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 : 2024년 3월 30일
열네번째 성지순례 중 네번째 마지막 성지
박해시대 교우촌이며 김천 황금 성당의 전신
김천 황금 성당(김천 마잠 교우촌)
[대구대교구]
김천 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유배자 혹은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김천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보여 진다. 천주교 박해에 관한 정부 측 기록으로 신유박해 직후에 쓰여진 『사학징의』에는 충청도에 살던 천주교인 박춘산이 김천으로 귀양 온 사실과 부산 동래에서 현계탁이 김천 증산으로 귀양 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인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김천에 살던 유시몬 외 5명의 천주교인이 충주 포교에 체포되어 처형된 사실도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 경기도·충청도·경상도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지금의 황점, 마구실, 장자터, 서무터, 마잠, 부상, 곤천이, 지대골[향천] 등 여러 지역에서 신자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마잠 공소는 1901년에 설립된 김천본당(황금동 본당)의 근원지이다.
김천시 지좌동에 속하는 마잠마을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으로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부친인 서철순이 이 마을에서 얼마 동안 살면서 아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를 낳았다. 또한 충청도 황간의 상촌 에서 살던 권종웅 (권영조 신부의 증조부) 가정이 먼저 박해를 피해서 금릉군 대항면 대성동에 와서 얼마간 살다가 다시 병인박해(1866-1875년)를 만나서 이곳 마잠으로 피난 오고 권 안드레아의 인도로 임 바오로(임동학의 선대)가 영세를 받고 그의 집안도 입교하였다. 또 마을에 별감 벼슬을 지낸 서 토마(동정녀 서 말다의 부친)와 허 요셉(도사 벼슬 지냄) 가정과 이 데레사 가정, 과부인 곽 안나와 그의 양부모도 사는 등 마잠마을은 많은 천주교인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이렇게 해서 큰 교우촌으로 발전을 하자 차츰 인근의 김천 시내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1901년 김천 본당이 설립되기 9년 전인 1892년 12월 18일에는 마침 대구 본당의 김보록 신부를 대신해시 남은 공소의 판공성사를 주고 돌아오던 조죠 신부가 이곳 김천 장터에서 500명의 군중으로부터 봉변을 당한 유명한 김천 사건이 발생했었다.
1895년 칠곡 왜관의 가실 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파이아스 신부와 2대 신부로 부임한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가 경상도 북부 지방을 맡아 전교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성학 신부는 김천 지역이 농업이 발달된 지역으로 안정적 인구를 확보하고 있고, 또 경부선이 부설되면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큰 점을 고려하여 김천에 새로운 성당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여러 차례 건의하여 마침내 승인을 받은 김성학 신부는 김천시 지좌동[일명 마잠]에서 민가를 빌려 전교를 시작하였다. 이후 교세가 확장되자 1907년 황금동에 새 성전을 지어 김천본당의 근거지를 옮겼다. 이 성당이 지금의 김천 황금 성당이다. 김성학 신부는 김천 본당의 주임 신부로서 활동하는 가운데 1907년 성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도 전개하였다.
1913년 지좌동 405번지에 마잠 공소로 설립되었다가 1930년 4월에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주임신부로 김동언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1944년 5월 신자 수가 줄어들면서 지좌 공소로 격하되고 김천 황금 성당으로 예속되었고, 1957년에 강당을 신축하였다. 1970년 8월 30일 지좌 공소에서 천주교 지좌 성당으로 승격하였다.
조죠 신부와 김천 사건
「조죠 신부는 김보록 신부를 대신해서 남은 공소 판공을 위해서 각 공소를 순회하였다. 그래서 1982년 12월 18일 그 는 남은 공소 판공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가던 중 해질 무렵에 김천 시장의 상인들에게 큰 봉변을 당하고 죽을 뻔 했었다.
즉 그날은 조선 팔도에서 몰려드는 김천의 큰 장날이었다. 조죠 신부가 말을 타고 마부와 복사와 함께 김천 시장을 막 지나가는데 갑자기 상인들이 몰려들어 "양놈을 죽여라,그놈을 짓밟아라“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조죠 신부 일행은 못들은 체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모여든 군중 들 중에 김치삼이란 자가 나타나 조죠 신부가 그 까닭을 그에게 물었더니 도리어 그는 군중과 합세해서 신부에게 달려들었다. 조죠 신부가 부득이 말에서 내려 범인을 체포하려는 순간 갑자기 김치삼이 조죠 신부에게 덤벼들어 신부의 수염을 잡아 뽑았다. 조죠 신부는 맞아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엉겁결에 차고 있는 권총을 뽑아 들고 허공을 향해 두 발을 쏘았다. 그러자 놀란 군중들은 잠간 조용해졌다. 그러자 그 틈을 타서 조죠 신부 일행이 빠져나와 시장 맞은편 다리를 지났을 때 갑자기 김치삼을 중심으로 한 군중 500여명이 달려와서 신부 일행을 포위하고 조죠 신부에게 달려들어 남은 수염을 모조리 뽑고 발로 차고 구타하며 말, 권총, 시계 등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리고 복사와 마부에게도 마구 폭행을 가했다. 거의 한 시간쯤 계속되었다.
이제 조죠 신부 일행은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날이 어두워지고 군중들이 신부를 때리는데 약간 지쳐있자 그 틈을 타서 조죠 신부 일행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군중 속을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마침 다행히 500m 떨어진 곳에 교우집이 있어서 그 집에 피신해서 3일간 머물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목숨을 구해서 대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이튿날 주민들로 부터 난동의 보고를 받은 김천 군수는 난처한 입장이 되어서 주범 네 명을 체포케 하고 조죠 신부로부터 빼앗은 말과 권총, 시계 등을 모두 신부에게 반환하게 했다. 한편 조죠 신부는 군수가 파견한 관리에게 범인들을 유배형에 처할 것과 선교사 보호에 관한 조약 규정을 김천 시장에게 제시하도록 약속했지만 잡힌 범인들에게 겨우 매 30대를 때리고서 이틀 만에 풀어주었다.
그동안 이 보고를 받은 대구의 로베로 김보록 신부는 경산 감사에게 두 번이나 항의하고 폭행한 범인들을 엄벌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가마를 보내어 조죠 신부를 김천에서 모셔오게 했다. 그후 범인들의 엄벌이 뜻대로 잘 되지 않자 로베르 김보록 신부는 거듭 경상 감사에게 항의하고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도 즉시 보고했다. 그러자 뮈텔 주교는 프랑댕 프랑스 공사에게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일들이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해 2월 23일자 중국 상해의「데일리 뉴스」신문이 조죠 신부에 관한 기사롤 쓰면서 “프랑댕씨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프랑스 공사를 니무랬다, 이렇듯 국제 여론까지 압력을 가하자 결국 사건은 종말을 짓게 되었다. 즉 경상 감사의 전문 보고에 “김천시에서 남상철, 김치삼, 최명천 등을 모두 엄벌에 처해서 유배하였음. 먼 곳의 어리석은 백성이 교호의 뜻을 모르고 사건을 일으킨 것은 몹시 눌라운 일. 이후 각국인의 상래시 각별히 호송할 것이고 그런 일이 없도록 시장에 게시했음” 이상이다.」(최석우 역 Mutel 문서 230∼233까지 참조)
그런데 이때 조죠 신부를 위험 속에서 구출해 준 신자는 아마 그때 김천시장에서 잡화상을 하고 있던 권종웅의 아 돌 권덕보 안드레아인 듯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해서 복음이 잘 전파되어서 결국 1901년에 가실(낙산》본당의 제2대 신부인 김성학 알릭스 신부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3도(道)의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 김천에 김천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뿐 아니라 1907년에는 성의학교 롤 설립해서 교육을 통한 전교사업과 지역사회의 봉사에 많은 공헌을 하계 되었다. 현재 김천 시내에는 황금동 본당(1901년),평화동 본당. 지좌동 본당(1950년) 등 3개 본당이 있다. - ps(대신성당,지례성당도 있음. 5개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