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과의 이혼도 몰랐다…朴이 밝힌 ‘정윤회와 인연’ [박근혜 회고록 13 - 정윤회 문건 사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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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잊고 지냈던 ‘정윤회’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됐다. 정윤회 실장(과거 비서실장을 지내 ‘정 실장’으로 호칭)이 나의 측근인 청와대 비서관 3명(이재만·정호성·안봉근)을 비롯해 10명의 여권 인사들과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세계일보 기사(2014년 11월 28일) 때문이었다.
나는 기사를 보는 순간 ‘이것은 완전히 사실이 아닌 게 보도됐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윤회 실장은 이미 오래전에 내 곁을 떠난 사람이었다.
이 사건과 연루된 박관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 행정관이 나중에 검찰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씨가 1위, 정윤회씨가 2위이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 언론에 보도돼 사회적으로 파문이 일었던 적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런데 이로부터 2년 뒤 최서원 원장(과거 유치원 원장을 지내 ‘최 원장’으로 호칭) 문제가 불거지자 최 원장의 전 남편이었던 정 실장이 정말로 정권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또 정 실장의 실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정윤회 실장과의 관계를 소상히 설명하려고 한다.
달성군 결전 앞두고 최서원 모친이 정윤회 추천
1998년 3월 12일 한나라당 달성지구당 개편대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지구당 위원장)은 이회창 명예총재(왼쪽), 조순 총재(오른쪽)의 손을 잡고 보궐선거 승리를 다짐했다. 중앙포토
정 실장을 알게 된 것은 1997년 말께로 기억한다. 나는 그해 대선 막판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돕기로 하고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그때 나에게 정 실장을 추천한 사람은 최서원 원장의 모친, 그러니까 정 실장의 장모인 임선이 여사였다. 7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청와대에서 나오게 됐을 때, 임 여사는 나의 어려운 형편을 헤아려 여러 가지를 챙겨주시던 분이었다. 임 여사는 내가 선거운동에 뛰어들면 옆에서 실무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보고 사위였던 정 실장을 나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선거운동을 한 기간이 워낙 짧았기 때문에 정 실장과는 서로 안면을 튼 정도에 불과했다.
문건 배후엔 김무성·유승민? 朴 “촉새 女의원의 음해였다” [박근혜 회고록 14 - 정윤회 문건 사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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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들의 저승사자라고 불리는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청와대를 포함해 주요 공무원들의 감찰을 맡고 있다. 그런 만큼 유능하고 책임감 있다고 평가받는 인사가 공직기강비서관으로 추천된다. 그런 공직기강비서실에서 이것(‘정윤회 문건’)을 만들었다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세계일보의 ‘정윤회 리스트’가 터지기 몇 달 전 정윤회 실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기는 했다. 2014년 3월 주간지 시사저널에 이른바 ‘정윤회의 박지만 미행설’이 보도됐을 때다. 정 실장의 사주를 받은 남양주의 한 카페 운영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내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을 주기적으로 미행 감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이상하다고 느껴 이 얘기의 진상을 철저히 파헤쳤으면 몇 달 뒤 나라를 뒤흔드는 큰 소동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나와 내 주변을 둘러싼 음해와 모함을 워낙 많이 겪다 보니 당시만 해도 ‘어디선가 또 누군가 괴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구나’는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2012년 8월 15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육영수 여사 38주기 추도식에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과 동생 박지만씨(왼쪽)가 참석했다. 중앙포토
마흔이 넘어 결혼한 박지만 회장은 아들 넷을 두어 가족들을 기쁘게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많은 사람이 박 회장 부부를 주목했다. 권력을 좇는 사람들이 부적절하게 꼬여 들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전 대통령들이 친인척 문제로 어려움에 부닥쳤던 것을 여러 번 봤던 나는 임기 중 이들 부부를 한 번도 청와대에 부르지 않았다. 동생을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나았다. 젊었을 때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박 회장은 이제 사업가로서 자리 잡고 안정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정치와 관계없이 살게 해주는 게 오히려 동생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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