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상 논쟁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을 덮친 큰 위기는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Philippikos Bardanes) 치세 때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필리피코스는 아르메니아인이었으므로 단성론에 경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이단을 인정하라고 촉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낡은 신학적 논쟁을 부활시켜 단의론을 부흥시키는 데에만 신경을 기울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Justinianos II)의 운명에 경악한 교황 콘스탄티노(Constantinus)는 그의 승인을 단호히 거부했다.
한편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살해된 것은 불가리아 왕 테르벨에게 구실을 만들어 줬다. 그는 2번째로 제국을 침략해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 왔다. 침략자 격퇴를 위해 황제는 마르마라 해 건너편의 옵시키온 테마(Opsikion)에서 지원군을 불러야 했다. 결국 그 결정이 그의 파멸을 불렀다. 옵시키온 병사들은 졸지에 황제가 된 자에게 충성심도 없었을 뿐더러 그가 어린애 장난하듯 일을 처리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713년 3월 3일 황제가 친지들과 오전 연회를 연 뒤 낮잠을 즐기고 병사들이 그의 침실로 침입해 원형 경기장으로 끌고 가서는 눈을 뽑아 버렸다. 재위한 지 불과 19달 만의 일이었다.
그 이튿날 원로원과 시민들이 낙점한 인물은 전 황제의 총비서 아르테미오스(Artemios)였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그는 아나스타시오스 2세 황제(Anastasios II)가 됐다. 그는 전임 황제들보다 훨씬 유능한 지도자였다. 첫째 과제는 황도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불가르족은 물러갔지만 이번엔 아라비아인이 문제였다. 황제가 보낸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아라비아인들이 다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즉각 육로 성벽의 수리와 보강 작업을 서둘렀다. 식량 창고도 가득 채웠고, 시민들에겐 3년 동안 먹을 양식을 비축해 두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소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돌아갔다. 715년 초,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로도스를 기지로 삼아 이슬람에 선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옵시키온의 군대가 반란의 조짐을 보였다. 그들은 로도스 섬에 도착하자마자 원정군 사령관 로고테테스 장군 요안네스(Ioannes)를 곤봉으로 때려 죽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황도로 행군하면서 도중에 징세관 테오도시오스(Theodosios)를 허수아비 군주로 추대했다. 테오도시오스 자신은 바라지도 않았던 제위였다.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폐위되어 테살로니키의 한 수도원에 감금됐다. 테오도시오스 3세(Theodosios III)의 즉위로 제국은 20년 동안 벌써 6명의 황제들을 맞았으며, 그 중 5명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워진 이래 그토록 무정부 상태가 오래 지속된 시기는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구원의 손길이 오고 있었다. 그 지도자는 '이사우리아인(Isaurian)'으로 알려진 레온(Leon)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실제로 이사우리아인은 아니었던 듯 하다. 어쨌든 그는 1급 장군이었으므로 일찍이 아나스타시오스는 그를 제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기지인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한 바 있었다. 사실 그 몇 달 전에 레온은 아르메니아콘의 스트라테고스였던 아르타바스도스(Artavasdos)의 지지를 확보하는 치밀한 사전 조치를 취해 두었었다. 계획이 성사될 경우 자기 딸을 그에게 주고 그를 제국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쿠로팔라테스에 임명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황도에 들어 왔다. 니코메디아에서 그들은 황제의 아들이 이끈 소규모 군대를 무찌르고 그의 식솔들을 생포했다. 거기서부터 레온은 총대주교와 원로원을 상대로 협상에 들어갔는데, 굳이 그들을 설득하느라 애쓸 필요도 없었다. 사라센이 언제라도 공세를 재개할 상황이었으므로 만약 황도가 공격받는다면 누구를 지도자로 삼아야 할 지는 뻔했던 것이다. 717년 초 테오도시오스 3세는 신변을 보장받고 에페소스의 수도원으로 가 은거했다. 그리고 3월 25일 새 황제 레온 3세(Leon III)가 금문을 통해 황도로 개선했다.
시기는 아주 적절했다. 717년 한여름 칼리프의 동생 마슬라마는 대군 8만 명을 이끌고 소아시아를 거쳐 8월 15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해 왔다. 그리고 2주일쯤 지난 9월 1일에 슐레이만 제독이 1800척의 함대를 이끌고 마르마라 해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봉쇄가 시작됐다. 레온 3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관식 이후 5달 동안 그는 방어 태세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신민들에게도 모두 방어에 나설 것을 다짐해 두었다. 이전의 공격에선 여름에만 전투가 이루어졌지만, 이젠 겨울에도 지속됐다. 더구나 그 해 겨울엔 기록적인 강추위가 찾아 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더 큰 피해를 본 측은 얇은 천막 밖에는 아무런 방한 장비도 없는 공격 측이었다. 그들은 말, 낙타는 물론 죽은 동료의 시신까지 먹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굶주림은 질병을 가져 왔다. 땅이 얼어서 시신을 매장할 수 없게 되자 수백 구의 시신들이 마르마라 해로 던져졌다. 한편 바다에선 헬라스의 불이 연일 이슬람 선박에 치명타를 안기고 있었다.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불가르군이었다. 그들은 제국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제국을 점령할 자들은 아라비아인이 아니라 자기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봄이 여름으로 바뀌면서 그들은 북쪽에서 내려 와 병 들고 사기가 저하된 사라센군을 덮쳤다. 결국 남은 병사들은 지친 몸을 추스려 시리아로 퇴각했으나 이미 완전히 분쇄된 함선은 겨우 5척만 남아 귀환했다.
그렇지만 육상에서는 전쟁이 재개되었다. 아라비아군은 726년부터 해마다 소아시아를 침략해 카에사레이아를 점령하고 니카이아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황제는 740년 아크로니온에서 아라비아군과 싸워 이겼고, 그제서야 이 고난도 끝이 났다. 제국에겐 하자르족과의 우호 관계가 큰 힘이 됐다. 하자르족은 칼리프에 대한 적대감에서 제국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에서 공격을 감행해 아라비아군을 힘들게 했다. 하자르 왕국과의 동맹은 레온 3세가 733년 아들이자 후계자인 콘스탄티노스(Konstantinos)와 하자르족 카간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해방되고 소아시아가 숙정됨으로써 비잔티움과 아라비아 간의 투쟁에서 한 단계가 막을 내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다시는 아라비아의 공격을 겪지 않게 되었고 소아시아는 테마 조직의 덕택으로 보다 견고한 제국의 방어 벽이 되어 주었다.
레온 3세는 행정 질서를 개편하면서 과도하게 큰 아나톨리콘 테마의 분할을 시도했다. 이 조치는 근자에 습관처럼 되어 버린 제위 찬탈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한 영토가 스트라테고스 1명의 손에 들어 있다는 것이 제위 소유자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지를 레온 3세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아나톨리콘의 서부 지역이 트라케시온 테마란 이름으로 분리되었다.
726년, 레온 황제는 자신과 아들의 이름으로 법전 '에클로가(Ecloga)'를 편찬하게 했다. 이는 제국법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에클로가는 가부장권을 크게 제한한 반면 아내와 자녀의 권리를 크게 확대하고, 혼인 관계는 크게 보호할 것을 명시했다. 특히 형법의 변화가 중요한데 눈을 멀게 하기, 코를 베기, 혀를 자르기 등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법전에는 등장하지 않던 체형의 모든 체계를 제공해 사형이나 벌금형을 대신하게 하기도 했다. 이런 변화는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아 풍습이 거칠어진 탓으로 보여 진다. 이 법전은 제국의 향후 입법에 영향을 미쳤고, 슬라브 국가들의 헌법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성화상 파괴 운동은 제국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반 성화상주의자인 레온 3세의 입장 표명은 제국에 큰 위기를 불렀다. 그리하여 위기의 시대로 특정 지어지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제국은 100년 이상 심각한 내부 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 이유는 제국인들이 형상에 내재한다고 생각한 특별한 상징적 의미 때문이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성화상에 대한 공경심이 점점 보급화 되었지만 이에 대해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지역은 종교적 갈등의 온상으로서 단성론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모든 교회의 의식들에 적대적인 바울로파가 점차 퍼지고 있었다. 이런 성화상에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라비아 세계와의 접촉으로 비로소 활활 타올랐다. 레온 3세의 성화상에 대한 적대적 성향을 그의 적들은 유대인이나 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보았다. 비록 레온 3세가 유대인을 박해하고 아라비아와 싸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반 성화상적 영향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레온 3세의 친 아라비아 성향으로 당대인들은 그를 '사라센인처럼 생각하는 자', 즉 '사라케노프론(Sarakenophron)'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성화상에 반대적인 분파주의자들의 교리를 내세워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영향이 교차하면서 비잔티움의 동부 지역에서 성화상 파괴 운동이 탄생했다. 그 선봉에 선 것은 소아시아의 고위 성직자들로서 클라우디오폴리스의 수도대주교(metroplitan) 토마스(Thomas), 니콜레이아의 주교 콘스탄티노스였다. 콘스탄티노스 주교는 제국의 성화상 파괴 운동의 정신적 수괴로서 정통파에서는 그를 '이단의 총수'라고 불렀다. 이제 비잔티움 동부 출신인 데다 아나톨리콘의 스트라테고스로서 아라비아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레온 황제도 성화상을 적대하는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며 잠재적이었던 반 성화상 성향은 공개적인 운동으로 화했다.
726년, 레온 3세는 공개적으로 성화상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사관 한 명을 시켜 황궁의 청동 대문 위에 있는 그리스도상을 철거하라고 명했다. 사관이 황명에 따라 그리스도상을 철거하려고 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사관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여 버렸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헬라스에서 터진 반란이었다. 헬라스 테마는 대립 황제를 내세워 함대를 편성해 황도로 돌격해 왔다. 처음부터 제국령 유럽 지역의 성화상에 우호적인 입장이 드러났다. 이런 입장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명백해졌다. 황제는 이 반란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지만 속주 하나가 통째로 들고 일어 났다는 것은 심각한 경고를 의미했다.
황제는 일을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총대주교와 교황의 동의를 얻고자 했지만 두 사람 다 황제의 생각에 단호히 거부했다. 총대주교와 교황 외에도 황제에게는 가장 중요한 반대자가 나타났다. 다마스커스의 요안네스가 바로 그 인물이다. 요안네스는 헬라스인 수도사로서 당대의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다마스커스인의 저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화상을 옹호하는 연설문 3권이었다. 요안네스는 성화상을 공경하는 것이 이교적인 우상 숭배의 부활이라는 비판을 막아내면서 독특한 이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그는 신 플라톤주의적 의미에서 성화상을 상징과 매개자로 설명함으로써 정당화 시키면서 성화상 문제를 구원론과 연결시켰다. 이 체계는 훗날 성화상에 우호적인 이론들이 발전하는 데에 지침이 되었다.
모든 협상들이 실패로 돌아간 후 처음에는 조심스레 행동에 착수했었던 황제도 이젠 강압적으로 돌아섰다. 그는 외견상으로는 합법성을 유지하기 위해 730년 1월 17일 황궁에서 최고위 관직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회합인 침묵 회의(silention)를 열고 제국 내 모든 성화상들을 다 파괴하라는 칙령을 반포해 이를 받아 들이게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게르마노스(Germanos)만은 끝내 서명을 거부해 파면시키고 황제의 지시를 이의 없이 따를 그의 옛 신켈로스인 아나스타시오스가 총대주교 자리에 올랐다.
이제 성화상에 대한 파괴가 시작되었다. 정부가 앞장서서 성화상들을 파괴하고, 그것을 공경하는 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계는 심각하게 냉랭해졌다. 성화상에 대한 적대적인 교조를 비잔티움의 공식적인 국가 이론 및 교회 이론으로 승격시킨 성화상 파괴 칙령이 발표되자 교황 그레고리오 3세(Gregorius III)는 황제의 성화상 파괴 정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지방 공의회를 개최하여 성화상을 파괴하는 자는 누구나 파문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사절을 여러 차례 보내 황제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으나 사절들은 번번히 감옥에 투옥됐다. 종교적 불화에 이어 정치적 불화가 뒤따랐다. 성화상 논쟁 최초의 정치적 결과로서 교황청과 제국 사이의 간극이 심화되고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눈에 뜨게 약화됐다. 레온 3세가 아라비아군을 몰아 낸 전승 군주로서 아무리 큰 명성을 누렸을 지라도, 이 성화상 파괴자의 월권은 결국 자신의 인기를 끌어 내리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제위에 올라 콘스탄티노스 5세(Konstantinos V)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 1년 만에 대립 황제가 나타났다. 이 대립 황제는 전 황제의 사위인 옵시키온 테마의 지휘관(코메스) 아르타바스도스였다. 그는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군사 지역의 전 병력을 지휘하는 자였기 때문에 처남에 대해 반란을 꾀할 수가 있었다. 그가 성공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성화상 지지자로 나섰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황제들 사이에 이 시대의 특징인 성화상 논쟁 투쟁이 벌어졌다.
742년 6월, 아라비아 원정에 나선 콘스탄티노스 5세는 옵시키온 테마를 통과하던 중에 기습 공격을 당해 패배했다. 이어서 아르타바스도스는 자기를 황제로 포고하고 콘스탄티노스 5세가 황도에 섭정으로 남겨 둔 테오파네스 모누테스(Theophanes Monutes)와 협상에 들어섰다. 테오파네스는 물론 황도의 다른 여러 고위 관리들도 대립 황제 측에 가담했다. 이는 황제의 성화상 적대 정책이 황제의 측근들에게조차 완전한 공감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르타바스도스는 군대를 이끌고 황도로 진입해 다시 한 번 편을 바꾼 총대주교 아나스타시오스의 손에 의해 황제의 관을 받았다. 황도엔 성화상이 다시 세워졌고, 성화상 파괴는 끝난 듯이 보였다. 한편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중심지인 아모리온으로 도피해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트라케시온 테마 역시 성화상 파괴자의 편에 섰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부황보다 더 뛰어난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재능은 이 투쟁을 결정 짓는 요인이 되었다. 아르타바스도스가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를 이끌고 트라케시온 테마에 들어서자마자, 아르바타스도스의 차남 니케타스가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병력을 이끌고 부친을 도우러 오기도 전에 콘스탄티노스 5세는 743년 5월, 사르데스에서 대립 황제에게 패배를 안겨다 주었다. 그 다음 콘스탄티노스 5세는 니케타스를 향해 돌진해 8월, 모드리나에서 아르타바스도스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스 5세는 결정적인 승리를 확보했고 11월 2일, 황도로 입성했다.
여기에서 잔인한 형사 재판이 열렸다. 아라타바스도스와 그의 두 아들들인 니케포로스와 니케타스는 히포드롬에서 공개적으로 큰 모욕을 당한 후 장님이 되었고, 그들의 지지자들도 처형되거나 손이나 코 등 신체의 일부가 절단당했다. 총대주교는 나귀에게 끌려 다니는 모욕을 당했다. 만 16개월 동안 황제였던 아르타바스도스의 치세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동쪽에서의 상황은 제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라비아는 제국과의 전쟁에 졌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내부 분열로 세력이 크게 동요되었다. 이쪽의 압력이 늦추어지자 비잔티움은 공세로 넘어갈 수 있었다. 746년, 제국군은 육상에선 시리아 북부를 침공해 게르마니케이아 시를 점령했다. 해상에선 알렉산드리아에서 파견 나온 아라비아 함대를 747년에 키프로스 섬에서 궤멸시켰다. 752년,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한 원정은 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중요한 두 국경 요새들인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멜리테네가 제국의 손에 떨어졌다. 황제는 이 곳에 요새를 설치해 불가리아와의 국경 지역을 지키게 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가 동쪽의 국경 지역에서 얻은 승리들은 제국이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시대가 종식되었음을 보여 주는 징후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즉 동부에서 비잔티움은 이제 공격당하는 게 아니라 공격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아라비아 위험이 사라지는 동안 불가리아라는 문제거리가 전면에 들어섰다. 756년, 불가리아 왕국은 비잔티움 제국 측이 자신들의 국경 지대에 요새를 설치한 것에 대해 제국의 영토를 침략하는 것으로 답했다. 이로써 비잔티움과 불가리아 사이에 대대적인 대결 시대가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노스 5세 치세기에 제국의 가장 큰 군사 행동 대상은 불가리아 왕국이어서 황제는 불가리아 원정을 9번 이상이나 나갔다.
반 제국파의 우두머리 텔레츠(Teletz)가 762년에 왕국의 오랜 내부 투쟁을 종식시키고 왕좌에 올라 제국령인 트라키아를 습격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에 대해 대규모 원정으로 맞받아 쳤다. 황제는 함대를 보내 도나우 강 어귀에 기병대를 집결시키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를 지나서 적지로 침입했다. 도나우 강변에서 남쪽으로 돌진하는 기병대와 트라키아에서 북쪽으로 돌격하던 황제군은 흑해 연안의 안키알로스에서 합류했다. 여기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혈전이 벌어졌고 불가리아의 완벽한 패배로 끝났다. 황제는 개선 행렬로 황도로 입성해 이 대승리를 자축했다. 게다가 텔레츠는 반란군에 의해 암살됐고, 이어서 불가리아는 끊임 없는 반란과 왕권 교체의 무대가 되었다. 772년, 텔레리그(Telerig)가 권력을 잡아 불가리아는 다시 예전의 힘을 되찾은 듯 보였으나 773년에 황제의 출정으로 불가리아로 하여금 평화 협상을 받아 들이게 했다. 같은 해 10월, 마케도니아로 돌격하던 텔레리그의 시도 역시 제국군에 의해 금방 실패로 돌아갔다. 비잔티움과의 잇따른 전쟁은 불가리아를 더욱 약화시켰다. 군사력은 흔들렸고 국가 조직은 마비됐다. 제국이 발칸 반도에서 차지한 우세는 확고한 듯 보였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아라비아와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거둔 성과는 대외 정책을 동부에 한정시킴으로써 얻은 것이었다. 황제와 교황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고 그에 따라 제국이 과거 이탈리아에서 누려 왔던 지배력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교황청으로선 이단적인 제국보다 더 편한 세력이 등장했다. 바로 신생국인 프랑크 왕국이었다. 754년 1월 6일 교황 스테파노 2세(Stephanus II)는 폰티온에서 프랑크 국왕 피핀 3세(Pippin III)와 만났다. 이 만남으로 로마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동반 관계가 시작되었고 교황령 건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에 등을 돌리고 프랑크 국왕과 동맹을 맺었다.
제국은 교황청과 대립하게 되면서 헬라스화 된 이탈리아 남부의 속주들인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일리리아를 로마 교황으로부터 분리시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 아래에 두는 개입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교황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교회의 중심지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은 헬라스적 동방과 라틴적 서방을 가르는 경계선과 일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제국의 성화상 파괴 정책은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심화시켰다. 그로 말미암아 로마는 헬라스적 동방에서 쫓겨 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라틴적 서방에서 쫓겨 나게 되었다. 이는 황제권 보편주의와 교황권 보편주의 모두 발판을 상실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 사건들이 시기적으로 제국에서 성화상 파괴가 고조되기 시작한 때와 맞물린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 이상의 일이다. 콘스탄티노스 5세 치하에서 파괴 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레온 3세가 황제 자문 회의를 통해 성화상 금지령을 내렸던 데 반해서, 콘스탄티노스 5세는 종교 회의를 통해서 성화상 파괴를 재가했다. 구성원의 단결을 위해서 황제는 주교좌들에 성화상 파괴론 지지자들을 대거 앉혔다. 또한 백성들에 대한 성화상 반대 선전 및 저술 활동도 했다.
754년 2월 10일, 보스포루스의 소아시아 쪽 해안에 있는 히에레이아 궁전에서 종교 회의가 열렸고 마지막 회의는 8월 8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블라케르나이 성당에서 열렸다. 황제의 조치는 성공했다. 338명이나 되는 주교들이 모여 모두들 성화상 파괴주의를 신봉한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회의의 주관자는 에페소스의 주교 테오도시오스였다. 총대주교 아나스타시오스가 얼마 전에 죽었고, 교황과 오리엔트의 주교들도 대표자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정통파 쪽에선 이 모임에 '머리 없는 종교 회의'라는 비아냥 거리는 별칭을 붙였다. 이 종교 회의는 단성론적 성향이 강한 황제의 강령적 저술들을 출발점으로 결의를 이끌어 냈고, 동시에 그리스도론 문제를 중점적으로 규명했다. 그 후 8월 29일, 종교 회의의 결정 사항이 포고되었다. 그에 따라서 성화상 공경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모든 성화상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정통파는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황제에겐 사도들과 동일하다는 찬사가 바쳐졌다. 즉각 도처에서 성화들이 지워지고 성상들이 파괴되었으며 그 자리엔 황제와 제국을 찬양하는 내용의 세속화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파괴 활동에 대항하는 반대 세력이 등장했다. 격렬한 투쟁이 불타 올랐고, 760년대에는 그 절정에 달했다. 황제는 성화상 옹호적 반대파의 지도자인 스테파노스 네오스 수도원장(Stephanos Neos)을 767년 11월에 군중들에게 사주를 시켜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에서 잔인하게 죽였으나 반대 세력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는 그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19명이나 되는 고위 관리들을 처형해야 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성화상 적대 정책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것은 수도자들이었다. 그들과의 결산은 특히 가혹했다. 성화상을 공경하는 이들에 대한 박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점 수도자 자체를 공격하는 성격을 띠어갔다. 이제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성화상 옹호적 입장 때문만이 아니라 단순히 수도자라는 신분에 속했다는 이유로도 박해를 받았으며, 수도 생활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수도원들은 폐쇠되거나 공공 건물로 바뀌고 수도원의 광대한 소유 토지는 모조리 몰수되었다. 이리하여 성화상 파괴주의가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 운동은 비잔티움의 수도자 계급과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대항하는 투쟁이 되었다. 정부의 전반적인 박해로 수도자들의 대대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로 가서 수도원들을 세움으로써 헬라스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를 만들었다. 비잔티움에선 성화상 파괴의 파고가 점점 높아져 754년의 종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보다 훨씬 도를 넘었고, 심지어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에 대한 공경도 금지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급진주의가 그의 죽음으로 와해되지 않았더라면 제국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아라비아인들이 아나톨리아를 다시 습격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불가리아와 싸우기 위해 돌아갔다. 그는 이들을 또 다시 패배시켰지만, 775년에 벌어진 그들과의 2번째 전투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는 타그마를 창설함으로써 군대를 강화시키고, 불가르족들을 다소 겁 먹게 만들었으나, 성가신 존재인 아라비아족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또 제국을 성화상 파괴로 분열시켰다. 그의 박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에는 사소한 것으로 생각했던 교리 논쟁을 한층 더 격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강압적 통치는 잔혹한 공포 시대로서 후대에 기록되고 있다. 그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성화상 지지자들의 숫자가 여전히 성화상 반대자들보다 더 우세했던 것 같다. 콘스탄티노스는 수세기에 걸쳐 동성애자로 비난당하거나 '이름을 더럽힌 자'라는 뜻의 '코프로니모스(Kopronimos)'의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신민들의 반감을 많이 샀다. 그의 시신은 정통파가 재건된 후 성 사도 성당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졌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후계자는 신중한 젊은이인 그의 아들 레온이었다. 황제 레온 4세(Leon IV)로서의 그의 짧은 통치는 성화상 파괴가 만개하던 콘스탄티노스 5세 시대에서 성화상 공경이 재건되는 이레네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룬다. 콘스탄티노스 5세와 하자르족 공주의 아들 레온 4세는 부황과는 달리 온건한 성격이어서 성화상 파괴가 완곡해졌다. 여기에는 성화상을 비호하는 아내 이레네 황후(Irene)의 영향이 컸다. 칼리프 통치령을 한 차례 공격한 뒤 레온 4세는 아라비아인들이 보복 차원에서 보낸 습격대를 잘 처리했다.
하지만 그는 780년에 재난을 만나게 됐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궁정 관리들이 성화상 공경파인 황후에게 성화를 가져다 준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배신감과 개인적인 안전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는 관리들을 모두 해임해 처벌하는 동시에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일을 중단했다. 몇 개월 뒤인 780년 9월 8일, 레온 4세의 때이른 서거로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6살의 나이로 콘스탄티노스 6세 황제(Konstantinos VI)로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레온 4세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훔쳐 온 제관을 써 보려 하다가 다쳐 죽었다고 한다. 좀 더 그럴 듯한 설은 황후와 성화상 지지자 관리들에 의한 독살설이다.
어린 황제의 섭정을 태후 이레네가 맡음으로써 연소한 아들과 옥좌를 나누었다. 정력적인 태후는 성화상 반대 세력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을 재빨리 분쇄하고 반역자들이 새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던 죽은 남편의 형제들에게 성직에 들어설 것을 강요했다.
이레네가 국사를 맡으면서 성화상이 결정적으로 부활했다. 그렇지만 태후는 일을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진행시켜 나갔다. 성화상을 적대하는 체제가 반세기 동안 제국의 권력을 독점해 왔기 때문이다. 고위 관직자들과 성직자들, 군부의 대부분은 성화상 파괴 지지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부의 계획은 784년 말, 레온 4세의 치하에 총대주교가 된 파울로스(Paulos)를 사임시키는데 성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태후의 비서인 타라시오스(Tarasios)가 새 총대주교로 임명됐다. 그 후에는 공의회를 열 준비를 시작했다. 754년에 열렸던 종교 회의의 성화상에 반대한 결정이 취소될 예정이었다. 786년 7월 31일, 성 사도 성당에서 종교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5세의 엄명을 마음에 간직한 황도 수비대가 회의 도중에 난입해 강제로 주교들을 해산시켰다. 그렇지만 태후는 이런 일로 그리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성화상 파괴파인 군 부대들을 아라비아에 대한 원정을 핑계로 소아시아로 이동 배치한 반면 성화상에 우호적인 군대를 데려 왔다. 787년 5월, 이번엔 니카이아에서 제 7차 공의회가 열리게 됐다. 타라시오스 총대주교가 의장을 맡고 각지에서 온 350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반 성화상주의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성화상을 적대하는 행위를 금하고 성화상 공경을 다시 수립했다. 공의회의 엄숙한 이 결정을 태후와 어린 황제가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그렇지만 반 성화상 세력이 궁극적으로 전복된 것은 아니었다. 이 세력의 존속은 태후와 황제 사이의 갈등이 불거졌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콘스탄티노스 6세가 이젠 충분히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심 찬 태후는 권력을 도무지 내놓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점차 모후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됐다. 자연스레 그의 주위에는 성화상 반대자들이 모여 들게 되었다.
그렇지만 태후는 790년 초에 일어난 모반의 싹을 제거하고 한 발 나아가 자신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합법화 시키려 했다. 이레네는 자신을 국가의 제 1인자로, 그녀의 공동 통치자인 아들은 제 2인자로 인정하라는 서약을 군부에 강요했다. 친 성화상적인 태후에 호의를 갖지 않던 소아시아 테마들은 이에 거세게 저항했다. 이 반대 운동은 군부가 황조의 권한을 대표해 790년 10월 콘스탄티노스 6세만이 제국의 단독 지배자임을 포고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레네는 게임에서 졌고 궁정을 떠나야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이레네의 지지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로부터 이레네의 복귀 허가를 받아 내고 말았다.
황제의 나약함은 그의 지지자들에게 환멸을 불렀다. 게다가 그가 792년 7월,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달아난 행동을 보여 불만은 더해졌다. 반대파는 전 황제의 형제인 부제(카이사르) 니케포로스를 눈 여겨 보았다. 이에 황제는 숙부의 눈을 찔러 멀게 하고, 그 외 4명의 다른 숙부들에게는 그들의 혀를 잘랐다. 아르메니아콘의 스트라테고스인 알렉시오스 역시 장님이 되었다. 그는 과거에 황제를 위해 태후에 반대했던 자였다. 이제 아르메니아콘 테마에서 거센 폭동이 터졌다. 황제는 자신의 옛 지지자들을 적으로 삼아 783년 원정을 감행해야 했다. 이 반란은 대단히 잔인하게 진압됐다. 그러나 그 대가로 한때 이 곳에서 황제가 누렸던 공감은 그를 향한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곧이어서 그는 정통파와도 사이가 벌어지게 할 일을 저질렀다. 783년 1월, 그는 모후의 권유로 결혼한 아름다운 파플라고니아 여인인 마리아 황후(Maria)를 내치고 정부인 궁녀 테오도테(Theodote)와 재혼하고 그녀를 황후로 임명했다. 교회법에 반대되는 황제의 이런 행동 방식은 정통파 인사들 사이에서 대단한 분노를 일으켰다. 급진파 수도사들은 황제의 부정한 행동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나섰다. 황제는 그들을 당장 추방시켰다.
분별 없는 행동과 악의적인 잔인성으로 정통파에게도 반대파에게도 지지를 잃은 콘스탄티노스 6세는 이제 강력한 적, 즉 그의 어머니 앞에서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레네는 봉기를 준비했다. 797년 8월 15일, 콘스탄티노스 6세가 원형 경기장에서 궁전으로 돌아올 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그를 덮쳤다. 그는 사로잡혀 27년 전에 자신이 태어났던 바로 그 방에서 태후의 명에 의해 두 눈알이 뽑혀 장님이 되었다. 그는 아마도 이 때의 상처로 사망했을 것이다. 테오도테가 낳은 콘스탄티노스 6세의 아들은 이미 일찍 죽었으므로 이로써 이레네는 이제 유일한 제위 계승자로서 자신이 비잔티움의 단독 통치자가 되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했다. 그녀는 섭정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비잔티움 제국을 다스린 최초의 여인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야망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궁정에는 숨 막히는 음모의 분위기가 지배했고, 여기서 여제의 최측근 고문 환관인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와 아이티오스(Aetios)가 서로 권력을 다투었다. 가뜩이나 신통치 않던 자신의 인기가 바닥에 이르자 백성들의 사라져 가는 지지를 붙들어 두기 위해 여제는 국가 예산의 필요는 고려하지도 않고 백성들의 재정적 부담인 도시세를 인심 후하게 줄여 주었다. 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항구에서 징수해 오던 수출입 관세도 크게 낮추어 주었다. 신민들은 모두들 이러한 조치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며 여제의 너그러움을 찬양했다. 그러나 제국의 재정 제도는 이런 너그러운 조치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제국의 대외 정치적 상황은 지난 20년 동안 상당히 악회되어 있었다. 이미 제국은 아라비아와 불가리아와 치른 혈투에서 모두 굴욕적으로 참패해 그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조공을 지불해야 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 치하에서 당당한 위치에 있었던 후라 이런 상황은 더욱 비참했다. 아시아와 발칸에서 겪은 군사적 실패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서쪽에서의 사태 전개로 말미암아 제국이 겪게 된 이념적 권위 상실이었다. 중세의 위대한 왕들 중 한 명이 프랑크족의 수장으로 있던 시기에 나라의 운명이 여인과 환관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제국의 비극이었다.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Charlesmagne)는 영토를 확장시켜 자신의 왕국을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롬바르드족을 굴복시키면서 샤를마뉴(샤를마뉴에서 샤를은 이름이고 마뉴는 존칭)는 비잔티움이 실천하지 못한 과제를 실현했고, 비잔티움은 자연스레 서방에서의 권위를 상실했다. 그에 따라 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더욱 가까워졌고, 그만큼 비잔티움 제국과 더욱 멀어졌다. 니카이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 사이에 종교 갈등이 해결되고, 정통 신앙을 회복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열렬하게 성화상 공경을 공언하게 되었어도 이 같은 사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교황청은 제국이 성화상 파괴 시대의 종교적 조치 뿐 아니라 교회 정치적 조치를 철회하기를 기대했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남부와 일리리아에서 로마의 사법권이 회복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일말의 고려도 기울이려고 들지 않았다. 이 문제는 니카이아 공의회에서 제기되지 않았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Hadrianus I)가 이레네 여제에게 보낸 서한 가운데 이와 관련된 부분은 공의회에서의 낭독 중 아예 누락되어 버렸다. 교황이 교회법에 따르지 않은 타라시오스의 총대주교 취임에 항의하고 그가 '세계 총대주교(그리스도교 세계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쓰는 데에 대해 항의한 부분들도 마찬가지로 삭제됐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사안은 교황 수위권을 이야기한 부분이 용의주도하게 건너 뛰어 졌던 것이다.
교황권은 동부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마찬가지로 황제권도 서부에서 배제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보조를 계속 맞추는 것은 이제 로마에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롬바르드족을 몰아낸 정복 국가인 프랑크와 함께 가는 편이 훨씬 전도가 유망했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교황 스테파노 2세 치하에서 시작된 성공적인 노선을 철저히 이어가 프랑크 왕과의 동맹을 고수했다. 이어서 그의 후계자인 교황 레오 3세(Leo III)는 이 노선을 철저히 계승하면서 목적이 확실한 8세기의 정책을 종결 짓는,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800년 12월 25일 성탄절에 교황은 합법적인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6세가 폐위된 후 제위가 비어 있다고 주장하며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서 프랑크 국왕 샤를마뉴를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언했다. 샤를마뉴는 성탄절 미사가 끝날 무렵 무릎을 꿇었고 교황은 그의 머리에 황제관을 씌워 주었다. 그것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4백 년 만에 서유럽에 다시 황제가 생겼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교황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가 있는 서방 세계엔 황제가 없었다. 그럼 만들면 어떨까? 탁월한 능력을 가진 데다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자라면 좋지 않을까? 그것은 동시에 교황 자신에게도 이득이 된다. 황제를 임명할 권리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그 어느 성직자도 그런 특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황제관을 개인적인 선물처럼 수여함으로써 교황은 이제 자신이 만든 황제보다 우위에 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 주게 된 것이다.
그 반면 비잔티움 측에선 이 사태를 다르게 파악했다. 그들에게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은 경악할 만한 오만일 뿐 아니라 신성 모독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토대는 고대 로마 제국의 권력과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2가지 요소들이었다. 따라서 천상에 신이 하나이듯이 지상에도 황제는 하나 뿐이었다.
서방 황제 대관식은 교황의 작품이었지, 샤를마뉴의 작품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막강한 결과를 초래할 걸음을 내딛은 샤를마뉴는 그로 인해 야기된 문제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비잔티움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했다. 비잔티움의 인정을 받지 않고는 그의 황제권은 법적으로 허공에 떠 있는 셈이었다. 여성이 제위를 소유하고 있는 한 그건 공석에 불과하다거나 비잔티움은 이단에 빠졌다는 식의 공허한 주장만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802년, 샤를마뉴가 보낸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섰다. 그들은 동서가 다시 합일되도록 이레네에게 자신들의 황제의 청혼서를 건네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레네는 과부인 데다 자타가 공인하는 미인이었다. 샤를마뉴가 결혼 상태로서 충분한 그녀를 설득해 아내로 맞이한다면 동방과 서방은 다시 하나의 황제에게로 재통합될 것이었다. 그러나 신민들은 일자 무식의 야만인을 결코 달가워 하지 않았다. 802년 10월의 마지막 날, 고위 관료들이 원형 경기장에 모여 여제의 퇴위를 부르짖었다. 체호되어 끌려 온 여제는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 들였다. 그녀는 레스보스 섬에 유배되어 1년 뒤 죽었다. 이렇게 해서 제국은 더 이상의 수치는 그럭저럭 면했으나, 이미 당할 대로 당한 뒤였다. 일개 야만인 족장이 느닷없이 튀어 나오더니 교황에게서 황제 작위까지 받은 것이다.
이제부터 제국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옛 질서는 사라졌다. 그리스도교 세계는 이제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게이콘의 로고테테 니케포로스(Nikephoros)가 이 반란으로 인해 제위에 올랐다. 니케포로스 1세 황제(Nikephoros I)는 정통파였고 선임 여제처럼 성화상 공경을 고수했다. 그러나 니케포로스 1세와 급진적인 수도자들의 관계는 악회됐다. 특히 황제가 박식한 역사가이자 신학자, 저술가인 니케포로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자 열심파는 세속인이 총대주교 자리를 차지한 것에 격분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황제는 다시 간통 사건을 끄집어 내기까지 했다. 그것은 황제는 교회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809년 1월, 그는 종교 회의를 열어 콘스탄티노스 6세와 테오도테의 결혼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열심파와의 단절을 초래하여 이들은 다시 교회 지도부와 결별해 정부의 박해를 받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황제의 과제는 나라의 경제 상황을 정리하고 재무 제도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전직 재무 행정관이었던 그는 이 과제를 위해 현명한 조치들을 내렸다. 또한 황제는 제국의 수비 체계를 안정시켰고 나아가 위험 지역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사민 정책을 시행했다.
프랑크 왕국이 아바르 왕국을 붕괴시킨 덕분에 판노니아의 불가리아인들도 아바르족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를 통해 불가리아 왕국은 세력과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판노니아 불가리아들의 추장 출신의 불가리아 왕 크룸(Krum)은 기골이 장대한 전사로서 전쟁욕과 승부욕에 불타 있었고 곧 제국인들의 공포의 대상이 됐다. 불가리아를 막기 위해 제국은 강력한 요새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요새들 중 하나인 사르디카는 불가리아군에 의해 파괴됐다. 황제는 즉시 사르디카로 가서 방어 시설을 다시 세웠다. 811년, 크룸의 굴욕적인 평화를 간청하는 제안을 무시한 채 황제는 군대를 거느리고 플리스카를 향해 진격해 왕도를 파괴했다. 승리에 도취한 황제는 산악 지대로 달아난 크룸의 뒤를 추격했다. 그러나 여기서 불운이 황제를 덮쳤다. 811년 7월 26일, 산악 지대의 협로에서 제국군은 크룸의 군에 포위되어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승리한 크룸은 황제의 두개골로 잔을 만들어 향연을 벌일 때마다 그 잔으로 건배를 했다.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한 전투에서 그의 아들인 스타우라키오스는 심한 부상을 입은 채로 간신히 도망쳐 다음 황제로 포고되었다. 하지만 그의 상처는 치유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의식은 다만 형식적 잠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빈사 상태의 황제에겐 자식이 없었으므로 대외정치적 위험이 다가오고 있던 이 시기에 제국 내부는 제위 계승 문제로 점점 더 격앙 상태가 되었다. 10월 2일, 스타우라키오스의 처남 미하엘 랑가베(Michael Rhangabe)가 쿠데타에 의해 황제가 됐고, 스타우라키오스는 퇴위해 수사가 됐다.
미하엘 1세(Michael I)는 나약한 황제였다. 그는 자기보다 강한 성격의 영향에 쉽사리 굴복했고 탁월하지만 인기가 없는 조치를 내릴 용기도 없었다. 미하엘 1세는 성화상 옹호자로 교회의 충실한 종복이었다. 그의 치세 하에 정통파는 최고의 나날을 체험했다.
서방 제국에 대한 동방 제국의 입장은 근본부터 변했다. 예전의 전 황제들은 샤를마뉴의 황제 칭호 요청을 들은 척도 안 했고 그의 뒤에 있는 교황에 대해서 비 타협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세력이 갈수록 성장해 제국령까지 확대되자 미하엘 1세는 점령된 지역을 반환받는 대신 샤를마뉴의 황제 지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사실적으로만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이제 두 제국들이 존재하게 됐다. 물론 프랑크 왕은 단지 황제일 뿐, 로마 제국 황제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샤를마뉴 자신도 로마 황제로 자칭하는 걸 늘 피했다. 비잔티움은 이 칭호를 자신들에게만 유보하면서 서쪽 황제와 동쪽의 유일하고 참된 로마 제국 황제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니케포로스 1세는 샤를마뉴를 황제로 인정하길 거부했지만 미하엘 1세는 샤를마뉴를 황제로 인정했다. 이는 811년의 파국 후 찾아 온 정세의 변화 때문이었다. 발칸에서 위협해 오는 직접적 위험으로 비잔티움은 서방과의 갈등을 해걸할 가능성을 상실했다. 크룸은 수많은 제국의 도시들을 정복해서 파괴해 갔고 비잔티움의 저항은 미미했다. 크룸은 자신의 조건을 최후 통첩 형식으로 포장해 비잔티움 정부에 평화를 제안했다. 총대주교 니케포로스를 선두로 황제의 고문들은 평화 조약을 맺자고 주장하는 동안, 스투디오스의 수도원장 테오도로스를 대변자로 하는 조언자들은 강경히 맞서자고 주장했다. 결국 강경파의 입장이 승리해 813년 6월, 제국군은 베르시니키아에서 돌진해 오는 크룸의 군대와 만났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스가 적군을 공격했으나 아나톨리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아르메니아인 레온의 군대는 본대를 따르지 않고 갑자기 후퇴했다. 2년 전엔 운명의 여신이 제국에 등을 돌렸다면, 이번엔 작전 결여와 내부 불화로 크룸이 승리했다.
정통파 황제는 패배로 위치가 흔들렸고, 성화상 파괴주의로의 토대가 준비됐다. 813년 7월 11일, 미하엘 1세가 실각하고 레온이 제위에 올랐다.
레온 5세(Leon V)는 군인 정신과 성화상에 대한 적대적 성향이 강한 소아시아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레온 3세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동쪽 출신이었고, 또한 황제가 되기 전에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였었다. 레온 5세는 뛰어난 군인이자 반 성화상파였던 레온 3세와 콘스탄티노스 5세를 존경했다. 그의 계획은 제국의 군사력을 재건하는 것과 성화상 파괴 운동의 부활이었다. 그는 선임 정부들의 군사적 실패가 성화상에 대한 옹호적 입장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선 중점이 두어진 것은 군사적 과제였다. 베르시니키아의 승리 후 크룸은 대규모 공세를 펴며 신속히 진격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 앞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아라비아군의 매서운 공격까지 견뎠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에 대해서는 크룸도 무력했다. 그래서 그는 황제에게 강화를 맺자며 회담을 요청했다. 황제가 이에 응답하자 크룸은 황제를 믿고 무장을 하지 않은 채 회담장에 나타났다. 비잔티움인들은 그런 그에게 배반의 공격을 가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린 탓에 겨우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 불가리아 군주는 격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근 전역을 황폐화 시켰고, 항복한 아드리아노폴리스 시민들을 도나우 강 건너편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제국군은 813년 가을에 메셈브리아 지역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듬해 봄, 크룸은 다시 황도로 진군해 왔지만 옛날의 아틸라처럼 그도 뇌일혈로 814년 4월 13일 갑자기 죽었다. 제국과 불가리아는 30년 간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최근의 극적인 사건들이 있은 후, 제국과 불가리아 사이의 국경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다.
레온 5세는 이런 평화로운 상황을 이용해 성화상 파괴 계획을 실현하고자 했다. 815년, 부활적 직후 새 총대주교로 임명된 궁신 테오도토스 멜리세노스가 의장을 맡은 가운데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종교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니카이아 공의회를 배척하고 다시 성화상 파괴를 신봉하기로 결정되었다. 서로 반복하며 내부 분열로 치닫던 정통파는 이에 다시 노선을 함께 해 종교 회의의 결정에 불복하고 대항해 성화상을 변호하고 종교에 정치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가로 황명에 의해 멀리 추방당해야 했다.
815년의 종교 회의는 아류적 무능의 낙인을 달고 있다. 9세기의 새로운 성화상 파괴 운동은 아류적 반도의 시도였다. 황제는 힘으로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반동 시도에 내재된 내적 허약함을 속일 수는 없었다. 레온 5세는 8세기의 성화상을 파괴했던 황제들이 누렸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랬기에 줄곧 제위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의 마지막 통치기에는 실각에 대한 공포가 도를 넘어 광기에 달했다. 820년 크리스마스 때,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리투르기아를 보던 중에 그는 전우였던 아모리아인 미하엘의 동조자들에게 시해당했다.
아모리아 황조의 창시자인 미하엘 2세(Michael II)는 거친 군인이었다. 그의 무식함은 세련된 비잔티움인들의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정력도, 이성도, 절제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의 치세 하에서 종교 논쟁은 진정기에 접어 들어 성화상 옹호자들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고, 추방된 이들을 다시 불러 들였다. 그러나 미하엘 2세는 성화상 공경 재건에 성공하지 못해 정통파는 몹시 실망했다. 미하엘 2세는 단지 성화상 문제에 대한 토론을 금지했을 뿐이었다. 옛날 성화상 파괴주의의 아성이었던 프리지아 출신의 황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화상 반대자였다. 따라서 그의 소극적인 태도는 성화상 적대 운동이 이미 기력을 잃었음을 통찰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하엘 2세의 대내 정치적 사건은 그의 전우였던 소아시아의 슬라브인 토마스가 일으킨 반란이었다. 토마스는 동쪽 국경 지역에서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이베리아인 등 각종 인종들을 자신의 깃발 아래 모았다. 소아시아는 혼혈인들과 슬라브족이 많아 반란 세력이 확대되기에 적합한 지반이었다. 토마스는 성화상 옹호자로 자처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이 비 합법적으로 제위에서 물러 났던 콘스탄티노스 6세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사실은 이 내전이 사회 혁명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로 자처하며 그들을 부담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그는 종교적 이후로 배척당하고 있다고 느낀 분자들과 경제적 공궁과 정부의 과도한 조세 압력 때문에 분격하던 민중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렇게 인종적 종교적 사회적 대립에 근거를 둔 반란은 곧 소아시아 대부분의 지역들을 장악했다. 한 연대기 작가는 '노예는 주인에 대항하여, 병사는 장교에 대항하여 모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고 쓰고 있다.
토마스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부터 황제관을 쓰고 키비라이오톤 테마의 함대를 이끌고 유럽으로 건너 갔다. 821년 12월, 황도에 대한 반란군의 포위 공격이 시작됐고 이는 1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러나 반란 세력은 여기서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불가리아 왕 오무르타그의 도움으로 조직력이 부족한 반란군을 쫓아 버린 것이다. 823년 10월, 소수의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아르카디오폴리스에 은둔해 있던 토마스는 결국 잡혀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근 3년 동안의 내란으로 제국은 눈에 띄게 허약해져 버렸다. 게다가 종교적 반목으로 제국은 분열되어 사회적 소요들이 만연해졌다. 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 대한 아라비아권의 공격과 점령으로 지중해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 판도는 크게 흔들렸다. 제국은 해전에 능한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하고부터 해군을 소홀히 했는데, 이러한 태만이 쓰라린 패배를 맛 보게 된 것이다.
거의 문맹이었던 미하엘 2세에 비해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테오필로스(Theophilos)는 충분한 교양을 쌓았고 예술과 학문에 큰 애정을 갖고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스승 요안네스 그라마티코스(Ioannes Grammatikos)의 영향을 받아 열렬한 성화상 배척자가 되었다. 그의 치세는 성화상 파괴 운동이 마지막으로 비약한 시대인 동시에 제국이 아라비아 문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시대이기도 했다.
테오필로스는 몽상가였다. 이미 사멸하고 있는 성화상 파괴에 몰두한 것을 보더라도 그렇고, 이미 전성기가 지난 아라비아계의 예술과 문화 등에 열광한 것을 보더라도 그에게는 몽상적인 데가 있었다.
아라비아에 탐닉한 테오필로스 황제는 자신의 치세 내내 아라비아와 싸워야만 했다. 제국은 소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으며, 동시에 시칠리아에서도 전쟁을 치뤄야 했다. 이 곳에서 아라비아인들의 정복 세력이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쪽에서의 전쟁은 성패가 자주 교차하며 수행됐다. 비잔티움이 적지로 진입해 승리를 자축했다 싶으면 또 전황이 바뀌어 아라비아가 제국령으로 돌진하기도 했다.
칼리프 마문의 형제인 무타심이 다음 칼리프로 등극해 838년에 제국에 대한 대규모 권정을 감행했을 때는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이 원정은 이제까지의 공격과는 달리 국경 지역이 아닌 소아시아의 중심지들에 향해졌다. 막강한 칼리프의 군대는 황제가 친히 지휘한 제국군을 쳐 부수고 앙키라를 점령하고 아모리온을 공략했다. 이 사건은 제국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아모리온은 아나톨리콘 테마의 중요 요새였고 현 황실의 고향이었다.
성화상 파괴는 테오필로스 치하에서 마지막으로 비약했다. 황제는 자신의 스승인 요안네스 그라마티고스를 총대주교 자리에 앉힌 것을 시작으로 다시 성화상 공경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황제는 온갖 수단을 다해서 성화상 파괴 운동을 고무시키려 했지만, 이 운동은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테오필로스가 842년 1월 20일 서거하자 성화상 파괴주의도 함께 와해되었고, 그것으로 이 운동이 초래했던 큰 위기도 끝났다.
8세기 말에 성화상이 부흥할 때도 그랬지만, 테오필로스가 죽은 후 성화상이 궁극적으로 재건된 것은 한 여인의 지휘 아래에서의 일이었다. 테오필로스가 서거하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미하엘 3세(Michael III)는 겨우 3살이었다. 그리하여 모후인 테오도라(Theodora)가 섭정을 맡았다. 반 성화상주의자인 요안네스 그리마티코스가 파직되고 총대주교 자리가 메토디오스(Methodios)에게 양도된 후 843년 3월에 열린 종교 회의는 성화상 재건을 엄숙하게 선포했다.
이 조처를 기념하기 위해 동방 정교회는 해마다 사순절 첫째 일요일에 성화상 적대주의에 대한 정통 신앙의 승리를 축제로 표현한다. 실제로 성화상 파괴주의의 몰락은 대규모적 신앙 투쟁 시대가 종결되었음과 교회를 국가 권력 밑에 종속시키려는 시도가 좌절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제국 교회는 당대에나 후대에나 열심파가 요구했던 자유를 얻지는 못했다. 비잔티움의 교회-국가 조직에서는 시종일관 국가와 교회 간의 밀접한 협력이 특징이었고, 이러한 협력은 보통 국가 권력이 광범위한 규모로 교회를 후견하는 형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