일 오전 대전 통합전산센터의 전산오류로 인한 세월호의 정확한 시간별 위치 확인과 사고 원인분석에 결정적인 AIS 항적을 정리하지 못했고,
2)이주영이 통할하는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거짓말을 묵인하고, 용인했으며,
3)통할하는 해경이 해군, 119, 민간어선, 민간잠수사들의 구조활동 방해를 묵인하고, 용인했으며,
4)채무자 박근혜의 통할을 받는 자로서 채무자의 ‘마지막 한 명까지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엄명’을 불복종했습니다.
채무자 박근혜는 1)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질문에 채무자 스스로 인정하고 답변한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을 속이고,
2)재난 사고의 현장에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속이는 말을 직접 발언하고,
3)1,750억원을 들여서 건조한 최신 구조 장비를 갖추고 있는 구조함인 통영함을 세월호 구조에 투입하라는 해군참모총장의 명령을 직접 방해했고,
4)소방방재청의 119 구조대, 현대 보령호 등 대형 바지선, 다이빙벨 등 더 효과적이고, 경험이 풍부하여 다양한 해양구조 사례에서 검증된 장비와 인력들이 투입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고,
5)해난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골든타임에 구조 현장을 방문하여 모든 구조활동 인력이 의전에 투입되도록 하여, 구조 작업을 중단하고 골든 타임을 허비함으로써 구조를 방해했고,
6)채무자 박근혜 자신이 세월호 유족과 국민들에게 약속한 ‘오늘 지금 여러분들하고 얘기한 게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분들 모두 다 책임지고 물러나야 합니다‘ 라는 약속을 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7) 채무자 박근혜의 아버지 독재자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유신 대통령으로 취임한 1972년 12월 25일 직후에 유신독재에 대한 민주공화국 국민의 반독재 투쟁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한 ‘상쇄아이템’이 필요한 시점인 1973년 1월 25일에 세월호 침몰현장과 불과 몇 km 떨어진 곳에서 ‘한성호’가 침몰하였는데,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바깥에서 문이 잠긴 채 침몰했다는 증언이 있는 한성호에서 초등학생을 포함한 수많은 진도 어민들이 수장되었음을 잘 알고 있고,
8)역시 유신군사독재에 반발하는 군내부 세력 제거를 위한 ‘징계아이템’이 필요한 시점인 ‘1974년 2월 22일’에 충무앞바다에서 ‘예인정’이 침몰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해군참모총장과 차장이 해임되는 등 행정부 수반이 통할하는 정부부처의 책임 및 부처장에 대한 징계 사례를 잘 알고 있고,
9)채무자 박근혜의 직속인 비서설장으로 재직 중인 김기춘이 ‘한성호’ 침몰사고 당시에 유신헌법 내용을 직접 작성하였던 법무부 담당 검사로 재직하였고, ‘예인정’ 침몰사고 당시에는 박정희 정부의 청와대 법무비서를 담당하는 법무부 법제담당과장으로 재직하여, 세월호와 동일한 대형 여객선 등 선박 침몰사고에 대해 재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생명 구조를 포함한 대응 방법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고,
10)채무자 박근혜는 이상의 8)과 9)의 경험과 지식을 보유한 김기춘이 비서실장으로서 진도체육관 방문 당시에 채무자에게 귀앳말을 할 수 있는 불과 1미터 내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었음에도 현장에서 김석균과 이주영의 거짓말에 채무자가 속는 것 또는 의도적으로 동조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거짓말에 속았거나 또는 채무자 자신이 의도적으로 동조하여 국민과 세월호 유족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김석균 해경청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청와대와 국정원을 포함한 모든 정부부처의 정보력과 통할 권한을 이용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경험이 풍부한 검증된 해상구조 장비와 인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한 뒤에 총 동원하도록 채무자에게 ‘구조 명령’을 내릴 것을 지원해야 하는 직무를 유기한 책임을 물어 즉시 사법처리하지 않았고,
11)17일 진도 체육관 방문 직후에 김기춘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법처리 하지 않고 인사권을 계속 방치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고 친일하는 문창극 총리후보,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 김명수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후보, 박효종 방송통신위원장후보 등을 채무자 박근혜에게 지명하게 하여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자존감과 국가적 신뢰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일을 계속하게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 상의 채무자 박근혜 자신의 직접적인 거짓말과 해군참모총장의 통영함 구조투입 방해, 통할하는 김석균 해양경찰청장과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의 거짓말과 명령불복종에 대한 묵인, 용인, 동조 행위를 통해 세월호 승객 구조를 막는 등, 헌법에 명시된 국민 생명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국가 재난과 국민 희생을 조장하고, 친일 인사에 대한 정부부처 장 지명을 통해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려 국가의 대표성을 상실하고, 헌법을 위협하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실태에서도 채무자 박근혜가 대통령의 직위에 있음을 기화로 정부가 구조를 안하고 오히려 구조를 막았기 때문에 더 많은 인명이 산채로 수장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지난 2014년 3월 25일에 제출한 가처분신청서 청구원인에서 신청자가 명시한 ‘국가 및 국민으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재정, 주권행사, 민생상 손실을 입게 될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와 국민이 처하게 될 더 이상의 손실과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채무자에 대한 본안소송 판결 전까지 직무집행정지를 명령하고 직무를 정지시키는 것이 국민의 세금으로 급여를 받는 법관의 맡은 바 책임과 함께 ‘우리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진정한 국민의 자세라 할 것입니다.
위 채권자들은 2014. 2. 14. 제18대 대통령선거무효소송사건(2014수15) 및 2014재수18 대통령선거무효소송의 청구취지, 청구원인 및 입증방법에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제18대 대통령선거무효소송을 제기함에 따라 박근혜 당선인이 그 적법한 자격상의 흠결로 인해 주어진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법선거로 당선이 결정된 채무자는 대통령의 직위에 있음을 기화로 전 국토와 국민에 대하여 국민을 대리하여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
-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2항 명시하고 있는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는 직무와
-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2004헌나1에서 밝히고 있는 헌법 제 66조 2항의 대통령의 직무집행에
‘헌법 제66조 제2항 및 제69조에 규정된 대통령의 ‘헌법을 준수하고 수호해야 할 의무’는 헌법상 법치국가원리가 대통령의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구체화된 헌법적 표현이다. 헌법의 기본원칙인 법치국가원리의 본질적 요소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국가의 모든 작용은 ‘헌법’과 국민의 대표로써 구성된 의회의 ‘법률’에 의해야 한다는 것과 국가의 모든 권력행사는 행정에 대해서는 행정재판, 입법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의 형태로써 사법적 통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입법자는 헌법의 구속을 받고, 법을 집행하고 적용하는 행정부와 법원은 헌법과 법률의 구속을 받는다. 따라서 행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을 존중하고 준수할 헌법적 의무를 지고 있다. ‘헌법을 준수하고 수호해야 할 의무’가 이미 법치국가원리에서 파생되는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헌법은 국가의 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이라는 대통령의 막중한 지위를 감안하여 제66조 제2항 및 제69조에서 이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 의 정신에 의한다면, 대통령은 국민 모두에 대한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인 것이다. 이에 따라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법을 준수하여 현행법에 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며, 나아가 입법자의 객관적 의사를 실현하기 위한 모든 행위를 해야 한다.‘
는 헌법과 헌법재판소의 직무 및 직무집행의 명확한 해석을 위반하고 대한민국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여
대 한민국 헌법 제66조 제4항에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헌법 조항에 의해 대통령은 행정수반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정부가 그에 의하여 조직되고 명령에 따라 직무를 수행합니다.
이에 해양경찰과 해양수산부가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법적인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고 있음에도 대통령의 명령을 복종하도록 하는 헌법 제66조 제4항에서 명시하고 있는 행정수반의 통할 권한을 포기했습니다.
또한 해군참모총장이 세월호에 탑승한 국민의 생명을 구조하기 위해서 발동한 구조함인 ‘통영함’의 충동을 방해하고 차단함으로써 국민의 생명 보호 및 헌법 수호의 책무를 위반하는 전횡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 에 사전에 직무집행정지가처분을 하여 두지 않으면 본안에서 승소한다 하더라도 위 신청외 국가 및 국민으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재정, 주권행사, 민생상 손실을 입게 될 우려가 높으므로 신청취지 기재와 같이 피신청인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및 본안소송 판결까지 이 건 신청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그 구체적인 행정수반의 통할 권한 포기 및 국민 생명 구조방해의 증거를 추가로 제시합니다.
소 명 방 법
첨부 문서.
1. 2014년 4월 17일 오후 5시 진도 체육관 방문한 채무자 박근혜의 거짓말, 9쪽.
2. 2014년 5월 16일 오전 10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김선동 의원 세월호 참사관련 긴급현안질의, 18쪽.
3.김광진 의원 "해군참모총장이 내린 구조함정 통영함 투입 명령. 누가 막았나?", 21쪽.
4. 2014년 5월 19일 김현호씨 한겨레TV 인터뷰 영상, 23쪽.
5. 1973년 1월 25일 오후 2시 반경 여객선 한성호가 목포항을 출발하여 조도를 향하여 항해 도중 침몰한 사건, 34쪽.
6. 1974년 2월 22일 해군 예인정 침몰 사고, 39쪽.
7. 영상 및 녹취록 포함된 CD 1부.
2014. 6. 23.
위 채권자 김 현 승 (서명 또는 날인)
탁 향 우 (서명 또는 날인)
대법원 귀중
첨부 문서.
1. 2014년 4월 17일 오후 5시 진도 체육관 방문한 채무자 박근혜의 거짓말
- 해군참모총장이 명령하고 출고 계약과 각서까지 작성한 통영함은 채무자 박근혜가 막았고,김석균 해경청장이 끌고 오라고 한 승인도 안난 바지선(언딘 리베로)는 이미 출발해서 현장에 가고 있었던 상황.
- 4월 16일 오전 11시 30분 이후로 세월호 우현까지 모두 물에 잠겼고, 17일 02시 30분에 세월호 선수마져 물에 잠겨 있고, 16일 11시 30분 이후 추가 생존자 구출은 전무한 상황을 낮에 침몰현장에서 보고 받고, 육안으로 확인하고 체육관 방문한 것임
- 최초로 잠수한 것은 언딘 잠수사가 4월 18일 07시에 잠수한 것이며, 채무자 박근혜가 방문한 당시에는 잠수하여 세월호 생존 또는 사망자를 확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상황이었음.
박근혜 : 어려운 날씨가 좋지 않지마는 저도 최선을 다하도록 모든 분들에게 부탁을 했고, 계속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떤 위로도 될 수가 없을 정도로. 안타깝고, 애가 타고 한순간 한순간 참담하시겠지만, 구조 소식을 함께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현장에서 여러 가지 소식을 정확하게 수시로 빨리빨리 알려드려서 이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당부를 많이 했습니다.
또, 지금 상황이 그래도 어쨌든 애타는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된다.
현장에 있는 해경이라든가, 해군에서도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전부 그런 각오로 임하고 있다는 것을 가족 여러분들께 확실하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또, 가족분들께는 정부가 최대한 가능한 모든 지원과 항해(?)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서,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데 대해서 철저한 조사와 또 원인 규명을 해가지고 책임 질 사람은 엄벌토록 할 것입니다.
영상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wPUy9zE3HyA
희생자 가족 : 상황실에 (사고)현장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가 장례식장입니까? 학부모들 장례식장이에요? 아무것도 스크린에 보여지는 게 없고, 그리고 배가 현장에 나갔을 때 여기서 어떻게 작전이 지휘되는 지는 몰라도
해상구조원이 구조를 하는 것을 못봤습니다.
기자들이 오니까 구조하고 있다고 그러고, 잠수원들이 30명이 투입된다고 하여서 학부모들은 배에 그만큼 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현장에서는 잠수하는 인원이 한 명도 있지 않았다.
가서 쇼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영상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ZPURYlKxeV4 1분 22초부터
박근혜 : 저 분 답 좀 먼저 드리구요.
그래서 그런 경험도 있기 때문에 자신(해경, 해군)들이 모든 것을 동원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얘기를...
거기 현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천안함의 그분들도 여기 와 있습니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이 200여명이 와있다고 귀앳말)
그 때 동원됐던 해군 200여 명 와서 지금 구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 천안함 직접 구조한 분들(언딘)하고 같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천안함을 직접 지휘했던 지휘관과 ..
(김기춘 비서실장이 박근혜와 이주영 해양수산부에게 장관 귀앳말)
박근혜 : 현장에서 그 UDT 대원이고, 잠수복 입고 직접 뛰어드는 포함해서 거기에 지위하는 모든 분들에게 얼마나 우리 가족들께서 애가 타시겠냐 그분들 마음을 생각해서 마지막 최선을 다해달라 이런 얘기를 했고..(김기춘 끄덕끄덕)
(명령을 내리셔야죠)
그게 바로 명령입니다.
이주영 : (마이크 멀리 하고 박근혜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하면서) 명단을 공개
대책본부 관계자 : 대통령님, 현재 생존자에 대하여 배안에 있는 명단 그것에 대한 분명한 자료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 승선자 명단은 저희들이 확보를 하고 있습니다. 있는데, 더러 정확도에서 떨어지는 명단도 있고, 또 한편에서는 명단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 꺼려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확인을 원하는 분들께는 그 명단을 확인해 드리고 있습니다.
박근혜 : 그것도 다 알려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주영 : (마이크 멀리 하고 박근혜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하면서 명단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
박근혜 : 그럼 어디에 확인을 하면 됩니까?
이주영 : 저희 해경하고 저희 해수부에서 확보하고 있으니까 필요하신 분들 있으면.
박근혜 : 지금 말씀을 들으니까. 이걸 전체 명단을 다 공개를 하면, 그걸 보고 충격을 받을 분들이 있어서 그 가족 분이 하지 말아 달라는. 그 공개를 원하지 않는 가족도 존중을 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대신에 또 많은 분들이 공개를 원하시고 확실하게 봤으면 하시니까, 그것을 얘기만 하면 그분이 여기 있다든지, 없다든지 신속하게 재깍재깍 알려드릴 수 있는 그게 필요하겠습니다.
피해자 가족 : 저희가 원하는 답이 그게 아니라. 실제로 그냥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것을 확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크레인이 지금 오고 있다는데, 대책반에 숨겨져 있고.
크레인이 관련된 사람이 어떻게 인양을 할거며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고 ...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는 대책반 운영 시, 현장에 카메라가 오지 못하고. 말했던 것처럼 저희가 원하는 거는 여기 있는 대표 몇 분이 가셔서 실제로 현장을 보고 전달을 정확히 해줬으면 좋겠구요. ...
박근혜 : 이거를 가족분들 한테 잠수하러 내려가서 어떤 상황이었고, 지금 어떻게 됐다는 거를 좀 더 자세하게.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보여드리는 노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이게 기울어져가지고 뒤집혀졌지 않습니까? 선박이. 여기 내려가가지고 승객이나 학생들이 모여 있다고 하는 그쪽에 접근을 하려고 그래도 시계가 한 20cm 밖에 안되기 때문에 안되고, 또 물살 때문에 들어갈려고 해도 밀려나고 했다는 이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셔야 될 분들이 가족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시도를 했는데, 지금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앞으로 이렇게 할 것 같다든지.
또 크레인(언딘 리베로호)이 오고 있는데 제가 듣기로는 내일 새벽 5시에 도착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도착을 하면 그 크레인이 선박을 이렇게 묶어서 그거를 크레인의 힘으로 전부 다 들어올릴 수는 없다고 한다며는 어느 정도 들어올린 다음에 잠수부가 더 들어가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에 그 때 들어가서 어떻게 해보겠다는가 이런 세세한 얘기를 누구보다고 이 가족분들이 들어야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을 계속와서 가족분들한테 누구보다도
영상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WlQnpuX0ftI
박근혜 : 잠수하러 내려가서 어떤 상황이었고, 지금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그 세세한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이 가족분들이 들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여기 스크린도 설치해서 실시간하고 사진으로 영상으로도 보여드리지만. 거기서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을 계속 와서 가족분들에게 누구보다도 뉴스보다도 가족분들이 더 먼저 알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석균 : 해양경찰청장입니다. 지금 제가 현장에서 구조활동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력을 잠수사 500여 명을 투입을 하고 있습니다.
희생자 가족 : (고성을 지르며 강력한 항의)
내가 다들 아무도 없는 사진을 가지고 있는데. 개xx
김석균 : 아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잠수사가 한꺼번에 다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눠서 계속 들어가고.
스크립트 : 그제서야 김 청장은 “한번에 500명이 들어갈 수 없고 나눠서 들어간다.
최고의 민간업체(언딘)를 동원해 오늘도 수색하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영상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P_4xp8Hm3_8 31초 ~ 1분 27초
박근혜 : 가족분들이 알으셔야 된다 이거죠. 가장 지금 힘들고, 순간순간이 고통스럽고, 애가 타고, 미칠 것 같은 이분들한테 먼저 알려드려야 된다 이거죠, 모든 것을 자세하게 좀 알려드리시고. 또 현장에서도 모든 각오를 다하고. 또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희생자 가족 : 선장하고 부선장하고 전부 다 해경이 제일 먼저 구조했어요. 그죠?
박근혜 : 조사할거고, 또 원인 규명도 확실하게 할거고,
또 거기에 대해서 엄벌에 처할 것입니다. 네.. 반드시.
김석균 : 금방 아까번에 말씀하신 부분. 알려주시는 부분. 제가 이틀동안 현장을 지휘하느라고 제가 여기를 뵙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대통령님 지시에 따라서 제가 매일 제가 와서 브리핑을 해 드리겠습니다.
박근혜 : 아까 명단 그거에 대해서도 어떤 가족부분. 원하지 않는 분들도 존중을 해야 되니까. 원하는 분들한테는 아주 편리하게 빨리빨리. 누가 있습니다. 명단에 있습니다는 것을 금새금새 알려드릴 수 있는 그런 것도 개설 하십시오.
희생자 가족 : 대통령님 저는 배를 2번을 타고 들어갔다가 나왔어요. 지금 ... 문제지만,
여기에서 지금 상황실에 물어보면 답은 139명이 잠수부가 들어갔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항(팽목항)에서 물어볼 때에는 12명이 작업 중이라고 했구요.
배를 타고(16일 밤 10시 경) 들어가서 잠수부를 직접 만났는데 2명만 들어갔어요.
누구 말이 옳고, 그리고 답답해서도 상황실에 물어봤는데. 거기서도 아무것도 몰라요. 내려와가지고 이틀동안 했다고 하는 짓이 뭐냐구요? 당신들!! 뭐를 했는데,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르냐구요. 이틀동안 뭘했냐구요.
박근혜 : 하여튼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가장 힘든 분들이 여기 가족분들입니다. 가족분들에게 모든 일들을. 크레인이 어떻게 할거고, 몇시에 도착할거고, 또 요구사항이 있으면 또 그것을 실천을 하고 ...
희생자 가족 : 이때까지 계획 그리고 거짓말. 계획 그리고 거짓말. 계획 그리고 거짓말만 했어요. 지금 가지고 계신 계획을 얘기해 주세요. 이 자리에서.
김석균 : 먼저 크레인부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박근혜 : 그래서 그 공기라도 좀 집어 넣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 많은 가족분들의 바람이라고 제가 듣고, 왜 공기를 집어 넣지를 못하느냐고 질문도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김석균 : 공기를 집어 넣으려면, 기본적으로 공기를 집어넣기가.. 진입로가 확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입로를 확보하는 과정이.. 계속 저희가 그걸. 계속 작업을 했었습니다..
저희가 그걸 진입로를 확보가 되어야 공기를 잡아 넣을 수가 있습니다.
박근혜 : 앞으로 모든 것을 가족분들 위주로 더 자세하게 계획과 또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뭐가 하다가 안되면 왜 안되고, 그래서 어떻게 할거고, 모든 것을 제일 먼저 세세하게 알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
그렇지 않습니다.
....
박근혜 : 그래서 책임을 지고 현장에 대해서 즉각 알 수 있는 사람이 아예 배치가 돼서, 계속 연락을 해서 현장도 설명을 하고, 또 가족분들이 요청하는 사항에 대해서 여러 차례 거치지 말고 즉각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김석균 : 제가 중요한 상황은 브리핑을 계속 하구요. 제가 또 지휘를 해야 하니까, 상시는 여기 못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지방청장을 계속 브리핑을 하고요. 원하시면 언제라도 또 달려와서 직접 브리핑을 하겠습니다.
희생자 가족 : 사람이 다 죽었는데, 공기 넣으면 뭐하냐고? 빨리 넣어줘야지..
김석균 : 지금 5시에 바지가 움직여야 되는 상황입니다.
박근혜 : 가족분들하고의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공기를 빨리 들여보내서 뭔가 좀 생존자들에게 도움을 줬으면 하는게 간절한 바램인데, 공기를 넣을려고 했는데 안된다는 얘기면.. 어떻게 해서 지금 안되고 있는지도 자세한 설명을 해야지. 이렇게 그게 안되갔구야 계속 애만 타고 안되지 않겠습니까?
...
이주영 : 대통령님께서 현장에 오셔가지고 저희들에게 아주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요청 사항들을 잘 준수해서 최후의 한 분까지 꼭 구조해 내도록 이렇게 엄명을 내리셨으니까.. 저희들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근혜 : 이렇게 이 분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앞으로.. 하여튼
마지막 한 분까지 구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대책본부 관계자 : 대통령님.... 저희들의 마지막 당부는 처음이자 끝이 오직 그마음입니다. 왜 우리나라 잠수부나 기술력이 지금 그 함수 내로 들어가서 그 안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 지를 왜 알 수가 없을까 그게 답답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서 내용을 좀 확인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희생자 가족 : 기계가 승인이 안났데요. 승인이 안떨어졌데요.
김석균 : 제가 그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바지가 막 준공해가 승인 안났습니다.
제가 끌고 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금 오는 중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
대책본부 관계자 : ...
희생자 가족 : 바지선이 와서 양쪽으로 묶고 공기층을 여서 띄운다는데...
박근혜 : 오늘 지금 가족 여러분들이 얘기해 주신 것이 다 실행이 되도록 다 지시를 하겠습니다.
대책본부 관계자 : ...
희생자 가족 : 명령 좀 내려 주세요. 해경이 말을 안들어요.
박근혜 :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약에 오늘 지금 여러분들하고 얘기한 게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분들 모두 다 책임지고 물러나야 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대책본부 관계자 : ....
희생자 가족 : 대한민국 주인이 누굽니까?
박근혜 : 우리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이죠. 네.
희생자 가족 : 저희가 속아도 너무 속았으니까, ...
대책본부 관계자 : 결론적인 명령을 부탁드립니다.
지금 잠수부 투입하고, 빨리 우리 학생들을 살려내고, 우리 생명들을 살려낼 수 있도록.
실시하라고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근혜 :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얘기를 들이면 또 이렇지 않나하는 생각들이 드실 수도 있는데, 거기에는 정확하지 않는 얘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그런 것을 세세하게 미리미리 알려드리지 않은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오늘 말씀하신 것이 잘 지켜지고 있는 지. 제가 전화를 한 번 드릴께요. 네.
영상 주소 : http://www.youtube.com/watch?v=SfcskfdsTIU
첨부된 CD 의 ‘4월17일오후박근혜진도체육관방문영상’ 폴더 내 영상 5개 녹취.
2. 2014년 5월 16일 오전 10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김선동 의원 세월호 참사관련 긴급현안질의
아직도 남아있는 스무분의 실종자들께서 하루 빨리 구조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또 피해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온국민이 저는 이제 피해자가 됐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밝혀야 될 내용이기도 합니다마는. 저는 지금 사고가 발생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여섯 가지의 단계를 거쳐왔다고 봅니다.
무 엇보다도 첫번째는 기업하기 좋은 이야기하면서 비즈니스 프랜들리 하면서 기업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그것이 기업의 탐욕에 기초하는 것인지.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정책이 저는 첫 번째 단계였다고 봅니다.
선박 연령 20년을 30년으로 늘리는 것이 상징했듯이 이명박정부가 박근혜정부가 이어지는 이 신자유주의, 비즈니스 프랜들리, 재벌 기업위주의 이 정책.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되돌아 봐야 되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돈벌이에 눈이 먼 기업들의 탐욕. 이걸 우리 사회가 이제 제어해야 됩니다. 불법으로 개조하고, 증축하고, 그리고 과적하고 생명에, 배 안전에 치명적인 평형수를 비워버리고 던져버리고, 거기에 화물을 과적하는 이 기업의 탐욕이 결국 꽃다운 아이들과 국민들을 죽였을 뿐만아니라, 우리 온 국민을 충격과 고통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또한 저는, 세 번째 단계는 해경이 사고가 발생한 때로부터 배가 완전히 전복되기 전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충분히 우리 어린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해경은 가서 무엇을 했느냐? 제일 처음에 기관원들을 구하고, 그다음에 선장과 선원을 구하고,
그리고는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그 아무것도 안한 일을 16일 당일만이 아니라, 제가 17일부터부터 현장에 열흘동안 있었습니다.
17일, 18일, 19일, 20일까지도 실제로 해경은 배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진도VTS 교신 기록을 아직도 은폐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은폐하고 있습니까? 국민앞에 낱낱이 공개해야 됩니다.
네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 해군에는 구조함도 있고, 통영함이라고 하는. 또 SSU라고 해서 이와같은 해난사고 때 긴급 구조할 수 있는, 우리 대한민국이 자랑할 수 있는 부대가 있습니다. 이 부대가 왜 제 때 투입되지 않았는지.
해군참모총장이 구조함인 통영함을 바로 현지로 보내서 구조에 참여하라고 했는데.
이걸 누가, 해군참모총장보다 더 높은 군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합참의장과 대통령밖에 없습니다.
문화재청이 보유하고 있는 탐사선 왜 투입되지 않았습니까?
문화재청장의 책임도 있고, 해군참모총장도 있고, 합참의장의 책임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할하는 사람이 바로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의 책임이 단순히 수사학적, 정치적, 도의적인 책임이 아니라. 실질적, 실정법적 책임이 있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이 정부가 초기부터서 국민을 언론과 함께 국민을 속이는데.
지금 피해자와 가족들과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5일동안 전혀 구조활동을 하지 못하면서도, 총력을 다해서 구조활동을 하고 있는 양, 국민을 속였던 것들. 지금도 진상을 낱낱이 밝히지 않는 것들.
이런 것들에 국민은 지금 분노하고 있고, 국민의 인내력은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사태를 수습해감에 있어서, 이제 사태 수습은 박근혜 정부만의 몫이 아닙니다. 정부만의 몫이 이제 아닙니다. 온 국민이 함께 이 사태를 수습해 가야 됩니다.
그래서, 저와 저희 통합진보당에서는 이미 이 무능한 것으로 드러났고, 거짓말 한 것으로 온 국민의 불신을 사고 있는 현 내각으로는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
내 각과 청와대가 총 사퇴하고, 거국적 비상내각을 구성해서 이 사태를 온 국민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슬픔과 분노에 찬 국민들의 힘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고 제발 방지대책도 세우고, 이 참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가족들의 아픔, 가족들의 고통, 그 것 하나도 온전히 진심어리게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대통령의 사과를 진심으로 사과한다, 사과에 진정성이 있다고 아직 못느끼고 있다고 가족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 늘 국회에서 왜 이 사고가 발생했고, 이 사고 과정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의혹들은 무엇이고, 그 의혹들은 어떻게 밝힐 것이며, 우리 국회가 해야 될 역할은 무엇인가 이런것들의 논의되어야 할 자리에 여기에서 마저도 가족들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애간장이 끓고 있는 이 가족들을 이유로 지금 무책임한 행동을 정부가 하고 있다.
저는 새누리당이 절대로 이러한 정부의 행동에 같이 부화내동하거나 같이 가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국민을 대변해야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해수부 장관과 해경청장이 참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끝까지, 정말로 이 정부로는 사태수습이 안되겠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 국민들 앞에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이구요.
가족의 의사를 근거로 삼았으니, 제가 직접 이 회의 끝나는 대로 제가 진도현장에 가서 우리 실종자 가족분들의 의사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만약, 그 가족들의 의사조차도 왜곡된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이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민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첨부된 CD의 영상 ‘통영함구조를 막은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김선동의원국회긴급현안발언’.avi 녹취입니다.
3.김광진 의원 "해군참모총장이 내린 구조함정 통영함 투입 명령. 누가 막았나?"
새정치연합 김광진 의원은 21일 세월호 사고 당일인 지난달 16일 오전 10시·11시 두 차례에 걸쳐 해군참모총장이 “여객선 침몰 구조지원”이라는 공문을 통해 통영함의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지만, 이것을 취소한 사람이 누구겠냐고 강하게 비난했다.
김 의원은 이날 정홍원 국무총리를 상대로 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당일 해군참모총장이 방위사업총장, 대우조선과의 3자 합의를 통해 진도군에 통영함을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 지시가 3시간 만에 번복이 되었다면서 배가 투입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정 총리는 이에 대해 장비보안의 이유로 통영함의 투입이 보류가 되었던 것으로 보고를 받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해군 측이 통영함은 뜰 수 있다고 판단을 내려 오전 내내 준비를 했다며 장비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북한의 은하3호 로켓이 바다에 떨어졌을 당시 청해진함은 세월호의 2~3배에 달하는 수심 88m에서 비행체 조각을 찾아오기도 했고, 또한 157m 수심에 있는 북한 잠수정을 인양한 적이 있어 기네스북에 올라있다면서, 이렇게 뛰어난 첨단장비는 물론 훌륭한 능력을 가진 잠수부들이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투입하지 못했다고 질타했다.
이어 국방부의 자료에 의하면 사고 당일 SSU, UDT 대원 40명이 헬기로 급파되었고 해군의 헬기와 함정도 도착했지만, 해경 측은 민간업체 언딘의 우선잠수를 위해 그들을 저지했다면서, 신고한 학생의 “살려주세요”라는 외침에 답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김 의원은 “짐의 부덕의 소치다”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면피되는 왕조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이 모든 결정자이자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렇게 사표총리가 나와서 “청와대 상황은 잘 알지 못한다”고 앵무새처럼 답변해서는 안 되는 만큼, 박 대통령이 직접 나와 답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 총리에게 최초로 청와대에서 대책위를 한 시각이 언제이며 참석자 리스트가 어떻게 됐는지 알려달라면서, 당시 회의 문건과 박 대통령에게 보고됐던 문건을 오후 질의 전까지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의원은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구원파도 청해진해운도 아닌 살릴 수 있는 학생들을 왜 살리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라면서, 반드시 국정조사나 특검으로 성역없는 조사를 통해 진상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팩트TV뉴스(facttv.kr) 고승은 기자
http://www.youtube.com/watch?v=ad1DTfJ_H7k
4. 2014년 5월 19일 김현호씨 한겨레TV 인터뷰 영상
이 내용은 세월호 참사 당일 이웃주민 김승태와 함께 25명의 생명을 구한 피시 헌터호 김현호 선장의 이야기를 재구성했습니다.
김현호 : 내가 몇 명 구해냈는지 모르고 정신없이 구해낸 건데 애기들이 너무 많이 죽었는데...
어떤 매체에 말을 한다는 게 좀 아니다 싶어서.. 얘기 안하려고 했던 건데...
자막 :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아침
김현호 : 티브이에서 긴급 자막으로 속보가 나왔어. 내가 진도 근방에 사니가, 그런갑다 하고 있었지...
그란데 청년회장 문자메시지가 들어오더라고 진도면 조도 부근이라고...
화면 : 긴급상황 맹골근처여객선침몰중 학생500여명승선어선소유자긴급구조요청 정순배(09시 43분)
기자 : 청년회장 문자 받고 바로 현장으로 가셨어요?
김현호 : 사고 현장까지 거리가 있으니까 배까지 기름통들고, 거의 달려가다시피 갔어.
거의 전속력으로 달려가니까 진도부근 세월호 침몰 사고 해역까지 15분 정도 걸리더만
해경에서 못 들어가게 했지. 배가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자막 : 4월 16일 오전 10시 7분께 세월호에 접근
기자 : 해경에서 못 들어가게 했는데, 어떤 판단으로 진입하신 거에요?
김현호 : 사람들이 배 밖으로 좀 나와있는데...
보니까 인원들을 얼마 못 실어내. 해경 고무 보트가 작으니까.
빨리빨리 사람들을 실어내야 하니까. 세월호 좌현 선미 쪽으로 들어갔지.
처음에는 배 앞쪽만 대놨지. 사람들이 확 나온 게 아니고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전부 다 물을 무서워 하더만 그래 갖고 밖으로 안 나오드만. 한사람씩 잡고 끌어올리는 상황이었지.
처음 갔을 때 고속단정은 선수 쪽에서 싣고 있더만,
나중에 티브이 보니까 거기서 선원들 실었더만
자막 : 김현호 선장은 세월호에 접근하지 말라는 해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이 배 ‘피시 헌터호’로 두 차례에 걸쳐 25명의 승객을 구조했다.
김현호 : 그동안 이건 말 안했는데, 창문으로 사람들이 보였다니까. 바로 옆이니까...
기자 : 창문에서 보기에 소리는 들렸어요?
김현호 : 소리도 안 들리고 손짓으로 ‘옆으로 오시오 옆으로’ 그렇게 해도...
나는 거기도 통로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방이었더만...
많이 안타까웠지 그냥 바다로 들어 가버리니까.
그 심정은 말도 표현을 못하지...
세월호는 90도 가까이 기울어진 뒤, 빠르게 침몰했다.
(방송에서) 전원구출이니 어짜니 해싸니까.
어 ‘전원 구출’ 아닌데...
배가 다 침몰하고 나니까,
해경ㆍ해군 배들이 엄청나게 많이 달려왔어.
기자 : 배가 침몰한 뒤에도 계속 인근 해역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김현호 : 한 사람이라도 떠오르면 구조하려고 그랬던 거지.
기자 : 해경이 협조를 부탁했나요?
김현호 : 다 전부 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 거지.
오후 4시께 사고 현장에서 철수를 했는데 그 그분은 말로 표현을 못 한다니까
그 뒤로 열흘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다니까
살려달라고 손짓하고 그런 모습들이 자꾸 떠오르니 잠을 못 자고.
오랫동안 힘들었지. 술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또 많이 울었지..
기자 :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에 어떻게 지냈어요?
김현호 : 열흘 간, 사고 현장을 계속 다녔지.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애기들이 많이 못 나왔다고 하니까
아내도 계속 가보라고 했지...
학생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말 잘듣는 학생들이
말을 안 들었으면 살 거인디
학생들이 말을 잘 들어서
희생자가 많이 나온 거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제.
가만히 기다리라는 방송 듣고
가만히 있어 부러서
그게 가장 가슴이 아프지...
자막 : 아직도 차가운 진도 앞바다에는
7살 꼬마 혁규, 그 아버지인 권재근 씨
기타를 사랑하는 현철이
야구를 좋아했던 중근이
선원들에게 버림받은 김진혁 씨를 포함한
실종자 16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취재 최성진 기자
편집 박수진 PD
첨부한 CD 영상 ‘’2014년 5월 19일 김현호씨 한겨레TV 인터뷰 영상.avi‘ 녹취.
쪽배로 세월호에서 25명 구한 김현호 선장 (인터뷰)
한겨레 | 작성자 최성진 기자
게시됨: 2014년 05월 26일 14시 40분 KST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26일 14시 40분 KST
진 도군 조도면 대마도에 사는 어민 김현호(46)씨는 4월16일 오전 세월호 침몰사고 직후 쪽배를 몰아 25명의 생명을 구했다. 그 뒤로도 열흘 넘게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세월호 주변을 맴돌았다. 생존자가 떠오를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서.
김 씨는 사고 당일 눈앞에 두고도 구하지 못한 두 명을 떠올리며 “그냥 바다로 들어가버링께, 그 안타까운 마음은 말로 표현 못하제…”라며 말끝을 흐렸다. 참사 34일째인 19일 오전, 김씨가 다시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으로 향하고 있다. 언론과 접촉을 피해온 그를 <한겨레>가 처음으로 1박2일간 동행 취재했다.
텅 빈 섬등포항에 어민 김현호(46)씨가 나타난 때는 해질 무렵, 오후 6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길고 납작한 생김새의 1.11t짜리 소형 어장관리선 ‘피시헌터’호를 몰고 온 김씨는 선착장에 닿자마자 땅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호리호리한 몸매만큼 날렵한 동작이다.
“먼 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소.”
악 수를 건네는 김씨의 손이 억셌다. 꽉 쥔 그의 손바닥 안쪽에서 단단히 박인 굳은살이 느껴졌다. 수십년 ‘배질’을 해온 세월의 흔적은 구릿빛 피부로도 나타났다. 눈빛은 날카로우나 사납지 않았고, 모자 속에 가려진 잿빛 머리카락과 턱선을 따라 하얗게 자리잡은 수염은 멋스러웠다.
“갑시다.”
짧 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 김씨는 다시 피시헌터의 시동을 걸었다. 진도군 조도면 상조도에 있는 섬등포항에서 다시 배로 10~20분을 더 들어가야 나타나는 작은 섬, 대마도로 뱃머리를 돌렸다. 피시헌터 꼬리 부분에 달린 일본제 혼다 모터가 굉음을 내며 힘차게 돌았다. 지난 18일 오후 선착장에서 떠난 지 5분쯤 지나자 저 멀리 대마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 두 70가구 107명(2013년 1월31일 기준)이 사는 대마도에서 김씨는 나고 자랐다. 대다수 대마도 주민의 삶이 그렇듯, 그도 봄이면 새벽부터 바다로 나가 미역과 톳을 길렀다. 해조류 수확이 끝나면 낭장망(조류가 강한 바닷속에 설치하는 긴 자루 모양의 그물)으로 멸치 큰 놈들을 잡았다. 배질이 아니었다면 아들 민준(23)과 큰딸 예림(21)이를 대학에 보낼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 김씨는 다시 피시헌터의 시동을 걸었다. 진도군 조도면 상조도에 있는 섬등포항에서 다시 배로 10~20분을 더 들어가야 나타나는 작은 섬, 대마도로 뱃머리를 돌렸다. 피시헌터 꼬리 부분에 달린 일본제 혼다 모터가 굉음을 내며 힘차게 돌았다. 지난 18일 오후 선착장에서 떠난 지 5분쯤 지나자 저 멀리 대마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렇게 바다는 그에게 참 고마운 삶터였다. 4월16일 오전에 벌어진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말이다. 사고 발생 33일째인 지난 18일 밤, 그는 대마도 대마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그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직접 담근 백하수오술이 줄어드는 만큼 그때 기억은 되살아났다.
김 현호씨가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 소식을 맨 처음 들은 건 지난달 16일 오전 9시30분께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맹골도와 대마도, 병풍도(무인도) 중간 지점에서 크게 중심을 잃고 기울던 시점이다. 김씨는 티브이 ‘7번’에서 날마다 틀어주는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지난 19일 ‘피시헌터’호를 몰아 사고 현장을 다시 찾은 김현호씨가 바지선 ‘언딘 리베로’호를 바라보고 있다. ‘언딘 리베로’호 앞쪽이 세월호 뱃머리가 가라앉은 지점이다.
“지 금이야 바쁘니까 테레비 볼 시간도 없지만, 그때는 쬐까 한가할 때였응께 아침밥 묵고 연속극 보고 있었어. 그란데 조금 지나니까 드라마는 계속 나옴스로 밑에 자막이 뜨더만. 진도 부근에서 여객선 침몰했다고. 집사람이 ‘진도 부근이라는디 안 가봐?’ 헌디, 진도 부근이라도 여그 조도인지 쩌그 위쪽인지 어떻게 알어. 그냥 ‘어어어’ 하고 있었제.”
그때 정순배 조도면 이장단장 겸 청년회장의 긴급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정 회장이 아래 내용의문자를 보낸 시각은 9시42분, 김씨가 받은 시각은 9시43분. “긴급상황 맹골근처 여객선 침몰중. 학생 500여명 승선. 어선 소유자 긴급 구조요청. 정순배.” 정씨는 한번에 25명씩, 모두 250명의 조도면 어민한테 부지런히 문자를 뿌렸다.
정 회장의 문자를 받은 김씨는 대형 사고를 직감했다. 평소 맹골수도의 “물발이 싸다”(조류가 빠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텔레비전을 그대로 켜둔 채 곧바로 피시헌터가 있는 대마항 쪽으로 뛰었다. 기름(휘발유) 채우는 시간도 아까워 20리터(ℓ)들이 말통에 담긴 기름을 통째로 들고 달렸다.
집 에서 20~30m 거리에 있는 대마항으로 가던 길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허겁지겁 뛰쳐나온 마을 형님 김승태(53)씨를 만났다. 대막리에 사는 동생 김준석(40)씨도 비슷한 시각 어선 ‘태선호’(1.05t)에 역시 이웃 김대열(44)씨를 태우고 침몰사고 현장으로 향했다.
“우리 섬 바로 앞에 2분 정도 나가면 목섬이라고 무인도가 있는디, 그 옆으로 딱 도니까 사고 현장이 바로 보여불더만. 그때부터 나는 30노트(시속 55.56㎞) 전속력으로 달리고, 승태 성님은 뒤에서 말통으로 기름 넣음스로 10시3분인가 5분인가에 도착했어. 여기서 15분 정도 걸렸제.”
사고 현장에 도착한 김현호씨는 할 말을 잃었다. 평생을 바다에서 산 그한테도 그렇게 큰 배가 침몰하는 장면은 처음이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세월호는 이날 오전 8시30분 진행 방향을 틀다가 왼쪽으로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김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75도 이상 기울어, 완전히 옆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세월호 1층과 2층은 벌써 바닷속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고 3층도 절반 남짓 물에 잠겼다.
지난달 16일 오전 9시42분, 정순배(51) 진도군 조도면 이장단장 겸 청년회장은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김현호(46) 선장 등 조도면 어민 250명에게 구조 지원을 요청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배는 많이 있었응께 잠깐 2~3분 정도 지켜봤어. 목 포 해경의 경비함 123정도 있고 고속단정, 어업지도선도 여러 대 있었지. 거기에 상선 네 척, 어선이 한 50척 정도 전부 주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을 빨리빨리 못 실어내드랑께. 큰 배는 접안을 못항께, 123정에서 내린 쬐깐한 고무보트로 시명(3명) 빼내 뒤로 빠져불고, 어업지도선 단정으로 5명 실어 빠져불고 그라는디 깝깝하제.”
현장에 달려간 많은 어선이 일제히 구조에 참여했더라면 피해 규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던 이유가 있다.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해경은 2차 피해를 막겠다며 민간 어선의 세월호 접근을 막았다. 해경의 이런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뱃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 145m에 이르는 거대한 세월호 선체가 뒤집어지는 상황이었다. 다만 김현호씨의 선택은 해경과도, 동행한 이웃 주민 김승태씨와도 달랐다. 김씨가 세월호 꼬리 왼쪽 부분으로 뱃머리를 들이댔다. 김승태씨는 말렸다.
“123정이 ‘빵빵’ 기적을 울리며 어선들을 못 가게 하드만. 그 큰 배랑 함께 넘어지면 위험항께. 그란디 넘어올라믄 시간이 좀 걸리겄고, 무엇보다 3층 복도 뒤쪽에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어. 사람들이 빨리 나오면 살 거인디, 물이 무서워서 안 나오고 버티드만. 그래서 (피시헌터) 이물(뱃머리)을 그냥 무조건 들이대고 ‘빨리빨리 나오시오’ 해서 끄잡아냈어.”
대막리 어민 김준석씨도 그랬다. 해경의 지시보다 눈앞에 보이는 세월호 승객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이런 염병, 해경이 다 뭔 소용이여. 눈앞에서 사람이 가라앉는디, 일단 막 갖다대서 살리고 보는 게 이상적이제. 해경 지시 들었다가는 갸들 다 죽었어. 안 그렇겄소?” 19일 오전 대막리에서 만난 김준석씨가 동의를 구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김준석씨가 김현호씨와 별도로 태선호로 구해낸 생존자는 20명이다.
해 경의 접근금지 명령을 뒤로하고 세월호에 배를 붙인 김현호씨는 좌현 후미에서 모두 8명을 “빼냈다”. 김현호씨가 세월호 쪽으로 다가갈 때만 해도 “니가 지금 나 죽여불라고 그러냐”던 김승태씨도 힘을 보탰다. 가슴 철렁한 순간도 있었다. 세월호의 후미 철제난간에 피시헌터의 뱃머리가 걸려 함께 기우뚱할 때였다. “야 너 배 들어간다!” 김승태씨의 이 말 한마디가 없었다면 피시헌터의 운명도 세월호와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온 힘을 다해 피시헌터호를 세월호 난간에서 빼냈다.
“그런 건 생각도 안 허고, 일단 사람들을 빨리빨리 구조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그랑께 들어간 거여.” 사고 현장을 지휘하던 해경은 민간 어선의 세월호 접근을 막았다. 침 몰하는 세월호와 함께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현호 선장은 자신보다 생존자 구조를 먼저 생각했다. 김 선장의 막내 딸이 사고 이후 보내온 페이스북 갈무리 화면이다. 사진속 가운데 검은옷을 입은 사내가 김 선장이다. 페이스북 갈무리
1 차로 구해낸 8명을 뒤쪽에서 대기하던 행정선 진도아리랑호에 옮겨 싣곤, 다시 세월호 쪽으로 다가갔다. 그 짧은 순간 세월호는 왼쪽으로 완전히 거꾸러졌다. 처음에 다가갔던 세월호의 왼쪽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대신 뒤집어진 오른쪽 허리 부분이 모습을 드러내며 선체 통로에 모여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처 음에는 배 안에 있다가 배가 자꾸 가라앉으니께 물로 다 뛰어들었어. 나도 힘이 좀 빠졌응께 구명조끼 잡고 그냥 막 끄집어올렸지. 나중에 티브이에서 보니까 해경도 지들 고무보트가 작응께, 우리 배 뒤에 타서 생존자 5명 정도 실었더만.”
피 시헌터가 2차로 진도아리랑호에 다가가 건넨 생존자는 22명이었다. 이 가운데 김현호씨가 김승태씨의 도움을 받아 건진 생존자는 17명이었다. 정순배 조도면 청년회장과 행정선 진도아리랑호 관계자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김씨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5명의 목숨을 살렸다. 정 부가 “투입된 경비함정만 81척, 헬기 15대, 유도탄 고속함, 유디티(UDT) 정예병력 등 동원해 구조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도자료를 뿌린 사고 첫날, 달랑 선박용 모터 하나 달린 “쬐깐한” 피시헌터와 태선호 두척이 승객 45명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참 담한 비극의 와중에 빛나는 활약을 펼친 김씨는 그로부터 한 달 넘게 언론을 피해다녔다. 겉으로는 “실종자도 아직 다 못 건졌는디, 내가 뭘 했다고 그란 걸 하겄어요”라며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치며, 속으로는 자신이 구한 생존자 25명 대신 구하지 못한 두 사람을 떠올리며 술로 괴로움을 짓이겼다. 김씨는 사고 당일 세월호 우현 허리에서 생존자를 구출하던 중,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 두 명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을 봤다.
“창 문 안쪽에도 (구출을 기다리는 승객이) 보였제. 창문 하나에 한 명씩, 두 명. 나는 그짝도 통로로 연결이 되는 줄만 알고 ‘옆으로 오시오, 옆으로!’라고 오른쪽을 계속 가리킨디,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젓더라니께. 나중에 알고보니 문을 열고 나와야 하는디, 문이 물이 잠긴 쪽에 있어서 그란 것 같드만….”
처 음으로 바다가 무서운 존재로 다가왔다. 날이 밝으면 넋이 나간 사람처럼 대마도 바다를 헤집고 다녔다. 열흘 넘게 그랬다. 생존자가 바다로 떠오를지 모른다는 미련한,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실낱같은 희망이 그의 등을 자꾸 밀었다. 김씨는 “유리창이라도 깨려고 시도했지만, 배가 미끄러운데다 망치나 쇠막대기 같은 게 없어서 그냥 바라만 봤다”며 안타까워했다.
“많이 안타까웠지. 그냥 사람이 바다로 들어가버리니까…, 그 심정은 말로 다 표현 못하제.”
이웃 주민 이아무개씨는 5월 초 김현호씨의 근황을 전하며 “소주 반 되(세 병 정도) 넘게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김씨는 “반 되는 모르겄고, 취하지 않으면 잠을 못 이뤘다”고 말했다.
김준석씨도 술만 마시면 울음이 터져나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맨정신으로 버티기엔 너무나 괴로운 나날이다. 지난주에는 침몰한 세월호가 갑자기 멀쩡하게 바다 위로 떠오른 뒤 항해하는 이상한 꿈을 꾸기도 했다.
두 사람이 아직도 안타까워하는 건 해경의 이해할 수 없는 초기 대응이다. 무엇보다도 사고 현장에서 승객을 세월호 밖으로 탈출시키려는 해경의 노력이 눈에 띄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해경이 단 한 명이라도 세월호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라고 방송만 했어도, 그 소리가 ‘야 나오란다’ 이렇게 전달돼 다 나왔을 거여.”
먼바다로 고개를 돌리는 김현호씨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영상] 김현호 선장 “가만히 기다린 학생들을 잃어서 가슴이…”
첨부한 CD 영상 ‘2014년 5월 19일 김현호씨 한겨레TV 인터뷰 영상.avi’ 녹취
5. 1973년 1월 25일 오후 2시 반경 여객선 한성호가 목포항을 출발하여 조도를 향하여 항해 도중 침몰한 사건.
김기춘의 반민주적 행태와 국가적 재난
- 1972년 박정희 유신정권 법무부 과장, 유신헌법 초안 작성
- 1972년 12월25일 유신헌법 발효, 27일 박정희 4대 대통령취임
- 1973년 1월 25일 진도 조도면 한성호 침몰, 바깥에서 문잠금
- 1973년 3월 박정희 유신정권 법무부 법무과장 승진
- 1974년 법무부 공안 검사
- 1974년 2월 22일 충무앞바다 해군 예인정 침몰
- 1974년 8월 중앙정보부 파견 검사, 9월 대공수사국장
- 2013년 8월 청와대 비서실장
- 2014년 4월 16일 진도 조도면 세월호 침몰, 바깥에서 문잠금
1973년 1월 25일 오후 2시 반경 여객선 한성호가 목포항을 출발하여 조도를 향하여 항해 도중 침몰한 사건.
원인은 과적으로 알려졌으나, 수십명의 인명피해가 난 부분은 아직도 의문이 많이 나는 사건임.
사망자 13명, 실종 48명으로 당시 대참사였음.
의문: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이유가 객실문을 밖에서 잠근 것(누가 잠그라고 했을까?)
사고가 난 후, 그것도 대낮에 시간을 모두 허비하고 밤에 철야수색한다고 난리를 폈지만,
선실안 인명 구조 못함(안했다는 의혹도 있음, 무능이 아니라 고의나 타의라는 뜻으로 해석).
초기에 대부분의 구조는 어선이 행함. 정부는 사고를 일부러 방치?
한성호 사건의 전후 역사적 사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음.
0)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일대 바람을 일으킴. 그리하여 오랜만에 분열되고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이 아닌, 3선 개헌까지 해가며 출마한 박정희를 크게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줌. 비록 선거 결과는 94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의 신승으로 끝났지만 부정선거 및 개표부정의 의혹이 많았음(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김대중이 이겼다고 생각함).
0-1) 이에 박정희는 독기를 품기 시작함.(심지어는 정보기관은 김대중을 바다물에 수장해 죽이려고 함)
1) 1972년 국회가 해산되고 유신헌법을 제정함.
2) 1972년 12월 23일 유신헌법에 의거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로 박정희가 100% 득표율로 당선됨, 영구집권의 발판을 마련(단임제 중임제 제한 규정이 없으므로)
3) 박정희의 꼬붕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1973년 1월 중 고교평준화 시안을 마련하여 2월에 발표하려 하나, 중학교 평준화에 이어 74년에 고교에 입학하는 특정인을 염두해 두고 교육정책을 또 바꾸는 게 아니냐는 비판 여론 비등(영구집권에 후계구도까지? 의혹)
4) 여당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전반 민심흉흉 하던 차에 정치적 이슈를 묻어버릴 사회적 이슈인 대형사건이 필요함
결 론: 결국 한성호의 대참사 원인의 뿌리를 캐면,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선 빅 매치가 부정선거로 겨우 이겼다는 박정희의 불안감, 조급함과 정통성 부정을 당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본다.
한 성호 사건은 정치적 이슈를 덮기에 충분했고 그 뒤 박정희는 6년간의 독재를 더 할 수 있었다. 사악한 사람들 측으로 봐선 한성호 사건은 대단히 성공적인 뉴스 물타기 성공전략이었고 향후 비슷한 위기일 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자 모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1973년 배가 침몰당해불면 사람을 먼저 내보내야 살 건데, 요번(세월호)맹키로 문을 잠가버렸당께. 그랑께 그 안에 갇혀 다 죽어버렸제.”
“해 경은 허대기만 허댔지 생존자 구조는 갸들(김현호·김준석씨 등)이 다 했어. 조도에서 멸치잡이 하는 어민은 애기 때부터 부모 따라다니며 배를 몰아온 사람들이라 바다에서는 거의 도사급이제. (김)현호 갸가 배 모는 거 보면 완전히 기가 막혀부러.”
5 일 오전 9시 서망항을 떠나 조도 창유항으로 향하던 진도군 행정선 ‘진도아리랑’호에서 이왕욱씨를 다시 만났다. 이씨의 말에 진도아리랑호를 몰던 조도면사무소 소속 김아무개 기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기관장은 “진도 브이티에스(VTS·해상교통관제센터)에서 사고 소식을 전하는 무전을 받고 달려가봤더니 이미 어민들이 도착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승객 구조는 작은 어선들이 다 했지, 우리는 한 게 없다”고 덧붙였다. 조도면 어민이 구한 생존자는 50명에 가깝다는 게 이씨와 김씨의 설명이다. 날렵한 모습의 진도아리랑호는 출항 15분 만에 창유항에 닿았다.
조도면 주민은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 실종자 수색과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 제거 작업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들한테 세월호 사고는 남의 일이 아니다.
“왜 또 그 뼈아픈 기억을 물어봐.”
7 일 저녁 김유기(69) 대마도 대마리 마을이장은 ‘한성호 침몰 사고’에 대해 묻자 소스라쳤다. 세월호 이전에 조도 앞바다에서는 또다른 정기 여객선 한 척이 침몰했다. 전남 목포와 조도를 오가던 68t급 정기 여객선 한성호다. 세월호가 관매도와 대마도 바로 남쪽에서 사고를 당했다면, 한성호는 거의 비슷한 거리의 북쪽에서 침몰했다. 1973년 1월25일 오후 2시30분께 벌어진 사고다.
그 날 한성호는 설 연휴를 앞두고 목포를 떠나 조도로 향했다. 진도군 지산면 심동리 세포부락을 500m 앞둔 지점에서 세찬 파도가 한성호를 덮쳤다. 파도를 맞고 기울어진 한성호는 다시는 중심을 잡지 못했다. 109명의 승선자와 한성호가 그렇게 침몰했다. 이 사고로 죽거나 사라진 희생자가 모두 61명이다. 대부분 명절을 쇠러 진도로 돌아오던 관매도, 대마도 등 조도면 주민이다. 두 섬에서만 30여명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의 상당수는 관매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등에 다니는 어린이다.
“그때도 과적이여 과적! 아주 똑같아, 이번 사고랑.”
쓰 디쓴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넣은 김유기 이장은 한성호 사고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사고가 난 1973년, 김 이장은 스물여덟의 청년이었다. 평생을 대마도에서 살아온 그한테 한성호 사고는 “운명을 완전히 바까놓은”,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 참사다.
“그 때 나는 우리 대마도 청년회랑 마을 식수난 해결한다고 우물 파다가 그 소식을 들었잖여. 곧바로 곡괭이고 삽이고 다 처박고 완전히 실신이 돼갖고 달려갔지. 우리 쬐깐한 대마도 부락에서 사람이 23명이나 수몰돼버렸응께 오죽하겄어.”
김 이장은 한성호 사고로 장인과 처조카를 잃었다. 마을 주민 처지에서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육지 코앞에서 배가 가라앉았는데도 갇힌 승객을 단 한 명도 건져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고 직후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찰 등을 중심으로 구조작업반을 꾸렸으나, 침몰 직후 숨진 채 발견된 19명을 뺀 나머지 실종자 42명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 정부는 정확한 승선자 숫자도 파악하지 못해 연일 허둥댔다. ‘무능한 정부’는 참사와 함께 쓰이는 관용어인가.
“나 중에는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하루 평균 서네 명씩 죽은 사람 장례를 치르는데, 시체도 못 건졌응께 시신 없는 엉뚱한 장례를 치른 거야. 그때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숨이 넘어갈 일이제.” 40여년이 지났는데도 김 이장의 기억은 생생했다.
대 마도의 이웃 섬 관매도에서 방 다섯개짜리 ‘송림민박’을 혼자 운영하는 장영자(81)씨는 15년째 이명과 갑상선 기능저하, 각종 관절 통증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 5일 늦은 오후 아무도 없는 빈 민박집에서 옛일을 떠올리던 장씨는 “내가 원래 기억이 좋은 사람이여. 그란데 여기저기 수술한다고 전신마취를 7번이나 했더니 정신이 그전보다 없구마잉”이라며 웃었다. 흐릿해진 옛 기억 가운데 유독 ‘또록또록’ 남아 있는 장면이 있었다.
“그 때 관매도 사람 많이 죽었어. 저그 윗집 살던 아줌마가 쌀장시를 했어. 대목잉께 쌀 판다고 애기랑 남편이랑 목포 갔다오다 다 죽어불고, 저쪽에도 아가씨가 하나 죽고, 아짐도 죽고, 쬐깐한 국민학생 여럿 죽고… 죽은 사람이 열에 가찹네.”
한 성호는 목포에서 출발할 때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먼저 과적이다. 사고 당일, 폭풍주의보로 이틀 동안 발이 묶여 있던 한성호는 파도가 가라앉지 않았는데도 출항을 감행했다. 여기에 밀린 승객과 명절 화물까지 무리하게 실었으니 사고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선박회사 ‘한일기선’은 출항 전 관리·감독기관인 목포지방해운국에 승선자를 66명이라고 신고했지만, 실제로 배에 탄 사람은 모두 136명이었다. 한성호의 정원은 86명이었다. 소주 125상자와 보리 50가마, 공사용 목재, 시멘트 등 각종 화물을 적정량(6t)보다 훨씬 많이 실은 사실이 경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한성호는 침몰 지점인 조도 앞바다에 도착하기 전, 마산도와 율도 등 중간 기항지에 일부 승객을 내려줬으나 여전히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뚱거렸다.
문 제는 또 있었다. 선박회사는 파도가 들이치는 갑판 위로 승객이 올라오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선실문을 밖에서 잠갔고, 구명장비를 벽장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자격도 없는 갑판원한테 배의 키를 맡겨 사고의 빌미를 제공한 선장 김아무개씨는 배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승객을 버린 채 먼저 탈출했다. 1973년 한성호 이야기다.
“배질도 못하는 넘들이 선장질을 왜 혀서 사람을 죽여부냐고. 배가 침몰당해불면 사람을 먼저 내보내야 살 건데, 요번맹키로 문을 잠가버렸당께. 그랑께 그 안에 갇혀 다 죽어버렸제.”
장 씨는 유일한 민박 손님을 위해 저녁상을 봐주며 틈틈이 한성호와 세월호 선장을 싸잡아 욕했다. 한성호 사고 이후 정부는 선장 김씨와 매표원 이아무개씨, 목포해운국 소속 임검관 조아무개씨 등 7명을 구속했다. 모두 선박회사 쪽 관계자이거나 하급 공무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과했다는 기록은 없다. 구속된 해운국 임검관 3명 가운데 한명이 장씨의 제부(여동생의 남편)다. 직접 담근 쑥 막걸리 한사발을 권하며 장씨가 말했다.
“우리 제부는 원래 그날 임검(현장단속) 나갈 차례가 아니었는데, 하필 그날 누가 근무를 바까달래서 나갔다가 그래돼불었어. 그 일로 모가지 날아가불고, 부잣집에 시집간다고 좋아한 우리 동생만 고생 많이 했제.”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6525.html
6. 1974년 2월 22일 해군 예인정 침몰 사고
해군 예인정 침몰 사고 또는 충무 앞바다 YTL정 침몰 사고 또는 충무 앞바다 해군 잡역보조선 침몰 사고는 1974년 2월 22일 충무 앞바다에서 대한민국 해군 소속 YTL정(잡역 보조선)이 전복, 침몰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승선 인원 중 해군 신병 103명, 해경 50명, 실무요원 6명 등 모두 159명이 순직하였다.[1]
YTL30호
소 형 항만 예인정(YTL, Yard Towing Large)은 항구 안에서 예인, 통선과 같은 잡역을 담당하는 보조선이다. 사고가 난 예인정(YTL30호)은 무게 120톤에 약 4백 마력, 최대 시속은 10노트였다. 승무원은 4명이며, 해군 당국에 의하면 350명 정도의 인원까지 수송이 가능하다고 보도되었다.[2][3][4]
침몰
1974년 2월 22일 10시 40분경, 충렬사 참배를 마치고 외항의 본선(LST815)으로 복귀하려던 진해 해군 훈련소 신병 316명이 YTL30호에 1차로 승선하였다. 11시 8분경, 모함을 30m 앞두고 급선회하던 중 선체가 기울어 전복되었고,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침몰하여 11시 13분경에는 바닷물 속에 잠겼다. 물은 차가왔고, 정장 차림의 제복은 무거웠다. 10시 이후로는 폭풍주의보가 내려져 있었고, 파고는 2m 였다.[2][3][4][5] YTL정장은 키를 움켜잡은 채로 사망하였다.[6]
구조 및 인양[편집]
사 고 당시 많은 배들이 구조에 참여하였으나, 해상이 어둡고 파도가 높아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3] 모함과 구명정, 어선들을 동원하여 14시까지 모두 152명을 구조하였고, 그중 2명이 구조 후 사망, 164명은 실종되었다고 보도되었다.[7] 해군본부는 사망·실종자는 모두 159명이라고 발표하였다.[8]
해군은 2월 23일 오전부터 인양 작업을 진행하였고,[9] 해저 15m에 바닥을 위로 침몰해 있음을 확인하였다.[10] 선체는 2월 25일 인양되어 수심이 얕은 곳으로 옮겨졌다.[11] 시신 인양에는 잠수정과 함께 저인망 어선들이 처음으로 동원되었다.[12]
수색반은 2월 26일까지 146명의 시신을 인양하고 인양 작업을 종료,[13] 남은 수색은 민간 잠수선과 어선에 일임하였다.[14] 3월 3일까지 1명을 제외한 실종자를 모두 인양하였다고 보도되었다.[6]
사후 처리 및 여파[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2월 28일, 해군 YTL정 침몰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해군참모총장과 차장을 해임하였다.[15] 해군교육단 신병훈련소 훈련대장, 해군통제부항무과장 등은 구속되고, 모함 함장은 직위해제되었다.[15]
사망자는 1계급씩 특진되었다.[16]
원인 분석 및 논란[편집]
사고의 원인으로 정원 초과와 조종 미숙, 신병들이 아침을 먹지 않은 점 등이 지적되었다.[7]
3월 2일, YTL정 사고 해군조사위원회는 무리한 승선과 급선회한 운항부주의를 원인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하였다.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채우지 않은 것도 원인으로 지적하였다.[17]
주석[편집]
이동 ↑ 이동렬. ""전우여…" 40년째 목이 메어 불러보다", 《한국일보》, 2014년 2월 21일 작성. 2014년 3월 15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