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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구파일방의 봉문, 그리고 군불악의 최후
1
낙양 북망산의 관제묘.
외곽에 자리 잡은 이유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황량함만이 보였다.
그러나 오늘 이곳은 때 아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집에 객이 벌써 아홉 명째 들어서고 있었다.
약간 좁은 듯한 석실 안에는 한 개의 긴 탁자가 있고, 그곳에 놓여진 열 개의 의자 중 아홉 개는 주인이 차지하고 앉았으나 하나만이 덩그러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중원무림을 이끌어 나가는 구파일방의 십방대의가 열리는 관제묘였다.
상석에는 소림사의 장문인인 혜각선사가 앉아 있고, 양옆으로 마주보며 여덟 명의 장문인이 앉아 있다.
혜각선사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아미타불…… 화산 장문인께서 늦는구려."
약속 시간은 일각이 지난 상태였다.
진천유개 만자량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용대협의 말대로 이 중에 한 사람이 흉수라면 우리는 호랑이 굴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용대협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안심이 된다만…….'
용해린이 신이 아닌 이상 그의 등장은 사건이 벌어진 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한 줄기 바람처럼 석실에 내려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중인들이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화산파 장문인 군불악이었다.
"늦어서 미안하외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은 여태껏 애첩인 도홍(桃紅)을 탐해서였지 급박하게 달려와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인들의 눈에는 너무도 급박하게 달려와 그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 *
관제묘에서 십 장여 떨어진 한쪽 숲은 울창한 나무와 이름 모를 넝쿨로 뒤덮여져 있어 숨어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그 은신처에 어울리게 관제묘를 주시하는 두 쌍의 눈이 있었다.
바로 용해린와 공손혜의 눈이었다.
용해린은 바닥에 정좌한 자세로 있었고 공손혜는 그런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었다.
'이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모두 모였군.'
용해린은 진중한 표정으로 관재묘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공손혜의 시선은 관제묘가 아니라 용해린에게 가 있었다.
'훗… 혜매는 오빠를 절대로 놓치질 않을 거야.'
문득 공손혜의 얼굴이 장미 빛으로 물들었다. 용해린과의 첫 관계 장면을 생각한 것이다.
스물거리듯 안개가 피어오르는 미로 속을 걷다 한 줄기 쾌감에 온몸을 떨었던 그 순간.
생각만 해도 짜릿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공손혜는 용해린의 어깨를 툭 쳤다.
"오빠!"
"쉿…!"
용해린은 질책의 표정으로 공손혜를 나무랬다.
그것에 질 공손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장난기가 발동한 나머지 얼굴을 용해린의 옆으로 옮겨 재차 용해린을 불렀다.
"오빠!"
"왜? 읍……!"
용해린은 고개를 돌린 순간 입을 뾰족히 대고 있는 공손헤의 입을 피할 수가 없었다.
공손혜의 혀가 용해린의 다문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말랑말랑한 육질, 마치 뱀의 움직임처럼 교묘한 입맞춤이었다.
용해린은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요 암코양이를 잠잠하게 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그러나 그는 창룡노를 쥔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
군불악은 자리에 앉았다.
비로소 열 개의 자리가 다 채워진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먼저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왕림하신 각파의 장문인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혜각선사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아니외다. 장문인께서 온갖 노력을 하여 도난당했던 비급의 단서를 찾았다는 것에 저희들이 깊은 감사를 드려야 옳을 줄 압니다."
군불악은 오늘 이 자리의 영웅인 것이다.
다른 장문인들 또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오랜 시간 기다린 지리함이 아닌 존경의 눈빛까지 담겨 있었다.
군불악은 고개를 저으며 정색했다.
"아니외다. 저는 응당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외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바로 본인이 찾아낸 무당파의 태청비록이외다."
무당파 장문인인 태허상인의 도호가 터져 나왔다.
"무량수불… 장문인께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진산비급이란 한 문파의 생명과도 같은 것.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양대산맥이었던 무당이 한순간에 무너질 뻔한 것이었고 그것을 군불악이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이다.
대를 이어 군불악에게 절을 해도 못 다할 은헤였다.
군불악은 태허상인에게 비급을 건네며 말했다.
"자파의 비급이 아닌 관계로 저는 아직 그것이 진품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니 무당장문인께서는 속히 확인해 보시지요."
비급의 진위(眞僞).
이미 군불악이 비급을 찾았다 하여 십방대의를 발동할 때부터 그것은 신앙과 같은 믿음이었다.
"무량수불, 진정 군불악은 백 년에 하나 있을 법한 정인군자십니다. 이 모든 것이 무림의 홍복이외다."
자파의 무공이 아닌 타파의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무림에서 금기시해 왔던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군불악의 이 같은 행동은 가히 존경받을만한 것이었다.
"헛 별말씀을……."
그러나 어찌 알 수 있을까.
지금 그의 겸손에 찬 미소 뒤에 숨겨진 칼이 자신들의 목을 한 치의 틈도 없이 겨누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군불악은 내심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태허상인의 비급을 잡은 손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빨리 펴보기나 해라, 이 냄새나는 말코 도사야!'
태허상인이 태청비록을 펼치는 순간 중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비급을 펼쳐 살피던 태허상인의 눈빛이 밝아졌다.
입가에서부터 번져가 얼굴 전체로 퍼지는 웃음은 감동이었고, 비급을 잡은 손이 떨리는 것은 감동에 찬 전율이었다.
"오오! 이것은 진본이 틀림없습니다."
무당장문인은 너무도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이례적으로 군불악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무량수불, 고맙소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했던 몸, 이제 부끄러움이 없어졌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소이다."
이제 문제 하나가 일단락되자 혜각선사는 밝아진 표정으로 군불악을 바라보며 더욱 중요한 관건에 대해 물었다.
"아미타불, 장문인, 단서를 잡았다는 것이 무엇이오?"
돌연 군불악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비급을 훔쳐간 범인을 알아냈소이다."
"허엇!"
"그것을 어떻게……?"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분분히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꿈에서조차 이를 갈게 만들었던 흉수가 아니었던가.
무림역사상 구파일방의 존망을 한손에 쥐고 뒤흔들었던 희대의 인물일 수도 있는 흉수.
또한 한 순간 영웅이기도 했던 그는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을.
군불악은 중인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고 난 뒤 섬칫한 안광을 발출했다.
"하하하핫……! 어떻게 알았냐고?"
장문인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천유개는 온몸을 타고 오르는 전율을 느꼈고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들리며 군불악을 가리켰다.
"예감이 맞았군. 바로 그대가 흉수였다니!"
군불악은 돌연 웃음을 뚝 그치고 살 떨리는 사악한 기운을 흘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 바로 내가 범인이지!"
"허억! 무엇이라고 했소?"
"뭣이라고?"
중인들은 잠깐 동안 멍해진 표정으로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군불악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흐흐, 범인이 바로 나라는 얘기지. 그러니 모두 죽을 준비나 해라!"
차앙!
제일 먼저 이 크나큰 충격에서 벗어난 태허상인이 검을 빼어 들며 일어섰다.
"이 간악무도한 놈! 그런 중죄를 짓고도 네 감히 살 생각은 아니렷다."
"흐흐, 그러한 것을 생각했다면 애시당초 이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
"네놈이 간덩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구나. 네 놈이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이냐!"
군불악은 그를 바라보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진천유개의 뇌리에 또다시 섬뜩한 느낌이 관통했다.
'저 웃음은 자신감이다! 그렇다면 놈은 암중에 함정을 파놓았단 말인가?'
군불악은 조롱하듯 미소를 지으며 태허상인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말코도사! 언제는 무림의 홍복이라며 스스로 칭찬하더니만 이제는 죽인다는 것이냐……!"
그리고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흐흐, 상대 못할 것도 없지, 내공도 끌어올릴 수 없는 허수아비 놈들한테 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중인들은 기겁을 하며 내공을 끌어올려 보았다. 결과는 악몽이었다.
"당했소이다! 놈이 독을 풀었소."
"언제…… 놈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군불악이 친절하게도 그들이 죽어야 될 이유를 설명했다.
"모르고 죽으면 억울할 테지. 그럼 내가 선심을 쓰지. 첫 번째 네놈들에게 보낸 서찰에는 남만에서 나는 오독초(五毒草)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 말코도사가 태청비록을 펼친 순간 무영독연(無影毒煙)이 날아오르게 되어 있었지. 물론 무영독연은 너희들이 호흡할 때마다 네놈들의 뱃속에서 차근차근 녹아 오독초의 가루와 충돌한 순간 절명무흔독(絶命無痕毒)이라는 엄청난 독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리고 이 독은 이미 해옥랑이라는 계집을 잡을 때도 한 번 사용했었지."
"해, 해옥랑!"
"그, 그럼 신주오룡을 사주해 대해천봉을 습격한 것은 네 놈이란 말이냐?"
"흐흐, 어리석은 놈들, 그것을 이제 알다니."
군불악의 조소에 다른 구파의 장문인들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아아! 그런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무고한 해왕맹과 대혈전을 벌이려 했으니."
"실로 악독하도다!"
"네놈의 목적이 무엇이냐?"
군불악이 얼굴을 찡그리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곧 죽을 놈들이 궁금한 것도 많군. 중원일통(中原一統) 혈마군림(血魔君臨)!"
창!
군불악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졌고, 다음 순간 그는 검을 뽑아들며 싸늘히 일갈했다.
"이제 목을 길게 빼놓아라! 오늘 이후로 구파일방은 우리 화산만 남게 될 것이다."
진천유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저놈이 혈마천의 주구일 줄이야! 빨리 용대협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내심 이렇게 염두를 굴리며 뒤로 물러섰다.
군불악은 검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네놈들의 독문무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미 장문인인 복호사태가 불진을 앞으로 내밀며 군불악을 가리키고 대갈했다.
"용서하지 않겠다! 비열한 악적!"
복호사태는 불진을 휘두르며 신형을 날렸다.
"연환혈풍(烟幻血風)!"
비록 완벽하지 않은 내공으로 펼치는 것이지만 무시 못할 힘이 실려 있었다.
"후후, 자신들의 절기로 죽어 가는 맛도 괜찮겠지!"
말과 함께 그는 가볍게 검을 앞으로 내밀어 갔다.
"연환혈풍!"
불진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겼다.
그러나 내공이 불완전한 초식은 쭉정이일 뿐, 복호사태는 힘없이 퉁겨져 날아가 석벽에 부딪쳤다.
꽝!
복호사태의 몸이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며 힘없이 고개가 꺾였다. 칠공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흥건히 바닥을 적셨다.
즉사였다.
"하하핫……! 귀찮구나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한순간이었지만 그를 영웅으로 생각한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웠던 태허상인이 검을 뽑아 들고 몸을 날렸다.
"이… 천인공노할!"
군불악의 검에서 엄청난 잠력과 검기가 뻗어 나와 나머지 팔파의 장문인들을 휘감는 것을 보며 태허상인이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팟!
내공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펼치는 태허상인의 검기에는 막중한 힘이 담겨져 있었다.
하나,
쾅!
군불악의 검과 부딪친 태허상인은 피를 토하며 뒤로 비칠비칠 물러났다. 내력에서 너무 딸린 것이다.
재차 군불악의 검이 내치려 할 때 태허상인의 옆에서 혜각선사가 삼성뿐인 달마역근공을 펼쳐 가세했다.
하나 결과는 똑같았다.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이 연수했는데도 군불악에게 밀린 것이다.
'엄청나게 강해졌다. 정상적인 상태라 해도 상대하기 벅찰 정도로.'
소림과 무당의 두 장문인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군불악은 너무 강해져 있었다.
혜각선사의 불호가 허탈하게 흘러나왔다.
'아미타불, 오늘 여기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어느새 군불악의 검에서 어마어마한 검강이 쏟아져 나와 무당 장문인의 허리를 휩쓸었다.
무당파의 지고지순한 검학의 정화라 불리는 태청검법이었다. 태허상인보다 더 완숙한 태청검법이었다.
"여기도 있다."
"노도도 여기 있지."
다른 육인의 장문인이 동시에 군불악을 향해 공세를 펼쳐내었다.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흐흐, 모두 사이좋게 가겠다? 그것도 좋지."
군불악이 싸늘한 웃음을 짓고는 내공을 배가 했다.
순간 그가 입은 도관이 엄청난 내공에 의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며 동시에 시뻘건 혈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콰콰콰콰!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뻗쳐 나왔다.
"이제 그만 모두 죽어라!"
"맞받지 말고 모두 피하시오!"
진천유개가 외치며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외침에 다른 팔파의 장문인들도 군불악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몸을 빼려했다.
하나 그들 팔 인은 모두 군불악의 공격 범위 안에 있어 몸을 빼려 해도 뺄 수가 없었다. 팔 인은 순간적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래도 명색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아니던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의 남아 있는 모든 내공을 모아 군불악을 향해 떨쳐냈다.
"달마삼장(達摩三掌)!"
"천하성산(天下星散)!"
"태극혜검!"
각자의 최고 절기들이 군불악의 검세에 부딪쳐갔다.
쿠콰콰쾅!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관제묘가 들썩였고 이내 자욱한 먼지를 발하며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다.
먼지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휘이잉……!
강렬한 바람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자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헛!"
군불악은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분명 육편조각이 되어 널브러져 있어야 할 팔파 장문인들의 모습이 멀쩡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저 먼지 속에 우뚝 서 있는 인영은 누구란 말인가?
"어떤 놈이 감히 내 일을 방해하느냐?"
먼지가 가라앉자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인영, 그는 바로 용해린이었다.
용해린은 군불악을 향해 좌수를 내뻗은 상태였는데 옷자락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군불악은 망연히 고개를 저었다.
"네, 네놈은 무적해룡!"
그러나 그가 놀라는 것은 자신의 공격을 용해린이 맨 손으로 막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일황이나 일옹이라 해도 맨손으로는 나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거늘.'
그만큼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있는 군불악이었다.
그가 용해린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을 때 용해린은 몸을 돌리며 진천유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방주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밖에 매복시킨 이 자의 수하들을 뒤늦게 발견해 제압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용해린이 큰 죄를 지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진천유개는 몸을 일으키며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군불악을 노려보았다.
"저 간악한 자가 모든 흉계의 원흉이네. 해왕맹의 해옥랑소저를 암산한 것도 저놈의 계략이었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일어서고 있었다.
용해린이 군불악의 검세를 해소했지만 그 여파는 상당해 모두 조금씩의 내상 등을 입은 것이다.
"아무리 중독으로 인해 내공의 칠할 가량을 잃었다고 하지만 한 문파의 지존들인 우리들을 일초에 꺾었다!"
'군불악의 내공은 이미 신화지경(神化之境)에 달했단 말인가?'
만자량을 비롯한 팔파의 장문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표정들을 하며 군불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은 도저히 군불악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시인해야 했다.
한편 군불악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막은 인물이 의외로 어리다는 것을 보고 가소롭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무적해룡! 네놈이 우연치 않게 본인의 공격을 받아냈겠다만 이제 그런 우연은 없을 것이다."
용해린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배어 물었다.
"난 무공을 우연으로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서……."
조소가 담긴 웃음이었다.
군불악의 입매가 씰룩여졌다.
"애송이가 입담이 제법 매섭구나. 어디 그 입담만큼이나 목숨도 질긴지 보겠다."
"후훗, 나의 몸은 제법 단단하지."
군불악이 검을 세우는 것을 보며 용해린도 어깨에 매었던 창룡노를 앞으로 내밀었다. 창룡노를 한 번 흔들자 그것을 감쌌던 천이 흘러내리며 면에 새겨진 용이 웅자를 드러냈다.
우우웅!
용음이 울려 퍼지는 듯 싶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군불악이 검을 앞으로 치켜세우고 냉갈했다.
"오냐! 애송이, 나 군불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군불악이 검은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검을 앞으로 찌르자 군불악의 검에서 엄청난 잠력이 노도처럼 밀려나와 용해린의 몸을 휩쓸어 갔다.
수많은 검영이 환상처럼 용해린의 요혈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용해린도 창룡노를 내리 그으며 마주쳐 갔다.
"해룡섬전(海龍閃電)!"
직선(直線) 하나가 허공에 선명히 그어졌다.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형상의 하얀 기운이 창룡노에서 뻗어 나와 군불악의 검세를 갈라갔다.
"헉!"
군불악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급히 뒤로 미끄러졌다.
'역시, 허명을 얻은 건 아니었군.'
군불악은 용해린이 내쏜 경력을 해소시키려 했다. 하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를 수직으로 쪼개려고 하는 그 기운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는 실낱같은 빈틈을 보였다. 그것을 놓칠 용해린이 아니었다.
"해룡풍운(海龍風雲)!"
동시에 한 소리 외침이 터지며 창룡노에서 재차 엄청난 힘이 쏟아져 나왔다.
쿠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창룡노에서부터 무엇이든 삼켜 버릴 것 같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나갔다.
군불악은 기겁을 하며 급히 검을 회전시키며 검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의 검이 소용돌이에 닿는 순간 잘게 부서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파파팟……!
부서진 검의 파편들이 그대로 군불악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크억!"
군불악은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용해린이 마지막 순간 그 어마어마한 잠력을 거둬들여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시신조차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무적해룡이었다. 그의 무공은 실로 가공할 것이었다.
군불악은 입에서 연신 피를 게워내며 용해린을 쳐다보았다.
"네…… 네놈 무…… 무적해룡…… 노…… 놈에게 이리도 허망하게 죽다니……."
그는 그대로 바닥에 철퍽! 무너져 내렸다.
"도홍이를… 또 안아 주어야 하는데……."
마지막 소원이 그것이었던가.
야망을 위해 악마에게 혼을 팔았던 그의 말로는 허무했다.
잠시 잔경련을 일으키던 그의 몸이 이내 멈췄다.
멀찌감치 혈전을 지켜보던 각파의 장문인들은 용해린의 엄청난 무위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가시죠."
용해린의 음성이 들려서야 그는 화들짝 놀라며 관제묘를 나갔다.
"오빠 !"
숲 속에서 공손혜가 용해린을 반기며 달려왔다. 그녀는 풀쩍 뛰어올라 용해린의 가슴에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
"오빠,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걱정할 것 없소이다. 용대협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진천유개가 웃으며 말하자 용해린이 공손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모르죠, 귀여운 암코양이가 가슴을 할퀼지."
공손혜는 용해린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때 진천유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용대협,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오."
"아니, 왜?"
"정천맹 또한 놈들의 공격을 받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요. 군불악이 그랬소, 오늘 이후 구파일방 중 남는 것은 오직 화산뿐이라고."
용해린의 눈빛에 싸늘한 한광이 돌았다.
"그렇다면……?"
"총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
"빨리 정천맹으로 향합시다!"
같은 시각.
삼천 권이 넘는 방대한 무학 서적을 보관하는 소림의 무학 보고 장경각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장경각주인 혜원대사가 낮에는 현 소림방장인 혜각대사 대신 모든 대소사의 일을 관장하는 한편, 밤에는 이렇게 장경각으로 와서 무공일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었다.
"밖에 누구인가?"
혜원대사의 청명한 음성이 울리자, 밖에서 곧 대답이 들려왔다.
"혜원사숙조님, 소질 행허입니다."
혜원대사는 책에서 눈을 떼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냐?"
밖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알았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장경각은 묘시에서 신시까지만 제자들에게 개방되기 때문에 행허가 들어갈 수 없었다. 때문에 혜원대사가 번거롭지만 장경각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혜원대사가 밖으로 나오자, 행허는 허리를 숙이며 합장을 했다.
혜원대사는 늦은 밤 어린 행허가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아심을 느끼며 진중하게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행허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날카롭게 외쳤다.
"이런 일이요!"
고개를 드는 행허의 눈빛에서 음침한 살기를 보았을 때는 이미 행허의 손에 들린 조그만 소검이 달빛에 반짝이며 자신의 배에 박혀들고 난 후의 일이었다.
푸욱…!
혜원대사 눈이 부릅떠졌다. 이어 그는 배를 움켜쥐며 행허의 어깨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보고도 막을 수 없었다. 장경각주라 불리며 천 년 소림 역사에 길이 남을 기재로 뽑혀왔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행허의 기습은 빨랐다. 그것은 한 줄기 빛,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네… 네놈이…… 네놈이!"
행허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고 눈은 시뻘건 혈광으로 물들어 갔다.
"흐흐……!"
이어 그가 배에 꽂힌 검을 한 바퀴 회전시켜 가슴으로 치켜올렸다.
그그극! 추아악……!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치며 행허의 얼굴에 튀었다. 행허는 한 손으로 피를 찍어 혀로 핥았다.
"네놈보다 세 살이 많은 나보고 네놈이라니……!"
그는 기묘한 축골공을 연마하고 있는 자였다.
이어 그는 신형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가는 혜원선사의 눈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경악의 빛이 만연했다.
그렇다.
행허, 그는 혈마의 수하로서 반노환동의 경지에 올랐기에 소림에 파견된 것이다.
열 두 살짜리 어린아이의 피를 즐기는 눈빛이란 말로 표현 못할만한 공포스러움이 있었다.
걸음을 옮기던 행허는 씨익 살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시작해라!"
"와아아아……!"
때 아닌 함성이 울리고, 후끈한 혈풍이 불어 닥쳤다.
승복을 입은 인물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 소림의 제자일진대, 그들은 나타나자 마자 동료들의 가슴을 베어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의 가슴에 검을 꽂은 것이었다.
그들은 혈마천의 간자였으니……!
* * *
상청궁.
무당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서 한 명의 인물이 급히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혜성천검 청정이 아닌가?
급히 신형을 날리는 그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각 후 청정은 상청궁이 가장 잘 보이는 무당산의 어느 산봉우리 위에 우뚝 서서 상청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을 때였다.
콰콰콰콰 쾅!
무당산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상청궁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어 불길은 마치 화마(火魔)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미친 듯이 타올랐고 근처에 자리한 도관들에 옮겨 붙어가며 천천히 무당산을 삼켜가고 있었다.
동시에 아직 폭탄이 남아 있는지 사방으로 튀는 파편들이 튀었다.
"무…… 무슨 일이야?"
"헛! 상청궁이!"
느닷없는 사태에 잠을 자던 무당파의 제자들은 자리옷 바람으로, 또는 옷을 거꾸로 돌려입은 채 숙소의 문을 박차고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주위에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다급성을 내질렀다.
그때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청정의 뒤에 어느 새인가 수십 명의 인물들이 도열한 채 무당파가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밤에 보는 화마(火魔)는 멋있지!"
청정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들려오는 폭발음과 무당파 제자들의 아우성 소리들을 음미하는 듯했다.
아무 일이 없다는 듯 만월은 교교하다 못해 처연한 달빛을 지면에 뿌려대고 그 달빛은 청정의 얼굴에 내려앉으며 그의 광기 어린 얼굴을 비추었다.
"그리고 십오야의 핏줄기는 더욱 어울리지……!"
척!
그의 손이 천천히 달빛을 가르며 앞으로 떨구어졌다.
슈슈슉……!
동시에 수십 줄기의 인영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아수라장으로 변한 무당파의 장내로 쏟아져 내렸다.
"엇! 치…… 침입자…… 커헉!"
"막아라!"
그러나 이미 그들의 몸은 곳곳에 치솟는 불길에 지쳐 있었고 타오르는 상청관을 맥없이 바라보며 정신 또한 허탈함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시작부터 패색이 완연한 격전, 아니 일방적
인 흑의인들의 도륙이었다.
곳곳에 검광과 피분수가 난무하고 하나 둘씩 무너져 가는 무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소림과 함께 무림의 태산북두라 일컬어지는 무당은 그렇게 무너져 갔고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소림과 무당의 괴멸을 필두로 아미, 곤륜, 청성 등 구파일방의 나머지 세력에서도 혈풍은 불어 닥쳤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운명을 같이 했다.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아마도 본래의 성세를 회복하려면 수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혈마천의 도발.
구파일방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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