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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소식 살아가는 얘기 스크랩 이산 가족찾기 이 지연 전 CBS 전 아운서
兵部公派 30世孫 梁芳秀 추천 0 조회 639 13.10.13 11: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15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서 북으로 간 친오빠 찾은

  <생방송 이산 가족 찾기> 진행자:이 지연

 83년 KBS <생방송 이산 가족 찾기>를 무려 1백 38일간 진행하며 온나라를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이끌어갔던 방송인 이지연씨가 50년만에 자싱의 이산 가족을 찾았다. 북한적십자회가 전해온 8·15 이산가족 서울방문단 후보 200명의 명단을 통해 6·25때 북으로 간 친오빠 이래성씨가 남쪽의 가족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이씨는 오빠를 찾은 기쁨에 앞서 외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편히 눈을 감지 못한 부모님 생각에 며칠 동안 눈물을 쏟았다고 말했다.              

                             ●글·김민경 기자 ●사진·지재만 기자0

 

    역사 적인 8·15 상봉을 앞두고 분단이 만들어낸 온갖 비극적인 가족사가 하나하나 전해지고 있다. 유복자를 키우며 5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린 할머니, 국군과 인민군으로 총부리를 겨눴던 형제, 아들찾기를 포기하고 10년 동안 아들의 제사상을 차려온 노모 등. 서울방문단 후보 명단이 대개 월북자 위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번 이산 가족들의 사연은 더욱 가슴 저리다. 반세기 동안 이들은 혈육을 찾기는커녕, 자신이 이산 가족이라는 사실조차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한 채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KBS <생방송 이산 가족 찾기>의 진행을 맡아 전국민을 울렸던 방송인 이지연씨(52)가 다른 이산 가족들을 찾아주며 남몰래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사연도 민족 분단으로 인한 불신과 비극의 깊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엄밀히 말하면 오빠가 월북한 건 아니지만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기가 두려웠어요. 이산 가족의 아픔을 표시하기도 어려웠죠. 어렸을 때 특무대라고 하는 당시 기관원들이 우리 집 한 칸을 내서 아예 살았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70년대 말 연좌제가 폐지될 때까지 기관원이 절 따라다녔어요. 제가 아나운서로 다니던 기독교 방송국 커피숍에서 기관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별 일 없냐’ ‘무슨 소식 없냐’며 묻고는 사라지곤 했죠. 나중엔 그 사람과 친해질 정도였으니까요. 보이는 데서도 그러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오죽할까 싶은 생각에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70년대 말 연좌제가 폐지되긴 했지만 이씨의 마음 저 밑바닥은 늘 불편했다. 이씨는 전화를 하다가 잡음만 들려도 ‘아, 나는 요주의 대상 가족이지!’란 생각에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조심조심 살아왔던 이씨가 지난 남북정상회담 기간에 케이블 채널인 KTV에서 특별 편성한 <만나야 할 사람들>이란 이산 가족 찾기 프로그램 진행 도중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이 오빠를 북에 둔 이산 가족임을 털어놓고 말았다.

 

“7부작 중 마지막 날 생방송이었어요. 일흔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가 북에 남겨둔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를 읽던 중이었죠. 할아버지는 김일성 대학 출신으로 잠깐 남쪽에 왔다가 전쟁이 나는 바람에 어머니와 생이별을 했다고 해요. 목이 메서 편지를 읽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엄마!’하며 오열을 터뜨리는데 그 얼굴이 오빠 얼굴로 오버랩되는 거예요. 진행자가 자기 감정 드러내지 않는 건 기본인데, 제 일그러진 얼굴과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TV화면에 고스란히 비춰졌죠. 담당 PD로서는 ‘횡재’한 셈이죠. 감정 조절 잘 하기로 유명한 여자가 엉엉 울고 있는 걸 생방송으로 보여줬으니.”

 

이씨는 더듬더듬 ‘우리 형제는 딸이 다섯이고 아들이 하난데 그 오빠가 북에 있다. 어머니가 그 아들을 기다리다 돌아가셨다. 83년에 이산 가족 찾기 방송할 땐 감정 많이 조절해가며 방송했는데 이제 나도 나이가 든 것 같다’고 말하고 방송을 마쳤다. 방송 후 “왜 이 선생이 적은 출연료에도 직접 자료까지 가져다주고 대본까지 고쳐가며 열의를 보였는지 이제 알았다”며 미안해했던 PD가 이씨가 오빠를 찾았다는 신문 기사를 보자마자 신이 나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선생님이 이산 가족 많이 찾아주셔서 복 받으신 거예요.”

 

 

70년대까지 연좌제 등으로
심적 고통 겪어

 

 이씨의 오빠 이래성씨(68)는 6·25 전쟁 당시 전북 이리농고에 다니다가 인민군 의용군으로 징집됐다. 1남 5녀로 외아들이었던 오빠가 징집되자 유달리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강하던 부모님은 화병으로 앓아 누웠다.

“어렸을 때 집에 대한 기억은 며칠 밤낮 동안 끊이지 않던 굿하는 소리, 스님들의 독경 소리와 연결돼있어요. 그 땐 굿이라도 하는 방법 밖에 다른 수가 없었거든요. 덕분에 가산도 많이 줄었죠.”

 

이씨의 가족들을 더욱 기막히게 한 건 전후 거제도에서 포로들이 석방된 뒤 일본에서 날아든 한 통의 편지였다. 오빠가 직접 쓴 편지의 요지는 ‘진남포에서 일본으로 오는 밀선을 타고 일본에 와서 공부를 잘 하고 있다. 언젠가 찾아뵐 테니 부모님은 걱정 마시라’는 것. 오빠가 포로로 잡혔다 석방된 뒤 북으로 갔다는 증거가 된 이 편지는 곧바로 공안기관에 의해 압수됐다.

 

“전후 혼란한 상황에서 민간인이 일본에 수소문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부모님은 온갖 연줄을 이용해 편지에 씌어진 일본 주소로 몇 차례나 사람을 보냈죠. 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거였어요. 우리 집에서 이렇게 하니까 기관원들이 긴장해서 감시가 더 심해졌어요. ‘접선’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했던 거죠. 그 후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통일될 날만 기다리시다 아버지가 66년에, 어머니가 86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얼마나 한이 맺히셨는지 임종 때 막 숨을 거두시려는 순간에도 손자들 얼굴을 보시고 몇 번씩 눈을 번쩍 뜨시곤 했어요. 혹시 아들이 온 게 아닌가 착각하신거죠.”

 

세월이 흐르면서 이씨의 부모는 겉으론 아들 찾기를 단념한 듯했지만, 문득 문득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내비쳤다고 한다.

“부모님이 그처럼 오빠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아는 저로서는 어린 마음에도 한밤중에 북에서 오빠가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신고해야 하나, 이렇게 갈등했었답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최고의 가치가 반공이었잖아요.”

 

그러나 정작 이씨 자신도 그런 기대를 아주 지운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이지연’이란 이름으로 방송 생활을 하면서도 ‘이점봉’이란 아명을 버리지 못해 지난해까지 모든 문서를 이중으로 만드는 불편을 감수해왔다. 자신이 방송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냥 살림을 하는 다른 언니들에 비해 혹시 오빠가 연락하기가 쉽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오빠 이래성씨가 북한적십자회에 기록한 남쪽의 ‘가족 사항’에는 고향인 전남 이리시 갈산동의 주소와 이씨를 포함한 다섯 자매의 이름이 한자도 틀림없이 적혀 있었다. 단지 이씨의 나이를 착각했는지 52세를 60세로 기록했다.

 

오빠 이렇게 살아있었으면
어머니께 생사라도 전해주지…”

“오빠가 떠날 때 제가 세 살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기억은 없어요. 가족과 오빠 친구들의 말로 어떤 성품이었는지 들었을 뿐이죠. 당시 학교에서 연대장이었고 굉장한 멋쟁이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이 강한데다 불의를 못참는 성격이었대요. 제가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아버지는 ‘네 오빠는 책보느라 밥상에서도 3시간씩 앉아있었다’며 절 야단치신 적도 있었어요.”

 

오빠 이씨에 대한 기억이 고교시절에서 정지됐기 때문에 북한적십자회에서 보낸 오빠의 사진을 보고 이씨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우리 오빠는 이런 할아버지가 아닌데’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이 만들어지는 눈웃음에서 곧바로 아버지의 얼굴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씨는 사진 속의 인물이 오빠인 것을 확인한 기쁨과 함께 ‘오빠, 이렇게 살아있었으면 부모님께 생사라도 한번 알려주지 그랬어요’란 원망이 한꺼번에 가슴에 북받쳐 올라왔다고 했다.

 

그리고 오빠를 만나면 제일 먼저 “오빠 아들 낳았어요?”라고 물어볼 것이라고 했다. ‘대를 잇지 못해 조상님 앞에 면목 없어 눈을 편히 못감겠다’던 부모님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TV를 통해 제일 먼저 오빠의 이름을 확인한 넷째 언니 이점학씨의 첫마디도 “아버지 보세요. 대가 끊이지 않았네요”라는 것이었다고.

 

이씨는 북한적십자회에서 보낸 명단에 직업 등 신상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오빠가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단지 이번 명단이 북쪽 체제에 나름대로 적응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 ‘나쁘지 않은 신분’ 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했다.

“지학순 주교가 북에 가셨을 때 가장 마음 아픈 게 ‘오누이 사이에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전 그런 아픔을 겪더라도 오빠를 만나고 싶어요. 오빠가 어떤 사상을 갖고 있다 해도 혈육의 정은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심이 남아있다는 것도 알아요. 만약 이 일로 제가 어떤 불이익을 겪더라도 전 감수할 수 있어요. 다른 이산 가족들도 그런 각오로 상봉 신청자 확인을 했겠죠. 단지 아직도 그런 불신과 증오심이 우리 사회에 남아있다는 것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파요.”

83년 <생방송 이산 가족 찾기> 이후 이지연씨는 일반 교양 및 가족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북한 관련 프로그램의 단골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씨는 현재 KBS 사회교육방송 프로그램인 <통일열차-내가 본 서울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매주 게스트로 나온 귀순자들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데 “귀순자들을 볼 때마다 혈육을 만나는 애틋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얼마 전 귀순자 김용씨에게 ‘(귀순자들) 모두 한번 모이세요. 내가 삼겹살 한번 살테니’ 라고 약속을 했는데 때맞춰 오빠를 찾게 된 거예요. 김용씨가 연락을 해와 ‘이럴 줄 알고 그랬구만요’ 하는데 우연이었지만 정말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산 가족 찾기> 당시 16시간 35분 동안 쉬지않고 카메라 앞에 서서 ‘텔레톤’(텔레비전+마라톤)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철의 여인’ 이지연씨. 이제 남북 상봉단 1백명의 명단에 뽑히기만을 기다리며 기도할 뿐이라는 그녀의 평온한 표정에서 오빠를 만나려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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