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가요의 해석과 향가의 시학
― 삼국유사 소재 작품을 중심으로
김종성(소설가, 전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1. 고대가요의 해석
유리니사금(재위: 24년~57년) 때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가요인 「도솔가(兜率歌)」는 작자 및 가사의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도솔가」는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1 ‘유리니사금 5년’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노례왕’조에 그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1 ‘유리니사금 5년’조에 의하면 유리니사금이 나라 안을 순행하다가 굶주리고 얼어 죽어가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자기가 잘못한 탓이라 하며 가엾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책을 세우도록 했다. 이 해에 「도솔가」를 처음 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가악의 처음 시작이었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조에는 “ 「도솔가」를 처음 지으니, 차사사뇌격(嗟辭詞腦格)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사를 통해 「도솔가」는 신라 노례왕(유리니사금)대에 지어졌고, 차사사뇌격(嗟辭詞腦格)을 가진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사사뇌격’은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차사는 ‘아으’·‘아야’ 등, 향가(鄕歌)에 붙은 감탄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뇌격(詞腦格)은 사뇌가(詞腦歌) 격식의 노래라는 뜻으로 10구체 형식을 말한다. 「도솔가」는 가락국(금관가야)의 「수로왕 신화」에 나오는 「구지가」와 함께 주술적 내용을 담은 신가(神歌)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신가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는 승려들이나 화랑에 의해서 향가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도솔가」에 대해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 형식’, ‘개인적인 서정시’, ‘집단적 원시예술로부터 서정가요로 옮겨가는 중간 형태’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박성의는 「도솔가」의 문학사적 지위에 대해 “무형식적 시가에서 정형적 시가로, 서사적인 문학에서 서정적인 문학으로 옮아가는 한 형태의 시가군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도솔가는 문학사상 집단적인 서사문학과 개인적인 서정시와의 교량적 존재를 이루고 있다”(박성의, 『국문학개론·국문학사』, 선명문화사, 1974, p.332.)고 보았다. 한편 양주동은 「도솔가」를 한국 가요의 남상(濫觴)으로 보았다(양주동, 『고가연구』, 일조각, 1987, p.27.). 양주동은 「도솔가」가 개인의 서정가요가 아니고, 민속환강(民俗歡康)·시화연풍(時和年豐)을 구가(謳歌)하였거나, 임금의 어진 정사(政事)를 칭송한 민중의 노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양주동, 앞의 책, p.27.). 정병욱은 「도솔가」를 “우리의 고대 시가 중에서 종교적인 요소가 표백되고, 순연한 서정적인 가요로 성립된 일련의 시가를 이름인가 한다”면서 “‘사뇌가’란 최초에 사뇌야(詞腦野) 지방에서 주로 유포되다가, 그것이 발전하여 후일에는 신라 시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 일종의 정형시를 지칭한 것이라고 보인다”(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980, p.78.)고 했다. 김승찬은 「도솔가」를 “가악(歌樂)의 시초이다(歌樂之始也)”(『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1 ‘유리니사금’조)라고 한 것은 사로 부족연맹국가의 성립 이후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등 혁신적 국가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 민속환강(民俗歡康)이 도래한 유리니사금대에 궁중의례에 사용된 인륜세교적(人倫世敎的)인 정풍가악(正風歌樂)의 최초의 작품이라는 뜻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형식적인 측면에서 「도솔가」는 첫째구와 둘째구의 끝에 감탄어미를 붙여 시상을 분절화되, 사뇌가의 낙구(落句) 부분에 가서는 낙구 대신에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서 긴 여음구를 넣고 이어나가는 연장체의 노래라고 보았다(김승찬, 『한국상고문학론』, 새문사, 1987, p.69). 일명 회악이라고 하는 「회소곡(會蘇曲)」은 유리니사금대부터 팔월 보름의 가배(嘉俳) 때 길쌈 내기에서 진 편이 탄식하는 조로 불렀다고 한다. 내해니사금(재위: 196년∼230년)대에 물계자가 지은 노래로 가사는 전해지지 않는 「물계자가」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개인 작가의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개인적·서정적인 내용으로 지어진 금곡(琴曲)의 가락에 맞추어 불리어진 노래로 신라의 시가 문학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이 노래[물계자가]에 이르러 신라에 있어서는 종합예술 형태인 가무악(歌舞樂)이 비로소 가악과 무용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라 추측된다”(김승찬·손종흠, 『고전시가론』,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2004, p.37)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 진평왕(재위: 579년~632년)대에 김무월랑이 지은 가요인 「명주가」는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고 작품 이름과 전승 설화가 『고려사』 권71 「악지」 ‘삼국 속악’조, 『증보문헌비고』 권106 「악고」17 ‘속악부’ 등에 전한다. 문헌에 따라 「명주가」의 작자와 창작 연대가 각기 다른데도 불구하고 「명주가」와 관련된 설화의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고려사』, 권71, 「악지」, ‘삼국 속악’조에서는 「명주가」의 작자가 서생(書生)이며, 창작 연대는 고구려 시대이고, 고구려의 가요라고 보았고, 『증보문헌비고』 권106 악고17 속악부에서는 신라의 가요라고 보았다.
한편 『강릉김씨파보』와 『강릉김씨세계』에 실려 있는 설화를 살펴보면 작자는 강릉김씨 시조 김무월랑이며, 창작 연대는 신라 경덕왕과 혜공왕 사이이고, 신라의 가요라는 것을 알 수 있다(김선풍, 『한국시가의 민속학적 연구』, 형설출판사, 1977, p.143.).
신라의 노래로 문헌상에 이름만 나타나고 가사가 전하지 않는 노래로는 「도솔가」·「회소곡」·「물계자가」·「명주가」 이외에, 「우식악」·「치술령곡」·「대악」·「원사」·「해론가」·「실혜가」·「양산가」 등이 있다. 가사와 악곡은 전하지 않고, 제목과 창작 연대 및 경위가 『삼국사기』 「잡지」1 ‘악(樂)’조와 『삼국사기』 「열전」5 ‘박제상’조에 전하며 눌지마립간(재위: 417년~458년)이 동생인 복호와 미사흔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지은 노래인 「우식악」, 왜국에서 피살된 박제상(김제상)이 피살된 지도 모르고 귀국하기만을 통곡하며 기다리다가 죽어간 그의 아내의 슬픈 사정을 노래한 「치술령곡」, 세밑이 되어 이웃집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가 나자 가난하여 떡을 하지 못하는 상심한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영계기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며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과 불평사(不平事)를 거문고로 풀었던 백결선생이 '거문고'를 타서 떡방아 찧는 소리를 흉내내어 지은 노래인 「대악(碓樂)」, 신라 진평왕(재위: 579년~632년)대에 경주의 천관사에 머물고 있던 기녀 천관이 김유신이 타고 온 말의 머리를 베고 집으로 돌아가자, 그 원망스러움을 하소연하여 지은 노래인 「원사(怨詞)」, “가잠성의 역전과 해론 부자(父子)의 용지(勇志) 및 영절(英節)과 효심을 기린 서사적 장가(長歌)(김승찬·손종흠, 앞의 책, p.39)라는 점에 주목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고, 그 노래를 지은 경위만이 『삼국사기』 「열전」 ‘해론’조에 기록되어 있는 「해론가」, 왕에 대한 충정에 변화가 없다는 것과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에 대한 지탄으로 내용을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실혜가」는 655년(태종무열왕 2년) 양산 전장(陽山戰場)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낭당대감 김흠운, 대감 예파, 소감 적득, 보기당주 보용나 등이 장렬히 산화하자,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애도하여 지었다고 하는 「양산가」(『삼국사기』 「열전」 ‘김흠운’조) 등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노래로 작품의 제목과 그 유래만이 『고려사』 권71 「악지」 ‘삼국 속악 고구려’조에 전하며, 고구려 정주(지금의 평안북도 양주 부근)의 물 가운데 있는 땅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내원성」, 『고려사』 권71 「악지」 ‘삼국 속악 고구려’조에 전하며, 고구려 연양(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에 살던 어떤 사람이 남의 밑에서 죽기를 무릅쓰고 일을 하며 자기 신세를 나무에 비유해 노래한 「연양」 등이 있다.
또한 백제의 노래로 『고려사』 권71 「악지」 ‘삼국 속악 백제’조에 전하며, 나주의 속현인 장성의 방등산에 근거를 둔 도적으로부터 구해주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는 노래인 「방등산」, 백제 속악의 하나로 장사 사람이 정역(征役)에 나갔는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 바라보며 부른 노래인 「선운산」, 『고려사』 권71 「악지」 ‘삼국 속악 백제’조에 전하며, 무등산에 성을 쌓아 편안하게 살 수 있음을 기뻐한 노래인 「무등산」, 『고려사』 권71 「악지」 ‘삼국 속악 백제’조에 전하며, 자색이 있는 구례현의 가난하나 정절을 지킨 여인의 노래로 도미처와 연관된 노래로 추정되는 「지리산」 등이 있다.
원시 사회에서 고대 국가로 전환되던 과도기 단계의 국가 형태인 연맹왕국은 소국들의 연맹에 이해 형성되었다. 연맹의 여러 소국들의 지배자는 각자의 영역을 다스리며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그중 세력이 강한 소국의 지배자가 연맹을 주도하거나 왕이 되었으며, 나라의 중요한 일은 소국들의 지배자들이나 대표들과 협의하여 처리하였다.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와 굿을 하면서 부르는 무가 같은 민요가 이미 선사 시대에 생겨났다. 고조선 시대에도 노동요와 무가는 흔하게 불리워졌다. 원시 고대문학의 집단가요에서 개인적 서정가요로 넘어가는 시기의 작품인 「공무도하가」와 고구려 초기의 가요로 작가와 연대가 뚜렷하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고대 가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개인적 서정시인 「황조가」가 주목할 만하다.
가락국의 시문학 작품인 「구지가」는 원래의 가요는 전하지 않고 4구체의 한역가 형태로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구지가」는 「수로왕 신화」에 나오는 삽입가요로 서기 42년 봄 3월에, 가락국의 9명의 간(干)이 백성 200∼300명을 거느리고 구지봉에서 수로왕(재위: 서기 42년~199년)을 맞이하기 위하여 흙을 파헤치며 부른 노래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
「구지봉영신가」, 「영신군가」라고도 불리는 「구지가」는 고조선 시대의 가요인 「공무도하가」와 고구려 초기의 가요인 「황조가」가 개인적 서정을 노래한 것과는 달리, 수로왕의 강림을 기원하는 집단 무요(巫謠)로 집단적 성격을 띠고 있다. 「구지가」는 그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인다. ① 잡귀를 쫒는 주문(呪文)으로 보는 견해, ② 영신제의(迎神祭儀)에서 출산 제의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집단제의에서 불려진 노래라는 견해, ③ 영신제의 중요한 순서의 하나인 희생 무용에서 불린 노래라는 견해, ④ 원시인들의 강력한 성욕을 표현한 노래라는 견해 등이 있다. 인간이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해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해 예찬을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 인간의 입장에서 위협하게 된다. 김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신령스러운 존재인 거북이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구지가」에서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하고 위협하는 주술이 그것을 말해준다. 일종의 위협하는 주술에 관계된 노래로 보인다. “거북(龜)아 거북아”에서 ‘거북(龜)’는 신의 의미에 해당하는 고대어이며, “머리(首)를 내밀어라”에서 ‘머리(首)’는 ‘생명’ 또는 ‘수장’즉,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구지가」의 기본적인 속성은 주가(呪歌)이며 우두머리를 맞이하기 위한 종교적인 속성을 띠고 있는 집단 무요이고, 주술성을 지닌 노동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가사의 뜻과 표현 형식이 「구지가」와 비슷한 노래로, 신라 성덕왕(재위: 702년~737년) 때 바다용에게 끌려간 수로부인을 구출하기 위해 불렀다는 「해가」가 『삼국유사』에 노래의 내력과 함께 전하고 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 놓아라.
남의 아내 훔쳐간 죄가 얼마나 크냐.
만약에 어기어 내 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으리.
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悖逆不出獻, 入網捕掠燔之喫.
― 『삼국유사』 권2 「기이」2 ‘수로부인’ 조
작가와 창작 연대 미상인 「해가(海歌)」는 신라의 고대 가요로 내용과 주제가 가락국의 고대 가요인 「구지가」와 비슷하다. 그러나 4구체지만 7언으로 되어 있는 「해가」가 4언 4구의 4구체로 되어 있는 「구지가」보다 그 내용이 구체적이다. 일반적으로 주술적 성격의 노래로 보는 「해가」의 해석을 둘러싸고 학자들 간에 견해 차이가 있다. ① 원시 신앙의 유풍을 이어받아 노래를 통해 주술적 힘을 발휘하게 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 ② 인간과 인간에게 재앙을 준다는 나쁜 신인 악신의 갈등을 「해가」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으로 본 견해, ③ 민심이 흉흉하고 흉년이 자주 들었던 성덕왕이 왕위에 있던 신라 당대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려진 굿노래라고 본 견해, ④ 「구지가」의 풍자적 개작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백성들이 부른 노래인 「해가」의 해석에 있어서 「해가」가 「구지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두 작품의 주인공의 이름이 수로이고, 가사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구지가」와 「해가」는 두 작품 모두 향가가 아니고 고대 시가이다. 「해가」는 언어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대인들의 언어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해가」는 고대인들이 언어가 갖고 있는 주술적인 힘을 믿고 불렀던 노래였던 것이다. 고대의 원시 신앙에서 용과 거북은 둘다 신으로 숭배되었다. 「해가」에서 수로부인을 납치해간 것은 용인데 백성들이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 놓아라”라고 노래부르고 있는 것은 우리 옛말에서 신은 ‘검’으로 ‘거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2. 향가의 시학
향가는 신라 시대로부터 고려 시대 전기까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정형시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표기 체계를 향찰(鄕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향가’란 광의로는 중국시에 대한 우리나라의 독특한 시가라는 뜻이라고 하겠으나, 협의로는 신라 시대로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는 사이에 제작된 이두(吏讀)식 문자로 표기된 시가를 이름이라 하겠다. 따라서 향가라 하면 도솔가나 사뇌가를 포함한 이 시기의 모든 시가의 총칭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이다.
― 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980, p.78.
주로 향가의 표기에 이용된 향찰은 “균여전(均如傳, 1075년), 역가공덕분(譯歌功德分)의 최행귀 서문에 비로소 나타나며, 그 뜻은 당문(唐文)에 대한 상대적 표현으로 우리말을 적는 글자 또는 우리말을 적은 글로 해석된다”(박병채, 『국어발달사』, 세영사, 1989, p.118.)
향찰의 표기법은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양주동·지헌영·김선기·서재극·김완진 같은 학자들이 연구해왔으나 아직 완전한 해독에는 이르지 못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향가는 하나의 문학 장르를 일컫는 용어가 아니다. ‘향가’는 중국의 시가나 불교의 범패에 대해 상대적 개념으로 신라인들이 우리 고유의 시가’·‘시골 노래’라는 개념으로 생각한 시가를 말한다.
향가에는 여러 개의 장르가 포괄되어 있다. 그 표기 체계가 향찰로 이루어진 향가의 형태로 보면 4· 8 ·10구체, 내용상으로 보면 주가(呪歌), 민요, 개인적인 창작 서정시 등을 포괄한다. 향가의 형식은 4구체→ 8구체 →10구체 형식의 순서로 발생한 것이다. 주로 향가의 표기에 이용된 향찰은 『균여전』 「역가공덕분」의 최행귀 서문에 비로소 나타난다.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등 총 25수가 남아 있다. 향가집으로는 진성여왕 때 각간 위홍이 당시의 향가를 집대성하여 『삼대목』을 편찬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지만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향가 가운데는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같은 개인이 지은 서정가요도 있고, 「풍요(風謠)」 같은 민요도 있고, 「혜성가(彗星歌)」와 「도솔가」 같은 의식요도 있다. 향가 작가들은 다양하지만 중심이 되는 작가층은 화랑과 승려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때까지 전개된 문학을 통일신라 시대의 문학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서서 더욱 유행한 향가 작품으로는 융천사의 「혜성가」,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희명의 「천수대비가」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향가의 작가층이 확대되었다.
「서동요(薯童謠)」는 민요가 4구체 향가로 정착된 것으로 선화공주에 대한 연모의 정을 노래하고 있는데, 향가 중 유일한 동요라고 볼 수 있다. 이하 「서동요」를 비롯한 『삼국유사』 소재 향가의 원전 교감은 『향가해독법연구』(김완진 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2, pp.53〜pp.137)를 참고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두고
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如.
― 『삼국유사』 권2 「기이」2 ‘무왕(武王)’ 조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향가이다. 영웅의 출생담(出生談)에 자주 등장하는 야래자(夜來者) 설화인 「서동 설화」는 서동이 신라의 서라벌에 가 선화 공주를 모함하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후 귀양가는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웅 설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설화인 「서동 설화」의 주인공 서동을 백제의 동성왕(재위: 479년∼501년)이나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무왕(재위: 600년~641년)으로 본다. 정치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왕위에 오른 무왕이 그것을 타개하는데 신라 진평왕(재위: 579년~632년)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며, 그 도움의 고리 역할을 한 것이 무왕과 진평왕 딸의 결혼인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2009년 1월 14일에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의 사리봉안기로 인해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 자체가 없었다며, 「서동 설화」를 부정하는 주장이 나왔다. 금동제사리봉안기는 그 내용이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석가모니 사리의 위대함을 말하고, 두 번째는 사탁씨(沙宅氏) 출신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서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다는 내용이고, 세 번째는 대왕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것이고, 네 번째는 왕후가 복을 받고 성불할 것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특히 사리봉안기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로 인해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무왕 당시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 사탁적덕의 딸인 사탁왕후라는 것이 밝혀졌다. 백제가 사비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 무렵에는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고 하는 유력한 귀족 가문이 8개가 있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가문이 사탁씨이다. 당대 백제의 왕은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과 41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던 무왕에게 사리봉안기에 기록된 백제 왕후 말고도 다른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서동요」의 배경설화로 알려진 『삼국유사』 ‘무왕’조 기사는 미륵 신앙을 토대로 만들어진 사찰인 미륵사의 창건 설화로 백제의 미륵 신앙의 의미를 잘 보여 주고 있어 백제의 미륵신앙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미륵 신앙의 특징이 담겨 있는 「미륵사 창건 설화」에는 미륵 하생 신앙적 요소도 동시에 있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거둥하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솟아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배했다”는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익산 땅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는 점이다.
『삼국유사』 ‘무왕’조 기사에서 도성을 사비(泗沘)에 두었던 시기 백제에는 미륵하생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익산 지역을 중시해 그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던 무왕은 용화산 아래 미륵사를 건립함으로써 백제 땅에 미륵의 이상 세계가 펼쳐지는 미륵불국토를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용화산 아래 못 속에서 미륵불이 나타났다는 것은, 미래불인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연하면 미륵사가 자리잡은 용화산은 미륵이 설법을 하는 용화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큰 못을 메워 “미륵(彌勒) 삼회(三會)를 법상(法像)으로 하여 회전(回殿)·탑(塔)·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워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는 구절에서 미륵상과 회전⋅탑⋅낭무를 각각 세 개씩 건립하였다는 것은 미륵의 삼회설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익산의 미륵사는 미륵이 하생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함으로써 이상적 세계를 이룬다는 미륵하생신앙의 염원으로 세워진 사찰로 백제의 미륵 신앙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구체의 서정적 향가인 「헌화가(獻花歌)」는 ‘소를 몰고 가던 노인(牽牛老翁)’이 수로 부인에게 벼랑에 핀 꽃을 꺾어 바친다는 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향가이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紫布岩乎邊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肹不喩慚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수로부인(水路夫人)’ 조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암소를 몰고 다녔기 때문에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선승·농사신·신선·남자 무당·단순한 촌노인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헌화가」는 무교적이거나 불교적인 색체가 없는 전형적인 서정가요로 암소를 몰고 다니는 노인이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어 당시 신라인의 미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풍요」는 양지가 영묘사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 때 금성의 남녀들이 흙을 운반하며 부른 노동요이다. 이 노동요는 유행하는 노래라는 뜻으로 「풍요」라고 불리우는 4구체 향가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향가 가운데 민요적 성격을 가장 잘 표출하고 있는 노래로 불교의 교리가 내포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재위: 579년∼632년) 때 융천사가 지은 「혜성가」는 10구체 형식의 향가로 『삼국유사』에 시와 그 연기 설화(緣起說話)가 실려 있다
옛날 東(동)쪽 물가
乾達婆(건달바)의 놀던 城(성)을랑 바라보고,
倭軍(왜군)도 왔다고
봉화를 올린 변방이 있어라
세 花郞(화랑)이 山(산) 구경 오심을 보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 쓸 별을 바라보고
“彗星(혜성)이여!” 하고 사뢴 사람 있구나
아으! 달은 저 아래로 떠가 버렸더라.
이 보아, 무슨 彗星(혜성)일꼬.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遊烏隱城叱兮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 烽燒邪隱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姪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北所音叱慧叱只有叱故.
― 『삼국유사』 권5 「감통」 7 ‘융천사혜성가 진평왕대’조
세도막 형식(4/4/2)의 10구체 향가는 다시 3개의 장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장에 등장하는 ‘아아’, ‘아야’와 같은 낙구(落句)가 오도록 양식화 되어 있다. 이것은 10구체 향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술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10구체 향가의 작가는 대부분 승려나 화랑이다. 민요적 속성과는 달리 개인이 창작한 10구체 향가는 집단 창작에서 개인적 창작으로 이어지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10구체 향가로는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와 「혜성가」·「안민가」·「원왕생가」·「제망매가」·「찬기파랑가」·「도천구관음가」·「우적가」·「원가(怨歌)」 등이 있다. 10구체 향가는 가장 정제된 형식으로 일명 사뇌가라고 하며 대개 서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0구체 향가로 주술적인 노래인 「혜성가」는 '동해물가·성·봉화·달·혜성'과 같은 시어를 통해 서정적 세계를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건달바(乾達婆)는 불교를 수호한다는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 건달바의 왕이다. 수미산 남쪽의 금강굴에 살면서 제석천(帝釋天)의 아악을 맡아본다는 신으로 향(香)만 먹고 공중으로 날아다닌다고 한다. 세 화랑은 거열랑·실처랑·보동랑을 말한다. ‘길쓸 별’은 혜성을 말하는데, 꼬리가 길어서 빗자루 같은 별이라고 한다. 「혜성가」에는 빗자루 같은 별이 세 화랑의 갈 길을 쓸고자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불길한 혜성이라 생각했다. 고대인들에게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샤마니즘 사상이 있었다. 그 원시적인 샤마니즘 사상이 신라 시대에 들어와서도 남아 있었다. 주술적인 힘을 통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신라 사람들은 믿었다. 진평왕(재위: 579년~632년) 때의 승려인 융천사가 지은 「혜성가」는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에 연기 설화와 함께 실려 있는 「원가」는 효성왕 때 신충이 지은 작품으로 주술적 성격을 가진 향가이다. 「원가」에서 효성왕과 잣나무는 은유 관계로 잣나무에 작용하는 것은 곧 효성왕에게 작용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주술적 심리가 「원가」에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혜성가」처럼 보편적인 주술이 작품 전편에 녹아 있는 향가가 아니라, 신충이라는 진골 귀족의 능란한 처세술이 작품 전편에 녹아 있는 향가이다. 후구(後句)는 잃었다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10구체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민가」는 유교 사상이 짙게 드러나 있는 10구체 향가로 통일신라 시대의 민(民)의 지위에 대해 알 수 있는 향가이다(신형식, 『신라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3, pp.192∼193 참조).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고자 한 현실 효용적인 측면이 있는 향가이다. 「안민가」는 유교적인 윤리의식, 즉 가족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교훈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君(군)은 아버지요,
臣(신)은 자애로운 어머니라.
民(민)은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시면
民(민)이 (임금의) 사랑받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대중(大衆)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들을 먹여 다스리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고자 할지면
나라를 保全(보전)할 길을 아실 것입니다.
아아, 君(군)답게 臣(신)답게 民(민)답게 한다면
나라 안이 太平(태평)할 것입니다.
君隱父也,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 爲賜尸知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攴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國惡攴持以支知右如, 後句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
―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
경덕왕(재위: 742년~765년)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왕과 신·민의 신분 질서를 강조한 충담사는 불교 승려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매년 중삼(重三)·중구일(重九日)에 차를 공양하였다. 이들은 도솔정토의 미륵에 대한 신앙을 보여준 것이다(정병삼, 「불교철학의 확립」,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9·통일신라』, 탐구당, 2013, p.409).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공양한 충담사의 행위는 신라 미륵신앙의 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경덕왕이 신라를 다스리던 때에는 신라 중대 왕실의 전제 왕권이 새로운 귀족 제력의 부상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왕권의 재강화를 위하여 관제의 정비와 개혁 조치를 취하였다. 집사부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고치고, 유학 교육을 진흥시켰다. 한편 전제 왕권을 안정시킨 성덕왕(재위: 702년∼737년)의 위엄을 기리기 위하여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한 데서 그의 전제왕권 유지 정책이 잘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대는 가뭄·지진·우박 따위의 자연 현상으로 인해 생기는 재앙이 특히 심했다. 오악(五嶽)과 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궁전 뜰에 나타나 경덕왕을 모시곤 하였다는 설화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무관하지 않다. 동악인 토함산, 남악인 지리산, 서악인 계룡산, 북악인 태백산, 중악인 팔공산을 말하는 오악과 경주의 동쪽 및 동남쪽 일대의 나력산, 영천 일대의 골화산, 청도 일대로 추정되는 혈례산을 말하는 삼산은 신라가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760년(신라 경덕왕 19년) 여름 4월 월명사가 지은 「도솔가」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난 괴변(怪變)을 물리치기 위한 의식에서 불린 노래이다.
오늘 이에 散花(산화) 불러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命(명)을 부리옵기에
彌勒座主(미륵좌주)를 뫼셔라.
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寳白乎隠花良汝隐, 直等隠心音矣命叱使以惡只, 弥勒座主陪立羅良.
― 『삼국유사』 권5 「감통」 제7 ‘월명사 도솔가’조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두 개의 태양 가운데 하나는 신라를 다스리고 있는 경덕왕에 도전할 세력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왕권에 도전하려는 세력들이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없애기 위해 부른 산화 공덕(散花功德)의 노래가 「도솔가」이다. 일명 산화가(散花歌)라고도 하는 「도솔가」는 4구체 향가로 명령법이 작품 속에 남아 있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서 사용되던 주가적(呪歌的)인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미륵신앙을 향가 「도솔가」를 통해 드러냈던 월명사는 「제망매가(祭亡妹歌)」를 통해 정토신앙(淨土信仰)을 드러냈다.
生死(생사)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彌陀刹(미타찰)에서 만날 나
道(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肹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味,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如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 『삼국유사』 권5 「감통」 7 ‘월명사 도솔가’조
경덕왕 때 월명사가 지은 「제망매가」는 10구체 향가이다. ‘위망매영재가(爲亡妹營齋歌)’라고도 하는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며 부른 추모의 노래이다. 1행에서 4행까지는 누이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을 제시하면서 삶의 허무함과 남매의 진한 정을 그리고 있다. 5행에서 8행까지는 혈육의 정을 구체화하면서 누이의 죽음에서 느끼는 인생의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9행에서 10행까지는 이승에서의 슬픔과 고뇌를 불교의 신앙심으로 극복하고 불교적 정신 세계로 승화하여 초극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제망매가」)에 의하면 월명사는 죽은 누이와 미타찰 즉 극락정토에서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은 누이가 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고 또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월명사가 재(齋)를 올리고 향가를 짓고 한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한 아니라 죽은 누이를 위한 것이었다. 우선 원하는 것은 죽은 누이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목적을 위해서 월명사는 영재(營齋)라는 추선행위(追善行爲)를 한 것이다. 그 결과로 그의 누이는 정토(淨土)에 왕생한 것으로 믿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종이 돈이 바람에 불려 서쪽으로 날아간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기백,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94, pp. 170∼171.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을 믿고 따라서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늘 생각하고 간절히 바라는 신앙이다. 더럽거나 속되지 않은 불국토(佛國土)로서 즐거움만이 가득하게 차 있는 세계를 가리키는 정토는 인간적인 슬픔과 고뇌가 없고 영원한 법열(法悅)만이 있다고 한다.
죽어가는 인간을 낙엽에 비유하고 있고, 핏줄 관계를 ‘한 가지’로, 낙엽을 떨어뜨리는 바람을 낙엽, 즉 여동생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신령스러운 힘을 지닌 매체로서 비유하고 있다. 나뭇잎과 바람에 ‘생사의 길’이 맺어져 이루어지는 은유는 고도의 시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제망매가」는 정제되고 세련된 표현 기교와 서정성이 뛰어난 노래로 승려인 작가의 의식 세계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는 경덕왕(재위: 742년∼765년) 때 충담사가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여 지은 노래였다.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간 언저리에
새파란 냇물에
耆郞(기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 냇가 자갈 벌에서
郞(랑)이 지니시던
마음의 갓을 쫒고 싶구나.
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兒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
「찬기파랑가」는 10구체의 향가로 고려 광종 때, 균여가 지은 11수의 향가인 「보현십원가」의 십행법(十行法)과 그 형식을 같이하는 유일한 향가이다. 경덕왕(재위: 742년∼765년) 때 충담사가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여 지은 「찬기파랑가」는 달·냇물·자갈 벌·잣나무·서리 등과 같은 자연물로 표상된 기파랑은 고아하고 사유하는 성자로 묘사한 서정시이며 당시 화랑의 지도자였던 기파랑의 높은 인격을 찬양하고 있다. 고도의 은유와 상징법을 사용하여 기파랑에 대한 흠모의 정을 더욱 강조한 것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부연하면 ‘달’은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광명과 영원을 상징하는 것이며, ‘냇물’은 기파랑의 맑고 깨끗한 인품을, ‘자갈 벌’은 원만하고 강직한 인품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잣나무’는 서리와 대립되는 이미지로 시련과 역경에 굴하지 않는 기파랑의 고매한 인품을 상징하는 것이며, ‘서리’는 잣나무에 닥친 역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역경에 굴하지 않는 기파랑의 굳은 절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찬기파랑가」는 향가 가운데 10구체 향가 중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며 유일한 문답 형식의 희곡적 체제를 갖춘 향가로 표현 기교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낭도(郞徒) 득오가 죽지랑의 인격을 사모하여 부른 노래로 8구체 향가이다. 윤회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는 「모죽지랑가」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깊어지는 죽지랑에 대한 흠모의 정을 그리고 있다.
죽지랑은 위엄과 위의를 지니고 있어 지난 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늙은 화랑이다. 그러한 그가 아간 벼슬을 가진 벼슬아치인 익선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이 연기설화에 잘 그려져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 위엄과 위의를 상실해 간 화랑 죽지의 모습을 통해 세력을 잃어가고 있는 화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분황사 천수대비 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조에 실려 있는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는「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맹아득안가(盲兒得眼歌)」이라고도 한다. 천 개의 손과 그 손바닥마다 박혀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관음(千手觀音Sahasrabhuja-avalokitesvara)에게 자식이 눈 낫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어머니의 종교적 신심(信心)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서정시로 10구체 향가이다. 「천수대비가」의 해독은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천수관음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앉아, “두 눈이 없는 내게 눈을 주신다면 그 자비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하는 향가라는 데에는 일치한다.
신라 원성왕 때 승려 영재가 지은 10구체 향가인 「우적가(遇賊歌)」는 『삼국유사』 권5 ‘영재우적’조에 실려 전한다. ‘도적 만난 노래’라는 뜻을 가진 「우적가」는 보이지 않는 글자들이 있어서 완전한 해독을 하기 어렵다. 승려 영재가 깊은 산중인 남악에 도를 닦으러 가던 길에 도둑을 만났다. 영재는 재물에 눈이 어두운 도둑들에게 삶의 참뜻과 바른 길을 제시하여 도적들을 설복시켰다. 이에 감동한 도적들은 칼을 버리고 머리를 깍고 영재의 제자가 되었다. 재물에 눈이 어두운 도적들에게 삶의 참뜻과 바른 길을 제시하여, 수도에 힘써 참다운 삶을 살아가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향가 작가가 아닌 승려 영재가 「우적가」를 지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 시기에 향가가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신라 향가의 마지막 작품인 「처용가」는 『삼국유사』 에 실려 있다.
東京(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해였고
둘은 누구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은 걸 어찌하리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鳥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 『삼국유사』 권2 「기이」 2 ‘처용랑과 망해사’조
「구지가」에서 「해가」로 이어지는 주술적인 시가의 맥을 계승하고 있는 「처용가」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내용을 담은 8구체 향가이다. 「처용가」의 가사의 일부는 고려가요 「처용가」에 들어가 있다. 이 고려가요 「처용가」가 1493년(성종 24년)에 성현 등이 왕명을 받아 펴낸 『악학궤범』에 훈민정음으로 기록되어 있어 향찰 문자 해독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한편 처용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는 견해, 당시 울산 지방에 있던 호족의 아들이라는 견해, 신라를 오고가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학자들의 연구 결과 대체로 처용을 용의 아들로 분장한 무당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처용가」의 끝부분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처용의 초월적 관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처용가」는 벽사진경을 도모한 무가(巫歌)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는 것을 보고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는 것은 무격사회(巫覡社會)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풍습이기 때문이다.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와 함께 신라시대 기원 노래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원왕생가(願往生歌)」는 10구체 향가이다.
달이 이제
西方(서방)까지 가시겠습니까.
無量壽佛前(무량수불전)에
일러 빠짐없이 사뢰소서.
誓願(서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두 손 곧추 모아
願往生願往生(원왕생원왕생)
그릴 사람이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을 남겨 두고
四十八大願(사십팔대원) 이루실까.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多可攴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攴,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邪 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광덕과 엄장’조
승려 광덕이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나 광덕의 처, 원효, 민간 전승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원왕생가」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원효가 교리와 형식을 중시하는 불교 사상에 일반 민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불교 교종의 한 종파인 아미타신앙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믿고 따르면 누구나 극락에 갈수 있다는 신앙으로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아미타불을 숭앙한다.
산스크리트어(Sanskrit)로 아미타바붓다(Amitabha-Buddha)라고 하는 아미타불은 특히 정토신앙을 숭봉하는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모시는 부처님이다. 아미타불을 예배 대상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 ‘달’은 중요한 소재이다. 여기서 ‘달’은 시적 화자가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기원의 대상이다. 시적 화자가 살아가고 있는 차안(此岸)[이 세상]과 아미타불이 있는 피안(彼岸)의 서방정토(극락정토)를 잇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원왕생가」는 귀족 불교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던 신라 불교가 삼한통일을 이루는 문무왕대에 이르러서 민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아미타신앙이 퍼져나가는 시간적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주목된다.
김종성⼁1986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가 당선되어 등단함. 2004년 고려대학교에서 「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2006년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소설집으로 『마을』·『탄(炭)』·『연리지가 있는 풍경』·『말 없는 놀이꾼들』·『금지된 문』 등이 있고, 학술서로 『한국 환경생태소설 연구』·『글쓰기와 서사의 방법』·『글쓰기의 원리와 방법』·『한국어 어휘와 표현Ⅰ·Ⅱ·Ⅲ·Ⅳ』, 역사서 『김수로왕: 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 등을 출간함. 전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현 《용인문학》 편집고문.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