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十二章 陰謀熟透
며칠 전부터 떠돌기 시작한 엄청난 소문으로 인해 강호가 온통 시끌벅적해졌다.
소문.
그것은 바로 강호사대세력(江湖四大勢力)의 하나로 꼽히던 사천당가(四川唐家)가 멸망했다는 것이었다.
─`에이, 그럴 리가…… 뭘 잘못 들었겠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모두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사천당가가 어떤 곳인가?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시무시한 독과 암기로 인해 이미 오래 전부터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해 온 가문이 바로 그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이 천하에 자랑하는 삼대극독(三大極毒)은 그 위력이 끔찍할 뿐만 아니라 해독 방법이 아예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그들과 마주치게 되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실정이었다.
하나 소문은 끊이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더니 결국은 사실로 판명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자기 집이 무너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천당가라 하면 근자에 강호에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온 장본인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들이 멸망했다는 것은 바로 강호의 평화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하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놀란 만한 소문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성(毒聖) 당문제(唐)가 냉면무적(冷面無敵) 철군악(鐵君岳)에게 패했다는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문제라 하면 백 년래 나타난 고수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삼성(三聖)의 하나이며 무림 역사상 독(毒)에 관해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냉면무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당문제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했다.
한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말았다.
─`허, 냉면무적이 정말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군!
사람들은 저마다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냉면무적에 대해 떠들어대느라 여념이 없어, 더욱 더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와 절망을 안겨 주었던 혈풍은 서서히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 *
혈우마검(血雨魔劒) 단소동(段東)은 족히 천 명은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넓은 대전(大殿) 한가운데서 눈을 빛낸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거무스름한 상자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성검자(聖劒子) 서문륭(西門隆)이 담담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상자는 무엇인가?”
서문륭의 물음에 단소동이 고개를 약간 조아리며 공손히 대꾸했다.
“사부께서 서문 숙부께 갖다 드리라 하신 것입니다.”
“내게?”
서문륭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난데없이 상자라니?
비록 서로 호형호제(呼兄呼弟)는 한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 사공기는 절대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서문륭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옆으로 슬쩍 눈짓을 했다.
묵묵히 시립(侍立)해 있던 제서용이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뚜벅뚜벅 상자 앞으로 걸어가 뚜껑을 열었다.
순간,
“으음……”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서문륭과 제서용의 입에서 한꺼번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들이 이토록 놀라는 것일까?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람의 머리였다.
여기저기 피가 엉겨 있어 실로 끔찍해 보이는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서문륭의 얼굴에 일순 기괴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번쩍이는 눈으로 상자 안에 있는 수급과 단소동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수라마존(修羅魔尊)이 성검문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 알았느냐?”
단소동이 여전히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희 사부께서는 진작부터 그가 성검문의 첩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흐음!”
서문륭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수급은 바로 수라마존(修羅魔尊)이라는 전대마인(前代魔人)의 것이었다.
수라마존은 이미 나이가 구십이 넘은 노마(老魔)로, 천마(天魔) 사공기(司空麒)의 심복임과 동시에 제마궁(帝魔宮) 삼대봉공(三大奉公)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사공기를 도와 마도의 부흥에 앞장선 제마궁의 원로(元老)였지만, 사실은 서문륭이 훗날을 대비해 제마궁에 침투시켜 놓은 첩자에 불과했다.
서문륭은 수라마존을 사공기의 측근으로 심어 놓기 위해 오랜 시간과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모든 것이 발각돼 잘려진 머리만 이렇게 그의 앞에 놓여 있게 되었다.
서문륭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어렸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둘째 치더라도, 우선은 사공기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철군악이라는 낮도깨비 같은 놈 때문에 골치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는데, 만약에 사공기가 이것을 문제 삼아 붙들고 늘어진다면 정녕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문륭의 눈빛이 투명하게 변했다.
“네가 수라마존의 수급을 갖고 나타난 것은 무슨 뜻이냐?”
단소동은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서문 숙부께서는 당문이 멸망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다. 나도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긴가민가했지만 곧 당문이 멸망한 것이 어김없는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지…… 한데 그건 왜 묻느냐?”
순간, 단소동이 처음으로 고개를 쳐들고 서문륭을 쳐다보았다.
서문륭은 그의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희미한 적의(敵意)를 읽을 수 있었지만, 의외로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사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태껏 성검문에서 알게 모르게 한 짓을 생각하면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은 때가 때인 만큼 그런 것에 연연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서문륭의 얼굴에 언뜻 희색(喜色)이 떠올랐다.
예상과 달리 사공기는 수라마존이 성검문의 첩자라는 것을 심각할 정도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서문륭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말해 보거라.”
“사부께서 말씀하시길, 이대로 가다가는 제마궁과 성검문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모두 멸망하고 말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울러 그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아닌, 말 그대로의 혈맹(血盟)을 맺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혈맹의 유효 시기는 대정회와 그 추종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입니다.”
서문륭은 안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상대가 먼저 꺼내자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좋다! 내 분명히 말하건대 앞으로는 절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제마궁과 힘을 합쳐 대정회를 치는데 전력을 다하겠다. 너는 내 뜻을 네 사부께 잘 전해 주도록 하거라.”
단소동이 빛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더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소질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음!”
서문륭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단소동은 깊이 허리를 숙인 후 총총히 밖으로 나갔다.
그의 모습이 대전에서 사라지자 서문륭은 두 눈을 기이하게 빛냈다.
이제 바야흐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과거에는 그저 시간을 조금 투자하는 것으로 무림을 손아귀에 움켜쥘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또 실제로도 거의 그렇게 될 뻔했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성검문은 이미 보유하고 있던 전력의 삼분지 이 이상을 잃어버렸고, 그것은 제마궁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당문은 이미 멸망해 버리고 말았다.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절대 그만한 대가를 바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흐음……”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서문륭의 눈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 * *
“그게 정말인가?”
제갈추는 번쩍이는 눈으로 앞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복면을 둘러쓰고 눈만 빠끔히 내놓은 인물이 땅바닥에 바짝 부복한 채 그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번 선은 그 동안 한 번도 가동하지 않고 죽어 있던 것이라 절대 믿을 만합니다.”
“그렇다면 제마궁의 반응은 알아보았나?”
“예! 그들은 이미 성검문을 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지 오래이고 기습 시기는 내달 초닷새라 합니다. 이쪽도 여태껏 한 번도 가동하지 않고 있던 선에서 나온 정보라 틀림없을 겁니다.”
“흐음!”
제갈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성검문과 제마궁이 감정의 골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아옹다옹하고 있다면 대정회로서는 더없이 잘된 일이었다.
단 한 번의 기습으로 그 동안 질질 끌어 왔던 길고도 지루한 싸움을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하나 꿈에서라도 바랄 만큼 기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제갈추는 그리 유쾌한 얼굴이 아니었다.
만약…… 만약 이것이 거짓 정보라면 자신들은 회생불능의 상처를 입고 말 것이다.
아울러 무림은 악인들의 손아귀로 떨어질 테고 그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깊은 산속에서 평생을 지내야 할 것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그 동안 삼성에 대항해 싸워 왔던 모든 사람들이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역사에 씻지 못할 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쪽도 준비를 해야겠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갈추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어둠이 깃든 저녁.
작은 동산 어귀에 위치한 허름한 장원이 따스한 불빛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휘이이잉……
겨울을 재촉하듯 차가운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닥치는 추운 밤이었지만 동산을 병풍처럼 드리운 채 따스한 불빛을 뿜어내고 있는 자그마한 장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없이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장원 한쪽에 위치한 방.
누군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꽉 다물린 입매에 독수리가 비상하는 듯 강렬한 눈썹이 너무도 인상적인 청년.
바로 철군악이 아니던가.
한데 가부좌를 한 채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특이해 보였다.
살며시 감은 두 눈에서는 번쩍이는 신광(神光)이 금방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았고 몸 주위를 떠도는 우윳빛 서기(瑞氣)는 마치 천상(天上)의 신선(神仙)을 보는 것처럼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휘류류류릉!
갑자기 우윳빛 서기가 마구 소용돌이치며 그의 백회혈(百會穴)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방안 가득 떠돌던 우윳빛 서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감겨져 있을 것 같던 철군악의 두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순간,
번쩍!
그의 눈에서 느닷없이 칼날 같은 섬광(閃光)이 번쩍이며 쏘아져 나와 주위를 환하게 비추더니 이내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철군악은 원래의 무심한 눈빛으로 되돌아와 묵묵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사실 철군악은 당문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서도 융천지옥마공에 중독되지 않을까 하고 많은 걱정을 했었다.
하나 감응곡이 호언장담한 대로 삼령신단(三靈神丹)은 너무도 훌륭히 융천지옥마공의 독을 막아 냈다.
비록 독을 완전히 몰아 내기 위해서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덕분에 철군악은 치료 과정에서 옥황기공(玉皇奇功)을 대성(大成)하는 망외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무공이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는 철군악의 얼굴에서 기쁜 빛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신공(神功)을 대성해 내공(內功)이 조금 높아졌고 몸뚱어리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고는 하나 가장 필요하면서도 중요한 검법은 조금도 진전을 보일 기미가 없었다.
답답했다.
시간은 점점 촉박해지고 있는데 무극칠절의 마지막 초식에 대해서는 전혀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으니 철군악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이 정도였나……’
여전히 가부좌를 한 채 앉아 있던 철군악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난생처음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검법은 익혀지지 않았고, 어떤 것으로 치고 부수어도 절대 깨지지 않는 불가능이라는 철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동안 숱한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노력한 끝에 바로 눈앞에 목표를 두게 되었지만, 막상 이루고자 하는 것이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이 너무 힘들어졌다.
너무 힘들고 외로워 이대로 모든 것을 잊고 멀리 떠나 버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철군악은 이내 눈빛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약해져서는 안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면 자신을 믿고 기꺼이 죽음을 택한 철단소와 정의를 위해 산화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절대 약해져서는 안 된다…… 절대!
철군악은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마치 거미줄같이 나 있던 수많은 검상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희미해져 있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철군악의 얼굴이 점점 무표정해지기 시작했다.
사형을 잃고 산속에서 추위와 허기, 그리고 분노를 참으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를 때의 기억을 잊지 않는 한, 그는 절대로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철군악은 느릿한 동작으로 손을 내린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한데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철 공자님! 안에 계세요?”
느닷없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 와 어두컴컴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송난령이었다.
철군악은 가만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삐그덕!
방문이 열리며 화사한 봄꽃처럼 아름다운 송난령의 모습이 보였다.
“어휴…… 도대체 어두운 방에서 혼자 뭐 하고 있어요?”
송난령은 철군악을 보자마자 코를 귀엽게 찡그리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철군악과 입맞춤을 한 이후로 그를 대하는 눈빛이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뭐랄까?
전에는 철군악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약간은 불안해 하는 눈치였었는데 이제는 그 또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한 듯 아주 당당하면서도 명랑한 눈빛이었다.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송난령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소?”
송난령의 얼굴에 함초롬히 웃음이 피어났다.
“조금 전에 사부님께서 오셨는데 떠나시기 전에 꼭 철 공자를 뵙고 싶어 하세요.”
철군악은 가만히 고개를 들고 송난령을 쳐다보았다.
검제(劒帝)가 왜 자신을 보고 싶어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지만, 그녀 또한 영문을 모르는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철군악이 다시 물었다.
“냉 선배는 어디 계시오?”
“제 방에요.”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갑시다.”
한데 그가 막 방문을 닫고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송난령이 살며시 옆으로 다가와서는 팔짱을 끼는 것이 아닌가!
철군악의 무심한 얼굴에 언뜻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는 설마 하니 송난령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순간, 송난령은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볼을 물들이며 옆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야말로 큰마음을 먹고 이렇게 과감(?)한 행동을 한 것인데 철군악이 눈치 없이 눈을 돌리자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든 것이다.
두근두근!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심장이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하나 그녀는 팔을 놓기는커녕 아예 한술 더 떠 철군악의 팔을 바짝 끌어안은 채 걸음을 떼어 놓았다.
철군악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기다시피 한 그녀의 몸을 통해 보드랍고 가냘픈 느낌의 팔과 동체(胴體), 심지어는 젖가슴의 몽클한 촉감까지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철군악은 난생처음 대하는 이상한 느낌에 정신이 다 얼떨떨할 지경이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선남선녀의 사랑은 그렇게 익어 가고 있었다.
철군악은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옆을 쳐다보았다.
눈길을 외면한 채 괜히 딴전을 펴고 있는 송난령의 모습이 들어왔다.
팔짱은 이미 푼 상태였고 두 사람은 간격을 조금 둔 채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철군악은 다시 앞을 보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똑똑똑!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철군악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옆에 있던 송난령이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사부님, 령아(玲兒)예요.”
“음…… 어서 들어오너라.”
철군악과 송난령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냉좌기의 모습이 보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과 온몸 가득 어려 있는 칼날 같은 기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 보였다.
“냉 선배를 뵙니다.”
철군악이 가볍게 허리를 숙이자 냉좌기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오랜만이군.”
그는 잠시 웃음띤 얼굴로 철군악과 송난령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자리를 권했다.
“앉게.”
철군악은 의자에 앉은 후 묵묵히 냉좌기를 쳐다보았다.
순간 냉좌기의 얼굴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표정이 없군.”
그는 말을 마치고는 의미 심장한 눈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철군악과 송난령을 쳐다보았다.
이미 송난령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하나 그와는 달리 송난령은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본 냉좌기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우리 령아가 부끄러움을 다 타는구나!”
순간, 송난령의 얼굴이 샐쭉하게 변했다.
하나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홍조 띤 얼굴로 땅바닥을 쳐다볼 뿐이었다.
노을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또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냉좌기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철군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자네를 이렇게 보고자 한 것은, 특별한 것은 아니고 단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이네.”
철군악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내가 듣기로 자네는 고금십대검법의 하나인 광해삼검(狂海三劒)을 익혔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철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냉좌기가 다시 물었다.
“자네는 고금십대검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철군악은 그가 왜 이런 것을 묻는지 몹시 의아했지만 눈을 빛내며 지체 없이 대꾸했다.
“고금십대검법이란 말 그대로 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열 개의 검법을 일컫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능형검법(凌形劒法)은 이름 그대로 형체의 틀을 벗어나 그 발검(拔劒)이나 운용이 매우 자유롭지만 너무 실전에 치우친 감이 있고, 광해삼검(狂海三劒)은 가장 패도(覇道)적인 검법이기는 하지만 그 오묘함이 떨어지는 맛이 있으며, 번뇌삼검(煩惱三劒)은 변화가 매우 복잡한 데 반해 위력이 조금 떨어지고, 빙염탄사검법(氷焰彈邪劒法)은 극한의 음기(陰氣)를 띤 사검(邪劒)의 정화이며,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관천류(貫天流)의 극치를 이룬 검법으로는 통천삼관(通天三貫)이 제일이고, 가장 화려하고 절도 있는 것으로는 창연칠검(蒼衍七劒)을 들 수 있으며, 무당의 태극혜검(太極慧劒)은 그 오묘함으로 인해 전설의 검예(劒藝)로 알려져 있고, 가장 기괴하면서도 위력적인 검법으로는 마교의 삼절마검(三絶魔劒)을 들 수 있고, 가장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검법은 용우십이검(龍羽十二劒)이라 할 수 있으며, 무량검도(無量劒道)는 모든 검법의 장점을 취해 만들어져 그 위력이나 오묘함은 다른 어떤 것들도 따라올 수 없지만 절대 완성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철군악의 장구한 대답이 끝나자 냉좌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 그렇다네, 자네도 알고 있듯이 고금십대검법은 범인이 평생을 노력해도 그 뜻을 알 수 없을 만큼 익히기가 난해한 반면 여타의 다른 검법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기도 하지…… 나는 운 좋게도 그 중 하나를 익힐 수 있었네.”
철군악은 묵묵히 냉좌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고금십대검법을 익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렇게 느닷없이 자신을 불렀단 말인가?
철군악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오를 즈음, 냉좌기가 다시 말을 꺼냈다.
“자네도 알고 있듯이 이제 얼마 후면 우리는 성검문, 제마궁과 자웅을 겨루어야 하네. 나는 여태껏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자부해 왔지만, 이번 결전을 앞두고는 못내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군 그래. 령아야 자네가 있으니 마음을 놓겠지만, 내가 익힌 검법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으니 잘못해서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천고(千古)의 절예(絶藝)가 아깝게 사장(死藏)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말이네만……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려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말씀하십시오.”
“내가 얻은 검법을 잠시 맡아 두었다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가 그것을 후대(後代)에게 물려주었으면 하네.”
“……!”
철군악은 그제서야 냉좌기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철군악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검법을 전수(傳授)해 주려는 것이다.
철군악은 냉좌기의 눈을 쳐다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입을 열어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음을 냉좌기도, 송난령도 알 수 있었다.
냉좌기는 미소 띤 얼굴로 철군악을 마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익힌 검법은 바로 용우십이검(龍羽十二劒)일세. 자네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이 검법은 그 웅장함과 부드러움이 가히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주 뛰어난 검법이네. 그럼 지금부터 검결(劒訣)을 설명할 테니 잘 듣도록 하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검력시하(劒力始下), 검세시상(劒勢始上)……”
설명은 무려 한 시진이 넘도록 계속되었지만, 철군악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데 열중했다.
시간이 갈수록 철군악은 앞을 가득 메우고 있던 뭔가가 서서히 뚫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빛냈다.
무극칠절(無極七絶)이 가장 필요로 했던 부분, 즉 부드러움을 냉좌기가 익힌 용우십이검이 효과적으로 보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용우십이검을 익힌다고 무극칠절의 마지막 초식을 단번에 깨달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안 들은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뭐랄까……
복잡하게 엉켜 있던 실타래의 끝을 찾았다고나 할까?
냉좌기의 설명은 진작 끝났지만 철군악은 여전히 눈을 빛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눈에서 점점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