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이 된 이유

자라온 환경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다. 그이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외가댁에서 자라면서 학자선비이신 완고한 외할아버지 밑에서 그분의 살아가는 모습과 교훈에 습관처럼 익숙해 있었다. 예를 들면 밥 먹을 때는 말하지 않는 것, 여자를 천시 여기는 것, 여자는 안온해야 되며 집안에만 있는 것 등등이었다. 그리고 그의 환경 적인 습관은, 나가서는 마음껏 떠들며 신나게 놀고 집에만 들어오면 입을 닫는 것이었다.   윤씨 대성 촌인 외가댁에서 자라면서 타성인 이씨 도령 하나가 밖에만 나가면 동네 아가씨들에게는 장미꽃을 든 남자로 자랑스럽게 보여 마냥 뱃심을 부리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집에만 들어오면 설쳐대는 젊은 외숙모의 온갖 욕설을 담은 거친 말에 실증을 느끼고 슬그머니 사랑방(독방)에 들어가 그물만 짜는 생활이 일상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자라난 신랑은 결혼을 하고도 나가면 유머도 잘 쓰고 아주 재미있고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집에만 들어오면 입술은 굳게 닫혀졌다. 밥 먹을 때 말하면 밥맛 떨어진다고 아이들까지도 말을 못하게 했다. 밥 먹을 때 말하는 아이는 그 아이의 밥그릇이 상 밑으로 숨겨졌다. 남에 얘기 싫어하는 그이에게 어쩌다 깜박하고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무의식중에 꺼내면   “내가 물었어? 듣는 댔어! 마실 갔다 온 표 내는 거야?” 수차례 이런 무안을 당하고 이제는 나도 말문을 닫는 회수가 잦아지고 입을 닫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가정 분위기는 그이의 인상처럼 점점 회색 구름이 감돌기 시작하여 먹구름이 되어갔다.          인상     그이의 인상은 칠팔월 잿빛 하늘 얼마나 많은 눈물 빗줄기 머금어 담았기에!   어여쁜 청개구리 아무리 재롱부려 노래 불러도 한 치도 변함없는 칠팔월 잿빛 하늘.   그 얼마나 많은 슬픈 사연 머금어 담았기에 세월 따라 굳어 버린 칠팔월 잿빛 하늘.   행여나 먹구름 벗겨질까 재롱둥이 청개구리 밤낮없이 깍깍 깍깍 노래 불러도 이젠 그만 체념해야 할,   세월 따라 길들여진 칠팔월 잿빛 하늘.     내가 자라온 과정은 아들이 없이 딸만 둘인 부모님 슬하에 막내딸로, 자상하신 부모님의 사랑과 자그마한 교회의 사랑을 거의 독차지하며 자유롭게 자라났다. 말이 없는 그이와는 너무 성격 차이가 났다. 모두들 신혼은 즐겁다고 말하는데 우리 신혼의 기억은 다툼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요즈음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천만 다행으로 감사드린다. 신앙인이 아니었다면 그 시대지만 이혼을 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이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성격이 차츰 변화되기 시작했으나 자기도 말이 없고 나까지도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은 여전했다. 그리고 무슨 일에든지 남의 편에 섰고 내편에는 한번도 서지 않는 사람이라 나는 항상 소외당한 느낌이었고 억울하여 숨은 눈물도 많이 흘렸다. 이러면서 세월은 흘러갔다.   사십대 중년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고독은 강물처럼 밀려오고 삶이 허무해지기 시작했다             허무     오늘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이도 학교 가고 아이들도 학교 가고 내일도 또한 그런 것들 지치고 쇠약한 몸과 마음   나의 기쁨은 아디에 나의 행복은 어디에   손은 부지런히 빨래를 비비는데 텅-빈 허전한 가슴은 눈물 공장인가!     나는 이럴 때마다 교회에 가서 억울함을 눈물로 호소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꿈으로 보여주며 결혼하라고 해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혼했는데 왜 이렇게 우리의 결혼생활은 잔인해요......?” 하면서 책임져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이는 목회에만 전념하며 총회, 노회, 각 분야에서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하다보니 항상 시간이 없었다. 이해를 하면서도 시간 없다는 말이 나에게는 입버릇처럼 들려왔다. 월요일 교역자들 쉬는 날이면 가야 될 곳이 많아서 몸 하나로는 모자랄 지경이란다. 그러다 보니 9시에 출근하면 저녁에 들어와 식사하고 9시 뉴스 20분도 채 못보고 들어가 잠이 든다.   그리고 출타 할 때 어디에 간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나갔다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평일에는 교회에 출근 하나보다 생각했고 월요일에는 어디 가느냐? 물었는데 ‘여자가 남자 하는 일에 뭘 그리 꼬치꼬치 묻느냐? 볼일 있어 가나보다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나간 다음에 곰곰이 생각하니 ‘여자가’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이 말에 내가 유심히 예민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내가 자라오면서 남자가 아닌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왔던 어린 시절 마음에 상처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아이들도 나갈 때면 어디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 어른이 돼서 슬그머니 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번 번히 어디 가느냐? 묻는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거기에다 싫어하는 안색을 보면서까지……. 그래서 이제는 묻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서로가 익숙해져 있어 ‘그이는 슬그머니로, 나는 나가면 나가는가 보다 들어오면 들어오나 보다.’ 이렇게 살다 보니 한 마디 말도 없이 지나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들 커서 모두 나가 제 갈 길가고 목회자 사모로서 자기 관리에 신경을 쓰다 보니 고독을 자처하며 친한 이웃도 없어졌다. 나만 외롭고 쓸쓸했다.         허전한 가슴     허전한 가슴 달래려고 내가 몰두 할 일감을 찾았다. 꽃꽂이, 종이 항아리, 현대 자수 이래 봐도 일 끝나면 역시 허전함 어느 날 문학 동산을 발견한 후 나는 확실한 일감을 찾았다. 나의 인생을 꽉 채워주는 영양소가 이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전에 억울하다고 내가 울며 기도했던 기도를 잊지 않고 다 기억해 두셨다가 지금에 와서 글을 쓰는 은사를 주셔서 날마다의 생활이 이렇게 기쁘고 즐거우며 희망 속에 감사가 넘쳐갔다. 글동무가 온 세계에 흩어져 있어 고독은 저 멀리 자취를 감추고 나는 내 생활로 행복이 가득 찼고 그이는 그이의 충성된 목회생활로 행복이 가득 넘쳐났다.   우리는 서로가 자연스럽게 자기의 갈 길을 가며 상대방을 건드리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간다. 돌이켜 보면 그이의 구박이, 나를 억울하게 했고 이 반응이 약자의 간절한 호소가 되어 하나님의 응답으로 ‘문학’을 선물로 받았다. 2000년도 내가 시집을 내려고 할 때 시집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아이들과 이구동성으로 의견들을 모으고 있는 중, 그이가 화장실을 가면서 하는 말   “그 시집이 왜 나온 줄 알아? 내가 하도 구박을 해서 넋두리 한 거지. 내가 책이름 지어줄까 ?”   “뭔데?”   “다 늙어서 쓴 시”   “어이구 기가 막혀” 말상대가 돼야지(속으로) 구박을 해서 시집이 나왔다는 말에는 긍정이 갔다. 문인이 된 이유의 발단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2003. 1. 17.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