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장 눈(雪)....... 운명(運命)의 재회(再會)
-1
①
뜻밖의 대격변이 아닐 수 없었다.
천마봉을 뒤덮는 함성과 난비하는 인영들 속에 갑자기 나타난 이
천이 넘는 무림인들이 바야흐로 수라궁도와 어울려 경천동지의 대
혈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구주친천도 조천명은 하늘을 우러르며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으핫핫핫핫핫...! 천군맹(天群盟)의 형제들이여! 수라궁 놈들을
마음껏 쳐부숴라!"
그들은 바로 천군맹의 고수들이었다.
"이, 이런 낭패가 있나?"
수라혈신 석기량은 이 갑작스런 변화에 기겁을 했으나 사태의 급
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미타불---!"
천지가 진동하는 웅후한 불호성이 다시 천마봉을 뒤흔드는가 싶더
니 이번에는 천마봉 위로 회의승복에 선장(禪杖), 계도(戒刀), 방
편산 등을 든 백 여명의 승려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맨 앞에는 외팔이의 한 노승이 서 있었는데 비스듬히 검상
(劍傷)이 그어진 냉막한 얼굴의 그는 바로 소림의 계도원주인 현
각대사였다.
현광대사가 그를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오! 현각사제......."
현각대사는 냉막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떨쳤다. 그
러자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핏빛의 괴병기인 혈옥척(血玉尺)이 들려
졌는데 그것은 그가 속가시절에 무수한 피를 묻힌 살인병기였다.
현각은 혈옥척을 치켜 올리며 냉랭하게 외쳤다.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을 전개하라!"
백여 명의 승려들은 바로 백팔나한이었다.
"아- 미- 타- 불---!"
백팔 명의 승려는 일제히 사자후가 실린 불호를 외웠고 드디어 천
년소림 최강의 진법인 백팔나한대진이 펼쳐졌다.
무림사상(武林史上) 단 한 번도 와해된 적이 없었던 백팔나한진은
물결처럼 파랑치며 포진했으며 군웅들을 주살하던 지옥칠십이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나한대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위--- 이--- 이--- 잉----!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는 가운데 백팔나한진과 지옥칠십이살
이 마침내 공전절후의 대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현광대사는 쓰러지기 일 보 직전인 군웅들에게 외쳤다.
"아미타불...! 여러분, 이곳은 저들에게 맡기고 어서 탈출합시
다!"
군웅들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며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차앗, 비켜라!"
군웅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수라궁도들을 주살하며 천마봉을 벗어
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수라혈신이 길길이 뛰며 악귀처럼 부르짖
었다.
"막아라!"
그러나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군웅들의 단결된 힘은 삽
시간에 포위망의 일각을 무너뜨렸고 특히 무영종은 군웅들의 선두
에 서서 닥치는 대로 은월도를 휘둘러 수라궁도들을 주살했다.
가히 놀라운 무위였으며 지금까지 그의 손에 쓰러진 자는 이루 헤
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윽고 포위망이 뚫리고 군웅들은 한 덩어리
가 되어 천마봉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라혈신은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수라궁에 한 번 들어온 이상 나갈 생각
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발악은 이제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천마봉 기슭.
군웅들은 모두 탈진해 있었다. 무사히 수라궁의 포위망을 뚫고 나
온 직후라 일시에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더우기 대부분의 군웅들
이 중상을 입은 지라 만일 적진(敵陣)이 아니라면 벌써 쓰러지고
도 남았을 것이다.
휙! 휙! 휙---!
문득 옷자락 나부끼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군웅들 앞에 수십
명의 인물들이 출현했다.
나타난 인물 중 맨 앞에 선 자는 백발의 금의노인(金衣老人)으로
그는 위풍당당한 체격에 정광(正光)이 넘치는 구순 가량의 인물이
었다.
이때 군웅들 틈에서 천산비검옹이 기쁨의 탄성을 터뜨리고 있었
다.
"아니! 주형(朱兄)이 아니시오?"
그제서야 군웅들도 모두 질세라 환성을 질렀다.
"아, 주청산(朱靑山) 노성주(老城主)!"
나타난 백발노인이야말로 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일 성
(一城), 즉 중원무성(中原武城)의 노성주인 중원신군(中原神君)
주청산(朱靑山)이었으며 그를 따르는 사십여 명의 고수들은 모두
중원무성의 핵심고수들이었다.
중원무성 주청산은 군웅들을 향해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추적자들은 우리가 막을 테니 어서 밑으로 내려가시오!"
그 말에 이어 주청산은 손을 흔들었고 여기저기서 속속 오백여 명
의 인영이 나타났다.
군웅들은 그들을 보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백여 명의 인
영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당금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절정고수들이
었기에.
팽천후가 격동하여 말했다.
"오오! 드디어 중원의 힘이 수라궁을 꺾게 되었소."
"마(魔)의 십 일(十日)... 마침내 우리는 승리할 것이오!"
검제 남궁진강도 흥분한 표정이었고 현광대사는 군웅들에게 말했다.
"자, 여러분. 그럼 이곳은 주성주께 맡기고 내려갑시다."
한편 무영종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주청산.......'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중원무성의 노성주인 주청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노인이 바로 나의 외증조부란 말인가?'
무수한 갈등과 격동이 그의 마음 속에서 마구 들끓었다.
'아버님으로 하여금 평생 불행한 삶을 살게 했을 뿐 아니라 결국
죽음으로까지 인도한 분이 바로 저 노인이란 말인가.......'
무영종이 거센 격랑으로 좌초를 겪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위전풍이
전음으로 말했다.
(하후형, 모두들 떠났소. 우리도 어서 내려갑시다.)
무영종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갑자기 모든 것이 허
망한 느낌으로 그의 가슴에 번졌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야지요......."
그의 힘없는 말투에 위전풍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무영종은
다시 한 번 주청산을 응시하더니 한 차례 긴 탄식을 발하고는 몸
을 날렸다.
중원신군 주청산은 그곳을 떠나는 군웅들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휴우....... 오백 인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저들 오십여 명
뿐이란 말인가......."
주청산의 노안에는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 이때 산모퉁이에서 한
채의 가마가 나타났다. 그것은 네 명의 건장한 남의무사가 메고
있는 작고 정교한 가마였는데 가마의 주렴 속에서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주 노선배님, 고수들을 모두 배치시키셨나요?"
주청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鍾里) 소저, 걱정 말게. 이미 천마봉 기슭에는 최소한 이천
명의 정사 각 파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네."
주청산은 말을 마치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가마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종리소저, 무엇 때문에 부친을 피했는가?"
가마 속에서 나직한 한숨이 들려왔다.
"아버님으로 하여금 공연한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
지요."
"음......."
주청산은 침중한 신음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을 바라보
며 말했다.
"아무튼 종리소저의 뛰어난 안배와 지략이 없었다면 무림은 진정
끝장날 뻔 했네."
가마 속에서 겸양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제가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무림 정사 양도의 군웅들을 한꺼번
에 영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주 노선배님이 없었다면 어찌 이
같은 대업을 이루었겠습니까?"
그 말에 주청산의 노안에서 무서운 결의가 번쩍였다.
"종리소저, 이번 기회에 수라궁을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이 어떻겠
나?"
"안 됩니다."
가마 속에서 잔잔한 음성이 들렸다.
"왜냐면 수라궁의 궁주는 이번 혈겁의 진정한 원흉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주청산의 안색이 대변했다.
"진정한 원흉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그는 어떤 자인가?"
"그가 누구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 자는 천혈성(天血星)의 마성
(魔星)을 타고난 자로서 수라궁주는 단지 그가 거느린 오대마성
(五大魔星)중의 일인에 불과합니다."
주청산은 안색이 홱 변했다.
"그럴 수가!“
한편 군웅들은 마침내 천마봉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들은 전신에
기력이라곤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으나 쉬지 않고 달려
해가 서녘으로 질 때에는 천마봉에서 오십여 리나 떨어지게 되었
다.
"휴......."
그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심이 되
었던 때문이었다.
휙! 휙! 휙.......
다시 몇 줄기 인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군웅들은 흠칫 놀라는 표정
을 지었다.
나타난 자들은 다섯 명의 금의무사(金衣武士)들로써 가슴에는 모
두 무(武)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러분. 저희들을 따라 오십시오."
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중년장한이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팽
천후가 의아하여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요?"
중년장한은 정중히 대답했다.
"저희들은 중원무성의 무사들입니다. 성주님의 명령으로 여러분을
위해 마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아!"
군웅들은 안도의 탄성을 발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복장은
중원무성 특유의 것이었고 실제로 군웅들은 모두 중상을 입어 운
신하기가 불편했던 차였다.
"자, 저희를 따라 오십시오."
중년장한의 말에 군웅들은 모두 희색을 띄며 따라 나섰고 잠시 후
산로에 이르자 십여 대의 건장한 말이 이끄는 사두마차(四頭馬車)
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부석에는 각기 두 명씩 금의무사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틀림
없는 중원무성의 무사들이었다.
"오오!"
군웅들은 환성을 발했고 금의청년무사는 정중하게 군웅들에게 말
했다.
"여러분, 어서 마차에 오르십시오. 이미 노성주님의 안배로 비밀
리에 쉴 곳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군웅들은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무림을 군림하는 중원무성답다.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구
나.'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며 차례로 열 대의 마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금의 중년무사는 무영종이 묵묵히 서 있는 것을 보자 정중히 말했
다.
"대협도 오르십시오."
그러나 무영종은 멀리 아스라히 신비로운 구름에 가려있는 천마봉
을 응시하며 침중하게 말했다.
"나는 상처가 대단치 않으니 걱정 마시오."
"그래도......."
중년무사는 한 번 더 권유했다.
"괜찮소. 다른 분이나 호송하시오."
중년무사는 걱정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 보았는데 가까이에서 위전
풍 또한 다른 무사의 권유를 받고는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나도 오르지 않겠소, 상처가 대단치 않소."
소림의 현광과 정혜도 말했다.
"아미타불... 우리들도 남겠소이다."
마침내 군웅들이 모두 마차에 오르자 남은 사람은 무영종을 비롯
하여 위전풍과 그의 아내인 빙혈미인 고설한, 그리고 현광대사와
정혜 등 다섯 사람이었다.
"자, 그럼......."
금의중년무사가 그들에게 포권했다.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신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고 맨 뒤에 출발한 금의 청년무
사는 한 번 더 그들을 바라본 뒤 떠났다.
②
산로에 남게 된 다섯 명은 모두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위전풍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이번 수라궁의 일은 하후형이 아니었다면 큰일날 뻔 했소."
하후성, 즉 무영종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지
금 수라궁주인 수라혈신이 쓴 무공에 대한 풀 수 없는 커다란 의
혹과 외증조부인 주청산의 등장 등으로 머리가 너무 복잡하여 그
어느 것도 깊이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때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그들의 눈에 아스라히 보이는 천마봉 정상이 갑자기 엄청난 대폭
발을 일으키며 하늘 높이 화염과 연기, 그리고 흙덩이를 솟구쳐
낸 것이었다.
꽝--- 콰르르-- 릉---!
어마어마한 대폭발로 수라봉 전체가 허물어질 듯이 흔들렸으며,
그곳에서 오십 리나 떨어진 무영종 일행이 있는 곳까지 지축이 울
렸다.
"아, 아니!"
일행은 대경실색했다. 그때 무영종은 그들에게 다급히 말했다.
"여러분! 여기 기다리십시오, 소생이 다녀오겠습니다."
위전풍도 따라 나섰다.
"하후형, 나도 가겠소!"
그러나 무영종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위형은 부인이나 치료하시오."
그의 몸은 즉시 전광석화처럼 천마봉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광경에 위전풍은 탄성을 발하며 말했다.
"아! 하후형은 정말 기인(奇人)이오. 현 무림에 저런 기인이 있다
는 것은 크나큰 다행이오."
정혜는 미소지으며 부언했다.
"소사숙님은 천고의 기재이십니다. 아마 무림사상 최대의 기인이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위전풍의 안색이 약간 변화를 일으켰다.
'어쩌면 독고황... 그의 상대는 하후형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는 마음이 침중해졌으나 내색치 않고 아내 고설한을 돌아다 보
았다.
"설한, 상처 좀 봅시다."
"네."
고설한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나직히 대답했다.
한편 중원신군 주청산은 군웅들을 보낸 뒤 천마봉에서 내려올 수
라궁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을 협공할 모든 준비가 완
벽하게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천마봉에서는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고 수
라궁도들은 물론 천군맹의 고수들과 소림사의 승려들조차 소식이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가 점차 커다란 의혹과 함께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 어디선가
한 줄기 미풍이 불어왔다.
스스스.......
주청산은 흠칫 놀라며 뭔가 괴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그
바람이 절대 평범한 바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 이것은?'
나직하면서 담담한 음성이 바람결을 타듯 들려왔다.
"허허허... 석기량은 정말 노부를 실망시키는군. 그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될 줄은 몰랐는 걸?"
그러자 잔잔한 늙은이의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그의 능력이 모자란 게 아닙니다. 만약 이번에 한 인물만 없었다
면 그는 충분히 승리했을 것입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무영종(無影宗)이란 자입니다."
바람을 타고 다시 나직한 너털웃음이 들렸다.
"허허허... 그것은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약자를 꺾어 이겨서는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강자(强者)를 꺾는 자 만이 진정한 승
자야."
주청산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도저히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목
소리의 방향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때로는 동쪽에서, 때
로는 반대인 서에서, 그리고 남과 북으로 음성이 이동했기 때문이
었다.
'천하에 이토록 경공이 빠른 자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동시에 두
명이나?'
그는 흰 눈썹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니다, 이것은 경공술이 아니다. 이것은 마도(魔道) 최고의 음
공인 천리회풍전성공(天里廻風傳聲功).......'
놀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주위를 돌아다보던 그는 아연실색을 금
치 못했으니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주위에 있던 백여 명의 고수들
이 모두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럴 수가......."
주청산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 순간 그의 귓전에 예의 음성이 들
려왔다.
"허허허... 자네는 노부를 찾는가?"
휙!
주청산은 몸을 번개같이 돌렸다. 그의 눈 앞에 언제 나타났는지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들은 사십 대의 준수한 청의 중년문
사(中年文士)와 이십칠팔 세 가량의 흑의청년(黑衣靑年)이었다.
흑의청년. 그는 위전풍이 수라궁 안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독고황
(獨孤皇)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주청산이 안색이 변해 외치자 청의의 중년문사가 가볍게 그를 나
무랐다.
"허허허... 말이 좀 거칠군. 천하에서 노부에게 그렇게 거칠게 말
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데?"
주청산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뻗쳤다.
"수라궁의 잡배들이구나. 그렇다면 노부가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
다."
우---- 웅!
그의 소매가 떨쳐진 순간 묵직한 공기의 진동음이 웅후하게 펼쳐
졌고 중년문사의 고요한 눈에는 가벼운 탄성이 빛났다.
"오! 무당(武當)의 실전된 태청강기로군."
그러나 그가 가볍게 손을 젓자 주청산은 자신의 장력이 형체도 없
이 사라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가슴에 무거운 압력을 느꼈다.
"으윽!"
그는 뒤로 세 걸음이나 주르르 밀려났다. 그의 안색은 이미 더 이
상 변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돌변해 있었다.
'이럴 수가? 나의 이 갑자(二甲子) 내공을 이토록 가볍게 막아내
다니.......'
그러자 가마 속에서 한 가닥 옥음(玉音)이 울려 나왔다.
"주 노선배님, 조심하세요. 지금 상대가 쓴 것은 바로 마교(魔敎)
의 유가대법(瑜伽大法)입니다."
그 말에 중년문사는 안색을 가볍게 찌푸리더니 가마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놀랍군. 노부의 일 장에서 그 근원을 찾아내는 인재
(人才)가 있었다니, 더군다나 여인의 몸으로."
그는 옆에 있는 흑의청년, 즉 독고황에게 물었다.
"황(皇). 천하에서 이런 여인은 누구인가?"
독고황의 조용한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있다면 오직 둘뿐입니다."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만사(萬事)의 손녀와 천풍보의 보옥(寶玉)인 종리유향(鍾里有香)
뿐입니다. 종리유향은 바로 귀곡(鬼谷)의 비밀제자이기 때문입니
다."
"아!"
마차 안에서 가벼운 놀람의 탄성이 들렸다.
과연 마차 안의 여인은 바로 절음폐혈증을 앓고 있는 천하제일지
녀 종리유향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귀곡자(鬼谷子)의 제자였다. 그
러나 그 사실은 부친인 종리자허조차 모르는 일이거늘, 독고황이
환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허허... 어쩐지.... 귀곡의 제자였기에 그랬군."
중년문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청산을 향해 물었다.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아느냐?"
주청산은 눈을 크게 떴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중원무성
의 노성주인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자,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허허허... 노부가 무림에서 사라진지 이미 이백 년이 넘었으니
알 리가 없지."
'이백 년!'
주청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노부의 이름은 백리극(百里克)이다."
"백리극!"
주청산은 급기야 커다란 충격을 받으며 급히 반문했다.
"그, 그럼 당신이 바로 이백 년 전의 인물, 그리고 천 년 간의 육
대천마(六大天魔) 중 일 인인 불사지존(不死之尊)이란 말이오?"
"허허허... 그렇네."
주청산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 자가 아직 살아있다니, 그럼 이미 나이만 해도 삼백 세에 가
깝다. 그런데 어찌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이 자
는 불사인(不死人)이라도 된단 말인가?'
불사지존 백리극은 가마 곁으로 걸어가더니 가볍게 가마의 주렴을
걷으려 했다.
가마를 메고 있던 남의 무사들은 이미 나무토막처럼 선 채로 굳어
있었다.
"멈추시오."
주청산이 외치며 쌍장을 날렸다.
"허허,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가?"
백리극은 슬쩍 소매를 저었다.
펑---!
"우욱!"
주청산은 연달아 뒤로 팔 보나 밀려났고 그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
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백리극이 가마의 주렴을 걷자 과연 그 속에는 종리유향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창백하면서 매혹적인 모습이었으며 또한 그
녀는 이 갑작스런 사태에도 태연한 채 평온한 모습이었다.
백리극은 조용히 그녀를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기재다, 기재야. 비록 황에게는 못 미치나 여인으로 치면
천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기재다."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아가야,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종리유향의 창백한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이미 불사지존임을 들었습니다."
"으음, 갈수록 마음에 드는군."
백리극은 감탄을 발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아가야, 너는 노부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으냐?"
그 말에 처음으로 종리유향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아무런 미련없이 고개를 저었고 백리극은 너털웃음을 웃었
다.
"싫다고? 허허허... 좋다, 아가야. 그러나 노부는 네가 그러면 그
럴 수록 더 마음에 드는구나."
백리극이 또다시 슬쩍 손을 젓자 종리유향은 가벼운 신음을 내며
기절했다.
백리극은 몸을 돌려 주청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중원의 힘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코 노부를 당하
지는 못할 것이다. 수라궁은 노부의 마종지문(魔宗之門)중 오 분
지 일의 힘밖에 되지 않는다."
주청산은 넋을 잃고 있었다.
"허허허... 자, 황! 가자."
스스스.......
다시 가벼운 미풍이 불었고 두 사람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
지고 말았다. 가마 속에 있던 종리유향과 함께.......
주청산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에는 온통
허탈한 기색이 깔리기 시작했다.
'불사지존... 불사지존이 나타나다니.......'
천마봉(天魔峯) 정상에 대폭발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엄청난
화염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③
눈이 내렸다.
천지를 온통 뒤덮을 듯이 백설이 난분분(欄紛紛)했다. 이곳은 북
방(北方)의 드넓은 광야(廣野).
눈은 풍요로움과 평화의 상징이다. 포근한 정서를 인간에게 주는
눈.......
기이하지 않은가? 뼈를 에일 듯한 한풍(寒風)에 동반되어 내리는
눈은 심혼(心魂)마저 얼릴 듯이 싸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을 보는 사람들의 감정은 정반대로 포근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었다.
그러나 지금 내리는 이 눈 속에는 지난 반 년 간의 엄청난 음모의
잔재가 섞여 있었다.
수라궁 개파대전(開派大典)이후 전 무림은 치를 떨었다.
무공산 천마봉의 수라궁에 초청되었던 정사 오백 명의 고수들과
그들을 초청했던 사천 명이나 되는 수라궁의 모든 고수들, 또한
개파대전 직후 수라궁으로 달려갔던 중원 정사무림의 오천여 명의
고수들.......
그들은 개파대전 그 날의 해가 서산에 떨어지기도 전에 모두 연기
처럼 실종되고 말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그들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 천마봉 정상에 위치했던 수라궁의 웅장한 건물도 이제
는 단지 잿더미와 폐허로 변해 눈 속에 파묻혀 있을 뿐, 남은 것
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에 모든 무림인들은 망연자실, 너무도 엄청난 이 사실에 모든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누군가 탄식했다.
- 아아! 드디어 무림(武林)에 종말(終末)이 오는구나!
눈발이 차츰 거세어졌다.
휘... 이... 잉!
눈보라가 치고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쓸어 버리듯이 흰 눈이 쏟아
졌다. 세상의 모든 음모를 덮어버릴 듯이 쌓이는 눈, 폭설(暴雪)
이었다.
광야(廣野).
은백의 설지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끝에서 끝으로 보이는 것은 오
직 눈뿐이었다.
이 끝없는 설원을 한 사나이가 걷고 있었다. 그는 백의에 긴 머리
를 허리까지 길게 드리우고 띠로 묶은 절세의 미청년으로 다름아
닌 하후성이었다.
그토록 영민하던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두텁게 앉아 있었으나 담
담하고 깊이를 모를 현기는 여전했다.
그의 어깨와 머리 위에는 벌써 눈이 그친 지 오래이건만 눈이 쌓
여 있었다. 그는 끝없는 설원을 그렇게 걸어왔으며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규칙적으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문득 하후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반 년이 지났다.'
그의 발걸음은 비록 지친 듯 했으나 변함없는 속도와 간격을 유지
하고 있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마차에 실려간 오십 인의 고수들,
그리고 외증조부와 수많은 무림인들....... 그 많은 사람들이 모
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후성의 고요한 눈에는 쓰라린 자책의 빛이 떠올랐다.
'완전히 당했다. 그때 마차를 몰고 왔던 자들은 중원무성의 무사
들이 아니라 이미 수라궁의 인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을 판단하
지 못하고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말았다.'
하후성은 탄식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치고 외증조부님과 수천 명의 군웅들은
또 어떻게 하여 사라졌단 말인가?
수라혈신인가? 아니다. 그는 아니다. 그는 비록 간교한 효웅이지
만 그때는 이미 바닥이 드러나 그럴 여력이 없었다. 분명 누군가
있다. 반드시 누군가 더욱더 무서운 원흉(元兇)이 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무서운 자다. 실로 엄청난 계략을 지닌 자... 아! 대체 그는 누
구인가?'
하후성은 고개를 들었다.
산(山).
그의 눈 앞에 거대한 산의 웅자가 들어왔고 그것은 그가 가는 방
향의 끝에서 마치 세상의 끝처럼 희뿌연 모습으로 막막하게 가로
막고 있었다.
'하란산(賀蘭山).... 결국 여기까지 왔다. 지난 반 년 간 전 중원
을 샅샅이 뒤지며 북상하다 결국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하란산. 웅대한 영산(靈山)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하후성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하란산까지 오게 되었으며 그
것을 바라보는 그의 뇌리에는 그리운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皇).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외롭다. 황.... 언제쯤이나
다시 너를 볼 수 있는가?'
천년고목(千年古木).
사람들이 무병장수를 빌던 거대한 고목나무는 가지마다 눈부신 설
화(雪花)를 피워내며 변함없이 우뚝 서 있었다.
그토록 세월이 흘렀건만 심한 눈보라와 광풍폭우 속에서도 천년고
목은 말없이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고 그 앞에 지금 하
후성이 서 있었다.
그는 만면에 감회 깊은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고목나무를 응시하
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랜만인가?
고목나무에 서린 수많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삼삼히 뇌리에 떠오
르자 하후성은 굳은 얼굴로 고목나무의 한 부분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그 속에 이제는 굳어진 글씨가 나타났다.
<하후성(夏候星).
독고황(獨孤皇).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변치 않는 우정을 위하여.......>
'황.......'
하후성의 눈꼬리가 떨렸다. 그 글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은 벅찬
감동의 물결이 어지럽게 격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
그의 부르짖음이 설원 멀리멀리로 퍼져나갔다.
도화전현성(桃花田縣城).
봄이면 마을 전체에 도화향이 진동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통 눈 속에 파묻혀 고요하기만 한 현성이었다.
장원(莊園)의 지붕에도 마당에도 눈 만 가득 쌓여 있을 뿐 이름도
없는 장원은 텅 비어 있었고 문은 열려 있었다. 그것도 한 쪽 문
이 부서진 채로였다.
하후성은 장원에 당도했다. 바로 자신이 어린 시절 자라왔던 하란
산 기슭의 조용한 마을 도화전현상에 있는 장원, 즉 집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부서진 문을 넘어 들어가는 하후성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회가 얽
혔다.
'내가 자라고... 모든 희노애락이 거쳐 간 곳... 귀소본능(歸巢本
能)인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이곳을 찾아오다니.......'
그의 걸음은 안채로 향해졌다. 잠시 후 그는 안채의 마당에 눈을
이고 있는 두 개의 무덤을 발견했다.
하후성의 안면이 미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는 한동안 무덤을
내려다보다가 서서히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덤을 향해 절을 했다.
'아버님, 할아범.... 성아(星兒)가 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면
모두들 기쁘다던데... 저는 왜 이토록 마음이 메어오는 것일까
요?'
휘--- 잉!
바람이 불었고 희끗희끗한 눈발이 그 속에 섞여 있었다.
툭!
웬일인지 하후성의 머리를 묶었던 띠가 끊어지더니 그 바람에 칠
흑같은 머리칼이 눈보라에 춤을 추며 흩날렸다.
그러나 하후성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언제까지고 그곳에 남아
있을듯 아예 굳어져 버렸다.
설원(雪原).
북방의 설원은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추웠
다. 그곳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그저
끝없이 눈이 덮여 있을 따름이었다.
그 설원을 터벅터벅 걷는 자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하후성은 다시 중원을 향해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등 뒤로 하란
산의 웅자가 그를 배웅하는 듯했다.
그는 최근 반 년 사이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었는데 그것은 중
원에서 이곳까지 수천 리가 넘는 길, 아니 곳곳을 헤매는 일만리
(一萬里)가 넘는 거리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걷는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버린 듯 예외없이
익숙하게 걸었으며 발자국 모양과 간격, 그 속도까지 언제나 일정
했다.
그렇게 걷는 방법 만이 피로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거니와 아마 일 년(一年) 동안을 쉬지 않고 걸으라
해도 그는 걸을 것이었다.
하후성은 불현 듯 걸음을 뚝 멈추었는데 그런 일은 사실 극히 드
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걸음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고개까지
돌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하란산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란산은 영원하다. 하후성, 힘을 내자! 너는 저 산을
닮고자 하지 않았는가? 하후성, 반드시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너에게 주어진 운명을 반드시 타개해야만 한다! 하후성.......'
따각 따각 따각.......
설원의 정적을 깨뜨리며 일정한 속도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설원을 가로지르 듯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한 대의 쌍두
마차(雙頭馬車)가 달려오고 있었다.
마차를 끄는 말은 눈과 같이 흰 백마(白馬)로써 잡털 한 올 섞이
지 않았다. 그런데 마차는 그와 정반대로 검은 흑오목(黑烏木)으
로 만든 것으로 백마가 끄는 검은 마차는 매우 선명한 대조를 느
끼게 해주었다.
하후성은 이미 등 뒤로 들려오는 마차소리를 들었으나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묵묵히 걷고 있었다.
사실상 그는 마차소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의 무심(無心)한 표정으로 입증되었다.
휘... 이... 잉.......
북방에서부터 설원을 할퀴어오며 그의 백의 자락을 찢어낼 듯 펄
럭이게 하는 한풍은 그의 검은 머리칼마저 마구 춤을 추게 했다.
따그닥 따그닥.......
마차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바로 그의 등 뒤에 이르자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마차 안으로부터 한 줄기 부드러운 음성
이 흘러나왔다.
"친구, 어디까지 가시오?"
하후성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으나 마차는 그의 걸음에 맞추
어 느리게 나갔다.
"음, 눈이 더 내릴 듯 한데 이 마차에 오르는 것이 어떻겠소? 가
는 길까지 태워 드리겠소."
그래도 하후성이 묵묵부답 걷기만 하자 마차 안에서 기이한 음성
이 들려왔다.
"친구, 그대의 모습은 무척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구료. 마차에 올
라 얘기나 하면서 가면 여정이 한결 가볍지 않겠소?"
그러나 여전히 하후성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뒤이어 마차가
속력을 약간 더 내더니 그의 옆으로 따라 붙었다.
마차 안으로부터 탄식이 울려 나왔다.
"아! 소성....... 너는 무척이나 변했구나."
그 음성을 듣자 하후성은 돌처럼 그 자리에 굳어지며 안색이 변했
다.
'이... 이... 목소리는?'
④
끼익!
마차도 멈추었고 그 안에서 몹시 다정한 음성이 하후성을 불렀다.
"소성, 마차 안으로 올라와라."
하후성은 극심한 격동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그의 준미한 눈썹 끝
과 눈꼬리가 미미하게 떨었다. 그리고 마차의 휘장이 열리자마자
그는 빨려들 듯 마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마차 안은 마주 보며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을 뿐 매우 조
촐한 구조로 아무런 장식이나 도구도 없었다.
흑의죽립인(黑衣竹立人).
의자에는 흑의를 입고 대나무로 만든 삿갓을 쓴 인물이 조용히 앉
아 있었다.
"소성, 자리에 앉게."
"그... 그대는......."
하후성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오자 흑의죽립인은 머리에 쓰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천하를 한 눈에 굽어보는 패왕(覇王)과도
같이 위풍과 야망이 충만한 청년, 바로 독고황(獨孤皇)이었다.
"황!"
하후성은 격동을 일으키며 부르짖었고 독고황은 그런 그를 바라보
며 만면에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성, 오랜만이다."
"황!"
두 사람은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두 사나이의 가슴에 뜨거운
우정의 불길이 타올랐다.
드디어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정사(正邪)의 최고 기재들
은 다시 만났다. 운명 속에서 만나고 운명 속에서 헤어졌던 두 친
구가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격렬한 우정의 불길 속에서 마주 안은 두 사람은 깊숙히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은 또다른 운명의 변
괴를 전제로 한 서글픈 재회(再會)였다.
마차가 달리는 가운데 하후성과 독고황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뜨거운 우정이 담긴 시선이 줄곧 오가고 있었다.
하후성은 비로소 격동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황! 도대체 그 동안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토록 찾으려 해
도 찾지 못했으니......."
독고황의 준수한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소성. 너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나는 너를 이미 몇 번이나
보았었다."
하후성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독고황은 대답하지 않고 탄식하며 물었다.
"소성. 너는 무엇 때문에 문(文)을 이어가지 않고 무(武)를 택했
느냐? 네가 변함없이 학문(學文)을 익혔다면 우리는 지금쯤......."
그는 웬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더니 음울한 음성으로 물
었다.
"소성,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독고황의 이상한 태도에 하후성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슴이 마구
떨려 왔다.
"황,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
독고황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소성, 내 언젠가 너에게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중원
의 대륙을 반드시 내 손안에 넣겠다고."
독고황은 눈을 번쩍 떴고 그의 고요하던 눈 속에서 강렬한 빛이
발산되었다.
"지금 나는 그것을 실행 중이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떨었고 독고황은 경직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마종지문(魔宗之門)의 문주(門主)다. 수라궁은 바로 마종지
문의 오대세력 중 하나다."
하후성은 충격적인 말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그... 그럴 수가... 그럴 수가......."
독고황은 문득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성,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이 독고황에게 있어서 너는 나의
분신(分身)같은 친구다."
하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래야 할 수도 없
었다.
"소성, 무림을 떠나다오. 너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결코
나를 당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우정어린 충고다. 소성......."
하후성은 그제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이제 알았다, 황....... 네가 바로 오대마성(五大魔星)
을 거느리고 나타난 천혈성(天血星)의 인물이구나."
이번에는 독고황이 말을 하지 않았고 하후성의 물처럼 담백하던
두 눈에는 안개가 뿌옇게 어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하...! 어이가 없구나. 수년 만에 만난 너와 내가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렇듯 정과 사의 양극으로 나눠지다니!"
독고황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소성. 내가 강호에 초출(初出)했을 때... 그때 나는 너에 대한
그리움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너의 이름을 대신 사용했
었다."
"무슨 말이지?"
"지금 네가 쓰는 환영신룡(幻影神龍)이란 명호는 바로 당시의 내
가 퍼뜨린 것이다."
하후성의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나직하게 웃었다.
"후후... 그랬었나? 이제야 환영신룡의 의문이 풀렸군."
독고황의 눈이 점차 빛났다.
"소성. 아니 무영종(無影宗)! 너는 꿈에도 몰랐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자부신군 무영종으로 변신해 수라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너
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기뻐했다."
"아!"
"그러나 너의 무공이 너무나 강하고 또 너의 지혜가 너무도 초절
함에 나는 그때부터 너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는 것
을 느꼈다."
"으음."
"군웅전에 묻어놓았던 오만 근의 화약도 너 하나 때문에 사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의 십만 근 화약도 너 하나 때
문에 알게 모르게 위전풍에게 비밀이 새어나가게 하여 오히려 천
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를 모두 희생시키게 했다."
독고황은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소성. 너는 나의 이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느냐? 네가 만약 조
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무림을 떠나다오. 소성. 제발......."
독고황의 어투와 표정은 절실했고 그에 따라 하후성의 안면은 마
구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실로 오랫 동안 그의 안색은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며 자꾸만 뒤바뀌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하후성의 안색은 평정을 회복하였고 그의 얼굴에는 인생
(人生)의 모든 것을 달관한 자의 기품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하후성은 입을 열어 담담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황. 나는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은 터질 것만 같다. 하지만 황. 용서해다오.
내가 애초부터 무림에 몸을 담지 않았다면 몰라도 한 번 담은 이
상 나에게는 이 무림을 지켜야할 운명(運命)이 부여되어 있다."
그의 음성 또한 절실하기 그지 없었으며 독고황의 안색은 침중하
게 굳어졌다.
"소성. 너의 현재 무공은 천하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강하
다. 그러나 너 혼자의 힘 만으로 마종지문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
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아니, 너는 모른다. 설사 너를 가르킨 소림 삼성승(三星僧)이라
할지라도 마종지문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하후성은 대답을 피해 잠시 침묵한 후 물었다.
"황. 하나만 묻자."
"좋다."
"반 년 전 수라궁에서 탈출한 고수를 마차에 실어 데려간 것은 너
의 계략이었느냐?"
독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럼 정사 사천여 명이 넘는 고수들이 실종된 것도?"
"물론이지."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독고황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들은 모두 안전하다. 그러나 당분간은 무림에 나오지 못한다."
그는 기이한 웃음을 흘려냈다.
"후후... 그들이 제압되어 있는 동안 무림정세는 완전히 마종지문
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독고황이 하후성에게 물었다.
"소성. 너는 나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느냐?"
"모른다."
"그 분은 불사지존(不死之尊)이시다."
하후성은 안색이 돌변해 부르짖었다.
"그... 그가 아직 생존해 있단 말이냐?"
"후후... 물론이다. 그 분뿐만 아니라 그 분의 부인인 벽안마희
(碧眼魔姬)께서도 생존해 계시다."
"믿을 수가 없군!"
"더군다나 나에게는 수라혈신 외에도 네가 아는 오대마성 중에 나
머지 사대마성이 있다. 또한 그밖에도 마종지문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대고수들이 있다."
"아!"
"자, 이래도 네가 마종지문을 상대하겠느냐?"
독고황은 경악하고 있는 하후성을 주시하며 말했다.
"소성. 현재 너의 무공은 나와 비슷하다. 그러나 일 년 안으로 나
는 내가 익힌 스승과 사모의 무공은 물론 천 년 전의 천중극마(天
中極魔)와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또 혈세천존(血世天尊)
등 육대천마와 천축(天竺) 마라혈교(魔羅血敎)를 비롯한 천축 십
팔교(十八敎)의 무공, 그리고 수천 년 간 비전되어 내려온 사도의
백육십 종(百六十種)의 모든 마공을 대성할 것이다."
독고황은 침착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나의 무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강해진다. 그러므로
너는 영원히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하후성은 계속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황......."
그는 마음을 가라 앉히려는 듯 낮게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언젠가 네가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지. 만약 네가 천하의 죄인이
된다면 어찌 하겠느냐고?"
하후성은 당당한 자세로 가슴을 펴 보였다.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나의 마음은 똑같다. 나는 곧 저 하란산처
럼 결코 변치 않을 것이다.
그의 음성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그러나 우정과 대의는 별개다."
독고황의 안색은 일시에 굳어버렸고 하후성은 더욱 냉랭하게 덧붙
였다.
"나는 싸울 것이다. 독고황 그대와, 아니 전 마종지문과......."
독고황은 만면에 격동을 일으켰다.
"소성. 그럼 너는 죽는다."
하후성은 고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히려 죽음이 더 편할 지도 모른다."
"소성. 너는 바보다. 무림을 떠나기만 하면 너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다."
하후성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독고황을 쏘아보았다.
"황, 너라면 지금 모든 것을 버리고 마종지문을 떠날 수 있느냐?"
그 말에 독고황의 짙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것 봐라. 네가 마종지문을 버리지 못하듯 나 또한 무림을 떠나
지 못한다. 이것은 똑같은 이치다."
독고황은 삽시에 안면근육이 마비된 듯 굳어져 버리더니 갑자기
허탈하게 말했다.
"소성. 조금만 더 가면 주산진(朱山鎭)이다."
그의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무림의 일은 무림의 일이고 우리는 우리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
르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너와 실컷 술이나 마시고 싶구나."
하후성 역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다, 황."
따그닥, 따그닥.......
마차는 달렸다. 끝없는 설원(雪原)으로.......
첫댓글 감사랍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