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사회의 중독행위
시민언론 민들레 / 강 수 돌(고려대 명예교수) 2024.6.6.
- 중독 행위자를 더 중독시키는 동반 중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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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득권 친화적인 보수언론조차 “국민은 권력자의 '비리' 못지않게 '비리 은폐'에 무섭게 분노한다”며 지난 40년간 은폐의 흑역사를 전해 주고 있다. 그렇다. 국민은 분노한다. 비리도 문제지만, 은폐는 더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중독행위 이론’을 떠올린다. 앤 W. 섀프 박사가 <중독조직> 또는 <중독사회>에서 제시한 ‘중독행위’란 마치 알코올 중독자의 생각이나 행동처럼, 본인의 중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현실 부정이나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정보 조작과 은폐를 반복하는 행위 패턴이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하면 타인의 느낌, 생각, 행동까지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섀프 박사에 따르면, 이러한 개인의 중독행위 패턴은 다양한 조직이나 심지어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조직 전체가 고유의 사명에 충실하기보다는 우두머리나 실권자의 눈치를 보며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거짓말, 정보 조작과 은폐, 통제 환상 등의 행위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전형적인 중독 조직!
또, 한 사회 전체가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허구적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가운데, 그 구성원들의 심신이 소진되거나 사회적 불평등과 분열이 강화되며 자원고갈, 생태파괴, 기후위기 등 삶의 위기가 고조됨에도, 마치 그런 문제는 시간이 가면 자동 해결될 것처럼 믿고 따르기도 한다. 전형적인 중독 사회!
- 앤 윌슨 섀프, '중독사회'
새프 박사의 이론에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게 있다. 그것은 개인, 조직, 사회 등 그 어느 경우에도 끈질긴 중독 행위(자) 곁에는 반드시 ‘동반중독자’가 있다는 점이다. 만일 동반중독자가 중독 행위자 곁에서 적극 옹호하고 변호하며 호응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 중독 행위자는 자신의 중독 행위를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동반 중독자가 중독 행위자에게 “항상 잘하고 계십니다” 또는 “누가 뭐래도, 옳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라고 맞장구를 치기에 그 중독 행위는 중단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게 아니오!”라며 비판 또는 저항을 하면, 이들은 ‘입틀막’ 식으로 대응한다. 내부 고발자나 온갖 비판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무시‧귀양), 또는 실제로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투옥‧살해)이 그들의 전형적인 대처법이다. 물론, 매수나 감투 씌우기를 통해 (약간 고급스럽게) ‘존재 변형’을 시키기도 한다. 더욱 ‘폼’ 나게는, ‘협치’의 형식을 빌려서 마치 공동결정과 공동집행을 하는 것처럼 가장하기도 한다.
- 대한민국 권력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속 모든 나라가 중독 조직
이런 이론적 논의를 염두에 두고 비리, 은폐 정권의 모습들을 다시 보면, 대한민국 정부나 검찰은 전형적인 중독 조직의 사례를 보여준다. 또 그 조직의 우두머리나 유력자들은 전형적인 중독행위자의 패턴을 재현한다. .... “채상병 사건 처리과정에 대통령실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정황과 추측을 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가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대통령[실]이) 감히 입을 놀렸”던 모습이 바로 전형적인 중독 행위다. 이렇게 뻔한 거짓말로 거짓과 비리를 덮으려 한 것은 “국민이 개돼지로 보이는 모양”이라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은 개한테도 그렇게는 안 하며, 그렇다 해도 먹히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중독 행위를 하는 개인, 조직, 사회의 모습은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크게 보면, 무한한 이윤 추구를 위해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흡혈귀처럼 부단히 빨아들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중독행위자 아닌가?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낮은 도수의 술에 쾌락을 느끼다가 갈수록 도수 높은 술을 마셔야 일시적이나마 만족하듯,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인간적 필요가 아닌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기에 영원한 불만족, 무한한 허기의 늪에 빠진다. 그 와중에 사람과 자연이 파괴되는 줄도 모르고 무감각, 무능력, 무책임하게 ‘꼼수’만 부리다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만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생태, 심리 등의 복합위기가 바로 그 증거 아닌가?
자본주의 시스템 속의 나라들 역시 중독사회, 중독조직의 모습을 드러낸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은 2017년 6월에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하고 2020년에 공식 탈퇴했다. 도널드 트럼프(공화당) 미국 대통령은 심지어 지구 온난화나 기후위기 같은 ‘팩트’ 자체도 부정했다. “비과학적이고 미국 이익에 반한다”라는 것이 파리협약 탈퇴의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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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피, 부인 아닌 직시와 응답이 ‘책임의 윤리’ 밑바탕
미국 몬태나주 법원이나 한국 헌법재판소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 개인, 조직, 사회나 세계가 중독행위를 벗어나 건강한 회복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전제조건들을 관통하는 것은 ‘책임의 윤리’다. 더 이상 ‘꼼수 정치’가 아닌, ‘책임 정치’가 절실한 까닭이다. 여기서 ‘책임’(responsibility)이란 말의 라틴어 뿌리가 ‘응답’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회피나 부인이 아닌 직시와 응답이 ‘책임의 윤리’를 구현하는 밑바탕이다.
첫째, 현실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들(예, 각종 비리, 사회 불평등, 구조적 폭력과 살인, 기후위기 등)을 부정, 은폐, 왜곡, 조작하지 않고, 사실과 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공개할 것.
둘째, 그 잘못을 저지른 개인과 조직이 상응하는 책임을 지고 합당한 절차를 거쳐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며,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각도의 예방 체계를 구축할 것.
셋째,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긴요한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더 나은 삶’을 공동 목표로 세우고 정보 공유, 열린 대화, 상호 치유, 집단 지성을 통해 꾸준히 ‘시스템 전환’을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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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해결책은 윤 대통령의 개인적 자백이나 반성보다 훨씬 먼 곳에 있다. 왜냐하면 그를 둘러싼 개인들, 조직들, 사회가 여전히 ‘동반중독자’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단호하게 ‘헤어질 결심’이 책임정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동반중독자란 그 부인만 일컫는 게 아님이 자명하다.
출처 : 시민언론 민들레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