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운명(運命)의 소용돌이
(1)
무림맹(武林盟)……
무림맹주의 집무실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볼품없었다.
집무실을 장식하는 가구라고는 책은 별반 꽂혀 있지도 않은 작은 책장과 싸구려 나무로 짠 것 같은 탁자, 그리고 의자 몇 개뿐이었다.
딱!
따악!
이 청아한 소리는 바둑판 위에 돌을 놓는 소리였다.
강호는 하루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판인데, 상황을 종합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할 무림맹에서 바둑돌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다니. 그것도 무림맹주의 집무실에서……
서문화는 의자를 앞뒤로 흔들며 다음 수를 고심하고 있었다.
디룩디룩 백 근이 넘는 육중한 살을 받친 의자는 가여워 보였다. 그가 흔들 때마다 삐걱삐걱! 부서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은 사내는 흰 유생복을 입은 무림맹 총관, 지다성 하을현이었다.
딱!
여인의 손과 같이 하을현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바둑돌을 짚어 천원(天元)에 놓았다.
"으잉!"
서문화는 눈을 번쩍 뜨고 바둑판에 기어 들어갈 듯 허리를 숙이고 방금 놓은 한 점을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갑자기 바둑판이 왜 이 모양이 됐지?"
올곧게 뻗은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하을현은 빙긋 웃었다.
서문화는 골치가 아픈 듯 이맛살을 찡그리고 손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허연 비듬이 풀풀 날렸다.
"대마(大馬) 다리가 부러진 건가?"
하을현은 여유롭게 말을 받았다.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니라 목이 부러진 게지요."
서문화는 우거지상이 되었다.
"뭐……뭐가 부러져? 그럼 대마몰살(大馬沒殺)이라 이건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참……! 이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쳐다봐도 풀리지 않자 가재미눈을 뜨고 하을현을 째려보았다.
"하 총관, 진지하게 묻겠소."
하을현은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대답했다.
"그러시지요."
"나도 바둑이라면 꽤 강하다고 자부해왔소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오. 혹시 뭔가 사악한 꽁수를 쓴 게 아니오?"
하을현은 허허! 웃었다.
"바둑에 무슨 사악함이 있겠습니까? 이런 지경이 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맹주께서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하여 이 몸과 맞둔 게 패착이지요."
서문화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총관의 의견으론 내가 한 수 접어야 한다는 거요?"
"아무래도……."
서문화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두 점 정도 깔면 되겠소?"
하을현은 대답 대신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서문화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 세 개를 폈다.
하을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문화는 다시 선문답을 하듯 손가락 네 개를 폈다.
"설마……?"
하을현은 신중하게 두 손을 다 폈다. 열 개의 손가락.
"너무하시는군. 하 총관……."
서문화는 마치 세상 살 재미를 잃어버린 노인네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물었다.
"헌데 말이오. 하 총관은 나와 겨우 바둑을 한 판 뒀을 뿐인데…… 어찌 열 점 운운하시오?"
"헛허……! 그야……."
서문화는 하을현의 말허리를 잘랐다.
"만약 내가 실력을 숨기고 거짓으로 뒀다면 하 총관은 정말 실수하는 게 아니겠소?"
하을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서문화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방정맞게 웃었다.
"헤헤헤!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현 무림의 국면과 너무 비슷하단 말이야!"
서문화는 바둑판 위로 손을 내밀어 천천히 바둑돌을 쓸어 담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현교는 구파일방 육문오가의 상당수와 결탁하고…… 게다가 황제와 연결하여 엄청난 속도로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지. 그들은 하 총관처럼 감히 장담하고 있어. 누구도 자신들의 적수가 못된다고…… 그들의 눈에 무림맹의 존재가 손톱의 때만큼이나 보이겠어? 우헤헤헤……!"
하을현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맹주의 가벼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맹주는 어떤 사람인가? 천하의 망나니인가? 아니면 나조차도 따를 수 없는 하늘이 낸 천고의 기재인가?'
서문화는 변덕스럽게 웃음을 뚝 그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랫배를 쓰윽 쓰다듬었다.
"으음…… 너무 웃었더니 갑자기 허기가 지는군. 그건 그렇고 저녁 무렵이면 손님이 올 거요."
하을현이 물었다.
"손님이라면……?"
서문화는 볼을 긁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날 죽이러 오는 손님이오."
하을현은 깜짝 놀랐다.
'살수(殺手)?'
서문화는 끝을 알 수 없도록 깊은 눈을 들어 하을현을 응시했다.
"명심하시오! 살기로 가득찬 그의 성정을 억누르지 못하면…… 나와 하 총관, 우리 두 사람은 내일 떠오르는 해를 다신 보지 못할 거요."
서문화는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반면 그의 성정을 누를 수만 있다면 천하대세의 대역전을 이룰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는 것이오."
* * *
휘이이잉……!
승냥이 울음소리처럼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고, 지는 태양은 활활 타오르는 숯불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귀검수 왕소우는 바람을 몰고 태양을 등에 지고 무림맹을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질식할 것 같은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림맹주 서문화……! 대체 이 왕소우를 이용하는 너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냐?'
세상을 저주하며 죽어가던 천서군과 증오에 찬 무몽의 얼굴이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왕소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들이 남긴 모든 말들이 사실이라면 넌 내 손에 죽는다.……!'
무림맹으로 다가가는데 그의 귓속으로 은은한 대금 소리가 파고들었다.
띠디딩…… 띠딩……!
마치 속세를 벗어난 선인이 한가롭게 부르는 노래소리처럼 청아하고 고고한 가락이었다.
왕소우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림맹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급격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이 곡은 금아가 가장 아꼈던 호반야정(湖畔夜情)……!"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과 석양의 붉은 노을이 비치는 아름다운 호수. 호숫가에 늘어선 능수버들 아래 대금을 연주하는 그윽한 금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금아……!"
대금 소리는 잔잔한 시냇물처럼 느린 가락으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사랑하는 님을 만나 싱그러운 사랑을 나누는 듯 부드럽고 달콤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경쾌한 가락은 곧 끊어지고, 어느 틈엔가 연인을 떠나보내는 별리(別離)의 심정을 노래하듯 애달픈 소리로 변했다.
왕소우는 자기도 모르게 처연하고 쓸쓸한 감정이 들었다.
"오오……! 금아…… 진정 너였더냐?"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이 처절한 가락은 바로 절망에 빠진 인간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왕소우의 지금 심정과도 흡사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아내를 잊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금아는 고개를 들어 몹시 쓸쓸한 표정으로 왕소우를 쳐다봤다.
뜨거운 왕소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곧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며 계속 대금을 뜯었다.
디디딩! 디디디……!
왕소우는 이를 악물었다.
'금아는 죽었어.…… 삼 년 전 나의 검 아래서…….'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발작적으로 앙천광소(仰天狂笑)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엄청난 진기가 실린 웃음소리에 금아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띵!
대금 줄이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다.
금아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왕소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가슴이 짓눌려 터질 것 같았다.
왕소우가 말했다.
"넌 내게 있어 허상(虛像)이다…… 그 허상을 쫓아 미쳐버린 나 왕소우는 허깨비보다 못한 존재이고……."
금아는 다소곳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왕소우가 물었다.
"이곳에서 날 기다렸나?"
"……."
"후후……! 서문화…… 그 인간이 이미 내가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건가?"
왕소우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금아를 쳐다보는 눈길이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그래…… 내 정신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넌 금아와 모든 게 비슷해. 허나 그것뿐……."
왕소우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바라보도록 치켜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오금을 박듯 힘을 주어 말했다.
"설사 완벽하게 같다고 해도 넌 금아가 될 수 없어!"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금아의 무릎 위에 올려진 대금을 움켜잡았다.
대금을 드는 순간,
콰득!
줄과 몸체가 그대로 바스러졌다.
금아는 눈을 크게 뜨고 왕소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왕소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놀라는 표정까지도 판에 박았군.…….'
그는 금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너까지 죽일 필요는 없겠지.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금아는 황급히 일어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제발……."
왕소우는 냉혹하게 금아를 내려다보았다.
"비켜라!"
금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부탁이에요…… 제발……!"
순간 왕소우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갈겼다.
쫘악!
금아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고, 힘없이 픽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입술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왕소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이 연극을 준비했는지 안다…… 금아와 비슷한 널 찾기 위해 놈들은 무척이나 고심했을 테지."
그는 고개를 돌려 무림맹의 높은 지붕들을 쳐다봤다.
"몇 달 전 순간적인 감상 때문에 무림맹의 청탁을 받아들였다. 허나 이젠 정리를 할 때야!"
금아는 벌떡 일어나 왕소우의 허리춤을 와락! 껴안으며 매달렸다.
"안돼요……절대로……!"
왕소우는 금아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뒤로 젖혔다.
"으으으……!"
금아는 이빨을 꽉 깨물어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왕소우는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다시 내 앞을 막으면 넌 죽는다!"
그 살벌한 기세에 금아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그녀는 결심한 듯 고개를 쳐들어 왕소우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게 해주세요.…… 절 죽여주세요.……."
왕소우는 피식 웃고는 대뜸 검 자루를 잡았다.
"수 년을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온 마누라도 잔인하게 벤 나다! 너 따위는 개 한 마리 죽이는 정도에 불과해."
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전 여섯 살 어린 나이로 세상에 버려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겪었죠. 어차피 오래 전에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어요."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달라보였다.
금아에게서 벗어나 본래의 그녀 자신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분들은 절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난생 처음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해줬어요……."
왕소우의 얼굴 표정은 그녀의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알 수 없었다.
"그분들의 뜻을 위해 더 이상 헌신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으로 보답하렵니다."
챵!
왕소우의 검이 뽑혀지는 순간 검 끝은 어느새 그녀의 뒷목덜에 닿아 있었다.
"그따위 소리에 내 마음이 흔들릴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예리한 검기에 머리카락이 휘리릭! 잘려서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고개를 내려 금아의 가느다란 목을 내려다보는 순간 왕소우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대체 뭘 봤길래……?
금아의 귀 밑으로 팥알만 한 점 하나가 그의 눈 속에 박혀 있었다.
'저 점은 설마……?'
왕소우는 천일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 딸은 여섯 살의 나이로 기루에 팔려갔네. 딸아이의 특징이 있다면 귀 밑에 점 하나가 있는 것이지……
왕소우는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쳐들었다.
"네 본명이 무엇이냐?"
금아는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이미 오래 전에 잊은 이름……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왕소우가 먼저 말했다.
"연명……? 천연명?"
금아의 얼굴과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반사적으로 왕소우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그……그걸 어떻게……?"
왕소우는 기가 막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이렇게 기막힐 데가……."
(2)
깊고 깊어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峽谷), 난파협(難破峽).
협곡을 끼고 있는 양쪽의 단애(斷崖)가 너무나 높아 태고(太古) 이래 햇볕이 들지 않는다는 계곡이다.
휘우우우우……!
바람은 단애에서 계속 안으로 불었지만 깊은 늪 속에 잠기듯 다시 빠져나오지 못했다.
"흐흠! 정말 재미있어. 저 안은 지독한 습지…… 이런 곳엔 대개 유쾌하지 못한 잡귀들이 많이 웅크리고 있는 법이지. 안 그런가?"
말을 건네면서도 백면귀라의 눈은 협곡 속에 붙박여 있었다.
애시당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석비룡은 중주신검문을 떠난 이후 난파협까지 오는 동안 입을 뗀 적이 없었다.
백면귀라는 석비룡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이봐, 너무 살벌한 분위기 풍기지 말라구.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거 몰라? 가뜩이나 분위기도 뒤숭숭한 판에……."
그때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석비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담할 수 있소?"
"……?"
백면귀라는 석비룡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석비룡은 얼굴을 협곡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곳에 정말 종천로가 있다고 말이오?"
백면귀라는 또 그 얘기냐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 질문은 신에게나 하는 거야. 난 단지 최고의 정보망을 자랑하는 개방에서 현현교의 움직임을 조사하던 중 종천로의 흔적을 여기에서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야."
석비룡의 얼굴은 동요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파랗게 눈을 빛내며 먹이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백면귀라는 쯧쯧 혀를 찼다.
"종천로가 여기서 발견되지 않으면 대신 나라도 때려잡을 기세로군."
그렇지만 그는 석비룡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사 그 모든 과거를 정상적인 상태로 받아들이기엔 충격이 크겠지…….'
하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백면귀라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겨내야 하네! 이겨내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어. 자넨 천하를 위해…… 닥쳐올 혈겁을 막아낼 구심점이 될 사람이니까…….'
석비룡과 백면귀라는 협곡 아래로 내려와 깊숙한 곳으로 조심스럽게 전진해가고 있었다.
백면귀라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협곡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봄날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열기를 느낀 것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 열기란 것은……."
석비룡은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모래밭이었다.
양쪽에 선 단애와 단애 사이에 넓고 길게 놓인 모래밭.
백면귀라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열사의 사막도 아니고 이게 웬 뜨거운 모래밭이야?"
석비룡은 무심하게 말했다.
"철화사(鐵火砂)요."
백면귀라는 그의 말을 확인하듯 되물었다.
"철화사?"
"말 그대로 가공할 열기를 뿜어내는 강철모래요. 물체가 닿으면 수십 배로 열기가 증폭되어 무엇이든 재로 소멸시켜버리는……."
"뭐 그런 것이……?"
백면귀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석비룡을 쳐다봤다.
그가 강호에서 굴러먹은 것도 수십 년, 철화사라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석비룡은 계속 말했다.
"더 무서운 건 철화사 주위에 보이는 풍경이 모두 허상(虛像)이라는 거요. 바로 종천로가 만들어 낸 것이지……."
백면귀라는 석비룡에게 다가서며 빠르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석비룡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종천로가 탄생시킨 아홉 개 환상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옥철사진(地獄鐵砂陣)이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백면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밑에 마른 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모래밭 안으로 휙 던졌다.
그는 입을 쩍 벌렸다.
"이…… 이런……!"
치이익!
나뭇가지는 모래밭에 떨어지기도 전에 불이 붙었고, 모래 위에는 흰 재만 풀풀 날려 떨어졌다.
백면귀라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저길 어떻게 건너지?"
석비룡은 무겁게 말했다.
"걸어서 통과하는 방법 외엔 없소."
상대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성큼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백면귀라는 깜짝 놀라 석비룡의 팔을 잡았다.
"무슨 짓이야?"
그는 석비룡을 범 아가리 속으로 뛰어드는 겁 없는 토끼쯤으로 생각했다.
석비룡은 그에게 팔이 잡힌 채 말했다.
"난 종천로가 만든 아홉 개의 가상공간을 모두 알고 있소. 내 발자국을 똑같이 따라오시오. 실수하면 그 뒤는 책임질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백면귀라는 손에 힘이 빠져 스르르 그의 팔을 놓아주고 말았다.
'제기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꼴이로군.'
그는 투덜거렸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석비룡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석비룡이 디딘 발자국 위에 그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스스스스……!
아래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얼굴 전체가 숯불을 뒤집어쓴 듯 화끈거렸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모래밭이 파도 위에 작은 배처럼 출렁출렁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다.
백면귀라는 다리가 심하게 흔들려 하마터면 석비룡의 발자국을 제대로 따라 밟지 못할 뻔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녔다 하더라도 무용지물(無用之物), 꼼짝없이 염왕 앞으로 끌려가야 할 판이다.
백면귀라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촤아아아!
모래밭 속에서 갑자기 커다란 물체가 솟구쳤다.
크아아아!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울부짖는 그것은 괴수였다. 전설 속에서나 들은 것 같은……
"마……맙소사!"
백면귀라에게는 경악의 연속이었다.
괴수의 머리에는 날카로운 뿔이 달리고 온몸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딱딱한 껍질로 뒤덮여 있었다.
괴수는 크앙! 울부짖더니 작은 눈으로 백면귀라를 보고 육중한 몸을 꿈틀 움직여 천천히 다가왔다.
백면귀라는 우웃! 놀라며 몸을 젖혀 옆으로 피하려고 했다.
그때 석비룡이 돌아서서 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절대 움직이지 마시오! 한 걸음만 물러서도 끝장이오!"
"그……그러면……."
이대로 앉아서 죽으라는 얘기냐고 따지고 싶었다.
크아아아……!
괴수는 거대한 입을 쩍 벌린 채 두 사람을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
"아악!"
백면귀라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두 눈을 꼭 감고 비명을 질렀다.
"이런 젠장할!"
하지만 그는 안전했다.
'지금쯤이면 괴수의 아가리에 걸려 몸이 피투성이가 됐을 텐데…….'
의아하게 고개를 드는데 괴수는 크아아! 울부짖으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석비룡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환상진의 모든 장치는 허상에 불과하오.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절대 다치는 법이 없소."
백면귀라는 얼이 빠져서 말도 안 나왔다. 그저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석비룡은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노야……! 난 당신과 오랜 세월을 함께 했소. 내 직감은 바로 당신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는구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착오였기를 바라고 싶었다.
'노야! 어서…… 모습을 나타내시오. 진정 당신이 현현교의 종천로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소.'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적어도 석비룡이 알건데 이런 환상진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은 노야뿐이다.
'……끝내 거절하신다면 이 몸이 직접 확인할 수밖에…….'
스스스스……!
이글거리는 열기의 모래밭을 지나 한숨을 돌리는 찰나 어디서부턴가 희뿌연 안개가 흘러나와 두 사람 주위를 휘감았다.
백면귀라는 당혹함에 소리를 질렀다.
"이건 또 뭐야?"
그는 석비룡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이 지독한 안개도 환상진에 속한 건가?"
석비룡이 대답을 않자 그는 곧 머쓱해져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석비룡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백면귀라는 그를 따라 멈춰 서서 석비룡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쳐들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하늘 위로 까마득히 솟아오른 수직의 암봉이었다. 암봉을 오르는 길은 오직 돌계단뿐이다.
백면귀라는 으스스한 주위 풍경을 두리번거리며 입으론 연신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정말 기분 나쁜 곳이로군. 그렇지 않나?"
이렇게 물으며 앞을 봤을 때 석비룡의 모습은 벌써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뭐……뭐야? 언제 저렇게 멀어졌어?'
"이봐, 같이 가야지."
이렇게 소리치며 앞으로 몸을 날리려 했을 때 석비룡의 전음이 들려왔다.
'함부로 움직이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오.…….'
백면귀라는 분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젠장할! 여기까지 와서 날 따돌리겠다 이거야?"
석비룡은 벌써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면귀라는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천리무영 석비룡……! 자네 혼자 해결하려는가 본데…… 이건 자네만의 일이 아니야……."
순간 놀랍게도 백면귀라의 몸이 촛농처럼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물이 되어 발아래 땅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스스스스……!
잠시 후 그가 서 있던 자리 위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3)
석비룡의 눈앞에는 스산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잡초가 허리까지 자란 벌판에 폐허와 같은 전각 하나가 서 있었다.
현판에 쓰인 장로원(長老院)이라는 글씨조차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석비룡은 잠시 그 앞에 서 있었다.
과거 그가 현현교의 지하동부 속에서 보았던 건물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똑같았다.
석비룡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중앙의 넓은 원형탁자에는 열 명의 노인들이 압도적인 기도를 발산하며 앉아 있었고 원형탁자 뒤쪽 정면의 벽 앞에는 비어 있는 태사의가 놓여져 있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현현교의 십대장로(十大長老)들……? 허나 역시 백 년 전의 허상(虛像)일 테지…….'
그의 눈길이 비어 있는 태사의에 닿았다.
'저 태사의가 바로 종천로의 자리일 테고…….'
석비룡은 거침없이 석상(石像)처럼 뻣뻣하게 굳은 장로들 사이를 지나 빈 태사의로 걸어갔다.
"노야……! 이제 내 임의대로 환상진의 일부를 해제하겠소."
석비룡은 양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잔뜩 기합을 넣은 뒤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파(破)……!"
스스스……!
석비룡의 몸에서 자욱한 안개가 뿜어져 나왔고, 안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차츰 주변 풍광을 삼켜갔다.
스르르르……!
위엄 있게 앉아 있던 십대 장로의 모습이 허수아비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안개는 태사의를 삼켰다.
안개가 흐려지면서 빈 태사의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석비룡은 두 눈을 부릅떴다.
"노야……!"
과연 태사의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가 그렇게 바라지 않았던 노야가 분명했다.
노야는 무거운 신색으로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돌려 석비룡을 쳐다봤다.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내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거늘……."
석비룡은 땅에 박힌 말뚝처럼 꼼짝하지도 않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듯 눈에 초점을 잃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래도 설마하며 아니길 간절히 염원했건만 결국 노야가 현현교의 태상장로 종천로였구려……."
종천로는 태사의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오래 전에 분열되고 와해된 현현교에…… 대장로란 자리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느냐……."
그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석비룡을 바라봤다.
"내가 전에 너에게 경고한 것을 기억하느냐? 네 뿌리에 집착하는 순간 삶에 일대 혼돈이 시작될 것이고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는 말을……."
석비룡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말해 주시오. 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노야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소."
종천로는 한숨을 크게 몰아쉰 다음 마지못해 말했다.
"더 이상 내게 대답을 기대하지 마라. 전에 어쩔 수 없이 내 입으로 현영이라는 이름을 말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다."
석비룡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도끼날로 후려 패 듯 단숨에 내 뱉었다.
"노야! 내가 이 상황에서 순순히 물러나리라 여기시오?"
종천로는 허허롭게 천정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결코 석비룡에게 뒤지지 않는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난 현영과 약속을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는다!"
석비룡은 계속 종천로를 압박해 들어갔다.
"나는 내 자신의 길을 가려할 뿐이오. 그것에 장애가 된다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소! 그것은…… 노야도 마찬가지요!"
종천로는 침착하게 그의 말을 듣고나서 조용히 말했다.
"어리석은…… 네가 나의 상대가 되리라 생각하느냐?"
"보여주리다!"
석비룡은 주저 없이 성난 사자처럼 몸을 솟구쳤다.
그의 양손이 좌우로 좌악 펼쳐졌다.
파공음도 없이 날아드는 무형의 기운.
"무영권이로군."
종천로는 무표정하게 뒷짐을 진채 좌우로 몸을 흔들며 물러섰다.
스팟! 스팟!
무형의 기운이 그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석비룡은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즉시 환공보를 펼쳐 종천로의 발 앞으로 다가간 다음 빠르게 손을 날렸다.
종천로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많이 강해졌구나."
말을 하며 날렵한 주먹을 어깨 위로 피해냈다.
석비룡은 팔꿈치를 꺾어 손날로 허리를 찔러가며 말했다.
"그건 세월이 노야에게서 등을 돌린 탓이오. 노야는 점점 늙고 약해지지만 난 정 반대요!"
종천로는 발 앞꿈치를 축으로 옆으로 빙글 회전해 피하며 말을 받았다.
"그렇군…… 그 말이 맞아. 세월은 이제 내게 있어 독이 될 뿐이야."
석비룡이 십여 초를 공격하는 동안 줄곧 피하고만 있던 종천로가 갑자기 쌍장을 모아 앞으로 쭉 뻗었다.
"허나 아직 이 종천로의 주름살이 그 정도로 늘지는 않았느니라!"
콰콰콰콰……!
꽈꽝!
격렬한 한 차례의 충돌이 있었고, 석비룡은 뒤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종천로는 끄덕하지 않고 제 자리에 서서 껄껄 웃었다.
"무영비록의 무공을 비롯해 네가 아는 모든 무공은 나에게서 나온 것임을 잊었느냐!"
"잊을 리가 있겠소?"
석비룡은 차갑게 말을 받으며 쌍장을 내쳤다.
콰우우……!
종천로는 깜짝 놀랐다.
"이……이건!"
얼결에 그도 쌍장을 내밀어 맞받아쳤다.
그러나 맞부딪칠 때의 강렬한 파열음도 들리지 않았다.
푸식……!
충돌 순간, 김 빠져나가는 소리를 내며 종천로의 맹렬한 쌍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종천로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실핏줄을 타고 팔 위로 올라오는 짜릿한 한기가 느껴졌다.
쩌저저정!
순식간에 종천로의 상반신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냉기(冷氣)!
종천로의 상반신이 얼음조각처럼 차고 딱딱하게 굳어졌다. 실제로 그의 옷과 피부 위에는 얇은 얼음막이 덮여져 있었다.
모든 것이 얼어버렸다. 눈을 부릅뜰 수도 입을 벌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혀……현빙신공(玄氷神功)……!'
석비룡은 의연하게 우뚝 서서 종천로를 쳐다봤다.
"노야의 가르침대로 난 항상 최후의 발톱을 숨겨왔소. 그리고…… 내가 이겼소! 그것이 설령 노야가 방심한 대가일지라도 말이오."
종천로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문 채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의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아지랑이가 날리며 얼음막이 풀어졌다.
쩌적!
투두둑!
얼음막은 금이 갔고, 급기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종천로의 안색은 해쓱하니 핏기가 가셔 있었다. 그는 후우욱! 숨을 몰아쉬고는 가까스로 말했다.
"어떻게…… 현빙신공을 얻게 되었는지 말해주겠느냐?"
낮고 메마른 음성이었다.
석비룡이 대답했다.
"무영비록을 얻기 이전에 난 이미 현빙신공의 구결을 알고 있었소. 허나 설마하니 노야를 상대로 현빙신공을 처음 펼치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소."
종천로는 잠시 말을 잃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렇구나…… 과연 네 녀석의 말대로 나는 늙었어……!"
석비룡은 종천로를 향한 시선에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부탁이오, 노야……! 노야께선 내게 있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분이오!"
종천로는 두 손을 힘없이 아래로 내리고 조용히 뭔가 생각을 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처음부터 숨긴다고 될 일은 아니었어. 고혼이 된 현영도 이젠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할 터……."
석비룡은 아연 긴장해 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정으로 알기를 바라던 과거사가 이제 모든 베일을 벗게 되는 것이다.
종천로는 한 소절씩 천천히 말을 꺼냈다.
"백 년 전 무림맹과의 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이후 현현교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당연히 좌엽선 교주를 향한 제자들의 충성심은 거의 절대적이었지."
교주 좌엽선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자신의 후계자로 아들인 좌현영을 선택했다.
장로원에선 만장일치로 교주의 뜻을 승인했다.
허나 교주를 제외하고 최고 서열의 고수들인 삼좌존(三座尊)이 모두 그 결정에 불복하면서 일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교주의 동생인 좌숙야는 은근히 차기 교주의 자리를 노리고 있던 터라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장로원과 좌숙야가 충돌하면서 그 와중에 십대장로 중 한 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로원에선 즉각 좌숙야를 비롯한 삼좌존의 처벌을 교주에게 요구했지만 그 요청은 묵살되고 말았다.
그건 결코 형제라는 핏줄 때문은 아니었다. 좌엽선 교주는 아우 좌숙야를 비롯한 삼좌존의 야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지만 결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만큼 현현교에서 차지하는 삼좌존의 위치와 능력은 막강했다. 만약 무리수를 둔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 현현교는 두 동강이 난 채 엄청난 내분에 휘말릴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한 그루 과일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는 일도 다 때가 있는 법……!"
좌엽선은 그 한 마디 말로 자신의 심경을 대변했다.
애초 그는 일단 아들 좌현영을 후계자로 삼아 체제를 정비한 다음 삼좌존의 힘을 서서히 약화시켜 숙청을 할 계획이었다. 좌엽선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암암리에 전해들은 장로원은 묵시적으로 좌숙야의 처벌을 않는 데 동의했다.
허나 삼좌존은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교주가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이미 반란의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독마 순우창은 오직 자신만이 제조할 수 있는 독(毒)을 조금씩 교주 좌엽선의 음식에 넣어 서서히 체내에 축적시키는 일을 담당했고, 단리확은 비천칩의를 개량해서 더욱 크고 강하게 만들어 훗날을 도모했으며, 좌숙야는 교주의 주위에 있는 호법고수들을 포섭하며 자신의 세력을 결집시켜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운명의 그날……
모든 준비를 끝낸 좌숙야는 존각(尊閣)으로 교주를 찾아가 단독면담을 요청한 뒤 암습을 감행했다.
좌엽선 교주는 체내에 축적된 독으로 인해 자신의 본원진기를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종천로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장로들과 함께 존각에 들이닥쳤을 때엔 이미 교주는 사망한 후였다.
그 날 이후 현현교는 둘로 갈라져 무려 일백여 일 동안 대혈전(大血戰)을 벌였다.
"너무나 끔찍했지!"
종천로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바로 지옥(地獄)의 재현(再現)이었어……."
(4)
"그 이후는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현현교는 그렇게 궤멸되었다."
종천로의 얘기는 모두 끝났다.
석비룡은 눈에 강렬한 예기(銳氣)를 쏘아내며 말했다.
"좌현영은 어찌 되었소?"
종천로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놈! 그는 너의 친부(親父)이거늘 어찌 함부로 이름을 부르느냐!"
석비룡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웃었다.
"흐흐흐……! 아직 난 아무것도 인정할 수가 없소. 아무것도……."
그는 자신의 온몸이 썩어 암흑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의지로는 되지 않는 운명이라는 암흑 속에……
종천로는 크게 노해 '근본(根本)을 부정하다니…… 이 돼먹지 않은 놈!'이라고 꾸짖으려다 석비룡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푸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석비룡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꼈던 것이다. 그만큼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많지 않으리라.
"좌현영은 당시 삼좌존에게 극심한 상처를 입었다. 난 현현교에 설치된 기관을 움직여 모든 입구를 봉쇄한 후 그를 데리고 탈출했지."
종천로는 과거의 일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새롭게 하는 것이 못내 괴로웠다.
'모든 것을 잊고 살았으면…….'
이것이 그의 진정한 바램이었다.
"그 후 좌현영은 복수와 현현교의 재건을 위해 혈음신장을 수련해왔다. 그것은 삼좌존과의 또 다른 전쟁이었다. 피차간에 서로를 경계한 나머지 함부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으니까……."
석비룡은 눈을 감고 있었다.
희로애락(喜怒哀樂)……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종천로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좌현영은 팔십 년의 수련 끝에 혈음신장을 십 성까지 수련해냈지……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팔십 년 만에 다시 삼좌존을 찾아내어 무려 삼주야(三晝夜)의 대혈전을 벌였다."
삼주야를 싸웠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무신(武神)과 무신(武神)의 싸움일 것이다.
"그 결과 삼좌존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현영 역시 지나친 내공소모로 인해 탈진한 나머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이르고 말았다. 현영은 그로 인해 내공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다. 그가 너의 모친을 만난 건 바로 그 무렵이었지……."
그 말에 이르자 석비룡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소름끼치는 한기가 눈 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어머님은 선천성 음맥으로 늘 몸이 허약했소. 허나 그러한 음맥의 체질은 혈음신장을 수련하는 자에겐 생명수나 다름없소."
종천로는 부정하지 않았다.
"네 말이 틀림없다!"
석비룡은 입 꼬리에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그는 혈음신장의 완성을 위해 어머님을 선택한 것이 분명하구려."
종천로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노갈을 터뜨렸다.
"닥쳐라! 좌현영은 본래 성격이 강직한 호걸이거늘 어찌 그런 파렴치한 방법을 쓰겠느냐!"
석비룡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지 않은 이상 아무것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표정이었다.
종천로는 혀를 찼다.
"어리석은 놈……! 네 친부를 모욕하지 마라. 그가 그런 방법을 사용했더라면 팔십 년이 아니라 단 팔 년 안에 혈음신장을 완성했을 것이다."
여전히 석비룡의 반응은 냉담했다.
종천로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돌릴 수 있을까 생각하며 계속 말했다.
"네 부친은 비록 백여 세에 이르는 나이에 너의 모친을 만났지만 회수신공(回壽神功)을 연성한 덕분에 청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너의 모친을 깊이 사랑했지만 행복한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석비룡은 독마 순우창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십 년 전 현영, 그놈은 우리 손에 죽었어!
"삼좌존에 의해 현영이 죽고 몇 달이 지난 후…… 네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 이후 난 네 곁을 맴돌며 은밀하게 무공을 전수했지만 삼좌존이 네 존재를 눈치챌까봐 현현교의 무공만은 가르치지 않았다."
석비룡은 이를 악문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혈음신장을 아는 누군가가 등룡왕부를 멸망시켰소. 놈이 누군지 아시오?"
종천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 허나 현현교와 연관된 자인 것은 분명하지."
주위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두 사람의 마음은 스산했다. 복잡한 감정이 새벽의 서릿발처럼 가슴 속에서 하얗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큰 소리라고는 종천로가 얘기 중간중간 터뜨리는 탄식소리뿐이었다.
"좌현영은 현현교의 비극이 자신의 대에서 끝나길 원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나는 걸 보지 못했음을 마지막 순간까지 아쉬워했지."
"크크크! 종천로, 상당히 현영을 미화하는군 그래…… 귀가 간지러울 정도야!"
벽을 타고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
종천로와 석비룡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오른쪽 벽을 쳐다봤다.
그그긍!
벽 한 가운데가 봉긋하게 부풀어 올랐다.
파앙!
끝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으시시한 마기(魔氣)를 풀풀 날리며 들어오는 늙은이. 고목나무가지처럼 바싹 마른 체구에 불같이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노인은 종천로와 석비룡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좌현영이 얼마나 비정하고 냉혹한 인간인지는 과거 현현교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 우리 삼좌존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때문이었어."
노인의 등 뒤로 흑의(黑衣)를 입은 다섯 사람이 들어왔다.
모두 오십여 세 정도로 하나 같이 근골이 단단해 보였으며 두 눈에는 형형한 안광이 빛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들임을 짐작케 했다.
석비룡은 의아한 시선으로 종천로를 쳐다봤다.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종천로는 조용히, 짧게 말했다.
"단리확!"
석비룡은 굳은 얼굴로 노인을 쳐다봤다.
'저 자가 바로 삼좌존 중 한 명으로 비천칩의를 움직이는 단리확이란 말인가?'
노인, 단리확의 전신에 섬뜩한 살기가 발산되었다.
"종천로…… 잘도 지금까지 살아 있었군.…… 좌현영이 죽은 이후 하루도 널 찾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고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로운 걸."
단리확의 눈길이 석비룡에게 옮겨졌다.
"크크크! 그래 저 녀석이 바로 좌현영의 아들이란 말이지? 좌숙야와 순우창이 얕보다가 단단히 혼났다는 말을 들었어."
그의 얼굴에 웃음이 싹 사라지며 싸늘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나저나 좌풍과 형제건만 전혀 분위기가 다르군."
혼잣말처럼 하는 소리였지만 석비룡이 들으라는 듯 목소리가 컸다.
석비룡의 눈에는 번개불 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형제라니……?'
종천로가 옆에서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석비룡! 어서 여길 떠나라!"
석비룡은 그의 소리는 들은 체도 않고 물었다.
"대체 좌풍이 누구요?"
종천로는 다시 외쳤다.
"어서 여길 나가! 저들은 내가 막겠다!"
두 사람은 계속 자신의 말만 했다.
"좌풍이 누구냐고 물었소!"
"안 들리냐? 어서 나가라니까!"
단리확이 쯧쯧 혀를 차며 빈정거렸다.
"저런 저런…… 이거 안쓰러워서 못 보겠군. 하기야 핏줄을 찾는 마음을 누가 막겠는가? 내가 대신 말을 해주도록 하지."
갑자기 종천로는 단리확을 향해 벼락같이 손을 내리쳤다.
"닥쳐!"
슈슈슈슈……!
일 장이 뻗어나갔지만 단리확은 여유 있게 피하며 입을 쉬지 않았다.
"좌풍은 좌현영의 아들, 다시 말해 너의 배 다른 형이다."
석비룡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내 형이라고……?'
종천로는 크게 노해 고함을 지르며 쌍장을 교차시켰다.
"갈(碣)!"
단리확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즉시 장력을 발출했다.
콰콰콰쾅!
충돌의 여파로 바닥이 옴폭 패이고 천정이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단리확의 음산한 웃음소리만이 들려 나왔다.
"크크크! 좌풍이야말로 현영의 모든 걸 진정으로 이어받은 놈이지. 혈음신장도 속성으로 수련해 냈을 뿐 아니라 현현교의 부활을 꿈꾸고 있으니까 말이야."
먼지가 가라앉으며 석비룡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단리확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너도 그 녀석의 별호는 들어봤을 것이다. 금황독존이라고……."
충격과 경악의 연속이었다.
'뭣! 금황독존이 내 형……?'
이때 종천로가 품속에서 손바닥 크기의 검은 깃발을 한 움큼 꺼냈다.
"유유암령일귀일원(幽幽暗靈一歸一元)! 암흑무한이여! 내게로 오라!"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깃발을 뿌렸다. 깃대 끝은 창 끝처럼 뾰족하게 깎여 있었고, 진기를 실어 뿌렸기 때문에 대리석 바닥에 푹푹! 박혀들었다.
극심한 혼돈!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깔리며 눈앞이 칠흑처럼 어두워져갔다.
"이, 이게 뭐야?"
당혹한 외침성이 터지는 가운데 석비룡의 귀에는 종천로의 전음이 들려왔다.
'암흑무한진은 내 스스로 풀지 않는 한 절대 깨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난 단리확과 운명을 함께 할 터! 빨리 나가지 않으면 너 또한 영원히 갇히고 말 것이다!'
석비룡도 종천로에게 이미 암흑무한진을 배워 알고 있었다.
'사문(死門)이 생문(生門)이고 생문이 또한 사문이니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석비룡은 또 보았다.
'처……천문(天門)이 닫히고 있어! 늦으면 영원히 갇히고 만다!'
천문이 닫히면 진을 펼친 사람조차 풀지 못한다. 종천로는 자신마저 영원히 암흑무한진에 가둘 각오를 다진 것이다.
석비룡은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신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무서운 속도로 천문을 향해 나아갔다.
석비룡의 몸이 천문을 빠져나가는 순간, 천문은 사라져버렸다. 이제 그가 지나온 곳은 모든 것이 혼돈과 어둠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석비룡은 단애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한 숨을 돌리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종천로의 전음이 들려왔다.
'비룡…… 진정한 혼돈(混沌)은 지금부터다. 이제 넌 철저히 혼자라는 걸 명심해라. 모든 난관을 너 혼자 헤쳐 나가야만 한다.'
석비룡은 가슴이 벅차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종천로에게 보일 리가 없는데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 종천로는 옛날부터 널 볼 때마다 최고의 기쁨을 느꼈었다…… 넌 내 평생 가장 위대한 작품이었어…… 나의 생명이 네 몸속에서 살아 숨 쉬는 걸 느꼈다고나 할까…… 사랑한다. 아이야…… 이제 나 종천로의 마지막 작품인 천리전이격공(千里轉移隔功)으로 네 몸 속에 들어갈 것이다…….'
석비룡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언제부터인가 두 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볼 위로 흘러내렸다.
'그것은 바로 내 백 팔십 년 인생의 결정일지니…… 바로 만공모사(萬孔毛絲)이니라!'
깊은 늪과 같이 암흑천지로 변한 단애 아래에서 태양이 폭발하듯 눈부신 광채가 번쩍거렸다.
그리고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은 섬광처럼 뻗어 올라와 석비룡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