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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유씨 씨족의 연원
시조 유전(劉筌)의 字는 원보(原甫), 號는 죽간(竹諫)이며, 시호(諡號)는 문양(文襄)이다.
그는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뒤 고려 문종36년 우리나라에 건너왔다. 문양공 신도비명(文襄公 神道碑銘)에는 “깊은 학식(學識)과 높은 행검(行儉)이 있어, 임금께 직간(直諫)하다가 군간 소인(群奸 小人)들에게 참소를 입어 7학사(學士)와 더불어 동거군(東居郡)<영천군(永川郡)의 옛이름>에 와 살았다”고 하였다.
또 ‘을묘보(乙卯譜,1975)’ 서문에 보면, 한태조 고황제(漢太祖 高皇帝)의 40세손인 유전(劉筌)이 왕안석(王安石)이 제정한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이 부당하다고 극간(極諫)하다가 고려 문종36년(1082) 8월에 지금의 영일군(迎日郡)에 와, 아들 3형제를 두었다고 하였다.
널리 알려진대로 유씨는 거창ㆍ강릉ㆍ백천(居昌ㆍ江陵ㆍ白川)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분관(分貫)되었다.
‘거창구보(居昌舊譜)’서문에 도첨의공 시조 유전(劉筌)의 첫째 아들 유견규(都僉議公 劉堅規)가 거타(居陀)<거창(居昌)의 옛 이름>君에 봉해져 본관을 삼았다 하며,‘강릉구보(江陵舊譜)’서문에 보면, 12세손 유창(劉敞)이 옥성(玉城)<강릉(江陵)의 옛 이름>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삼아 강릉(江陵)을 본관(本貫)으로 하였다고 한다.
또 ‘거창구보(居昌舊譜)’에는 연대가 오래되어 조상을 고거(考據)할 수 없으나, 다만 알려진 바로는 백천유씨(劉氏)는 시조 유전(劉筌)의 세째 아들 유견익(劉堅益)의 후손으로 7세손 유국추(劉國樞)가 백천군(白川君)에 봉군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유승(劉升)도 은천군(銀川君)<백천(白川)의 고호(古號)>에, 10세손 유시준(劉時俊)이 부흥군(復興君)(白川의 古號)에 봉군되어 백천(白川)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각기 분관하여 오다 1973년 4월 대동종친회(大同宗親會)를 창립, ‘을묘보(乙卯譜)’(1975)의 간행을 계기로 유씨의 대동(大同)을 보게 되었다.
본관지 연혁
● 거창관(居昌貫)거창은 경상남도 서북단에 위치한다. 본래 거렬군(居烈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거창군이라 개칭하고, 고려 현종 때 합천에 합하였으며, 이조 태종 때 거제현(巨濟縣)에 합하여 제창(濟昌)이라 부르다가 다시 분리하여 거창현(居昌縣)으로 하였으며 성종1년 왕비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중종 초에 다시 거창현으로 하였다. 효종9년에 안음현(安陰縣)에 합하였다. 현종 때 부활하고, 영조 때 부(府)로 승격하였다가 정조12년 현으로 강등하였다. 1914년 3월 부·군 폐합시 북상·위천·마리(北上·渭川·馬利)3면과 안의군의 신원면(新元面), 삼가군(三嘉郡)을 이속시켜 오늘날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유, 이, 사, 신, 장(劉, 李, 史, 愼, 章)씨 등이 있었다.
● 강릉관(江陵貫)강릉은 본래 예국(濊國)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정할 때 임둔(臨屯)이라 불렀고, 고구려조에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는 명주(溟州)라 일컬었다.고려 태조19년에 동원경(東原京)이라 하였고, 그 뒤 여러 번 바뀌다가 원종1년에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충렬왕34년에는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공양왕 1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며 세조조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1928년 읍으로 승격, 1955년 시로 되었고 강릉군(江陵郡)은 옛 명주군(溟州郡)으로 돌아갔다.주요성씨로 유 · 김 ㆍ 문 · 박 · 어 · 왕 · 최 · 함(劉 · 金 ㆍ 文 · 朴 · 魚 · 王 · 崔 · 咸)씨 등이 있었다.
● 백천관(白川貫)백천은 본래 고구려의 도납현(刀臘縣) 또는 치악성(雉岳城)인데, 신라 때는 구택현(雊澤縣)으로 고쳐 해고군(海皐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 초부터 백천이라 칭하였다. 현종 때는 평주(平州)에 속하였고 의종 때는 개흥부로 승격하여 지개흥부사(知開興府事)를 두었으며 후에 다시 백천으로 되었다. 고종 때에는 충익현(忠翊縣), 원종 때는 부흥도(復興都), 공민왕 때는 다시 백천현이라 하였다. 이조 태종 13년에 백천군이 되어, 경기도로부터 황해도에 이관된 후 변천을 거쳐 1914년에 행정구역 변경 때 연안과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주요성씨로 유 · 조 · 강 · 금 · 유 · 이 · 호(劉 · 趙 · 姜 · 金 · 柳 · 伊 · 扈)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 거창계(居昌系)---- 의사공파(義士公派) · 정자공파(正字公派) · 교수공파(敎授公派) · 판사공파(判事公派) · 감정공파(監正公派) · 참봉공파(參奉公派) ·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ㆍ 통정공파(通政公派) · 진사공파(進士公派)○ 강릉계(江陵系)----경력공파(經歷公派) · 병사공파(兵使公派) · 좌랑공파(佐郞公派) · 군수공파(郡守公派) · 감찰공파(監察公派) · 어사공파(御使公派) · 호판공파(戶判公波) · 부사공파(府使公派) · 금성군파(金城君派) · 병판공파(兵判公派)○ 백천계(白川系)----아림군파(娥林君派) · 중화공파(中和公派) ㆍ 감찰공파(監察公派)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주요 세거지
‘을묘보(乙卯譜)’ 서(序)에 의하면 시조 유전(始祖 劉筌)이 고려 문종36년 고려에 들어와 경북 영일군(迎日郡)에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경상도 일대에서 세거하였다.
‘을축보(乙丑譜)’서(序)에 의하면 유전(劉筌)의 첫째 아들 유견규(劉堅規)가 거타(居陀)<거창(居昌)의 옛 이름> 君에 봉해진 후로 거창에서 세거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보에 의하면 9세 유환(劉懽)의 대(代) 부터 거창도(居昌都) 일원에 묘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居昌을 본관으로 하는 파는 이때부터 거창군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가 13세 유산수(劉山壽)의 대 이후 사천군(泗川郡)에, 일부는 유한원(劉漢元)의 대 이후로 고성군(固成郡)에 이거(移居)한 것 같다.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하는 12세 옥천부원군 유창(玉川府院君 劉敞)의 후손은 지금의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인 광주군(廣州郡)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가 13세 유인제(劉仁悌,군수공파)의 대 이후 칠곡군(漆谷郡)에 세거했으며, 일부는 14세 유신주(劉信周,병사공파)의 대 이후 진천군(鎭川郡)에 성거하였다. 15세 유용삼(劉用參)의 대를 전후해서는 수원(水原)에 터를 잡았고, 16세 유경상(劉景祥,경주유씨), 유현(劉賢)의 대 이후로는 양주군(楊州郡)에 세거하였으며, 15세 유한량(劉漢良)의 대 이후로는 고창군(高敞郡)에 이거하였다.
16세 이후로는
평산(平山) · 의주(義州) ㆍ 영변(寧邊) · 연안(延安) ㆍ 평양(平壤) · 선천(宣川) ㆍ 진양(進陽) · 통천(通川) · 북청(北靑) · 서울 · 화성(華城) · 금포(金浦) · 강화(江華) · 양주(楊州) · 고양(高陽) · 안성(安城) · 수원(水原) · 성남(城南) · 진천(鎭川) ㆍ 청원(淸原) ㆍ 옥천(玉川) · 제천(堤川) · 충주(忠州) · 대전(大田) · 공주(公州) ㆍ 계용(鷄龍) · 금산(金山) · 부여(夫餘) ㆍ 구암(龜岩) ㆍ 은산(隱山) ㆍ 홍산(鴻山) · 옥산(玉山) · 서천(舒川) · 비인(庇仁) ㆍ 예산(禮山) · 청양(靑陽) · 洪城(洪城) · 전주(全州) · 완주(完州) ㆍ 김제(金堤) · 황산(皇山) · 청하 · 부안(扶安) · 백산(白山) · 동진(東津) · 계문상서(界文上西) ㆍ 진서(鎭西) · 행안(幸安) · 줄포(茁浦) · 고창(高敞) · 아산(雅山) · 고석(古釋) · 부안(富安) · 심원(心元) · 정읍(井邑) · 입암(岦岩) · 산내(山內) · 진안(鎭安) · 백운(白雲) · 장수(長水) · 순창(淳昌) · 남원(南原) · 보절(寶節) · 이리(裡里) · 익산(益山) · 광주(光州) · 광산(光山) · 화순(和順) · 곡성(谷城) · 장성(長城) · 영광(靈光) · 홍농(弘農) · 나주(羅州) · 영암(靈岩) · 무안(務安) · 목포(木浦) · 장흥(長興) · 여수(麗水) · 여천(麗川) · 승천(昇川) · 순천(順天) · 신안(新安) · 비금(飛禽) · 강진(康津) · 대구(大邱) · 칠곡(漆谷) · 경산(慶山) · 영덕(盈德) · 예천(醴泉) · 금천(金泉) · 상주(尙州) ㆍ 울산(蔚山) · 부산(釜山) · 거창(居昌) · 고성(固城) · 동해(東海) · 밀양(密陽) · 금해(金海) · 강릉(江陵) · 영월(寧越) · 정선(旌善) · 원주(原州) ㆍ 평창(平昌) · 춘천(春川) ㆍ 제천(堤川)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유창(劉敞)의 동생 12세 유직(劉直)의 후손은 함남 영흥군(永興郡,어사공파)에서 터를 잡았으며, 12세 유방(劉方)의 후손은 연안(延安,호판공파)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신사보(辛巳譜)’序에 의하면 유창(劉敞)의 동생 12세 유치(劉治)가 함남 북청(北靑,병판공파)에 유배된 후로 자손들이 북청군(北靑郡)에서 세거하였으며, 일부가 13세 유인부(劉仁夫)의 대 부터 단양군 영춘면(丹陽郡 永春面)에 터를 잡았다.
한편 2세 유견구(劉堅矩)의 후손은 거창에서 세거한 것 같으며, 일부가 15세 유선(劉善王立)의 대 이후로는 완주군(完州郡)에, 7세 유해(劉海王立)의 대 이후로는 거제군(巨濟郡)에 이거하였다.
백천(白川)을 본관으로 하는 백천군 유국추(白川君 劉國樞)의 후손은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서 세거하였다. ‘을묘보(乙卯譜)’서(序)에도 15세 주부공 유홍도(主簿公 劉弘道)가 연안(延安)에 거주하였다고 하여 백천유씨(白川劉氏)가 연백군(延白郡) 일원에서 세거하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경기도 수원시(水原市), 김포군 김포면(金浦郡 金浦面), 안성군 미양면(安城郡 薇陽面), 충북 청원군 북이면(淸原郡 北二面), 제원군 수산면(堤原郡 水山面), 충남 공주군 계룡면(公州郡 鷄龍面), 부여군 옥산면 · 홍산면 · 충화면(扶餘郡 玉山面 · 鴻山面 · 忠化面), 서천군 비인면(舒川郡 庇仁面), 전북 고창군 부안면 · 아산면 · 고수면(高敞郡 富安面 · 雅山面 · 古水面), 부안군 백산면(扶安郡 白山面), 전남 신안군 비금면(新安郡 飛禽面), 승주군 월등면(昇州郡 月燈面). 영암군 신북면(靈巖郡 新北面). 장흥군 부산면(長興郡 夫山面), 곡성군(谷城郡), 담양군(潭陽郡), 경북 영풍군 이산면(榮豊郡 伊山面), 칠곡군 북삼면(漆谷郡 北三面), 예천군 예천읍(醴泉郡 醴泉邑),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旌善郡 旌善邑), 영월군(寧越郡), 평창군(平昌郡), 원주시(原州市), 평북 영변군 오리면(寧邊郡 梧里面)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79년 현재 경기도 양주 · 화성 · 강화 · 김포군(楊州 · 華城 · 江華 · 金浦郡), 강원도 정선 · 영월(旌善 · 寧越), 충북 제천 . 청원군(提川 . 淸原郡), 충남 서천 ㆍ 공주 ㆍ 서산 · 홍성군(舒川 ㆍ 公州 ㆍ 瑞山 · 洪城郡), 전북 고창군(高敞郡), 전남 영광 · 신안 · 승주 · 장흥군(靈光 · 新安 · 昇州 · 長興郡), 경북 영덕 · 영주 · 예천군(盈德 · 榮州 · 醴泉郡), 경남 울주 · 거창군(蔚州 · 居昌郡)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특히 경남 거창군 위천면 금곡리(居昌郡 渭川面 金谷里)는 고려 공민왕조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유환(劉懽)이 터를 잡은 이래 5백여 년 동안 거창유씨(居昌劉氏)가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다. 시조 유전(劉筌)의 9세손인 유환(강릉유씨 시조 유승비의 큰 형)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켜 이곳에 칩거하였다. 이웃 마이면 월현(馬利面 月峴)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불이제(不二齊)가 있어 유씨(劉氏)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한다.
씨족史
거창 · 강릉 · 백천(居昌·江陵·白川)유씨(劉氏)는 송(宋)에서 한림학사병부상서(翰林學士兵部尙書)를 지내고 고려에 망명, 귀화한 유전(劉筌)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거창 · 강릉 · 백천의 세 본관을 쓰는 것은 유전의 후손 중에서 봉군(封君)받은 자의 후손이 분관(分貫)했기 때문인데, 시조가 같으므로 합보(合譜)하였다.
유전(劉筌)은 중국 송조(宋朝)의 팽성(彭城) 사람으로 병부상서(兵部尙書)의 관직에 이르렀다 한다. 송 신종 원풍(宋 神宗 元豊)년간에 청묘 · 취식법(靑苗 · 取息法)의 신법(新法)이 실시될 때 정치적 동기로 임팔급 · 설인검 · 허동 · 송규 · 최호 · 권지기 · 공덕수(林八汲 · 薛仁儉 · 許董 · 宋圭 · 崔沍 · 權之奇 · 孔德守) 등 8학사(學士)의 일원으로 고려에 망명하였다. 당시 그는 32세였으며 고려 문종36년(1082)이었다. 9經 · 백가서(百家書) 및 천문 · 지리(天文 · 地理)에 정통했다 하며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경북 영일군에 정착,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한다.
유전의 후손은 세 갈래로 분관(分貫)되었다. 유전의 큰 아들 유견규(劉堅規)는 도첨의찬성사 · 정승(都僉議贊成事 · 政丞)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치사(致仕)한 후에 거타(居陀)(居昌의 옛이름)君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거창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그의 후손 중에서 12세조 유창(劉敞)은 조선개국 후 옥천(玉川)(江陵 의 옛이름)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유전의 세째 아들 유견익(劉堅益)의 8세손인 유국추(劉國樞)가 백천군(白川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은 백천(白川)으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리고 유전의 둘째 아들 유견구(劉堅矩)의 후손은 유견구의 아들인 유웅열(劉雄悅)이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거창 · 강릉 · 백천과 구별해서 아림파(娥林派)라 하나 본관(本貫)은 거창(居昌)으로 한다.
劉씨의 시조부터 몇대에 걸치는 세계(世系)의 기록에는 불비 한 점이 없지 않다. 시조인 유전이 고려에 귀화한 해는 문종36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을묘보(乙卯譜)’에 의하면 그의 손자인 아림군 유웅열(娥林君 劉雄悅)이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칠 때 보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째 아들인 유견익(劉堅益)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봉익대부 · 이조판서 · 대사헌(奉翊大夫 · 吏曹判書 · 大司憲)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이조판서(吏曹判書)는 고려 충렬왕 이후에 변경된 관직명인 것이다.
여말조선의 왕조교체기에 9세 유환(劉懽)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로 거창(居昌)의 금원산(金猿山) 기슭에 은거했다. 이와는 달리 12세 유창(劉敞)은 조선 개국에 적극적으로 참여, 출세의 길을 간 인물이다. 공민왕(恭愍王)20년 文科에 급제, 성균학유(成均學諭)를 거쳐, 박사, 문하주서(博士, 門下注書)에 올랐다.
그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친교가 두터웠으며, 이런 연유로 조선(朝鮮) 개국에 참여, 2등 공신으로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그 후 좌부승지(左副承旨),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등을 지내고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다. 그는 조선개국공신들을 중심으로 왕권쟁탈전이 벌어져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태조 측에 속했는데,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소요산에 들어가 버렸다. 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예문관제학(禮文館提學), 대제학(大提學),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을 두루 거친 뒤 1408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올랐다.
고려말에 둔촌(遁忖) 이집(李集 : 학자)이 목은(牧隱) 이색(李 穡)에게 좋은 사윗감을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목은은 자기 문하(門下)에 재주꾼이 많지만 권근(權近)과 유창(劉敞)을 당해 낼 재주는 없다 하자, 이집(李集)은 창(敞)을 사위로 맞이했다고 한다.
태조(太祖)가 죽은 뒤 스스로 수묘관(守墓官)이 되어 3년 간 수묘(守墓)했다.
강릉유씨(江陵劉氏)의 대표적인 인물인 유창(劉敞)은 조선 태조1년 초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냈으며 옥성군(玉城君)에 봉해졌다. 태조4년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으며 다시 옥천군(玉川君)에 추봉되었다.
그뒤 태조6년에는 예조전서(禮祖典書)와 태종4년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쳤으며 태종으로부터 ‘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어필(御筆)을 하사받기도 했다.시대별 인물 약전(時代別 人物 略傳) - 고려시대 - · 유승비(劉承備) 고려 1273(원종14년)~고려 1350(충정왕3년)
[강릉유씨 시조 -1세] : 상일동 묘역에 설단 강릉유씨 시조(江陵劉氏 始祖)인 휘(諱) 승비(承備), 선조는 도시조 유전(劉筌) 선조의 9세손으로 초휘는 서(瑞)요, 자는 천상(天祥), 호는 국재(菊齋)이시다. 고려말 문과급제하여 상서도성 추밀원 좌복야로 치사(致仕-퇴직)하시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순충보조공신(純忠褓祚功臣)·통정대부(通政大夫)·호조 참의(戶曹參義)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증손 유창(劉敞)께서 조선개국 2등 공신에 책록되어 옥천(江陵의 古號)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 유송백(劉松柏)[...2세] : 상일동 묘역에 설단 자(字)는 공헌(公憲), 호는 송봉(松奉). 고려 때 개성윤(開城尹)·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유송재(劉松梓) [금성군파 파조 - 2세] 고려조 때 문과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綠大夫)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三重大匡 門下侍中 平章事)를 역임하시고 금성군(金城君)에 봉해지셨다.
생년, 졸년, 할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묘소 역시 실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드님에 천성(天性), 손자에 서(敍)요, 증손에 수종(壽宗), 고손 연(演)은 군수공(仁悌:인제) 할아버지의 세째 아드님으로 입양하셨다. 송재 할아버지의 후손을 금성군손(파) 이라고 한다.
·유천봉(劉天鳳)[...3세] : 상일동 묘역에 설단 자(字)는 내소(來韶), 호(號)는 절재(節齋). 고려 때 지안악군사(知安岳郡事)를 지내고, 충근익대수의협찬보조공(忠勤翊戴守義協贊褓祚功臣)·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영경연판병조사(領經筵判兵曺事)에 추증(追贈)되었다.
- 조선시대 - ·유 창(劉 敞) 1352(공민왕1)~1420(세종2)
[강릉유씨 중시조 -4세] : 상일동 좌현 묘역 초명은 경(敬), 자(字)는 태화(太和), 호(號)는 선암(仙菴), 시호(諡號)는 문희(文僖), 공민왕 원년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1371년(공민왕 20)문과(文科)에 급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고, 박사(博士)·문하주서(門下注書)를 역임, 특히 이성계(李成桂)와 절친하여 측근에서 항상 학문을 강론해 주었다. 1376년(우왕 2)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전공 좌랑(典工佐郞)·예의 정랑(豫義正郞)·군부 정랑(軍簿正郞)을 거쳐 1389년(공양왕 1) 성균 사예(成均司藝), 이어 호조의랑(戶曺義郞)·성균관좨주(成均館좨酒)를 역임했다.1392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으로 대사성(大司成)에 승진했고, 그 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좌부승지(左副承旨)·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등을 지내고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으며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1401년(태종 1)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소요산(逍遙散)에 들어간 태조(太祖)를 찾아가 귀경(歸京)을 권유했으며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을 역임, 1408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태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이 되어 3년 동안 묘(墓)를 지켰다. 1410년 길주도 찰리사(吉州道察理使)로 나갔다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지낸 뒤, 1413년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고 1416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진봉(進封), 1420년에 궤장(궤杖)을 하사(下賜)받았다. 1420년 12월 9일 생을 마치니(세종2년), 세종(正宗)이 환관(宦官)을 보내어 백미(白米)와 콩 40석을 부사(賻賜)하여 1등 공신(一等功臣)의 예(禮)로 후장(厚葬)하고, 그를 칭송하기를 당(唐)나라 누사덕(누師德)에 비유하였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태종 13년에 경연을 열어「대학」을 연의했고, 왕씨를 보호하여 벼슬을 내리고 묘를 세우게 했으며 포은의 후손에게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주청하였다. 태종(太宗)이 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어필(御筆)을 하사하고 부(父)·조(祖)·증(曾) 3대(三代)에 벼슬을 추증(追贈)하였으며,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양리에 영정각(影幀閣) 및 어필각(御筆閣)을 세워 봉안하고 있다가 어느날 "영정각"에 도둑이 들어 고려시대 제기(도자기)와 여러 가지 유물을 도둑맞아 찾지 못하고, 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어필(御筆) 원본은 "상일동 문희공 유물관"에 보관해 놓고 경북 칠곡군 숭양리에는 복사본만 모셔져 있다.
창의 선암문집《(仙庵文集)》은 중요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으며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창은 4형제의 맏이로서 세 아우 직(直)·방(方)·치(治)는 각각 영흥파(永興派)·청송파(靑松派)·북청파(北靑派: 혹은 兵判公派)를 이루었다.
증조(曾祖)이신 국재공을 시조로 하여 계대(系代)한 것이 700여년 남한에만 약 5만여 가구에 175,000여명이 살고 있으며 북한을 합한다면 약 25만명이 되는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중국에서는 황족(皇族)으로 천하대성(天下大性)이라고 칭(稱)한다고 한다. · 유 직(劉 直)[...4세]
1357년에 출생하여 1390년에 생원 및 진사에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안악군사(安岳郡事) 및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셨다. 1418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1426년 6월 23일에 卒하시니 향년이 70세이다.
公의 홍패는 영흥의 종가에 보관되어 있다. 墓는 정평 유관동 시현사( 視見寺) 남쪽 수노봉의 아래 계좌(系坐)이다. 병조참의 윤사은(尹師殷)이 묘갈명을 지었다. 配 정부인 崔氏는 판군기사사(判軍器寺事) 문한(文翰)의 따님으로 1428년 1월 12일에 卒하셨고 墓는 合封이다. 문희공 창(敞) 할아버지의 4형제 중 둘째 아우로서 함경남도 영흥에 거주하여 영흥파(永興派)를 이루었다.
·유 방(劉 方) [호판공파 파조 - 4세] 조선조(朝鮮朝) 때 문과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을 지내시고 세종조에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셨다는 기록만 있을 뿐 생년, 졸년,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문희공 창(敞) 할아버지의 4형제 중 셋째 아우로서 경상북도 청송에 거주하여 청송파(靑松派)를 이루었다. 아드님은 운영(雲影), 손자에 숭(崇), 증손은 자강(自彊)이시다. 현재는 어디에 얼마나 분포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유 치(劉 治) [병판공파 파조 - 4세] 호(號)는 청유(淸遊). 조선(朝鮮)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고려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조선조에 들어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병조판서(行 兵曹判書)를 역임하시고 도덕과 문장이 큰형(문희공 창)과 다를 바 없었으나 시론(여론)을 입어 태종1년 1401년에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과 같이 북청에 귀양 와서 은거함에 같은 마을에 집을 짓고 살면서 평수지교(萍水之交:객지에서 만나 맺어진 친구)를 맺고 그곳에 처음으로 서숙(글방)을 세우고 주민들을 교육하니 북쪽의 유풍예절(유교의 예절)이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치(治)선조는 태종 때 예문관대제학까지 지냈으며, 영조 때의 학자 여호(汝豪)가 그의 후손이다.
문희공 창(敞) 할아버지의 4형제 중 넷째 아우로서 함경남도 북청에 거주하여 북청파(北靑派:혹은 兵判公派)를 이루었다. 슬하에 6형제를 두셨으니 장자에 인부(仁夫) 삼척진 첨절제사(三陟鎭 僉節制使)로 영춘(지금의 충북 단양)에 살으시고, 차자에 인수(仁秀) 성균진사(成均進士)요, 삼자 인덕(仁德)은 상호군(上護軍)이며, 四자 인봉(仁奉)이며, 五자 인지(仁智)요, 둘째부터 다섯째 까지는 북청에 사셨고, 六자 인호(仁好)는 갑산(甲山:함경도)에 이사하여 사시면서 그 후손들이 병조판서를 약하여 병판공손(파)이라고 한다.
·유 경(劉 景) [부사공파 파조 - 4세]
할아버지는 시조 휘 승비의 큰 아드님(松栢:송백)의 둘째 아드님(天祿:천록)의 아들이다.고려조 때 문과급제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문하성에 정7품 벼슬)를 역임하고 학행(學行)이 세상에 널리 알려 졌으며 국자감승(國子監丞)을 지내고 평산부사(平山府使)를 역임하여 후손들이 부사공이라 한다.할머니는 서원염씨(瑞原廉氏)로 성균진사(成均進士) 호(浩)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아드님 근(近)을 두시고 조선조 태조 4년 서기 1404년 2월 15일 졸하시니 묘는 할아버지와 같이 현재 경기도 양주군 설마령하 청학동 유좌에 모셨다.
부사공 할아버지의 직계를 살펴보니 20세 하연(夏淵: 秉자항렬) 까지만 기록되고 이하는 기록이 되지 않았다. 경(景)자 할아버지의 후손을 부사공손(파) 이라고 한다.
·유인통(劉仁統)[...5세] : 상일동 묘역 우현에 모셔져 있음. 자(字)는 경원(景元). 조선조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문희공 휘 창(敞) 할아버지의 첫째 아드님으로, 경력공 지주, 병사공 신주, 좌랑공 계주 세 아들을 두셨다.
·유인제(劉仁悌) [군수공파 파조 - 5세] 자(字)는 이공(而恭), 호(號)는 송재(松齋).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문희공 휘 창(敞) 할아버지의 둘째 아드님으로 일찍이 문과급제 하여 통훈대부로써 금산군수(지금의 경북 금능)를 역임하시고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로 대제학(大提學)을 지내시다. 할아버지께서는 도량(道量)이 넓으시고 강직(剛直)하심을 스스로 수범하시더니 관직에서 물러나 옥산에서 여생을 보내시다. 할머니는 정부인 전주이씨(貞夫人 全州李氏)로 대호군(大護軍) 동영(東榮)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5남을 두셨는데 장자에 휘 한(翰)이며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요, 차자에 휘 덕(德)은 통덕랑(通德郞)이요, 三자는 휘 연(演)이며 출계 수종(壽宗)후 하고, 四자 휘 백(伯)은 용천고강만호(龍川古江萬戶)요, 五자는 휘 극주(剋周)요 형조참의와 능주목사(刑曹參議 綾州牧使)를 역임,
다섯 형제분을 두셨는데 후손이 많이 사는 지역은 강원도와 경상도며 소수 분포는 전국에 산재하여 살고 있으며 군수공손(파) 이라고 한다.
·유인길(劉仁吉) [...5세]
문희공 휘 창(敞) 할아버지의 셋째 아드님으로, 조선조(朝鮮朝)에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유상우(劉尙友) [어사공파 파조 - 5세] 조선조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휘는 상우(尙友)요. 문희공의 넷째 아드님으로, 숙부이신 휘 직(直) 할아버지에게로 출계하시다.
할아버지의 생부는 창(昌)이시고 1381년에 출생하시어 壬申에 생원에 합격한 후 문과급제하여 승훈랑(承訓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1416년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에 오르셨다. 국조방목(國朝榜目)을 보면 할아버지는 태종, 갑오, 을과, 삼등(太宗, 甲午, 乙科, 三等)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다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할머니는 본관은 알 수 없고 왕씨(王氏)이며 득명(得命)의 따님이시다. 1378년에 출생하시고 1436년 5월 27일에 卒하셨다. 할아버지 묘소는 함경도 영흥 장흥사 동하원 지대동 자좌에 묘비, 상석, 장군석, 지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忌日은 3월 13일이다. 할머니의 묘는 광주 선영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할아버지는 이북이고 할머니는 묘 자체가 없으니 찾을 길이 없다. 이 할아버지의 후손을 어사공손(파) 이라고 한다. 슬하에 삼형제를 두셨으니 장자에 휘 장생(長生)이며 진전직(眞殿直)을 지내고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에서 언덕바지에 과일나무 심고 근심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살으셨으므로 후손이 이북에 많이 살으신다. 둘째 아드님 휘 만수(萬壽)는 사간원에 정언(正言:정6품)을, 삼자 휘 천수(千壽)는 통훈대부로 상주목사(通訓大夫 尙州牧使)를 역임하시다. ·유지주(劉智周)[경력공파 파조 - 6세] : 상일동 묘역 좌현 자(字)는 광윤(匡允), 호(號)는 담재(湛齋). 조선(朝鮮)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문희공의 큰 아들 인통(仁統:吏曹判書)의 큰 아들로 휘는 지주(智周)요 자는 광윤(匡允)이시며 호는 은암(隱庵) 또는 담재(湛齋)이시다. 조봉대부 부마부경력(朝奉大夫 駙馬府經歷:종4품)을 역임하시고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이조참판(行 吏曹參判:지금의 차관)을 역임하시다. 할머니는 정부인 교하노씨(貞夫人 交河盧氏)로 서령(署令) 효사(孝思)의 따님이다. 둘째 할머니는 정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로 묘는 문희공 할아버지의 계하(階下)에 쌍봉이며 제사는 매년 음10월 3일에 경력공조의 조부(문희공 창), 아버지(판서공 휘 인통), 둘째동생 좌랑공(繼周: 계주), 손자 목사공(琨: 곤)의 제사를 같이 봉향한다. 슬하에 5남(男)을 두셨으니 장남에 휘 용량(用良)은 음직(蔭職:조상의 덕으로 받은 직첩)으로 병조참판하고, 차남 휘 용평(用平)은 사헌부 감찰과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종5품)와 제용감(濟用監) 판관을, 삼자 휘 용하(用何)는 통훈대부로 예조좌랑(通訓大夫, 禮曹佐郞:정6품)을, 사남 휘 용삼(用參)은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오남 휘 용순(用恂)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丞旨:지금의 비서)와 예조참의(禮曹參議:정3품)를 역임하였다. 이상 5형제분의 손이 전국에 살면서 경력공손(파) 이라고 한다. ·유신주(劉信周) [병사공파 파조 - 6세] 조선(朝鮮)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을 역임하였다.
문희공의 둘째 손자로 판서공 휘 인통(仁統)의 둘째 아드님이다. 휘는 신주(信周)요, 자는 광민(匡民)이며 호는 순재(純齋)이다.조선조 태종 때 출생하여 무과에 급제. 관직이 가선대부로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 兵馬節度使)에 오르시다. 할아버지께서는 정무(政務)에 진력(盡力)함에 청렴결백하고 언행이 일치하며 덕으로써 백성을 어루만지고 어진 정사를 베풀어 백성들이 할아버지의 힘을 입어 가난과 어려움을 모르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송덕의 소리가 자자하였다. 전통가법을 이어받아 자제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며 가족과 일가친척이 멀고 가까움이 없이 화목하게 지내게 되었고 선조의 유지와 유업을 몸소 빛내 후세에 영원한 덕풍(德風)을 심어 놓았으니 길이 숭앙(崇仰)을 받을 분이로다. 할머니는 정부인 안동김씨(貞夫人 安東金氏)로 상호군(上護軍) 영창(榮昌)의 따님이다. 슬하에 3형제를 두셨으니 장자 휘 웅(熊)은 행 충좌위 부사과(行 忠佐衛 副司果)요, 차자 휘 호(虎)는 문과 급제하여 통훈대부 예조좌랑(通訓大夫 禮曹佐郞)이며, 삼자 휘 표(豹)는 성균진사(成均進士)하다.묘(墓)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유좌합봉하고 석물(石物)을 갖추다. 제사는 매년 음 10월 5일 시향(時享)을 올린다.이 할아버지의 후손을 병사공손(파) 이라고 한다. ·유계주(劉繼周)[좌랑공파 파조 - 6세] : 상일동 우현 묘역 자(字)는 국헌(國憲), 호(號)는 성재(省齋). 조선조(朝鮮朝)에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문희공의 세째 손자로 판서공 휘 인통(仁統)의 세째 아드님이다. 휘는 계주(繼周)요, 자는 국헌(國憲)이며 호는 성재(省齋)이다.문과급제하여 통훈대부로 이조좌랑(정6품)을, 통정대부로 좌승지(左丞旨)를 역임하시고 정헌대부에 오르셨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할머니는 정부인 연안김씨(貞夫人 延安金氏)로 대사간(大司諫) 육(堉)의 따님이다. 슬하에 4형제를 두셨으니 장자에 휘 현(賢)이며 황해도 은율(殷栗) 현감을 지내시고, 차자 휘 한량(漢良)은 무장현감(茂長縣監)을, 三자 휘 도보(道輔)는 사산감역(四山監役)을, 四자 휘 숭능(崇陵)은 첨정(僉正)을 지내셨다. 묘는 판서공 휘 인통(仁統)할아버지 산소 아래(상일동)에 쌍봉으로 모셔 있으며 제사(시제)는 매년 음 10월 3일에 봉향한다.이 할아버지의 손을 좌랑공손(파) 이라고 한다.
·유 생(劉 生) [감찰공파 파조 - 6세] 조선조(朝鮮朝)때 문과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내시고 옥과(玉果) 현감(縣監)을 지내셨다.
문희공 창(敞) 할아버지의 四子인 인길(仁吉)의 장자이다. 할아버지는 문과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시고 옥과(玉果) 현감(縣監)을 지내셨다. 할머니는 숙부인 광주이씨(淑夫人 廣州李氏)며 묘는 함흥군 주북면 흥경리 강석동 간좌쌍봉이며 석물(石物)도 갖추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께서 함경도 함흥에 올라가신 후로 자손이 그곳에서 터잡아 살게 되었다.
살펴 보건데, 할아버지 손은 거의 이북에 사시는지 대동보에 대부분 들어오지 않았다.
·유용량(劉用良)[경력공...7세] 자(字)는 유능(幼能).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유용평(劉用平)[경력공...7세] 자(字)는 평중(平重), 호(號)는 퇴헌(退軒).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유용하(劉用何) [경력공파 성재공 계 계조 - 7세] 자(字)는 사능(士能), 호(號)는 성재(省齋).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유용삼(劉用參)[경력공...7세] 조선조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유용순(劉用恂)[경력공...7세] 자(字)는 사성(士誠), 호)號)는 만곡(萬谷). 조선조(朝鮮朝)에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유한량(劉漢良) [좌랑공파 은재공 계 계조 - 7세]
자(字)는 충겸(忠謙), 호(號)는 은재(隱齎), 은재 유한량(隱齋 劉漢良)은 문희공 유창(文僖公 劉敞)의 증손이며, 이조좌랑 계주의 아들로 명종 3년 한양에서 출생했다. 중봉 조헌에게 배우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돈영부도정과 무장현감(茂長縣監)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진주성(晉州成)방어에 참전,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진주(晋州) 남강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화살이 떨어져 죽창(竹槍)으로 대전했으나 성(成)이 함락되자 장렬하게 순절하니 선조 26년 6월 29일이었다. 그 공으로 후에 그의 둘째 아들 유세형(劉世珩)은 부여현감(扶餘縣監)을, 세째 아들 유세영(鍮世瑛)은 양천현감(浪川縣監)을 제수받았다.
고창(高敞)의 정산사(鼎山祠), 장성(長成)의 송계사(松溪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승비(承備:1세) - 계주(繼周:6세)[좌랑공파] - 한량(漢良:7세)[은재공]
·유덕문(劉德文) [경력공파 술재공 계 계조 - 10세]
자(字)는 욱경(郁卿), 호(號)는 술재(述齋), 술재 유덕문(述齋 劉德文)은 전남 장성(長城)에서 창의(倡義)하여 의병장 김제민(金齊閔)을 도와 경기도 安城까지 진군하여 커다란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조선조(朝鮮朝)에 상호군(上護軍)을 제수 받았으며, 경서(經書)에도 통달하였다 한다.
승비(承備:1세) - 지주(智周:6세)[경력공파] - 용하(用何:7세)[성재공] - 세분(世분:8세) - 필(弼:9세) - 덕문(德文:10세)[술재공]
·유호인(劉好仁) [경력공파 천방공 계 계조 - 11세]
자(字)는 극기(克己),호(號)는 산당(山堂)·천방(天放), 천방공 유호인(天放公 劉好仁)은 참판(參判) 선보(善寶)의 아들로 조선 때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으며, 진사(進士)를 지낸 후로 학문(學文)에 열중하여 후진 양성에 전력했다.
1574년(선조7) 여름.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제단(祭壇)을 쌓고 살신기우(殺身祈雨)할 결심으로 높이 쌓아 올린 장작더미위에 정좌(正坐)하고 기원하면서 나무에 불을 지르니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왕(王)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천방(天放)이라는 호(號)를 하사했다.
특히 호인(好仁)은 일생을 낙천적(樂天的)으로 살았는데, 자기가 사는 곳을 자하동(紫霞洞), 자기 거처를 정정당(定靜當), 바깥 사랑채를 불우당(不憂當), 집 앞에 있는 연못을 완료호학지심지(完妙好學之心池)라 이름하고 풍류(風流)로 일생을 살았다.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능해, 조헌 · 김장생(趙憲 · 金長生)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우하며 후진양성에 힘써 추앙을 받았다.
장흥(長興)의 예양서원(汭陽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승비(承備:1세) - 지주(智周:6세)[경력공파] - 용순(用恂:7세)[참의공] - 한필(漢弼:8세) - 계창(季昌:9세) - 선보(善寶:10세) - 호인(好仁:11세)[천방공],호의(好義:11세)[산재공.비금유씨]
·유호의(劉好義)[경력공파 산재공 계 계조-11세]-비금강릉유씨 유가(劉家)선조의 부(父) 자(字)는 극신(克信), 호(號)는 산재(山齋). 천방공 호인(好仁)의 둘째 아우로 비금 강릉유씨 계조 가(家) 할아버지의 부친이시다.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유경상(劉景祥) [강릉유씨에서 분적, 경주로 관적 - 11세]
자(字)는 중길(仲吉), 호(號)는 고봉은재(高峰隱齋), 1579년(기묘) 생원시에 합격, 1588년(선조21년) 공의 나이 38세 때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17위, 조선조(朝鮮朝) 때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냈다. 성균관 전적, 양주·제주의 목사 등을 거쳐 경주부사를 역임했다.
경주유씨(江陵劉氏)는 강릉유씨(巨昌劉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그의 선계는 강릉유씨(江陵劉氏)로, 그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고, 일찍이 성균관 진사를 거쳐, 경주부사로 치사했는데, 후손들이 그 영특함과 학문이 뛰어남을 기리기 위해 강릉유씨에서 분적, 경주로 관적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충북 충주시 창소색동에 있고, 매년 음력 4월 7일에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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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습니다. 단양에도 유씨들이 많은데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