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동(舊基洞)
경복궁에서 청와대 곁 칠궁을 지나
북악산을 감돌아 자하문 곁을 나서면
사직터널이 끝나는 지점부터 구기동 일대.
사직터널에서 나오자마자 시야에 들어오는.,비봉.
세검정을 포함한 탕춘대능선까지 또한.,구기동 일부이다.
'법정동' 구기동은 '행정동' 평창동 관할을 포함한.,넓은 면적.
비봉 능선을 고구마처럼 길게 애워싼.,구기동.
구기동(舊基洞)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동이다.
법정동으로써 구기동은., '행정동' 평창동 관할.
북쪽으로.,진관동.
동쪽으로는.,평창동.
남쪽은.,신영동, 홍지동.
서쪽으로는.,홍은동. 불광동.
본디, 구기동 지명은 '구텃굴'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구텃굴이 무엇에 대한 구터인지 연원을 확인할 수 없지만
구기동 옛 자연촌락 흔적에서 "구터" 연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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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굴, 먹정굴, 문수동, 매박굴, 독박굴, 구텃굴 등.
조선시대 반정이 일어날 때마다.,반정군 비밀 집결지.
특히, 조선시대 구기동은 반정 모의 세력들의 결의 장소.
예., 舊
터., 基
마을., 洞
구기동.
중종반정 때
진관사.,모의
연신내.,집합.
경복궁을 점령.
인조반정 성공 후
칼을 씻은 세검천도
구기동에 위치한.,세검정.
인조 때 '이괄의 난'
반정군들의 비밀 집결지 및
반정군 훈련장도 구기동 독박골.
'연신내 ~불광사 ~ 불광산 부침바위~
탕춘대능선 ~ 승가사 ~ 비봉~ 독박골.'
탕춘대능선 성곽에는 두개의 암문이 있다.
탕춘대능선 성곽 아래.,'비상출입구' 암문.
'연신내 ~ 불광사 계곡' 일대는 전란 때마다 격전지.
불광산 부침바위는 인근에 국사당이 있었던 흔적이다.
전란 또는 내란 때 사자의 영혼을 달래주던 흔적 지명들.
'불광산(佛光山)~부침바위~ 향로봉~관암~비봉.'
탕춘대 성곽 안과 밖에 각각 주둔한 군사들이
비상시 들락거리며 군사작전을 펴기 위한.,암문.
탕춘대능선 성곽은 한성 방어를 위해.,숙종때 축성.
그로부터, '왕실 호위대' 어영청 군사들의 관할지역.
연산군 재위 때는 궁궐 30리 밖 민가가 모두 철거된 곳.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숙종 때 탕춘대 축성을 완공.
그후로, '민간인 출입통제 군사보호지역' 구기동 비봉 일대.
'박정희 대통령 암살목적' 북한 124군부대 공비.,침투 루트.
암살 실패 후.사모바위 땅굴에서 비박하며.,저항했던 공비들.
결국, 비봉 일대에서 투항 중 붙잡혀 귀순한.,김신조.
그 사건 이후, 평창동은 주택지로 분양되어.,민가 형성.
비봉과 사모바위 일대는.,수도경비사령부 군부대 주둔지.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비봉 일대 군부대 철수.
청와대 곁 궁정동의 안전가옥(安家)들도 모두 철거.
10.26사태 때, 김재규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곳.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안가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사라졌다.
대통령 취임 직후 “한마디로 여자들하고 노는 집”.
안가는 청와대 인근., 궁정동 삼청동 청운동 등에 12개 동.
궁정동 6 (1만2000㎡), 청운동 3 (4000㎡), 삼청동 3 (2만㎡)
이 밖에 "
구기동과 한남동에도 안가가 있었다."는 말도 있다.
안가가 세상에 공개된 시기는 1993년 철거 직전이었다.
궁정동 안가의 영빈관, 한국관 등 두 곳이 당시 공개되었다.
이탈리아제 소파, 대형 샹들리에, 최고급 양탄자 등 화려한 장식
영빈관 1층은 50여명이 앉을 만한 온돌방이 있었고,
2층에는 고급 침대가 자리한 침실이 있었고 방 안에는
국내 주요 기관과 해외연결이 가능한 핫라인 전화 설치.
현재, 일부 안가는 비서실장,
헌법재판소장 공관으로 사용.
.
궁정동(宮井洞)의 안가 터.
현재, 무궁화 동산으로 변모.
무궁화꽃 - 심수봉 작사/작곡.
1. 이 몸이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
내 아이를 지켜 주소서.
.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오거든.
.
강인한 꽃
밝고 맑은
무궁화를 보여주렴.
.
무궁화 꽃이 피는 건
이 말을 전하려 핀단다.
.
"참으면 이긴다." "목숨을 버리면
얻는다."
"내일은 등불이 된다." "무궁화가 핀단다."
2.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
.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
.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
.
몸은 비록 묻혔으나
나랄 위해 눈을 못감고
무궁화
꽃으로 피었네.
.
이 말을 전하려 피었네.
.
"포기하면 안된다." "눈물없인 피지 않는다."
"의지다." "하면 된다." "나의 뒤를 부탁한다."
...............무궁화 동산..............
옛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터.
현재 시민휴식공원이며 이곳은 본래
청와대 구내로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
1993년 청와대 앞길 개방 이후
시민공원으로 조성된.,무궁화동산.
태극무늬로 무궁화를 심었고, 중앙에
궁정동을 상징하는 우물 정(井)자 분수대
주변에 자연석으로 성곽을 만들고
240m 산책로 주위에는 화단을 조성.
화단에는 야생화 7,700그루를 심었다.
무궁화와 소나무·느티나무 등
수목 13종 1,500여 그루를 식재
인근 주민들의 휴식터로도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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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연산군 때부터
박정희 대통령 시절까지
군사보호지역.,구기동 일대.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이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 경리청계' 속.
1867년 상평방(常平坊) 경리청계(經理廳契)로 소속 변경.
1894년 갑오개혁 행정구역 개편 때.,구기동, 응암동, 옥정평.
1914년 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경성부 은평면 구기동,
응암동, 옥정평이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통폐합.
1949년 8월 13일 서대문구(은평출장소 관할) 에 편입되었다.
1950년 구기리에서 구기동으로 명칭을 변경
1955년 4월 18일, 행정동제 실시로.,평창동 관할
1965년 5월 은평출장소 관할에서 서대문구 관할 변경
1975년 10월 1일, 종로구 관할로 편입
구기동 남부를 진흥로가 가로지르며,
구기터널을 통해 불광동으로 연결이 되며.
반대편은 신영삼거리 통해 세검정길과 연결된다.
....................문화재.....................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불여래좌상(보물 215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보물 1000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사적 228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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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 정상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비봉(碑峰)
그 아래에는.,'조선시대 궁궐사찰' 승가사(僧伽寺).
승가사 경내에서 108 계단 위로.,마애석불여래좌상.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폐사찰 화.
756년(경덕왕 15) 창건된 이후 몇차례 수난.
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로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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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사 계곡 아래.,석조승가대사상(보물 1000호),
그곳 등산로 폐쇄 후, 찔레 덤불 속에 방치된.,보물.
고려시대 유물.,마애석불여래좌상 & 석조승가대사상.
두 보물이 멀리 동떨어져 위치한 것으로 보아
고려 때 승가사는 오늘날보다 규모가 더 컸던듯.
고려시대 승가사계곡은 절골을 이뤘던듯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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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능선~사모바위 ~승가봉 ~ 문수봉.
문수봉은 "문수보살"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옛부터 그곳에 올라 기원하면.,"아들을 낳는다."
문수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망명 직전 들렀다.'던 사찰.
'문수사에서 백일기도로 이승만 대통령을 낳았다.'는.,모친.
숙종 때 축성한 북한산성 '대남문 구간 담당 승병이 주둔한 사찰.
일제때 승병제도 폐지로 인해 방치되었던.,문수사.
그후, 아들을 낳기 원하는 여인들에게.,백일 기도처.
오늘날, '문수보살' 성지(聖地)로 알려진 비구니 사찰.
문수봉 정상 동쪽.,촛대바위 아래 두꺼비바위.
'비구니사찰' 문수사 곁 대남문 건너편.,보현봉.
보현봉은 조선 도읍 성지로., 보신각(종각)을 상징.
종각에 설치된 보신각 종은
보현봉 형태를 모방해.,주조.
보현봉을 성지로 여긴.,조선 초.
.
조선 초, 태양관측소 역활을 했던.,보현봉.
조선시대 보현봉 아래 평창 인근마을.,"평창굴".
'고려 ~조선' 말까지 무속이 성행한.,"평창굴장안".
"장안"이란 나라의 도읍지를 일컫는.,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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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전부터 자연부락.,구기동의 옛지명들.
가늘굴, 먹정굴, 문수동, 매박굴, 독박굴, 구텃굴 등.
굴(堀)은 땅이나 바위가 안으로 깊숙히 패어 들어간 곳.
조선 말, 문수보살 무속사상이 성행했던 곳일까?
조선 말, 지리산 백무동을 능가했던, 인왕산 무당촌.
8도무당들이 한양 인왕산 일대로 몰려들었던.,조선시대.
'조선시대 폐불정책으로 인해
폐사찰들이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문수보살 무속신앙의 진원지가 된걸까?'
'그무렵, 페사찰 지역 곳곳에 들어선
자연 무속촌의 옛터 지명들이 아닐까?'
.
가늘고 길게 들어간 골에 있는 마을.,가는굴,
검은 바위가 있어 박쥐가 많았던 마을.,먹정굴
문수봉과 보현봉 사이 문수사 인근마을.,문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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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 북쪽 아래.,암봉(매바위)계곡 마을.,매박굴,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 일대의 계곡마을.,독박굴.
'구기동 ~비봉~ 대남문 등산로 계곡마을.,구텃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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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때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한 탕춘대성.
연산군 때, 민가 철거 후 사냥터, 연회를 베풀던.,탕춘대.
오늘날, 북한산 대남문, 비봉능선, 문수봉 등 등산로 입구.
구텃골은 인근 평창동과 아울러,
오늘날, '명사들의 마을'.,구기동.
독박굴은 1623년 '인조반정 공신' 원두표 장군과 관련된 지명.
그무렵에는 역병(장티프스) 환자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독박굴.
인조반정 모의 때 독박굴의 비밀 아지트는 어디쯤 있었던 것일까?
양지바른 장독대에 얹혀있는 독 처럼
독 형태 암봉이 유난히 많은 지역이.,독박골.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에서 바라보면.,실감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에 가까운 산세'가 수리봉.
정상 암봉이 (독)수리를 닮아.,"매봉" 또는 "수리봉".
그 암봉 전체가 "독" 형태로 치솟은 산세라서.,"독바위".
'산모(産母)의 유방 같다.' 하여.,"젖가슴봉"
젖이 불어 터질듯 탐스럽게 치솟아.,"유방봉".
젖꼭지 형태가 "쪽두리 같다." 하여.,"쪽두리봉."
전국 어디나, 쪽두리봉 지명은 위험한 암봉.
첫날밤 새색시 쪽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쪽두리를 만졌다면, 책임져야 하는 몽골 풍습.
그리하여, 쪽두리는 원나라 풍습으로
첫날밤 새색씨 입장에서는 정절의 상징.
만지고 책임지지 않는다면, 사둔 간 전쟁.
새신랑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을 때까지
신부 측 친정 부족들은.,결사항전 선전포고.
책임을 못진다면, 아예 만지지 말아야 할.,쪽두리.
새색씨 쪽두리는 원나라 첫날밤 혼례 풍습으로
신부 부족과 신랑 부족 간 결합을 상징하는.,징표.
신부의 첫날밤 쪽두리는 그 가문을 상징하는 자존심.
수리봉 암장으로 이어지는 무당골.,끝자락.
계곡 사이 암봉이라 등산객 발길이 뜸한 바위길.
수리봉 암장을 찾는 클라이머들이 간혹 눈에 보인다.
아이길, 형길, 엄마길, 아빠길, 첩길 등.
주로, 가족 호칭으로 명명된.,수리봉 암장.
"아빠길"이 난이도 높지만 "첩길"이 흥미롭다.
"아빠길" 등에 매달리는듯 올라가야 하는.,바위길
죽는 한이 있어도 매달려야만 오를 수 있는.,"첩길"
가족길 건너편에 비봉을 바라보는 위치에.,"진달래길"
"진달래길" 아래로 보이는 계곡이.,무당골.
무당골을 오르는 바위 틈마다.,굿판 흔적들.
굴 틈새마다 무당이 집을 짓고 살았던 흔적들.
그 정상부에 전망 좋은.,마당바위와 집터 흔적들.
'혹, 원두표장군 비밀 아지트 아닐까?'
사방이 암릉으로 애워싸여 있는 천혜의 요소.
서대문, 불광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천연적인 요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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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둥이
수리봉으로 오르다보면, 무당골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많다.
수리봉 ~향로봉(삼지봉) ~ 관암 ~ 비봉.
불광(佛光)은 죽음을 뜻하는.,불교 용어.
(독)수리는 시체를 뜯어먹고 사는.,맹금류.
향로(香爐)에서 비롯된 지명.,향로봉(香爐峰).
'연신내~ 연서시장~불광사~향로봉' 등산로.
'향로봉의 길목' 소나무 숲 아래 있는.,부침바위.
부침바위 지나 향로봉 안부에 있었다는.,향림사.
이곳 인근이 국사당 & 화장터 였음을 대변해준다.
"부침바위에 돌을 문질러 붙으면 소원이 성취된다."
"부침바위에 나이만큼 돌을 문지르면, 아들을 낳는다."
"부침바위에 치성드리면,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무사귀환."
이곳에서 비봉 능선을 바라보면 관암이 보인다.
관을 뜻하는 지명일까? 선비의 갓을 뜻하는걸까?
막상 그곳에 도달하면, 넓은 마당바위가 있는 쉼터.
'향림사터' 향로봉 아래., 소나무숲.
'삼지봉~관암~ 비봉' 능선 아래.,응봉.
"북한산의 용아장성"이라고 불리우는.,암릉.
비봉능선에서 첫번째 난관지대 관문.,향로봉.
향로봉 정상까지 오르는 바위길들은 모두 절벽.
바위길에 서툰 등산객들에겐 조난사고 다발지역.
그곳 중턱에서 오도가도 못하며 "살려달라." 아우성.
바라만 보기가 너무 안타까워
가까이 다가가서 구해주려고 하면
"가족에게 유언부터 전해줘요." 부탁.
막상, 무사히 오르고 나면
묘한 성취감마저 느끼는듯..
시야가 탁트인 쉼터.,마당바위.
"내가 살아 있다니.,"
"꿈인가? 생시인가?"
향로봉을 오르다가 한번 겁먹으면
6개월은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곁에서 자는 아내까지 깨워가며 잠꼬대.
"여보! 나 살아 있어요?"
향로봉 정상에 오르고 나면,
간혹 인천 앞바다까지도 보인다.
비온 후, 가끔 개성 송악산도 보인다.
향로봉은 "삼지(三指)봉"이라고도 불리운다.
三 손가락 처럼, 3줄기의 암맥을 품은.,삼지봉.
좌청룡 수리봉, 중앙 인왕산(仁王山), 우백호 불광산.
특히, 수리봉 계곡' 바위틈에는 무당굴 흔적들
조선시대 무당은 미래의 길흉을 점 치는 예언자.
굿은 물론 병을 치료하는 의술인 역활도 겸한.,무당.
수리봉은 정상에는 맹금류 '수리.'형태의 바위
수리봉은 '수리' 형태 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여인의 탐스러운 젖을 닮아 "유방봉"이라고도 한다.
수리봉 둘레 곳곳마다 널린 굿판, 제수 음식들.
수리봉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산신제 명소이다.
오늘날까지 무속신앙 옛풍습이 남아있는.,무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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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남산의 무신당'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 옆으로 이전해 왔기에
그로부터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된 홍제동
그 주변 일대에 많은 무신당이 생겨 굿이 성행했다.
무당골은 구기터널 불광동 방향 도로변 약수터 건너편.
그곳 진입로는 관리공단 울타리로 막혀 일부만.,출입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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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봉(암장 가족길)으로 가는 길.,"무당골".
아이가 태어나면 으례히 행하는 백일, 돌 잔치는
아이를 지켜달라고 삼신을 섬기는 우리나라 풍습.
아이가 자라며 부정 타지 않고 살을 당하지 않도록
백설기, 수수팥떡, 인절미 등을 먹여 악귀를 쫓아내길
빌고 부모의 생신, 회갑,칠순 때도 삼신을 섬기던 음식.
처음 수확한 곡식을 농신, 곡물 신에게 바치고
태양신이자 상업 신이자 의술 신 <신농>을 섬겼지만
"신농은 단장초 독으로 장에 탈이나서 죽었다."고 한다.
자신이 의지하던 약에 의해
오히려 죽임을 당했던.,신농.
'신라 왕' 차차웅은 사직단을 세워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냈고,
납일(동지후 3째미일)에는 각 가정에서도 사당에 제사를 지내
태양신이자 농신을 섬겼는데 신라신이 왜로 건너간.," 스사노오."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단군>.
일본 우두천황이 되어 농업기술을 전파.
오늘날, 일본 태양신의 동생으로 불린다.
오늘날, 일본 여신으로 알려진.,<천조대신>.
일본에서 태양신 무녀를 상징하는 무당의 뿌리.
율려 연주로 만물을 탄생시켰다는 창조여신.,"마고."
음악을 미화해 환각 파티, 윤간으로 기형아 등을 양산.
여인을 누드로 만들어 눈요기 감으로 한.,여신의 창조주.
장례 때 무덤에 악귀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무덤터를 다지는 달구꾼의 달구질과 곡소리.
곤륜산 옥황상제가 넋이 거두기를 바라는.,풍습.
'곤륜산 호랑이 모습을 한.,여신 "서왕모"
천도 복숭아로 불로불사 몸을 만들어 준다.'
달구꾼들은 환웅이 천제를 지낼 때부터 풍물패
"산신 서왕모를 즐겁게 해준다."는 악기.,<장고> <징>.
쇠소리로 귀신을 불러 <피리>로 슬픈신과 영혼을 달랬다.
<태평소>는 신을 즐겁게해 신을 부른다는 악기.
<꽹과리>는 타악기와 함께 굿판 흥을 돋구는 악기
<소라>는 신을 부르는 굿당을 엄숙하게 해주는 악기.
<북>은 전쟁터 승전이 기쁘고 즐거울때 사용.
<갱정>은 칠성 산신령들을 축원 위로하는 악기,
<경쇠>는 부정을 풀어낼때 사용하는 제례용 악기.
매춘을 일삼는 <사당패>, 남색을 일삼는 <남사당패>
<풍물패>는 곤륜산 서왕모를 기쁘게 해주는 굿패거리.
<서왕모>는 액운과 질병의 신을 관장
"재앙과 질병을 일으키는 별을 다스리고
역병신의 단속을 주관한다."는., 여신이다.
신라 건국신화에서 선도성모를 상징하는 복숭아.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낳았다하여 복숭아를 신성시.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까지 도화녀로 섬긴.,신라시대.
신라시대 진지대왕과 도화녀 사이에 비형
"귀신들이 무서워할 만큼 잘 다스렸다."는데,
귀신들에게 도화녀와 복숭아는.,피하고 픈 존재.
하여, 집에 귀신들이 들지 못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복숭아 나무를 섬겼다.
죽은이 넋을 천도하기 위해 오구굿을 하고,
산사람도 극락갈 때 편히 가라고.,산오구굿
오구굿 뿌리는 대관령 여서낭.,정씨처녀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한맺힌 처녀귀신
비명횡액, 흉살, 구금, 송사를 일으키는 재살.
무당골은 예나 지금이나
으시시한 느낌이 드는 곳.
비봉 능선에 올라서면 구기동이 한눈에 보인다.
'비봉능선 정상' 문수봉과 보현봉 사이 계곡.,문수동.
비봉 능선은 좌우로 은밀한 계곡들을 수없이 품고 있다.
심지어, 비봉 정상에서부터 구기동'까지
암릉 바위길에 숨겨진.,굴곡(屈曲) 협곡도 많다.
가시덤불 속.,구기리 마애석불여래좌상.(보물 215호)
비봉에서 100m 슬랩이 빧어내린.,바위길 끝.
일반 등산객이 접근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곳.
혹시, 이 일대가 '구기동의 유래'인 구텃굴 아닐까?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사적 228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보물 1000호),
구기리 마애석불여래좌상.(보물 215호)
사적과 보물을 모두 품고있는.,구텃굴.
그 아래로 넓은 휴식처 공터 옆.,김신조굴.
김신조가 마지막까지 투항하다가 붙잡힌 곳.
그 아래로 개울을 따라
구기동계곡으로 이어지고
그 좌우로 몇몇 단독 주택가.
그 아래로 내려오면.,청운양로원
그 아래로 더 내려오면.,이북5도청.
'이북오도청 ~승가사' 승용차 전용도로.
그 길에 가리워져 잊혀져가는 구텃골 유래.
비봉 능선 동쪽으로 흘러내린 골짜기.,구텃골.
구텃골은 승가사, 위험한 암릉길. 자연보호 구역
중간 길목마다 등산로가 끊긴 출입제한 통제구역들.
구텃골 지명의 유래나 얽힌 역사가 끊긴 점이 아쉽다.
비봉 정상에서부터 구기동까지
암봉으로 이어진 바위길도 있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눈길을 끈다.
승가사 도로 아래로 금줄을 쳐 놓아
출입통제구역이 된., 숨겨진 협곡 속에 폭포들.
누드 사진작가들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비경지대.
암릉 바위길 아래로는
높이 약 50m 가량의 폭포와
크고 작은 폭포들도 연이어진 협곡.
여근곡을 연상케하는 비경.
'폭포지대' 비경지 끝지점이
북한산 관리공단.,구기동 분소.
그곳 비경지를 빠져나오면
다시 태어난 느낌이 드는 곳.
.........................
.........................
비봉 동쪽 구텃골은 구기동까지
유서 깊은 궁궐사찰 승가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암자와 비구니 사찰들이 있다.
구텃골은 북한산 비봉 남쪽 두 용맥 사이에 위치
'북한산의 용아장성' 비봉 능선이 애워싼.,구텃골.
풍수지리 상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명당터이다.
'그 까닭은 '궁궐사찰'인 승가사가
영친왕을 낳게 한.,명당인 때문일까?'
귀인, 순빈(純嬪), 순비(純妃)로 봉해졌던.,엄상궁
고종은 황후로 세우고 싶어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
원래 평민 신분이라, 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도 때문.
하여, "엄귀비(嚴貴妃)"라 불리웠던.,황귀비.
'이사벨라 비숍'이 ‘투명한 피부에 훤칠한 외모’.,명성황후.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5일 후 불러들여 총애한.,엄상궁.
수라간 음식조차 의심스러웠기에 믿을만한 측근은 엄상궁 뿐.
고종 대신해 위기 대처능력과 충성심을 갖춘.,엄상궁.
황후 바로 아래이자, 후궁 중 가장 높은 직위가.,황귀비.
황후가 없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황후 대우를 받았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들을 낳기 위해
북한산에 산신각까지 짓고 백일기도를 올려
이때 만든 약사불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고 한다.
구한 말, 고종때 민비와 엄상궁 시주로 복원된.,승가사.
엄상궁은 8살에 나인으로 입궐 후, 민비의 총애를 받아
'민비의 몸종'이나 다를바 없는 시위(侍衛)상궁으로 발탁.
민비가 일제에 시해된 후, 고종을 섬겨 귀인에 책봉
1897년 아들 이은(李垠 : 영친왕)을 낳고 1903년 황귀비.
35살 고종보다 3살 아래 32살 늦은 나이에.,성은을 받았다.
1854년 1월5일에 태어난.,엄상궁
민비(1851년생)보다 3살이나 어리고
키 150cm 단신에 뚱뚱하고 못생긴.,얼굴.
그녀가 고종의 침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자
궁궐 내에서는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
'왕의 승은을 입어야만,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관행.'
.
민비조차 믿지 않다가 끝내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늙고 못생겨 고종이 탐낼 까닭이 없다.' 여겼던.,몸종.
민비는 직접 매를 치려고 "형틀을 차리라." 명을 내릴 정도.
'고종이 자신의 몸종을 건드렸다.'는 배신감보다는
'늙고 못생긴 엄상궁에게 남편을 빼앗겼다'.는 속상함.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민비에 의해 궐에서 쫓겨난 엄상궁.
"후궁은 물론 궁녀들 조차 왕 곁에 접근 못하게 하라."
민비가 믿었던 엄상궁에게 밀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보란듯이 치마를 뒤집어 입은 것은.,명성황후에 대한 도전.
그러나, 그것으로 고종과의 인연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1895년 10월 '민비시해사건' 5일 후
엄상궁은 다시 궁궐로 돌아와 고종의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엄상궁은 궐에서 민비에게 쫓겨난 10년간,
사가(私家)에서 쥐죽은듯 숨죽이고 지냈다지만
지난 10년간 궁궐 밖에서 은밀히 만났다던.,두 사람.
혹시, 두 사람의 밀회장소는 '이현궁'이 아니었을까?
숙종이 장희빈으로부터 동이를 보호하기 위한.,숙빈궁.
'숙종이 궐밖으로 잠행 할 때마다 몰래 들렀다."던.,숙빈궁.
.
민비 시해 사건 후, 일제가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고종마저 일제에게 살해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때 엄상궁의 기지로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한.,고종.
엄상궁은 자신의 가마에 고종과 세자를 태워
덕수궁 뒤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린.,아관파천.
고종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곧 조선 정부가 이전한 결과.
(그당시 세자가 훗날., 조선 27대왕.,순종.)
(명성황후 아들로., 재위기간은1907~1910.)
(엄상궁이 명성황후 시해 후, 갚은.,마음의 빛.)
'그 덕분에 훗날 그녀의 아들인.,영친왕이
순종의 왕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로부터, 만 1년간 고종은 엄상궁과 더불어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그곳에서 국사를 집행.
친일파 정책을 파기, 친일내각 수반 김홍집을 제거.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의 총애를 받아
임신을 하게된.,엄상궁.
러시아공사관에서 다시 궁궐로 돌아와
엄상궁이 44세에 낳은.,이은(李垠 : 영친왕).
하여, 민비에 이어 엄상궁 시주로 복원된.,승가사.
1906년 4월 진명여학교 설립,
5월 숙명(전신 :명신)여학교 창설
이어, '양정의숙'을 설립했던., 엄상궁.
진명, 숙명 두 학교는 기숙사를 만들어
일체의 비용과 학용품을 학교에서 부담.
궁궐 경축일에는 궁궐에서 정찬을 내렸다.
엄상궁은 그녀 가문의 일가친척 사재까지 모두
구한 말, 나라의 인재 양성을 위해 사회에 환원.
조선시대 구텃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당터.
풍수지리상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구텃골은 비봉 남쪽 두 용맥 사이에 위치.
'북한산의 용아장성' 비봉능선 모두 구텃골.
옥녀가 베틀에 앉아 비단짜는 형국
유명인사를 배출할 터로서 소문난 곳.
정치인,·공직자, 법조인들에게는 명당터.
백사실계곡과 세검정 건너 마주보는.,구텃골.
오늘날, 구기동은 대남문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
등산객 대부분 이곳만 구기동으로 잘못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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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능선을 중심으로
남으로 상명대학교 서울 캠퍼스
북으로 승가봉 ~문수봉~나월봉까지
북서쪽으로 진관사까지가 모두 구기동.
북쪽으로는 진관사계곡
동쪽으로는 구기동 계곡.
남쪽으로는 운문사 계곡
서쪽으로는 불광사 일대
주소 - 서울 종로구 비봉5길 34.
'비봉~상명대학교(서울 캠퍼스)' 사이에.,운문사.
세검정으로 흘러 홍제천과 합류하는 일대.,"가는굴."
불광산을 좌우로 품어안고 가늘고 길게 흐르는.,가는굴.
문수봉과 보현봉 사이 계곡.,"문수동".
'승가사 ~ 이북오도청' 골 일대.,"구텃골."
불광산을 독박처럼 감싸고 흐르는.,"독박골".
'독에 뜬 박' 둘레처럼 가는 불광천.,"가는굴".
오늘날 도로 포장에 묻혀 옛모습을 볼 수 없다.
그외 "먹정굴" "매박굴" 등으로 불리웠던.,구기동.
먹정굴은 '나월봉 안부 ~ 진관사계곡' 일대 구기동.
매박굴은 비봉 아래 위치한 매(응)봉 & 수리봉 계곡.
비봉 정상에는 통일신라 24대 진흥왕이 세운.,순수비 터.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 남하했고,
백제 26대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잃어버린 한강 유역과 북한산을 회복하는데 성공.
하지만,
2년 뒤에
통일신라에게
그 땅을 빼앗겼다.
통일신라 진흥왕(眞興王)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승리감에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었던 한강 하류 일대와 동해안을 따라
함경남도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상징물.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순수비(巡狩碑)
흔히, '창녕비.·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로 부른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서울 종로구 구기동.,비봉.
함남 함흥군 하기면., 황초령,
함남 이원군 동면 마운령에서 각각 발견
이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존재가 알려진 창녕비를 제외한
3 순수비는 조선시대 '금석학' 효시가 된 문화재이자 유물
특히, 비봉의 순수비는 '청나라 유학파' 추사 김정희가 판독.
조선 말, 대원군에게 서예, 사군자를 가르치며
승가사 복원 준공식에 참석해 경판 글씨를 남기고
잠시 승가사에 머물며, 진흥왕 순수비를 판독한.,추사.
그전까지는 조선 개국 초, 한양도읍 천도할 당시
무학대사가 세운 비문이거나, '신라 말~ 고려 초'
도선국사가 세운 비문으로 설화와 전설이 전해온다.
무학대사 눈앞에 홀연히 나타난.,도선국사.
"미련한 무학아! 이제야 여기에 왔느냐?
네가 찾는 한양 도읍지는 이곳이 아니다.
여기서 좀 더 오르면, 사모바위가 있느니라."
도선국사가 가르킨 곳으로 무학대사가 가보니
"도읍 궁궐터가 한눈에 들어왔다."는.,사모바위.
그리하여, 한양 도읍 신도시 건설은 사모바위 형태.
오늘날, 진흥왕 순수비는 최근 들어 글자 판독 등에서
진전을 보지 못하면서 연구도 답보상태를 머물러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 풍화작용에 깎여 비문 판독이 어려운 탓.
'국보 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문화재청은 복제비를 북한산 비봉(556m) 정상에 다시 세웠다.
사실, 561년(진흥왕 22) 건립된 창녕비를 제외하고
568년(진흥왕 29) 전후 세운 것으로 보이는.,3 순수비.
북한산비는 555년 건립설도 있으며 장방형에 길이 150㎝
진흥왕이 힘들게 개척했던 군사기지를
후퇴 시점에 산 정상 부근에 세운 공통점
하지만, 4 순수비가 어디에서 제작되었고,
누가 비문(碑文)을 지었는지 등은 답보상태.
순수(巡狩)란 원래 '왕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천지산천에 제사지내고, 지방행정 민정시찰.' 뜻말.
경주에서 출발한 진흥왕의 민정시찰 기념비 아닐까?
그렇다면, 경주에서 제작해 옮겨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비문은 왕명으로 거칠부(居柒夫·?~579)가 짓지 않았을까?
진흥왕은 황초령비 마운령비를 세운 568년 10월에
북한산주(한양) 및 동해안 비열홀주(함남 안변).,폐지 후
남천주(경기 이천), 달홀주(강원 고성)로 후퇴하고 있었다.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운 목적은
이곳을 다시 점령할.,고구려, 또는 백제.
그들에게 자신의 족적을 남기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 다시 탈환해
훗날, 삼국통일 위업을 이루려고
스스로 결심을 굳히려했던 것일까?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가야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함경도까지 신라의 영토를 넓히고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은 왕이다.
순수(巡狩)란 왕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을 말한다.
진흥왕은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을
펼쳐나가면서 새롭게 신라의 땅이 된 지역을
돌아본 뒤 그곳이 자국의 영토임을 천명하는
비석을 나라 곳곳에 세웠으니 곧 진흥왕순수비.
현재까지 발견된
진흥왕순수비는 4개.
서울 북한산 비봉., 북한산비,
경상남도 화왕산에 있던 창녕비,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황초령비,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마운령비 등.
어떤 학자들은
단양 적성산성 적성비(赤城碑)
파주 감악산 몰자비(歿字碑)
또한 진흥왕순수비라고 주장.
그런데 진흥왕순수비는
모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의 높고 가파른 산에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1,200년간 잊혀져오다가
조선 말기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에 의해 발견.
추사는 1816년에 비봉과 문수봉 사이
궁궐사찰 승가사(僧伽寺)에 놀러왔다가
우연히 이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당시에는
진흥왕순수비 덮개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비문의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비봉에 올라가 비문 중 68자를 확인하고 그것이
신라진흥왕순수비임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국보 제3호)는
오랜 풍화 작용으로 아래쪽 귀가 떨어져나가고,
추사가 발견했을 당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는
덮개돌도 사라져버렸으며, 한국전쟁 때의 탄흔이
남아 있는 등 이에 대한 보호책이 시급한 상태였다.
그래서 1972년에 경복궁으로 옮겼으며,
다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이전 보호.
비석을 비봉에서 옮길 당시
아랫부분이 철심으로 암반에 연결되어
있어 이전작업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사실 북한산의 최고봉 백운대를 비롯하여
인수봉, 망경봉, 보현봉 등 연봉들이 모두
거대한 화강암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비봉 또한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석이 서 있는 비봉 정상은
아무나 오를 수 없을 만큼이나 가파르다.
그 옛날, 진흥왕이 어떻게 비봉에 올랐는지
신기하기도 하려니와 사람도 빈몸으로 오르기
어려운 비봉에 높이 154㎝ 너비 71㎝ 두께 16㎝의
무거운 비석을 어떻게 옮겨 세웠는지 꽤나 궁금하다.
비에 쓰여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고,
그 내용은 왕이 지방을 방문한 목적과
비를 세우게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비의 건립 연대는 비문에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연호가 없어 여러 학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진흥왕
16년(555년)이나 진흥왕 29년(568년)으로 보고 있다.
전자는 '진흥왕이 16년(555년)에
북한산을 순수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이때 비석을 세웠다는 설.
후자는 북한산비 내용이
568년 세워진 마운령비,
황초령비와 비슷하고 비문의
‘남천군주’를 근거로 삼국사기에
“진흥왕이 29년 10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는 내용과 연계하여
568년 10월 이후에 새워졌을 것이라는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