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리큐 은사정원(浜離宮 恩賜庭園)
하마리큐 은사정원(浜離宮恩賜庭園)은 도쿄도 쥬오구에 있는 공원으로 구 하마리큐 정원(旧浜離宮庭園)로 특별 사적 및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바다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 조수 간만의 차이를 정원에 끌어들여 시오이리(潮入り) 방식의 회유식(回遊式) 축산천수정(築山泉水庭) 정원이다.
정원 안에는 오리사냥터, 연못, 찻집, 화단, 모란정원 등이 있고, 2000년대 초반 서쪽에 구 시오도메 화물터미날이 재개발되어 시오도메 일대의 고층빌딩이 들어서면서 정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에도시대에 고후번(甲府藩)의 시모야시키(下屋敷)에 딸린 정원으로 조성되어, 도쿠가와 쇼군 가의 별저 하마고덴(浜御殿)이었다가, 궁내청 관리의 리큐(離宮)를 거쳐 도쿄도에 하사되어 은사공원이 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최근 정원 내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4동의 다실 등이 복원되어 있다.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성에 입성할 무렵, 성의 동쪽, 서남쪽 평지는 끝없는 갈대밭으로 매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의 해안선은 다마치역(田町駅)과 신바시역(新橋駅)을 잇는 선까지였으며, 1603년, 이에야스가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으로 임명되어 에도막부가 열리면서, 본격적인 매립이 시작되었다.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家光)의 삼대에 걸쳐 매립이 진행되어, 현재 쓰루가다이(駿河台) 남부 간다야마(神田山)를 헐어, 그 흙으로 에도성의 동쪽과 남쪽을 메꿨고, 각 다이묘들에게 인부를 동원하였다. 현재의 하마리큐(浜離宮) 일대는 당시 시바(芝)라고 불렸고, 에도성 부근에 시타마치(下町)가 정비된 후, 그 주위를 둘러 매립이 이뤄졌다. 가장 먼저 도카이도(東海道), 거기에 마을이 들어서고, 그 결과, 하마마치(浜町), 하치쵸보리(八丁堀), 니혼바시(日本橋), 교바시(京橋), 긴자(銀座) 등이 탄생하여, 니혼바시가와(日本橋川)를 중심으로 하는 에도 내항(江戸内港)이 정비되어, 니혼바시(日本橋)와 교바시(京橋)가 놓였다.
1632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슈토시마고오리에도노쇼우즈(武州豊嶋郡江戸庄図)에 의하면, 간조시 갈대가 드러난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상태였고, 당시 쇼군 가의 매 사냥 장소이면서, 산킨코타이(参勤交代)로 에도에 머무르고 있던 다이묘를 초대하곤 했다. 1657년 작성된 신텐에도노즈(新添江戸図)에서는 매 사냥터는 이미 없어졌고, 마을과 바다 사이에 다테 가문(伊達家)과 호시나 가문(保科家)의 시모야시키(下屋敷)가 보인다.에도성 부근은 상업지구로 개발되었고, 해안쪽은 방어상의 이유로 유력 다이묘나 새로 임명된 번주의 주택을 배치하였다. 1657년 대화재 후 정비할 당시에도 이 방침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도쿠가와 츠나시게(徳川綱重, 1644-1678)에게 하사된 것이 대략 1654년으로, 15,000평에 달하는 면적이었는데, 1661년 경에는 25만석의 다이묘가 되어 고후노도노(甲府殿)라고 불렸고, 현재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 가미야시키(上屋敷)가 있었기 때문에, 매립하여 하사받은 택지는 코후노도노 하마야시키(甲府殿浜屋敷) 혹은 우미테야시키(海手屋敷)라고 불렸다.
코후닛키(甲府日記) 1669년 11월 29일자 내용에 정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이 언급되어 있고, 이후 서자인 츠나토요(綱豊,1662-1712))에 이어져 1704년까지 하마야시키(浜屋敷)로서 존속했다.
5대 쇼군 츠나요시(綱吉, 1646-1709)이 후사가 없어, 1704년 츠나토요를 양자로 에도성에 맞이했고, 이에노부(家宣)로 개명하여 이후 6대 쇼군이 되었다. 코후하마야시키(甲府浜屋敷)는 하마고덴(浜御殿)으로 불렸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토쿠가와 가문의 정원이 되었다.
츠나요시(綱吉)는 1707년 하마고덴(浜御殿)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나카노시마(中島) 차야(茶屋), 우미데차야(海手茶屋), 시미즈(清水) 차야(茶屋), 간논도(観音堂), 코신도(庚申堂), 오테몬바시(大手門橋) 등을 새로 지으며, 하마고덴(浜御殿)은 면모를 일신하였다. 1709년 쇼군이 된 이에노부(家宣)는 에도성 내 후키아게(吹上)과 하마고덴(浜御殿) 정원을 수리하였고, 그 해 9월5일, 임명을 축하하기 위해, 장식으로 꾸민 배를 하마고덴(浜御殿)에 띄우고, 이에노부의 명령에 배는 일제히 노를 저었으며, 나카지마(中島)의 차야(茶屋)에 모인 쿠게(公家) 들은 다이센스이(大泉水)를 바라보며 와카(和歌)를 읊었고, 배 위에서는 연주를 했다고 한다.
이에노부가 50세로 1712년 죽자, 5세 밖에 안된 아들 이에츠구(家継)가 쇼군이 되었지만, 3년 후인 1715년 8세의 나이로 죽었다. 1716년 4월 기슈 도쿠가와 가문( 紀州徳川家)의 요시무네(吉宗,1684-1745)가 쇼군이 되었다.
8대 쇼군이 된 요시무네(吉宗)는 1716-1721년까지 교호(享保)의 개혁, 막부재정의 재건에 힘썼고, 하마고덴(浜御殿)의 관리와 재건에도 비용절감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1724년 화재에 따른 복구도 최소화하는 대신, 제당소, 제염소, 대장간 등을 지었고, 1727년에는 사탕수수를 심어 1729년에는 흑설탕 제조에 성공하기도 했다. 쇄국중에도 네덜란드인 괴젤을 하마고덴으로 초청하여 마장에서 서양경마술을 시연하게 하였고, 1728년 나가사키에 도착한 코끼리는, 그 2년전에 베트남을 출항하는 배편으로 요시무네가 주문한 것으로, 암, 수 2마리였는데, 암코끼리는 곧 죽고, 수코끼리는 일왕의 알현을 위해 종4위의 고위직책을 하사받고 에도성 하마고덴(浜御殿)으로 들어가 요시무네와 만나기도 했다.
11대 쇼군 이에나리(家斉,1773-1841) 대에 하마고덴(浜御殿)이 가장 많이 정비되었고, 많은 행사가 개최되었던 시기였는데, 츠바메노챠야(燕の茶屋), 마츠노챠야(松の茶屋), 와라부키노챠야(藁葺の茶屋), 고테이야마코시카케(御亭山腰掛), 마츠바라노코시카케(松原の腰掛) 등이 지어졌다. 1800년 경에 정원의 정비가 끝나면서 이에나리의 방문이 잦아졌지만, 그중에서도 오리 사냥터에서의 방매에 가장 자주 방문했다.
12대 쇼군 이에요시(家慶, 1793-1853)에 이르러서는 급박한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정원 관리가 힘들어졌고, 1853년 페리 제독이 미국 함대를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입항하면서 에도는 대혼란에 빠졌으며, 막부는 각 번으로 하여금 연안 경비를 맡겨, 하마고덴(浜御殿)의 경우, 타카마츠 번(高松藩)이 맡아 대포를 설치하였고, 페리 제독은 약 6일 후 물러났다. 이에요시(家慶)가 죽고, 13대 쇼군 이에사다(家定,1824-1858)가 쇼군이 되면서, 1854년 가나가와 조약(神奈川条約)이 체결되었고, 1856년 미국 초대 영사 해리스가 시모다(下田)에 상륙하면서 정세가 긴박해졌다. 1859년 이에모치(家茂, 1846-1866)가 14대 쇼군이 되고 9년간 양이(攘夷)와 개국(開国), 재정악화등 쉴 틈 없었던 1866년 9월 6일 이에모치의 관을 실은 배가 하마고덴(浜御殿)에 상륙했다.
1866년 하마고덴(浜御殿)은 카이군쇼(海軍所)가 되어, 1867년에는 하마고덴(浜御殿)이란 명칭이 없어졌다. 그해 요시노부(慶喜)는 쇼군이 되었지만, 다음해 10월 24일 물러났다. 마지막 쇼군이었던 요시노부는 하마고덴(浜御殿)과 에도성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다. 1868년 막부가 무너지고, 에도성이 도쿄로 이름을 바꾼 후, 메이지 일왕이 8월 27일 즉위하였다.
쿠와챠(桑茶) 정책 실시로 정원은 뽕밭과 차밭으로 바뀌었고, 하마덴(浜殿)도 도쿄부의 관리 하에 귀빈접대장소로 바뀌었다. 미국영사를 포함한 많은 나라의 외교사절로부터 정원을 보고싶다는 문의가 쇄도하여, 정부는 막부 시절의 조약을 인계받아 가조약을 맺고 북독일연방, 호주와 조약 교섭 장소로 하마덴(浜殿)을 낙점하여, 1867년, 영국제2왕자인 듀크 오브 에딘버러 공의 입국에 맞춰, 나카지마노차야(中島の茶屋), 츠바메노차야(燕の茶屋), 타카노차야(鷹の茶屋), 시오미노차야(汐見の茶屋)、오츠타이바시(お伝い橋), 바켄죠(馬見所), 스이몬(水門), 오아가리바(お上り場) 등 여러 곳을 수리하였다. 그 외의 건물은 입찰하여 처분하였고, 접대시설로 엔료칸(延遼館)이 완공되었는데, 일본 최초의 서양식 석조건물로, 대부분 목조구조물에 응회암으로 벽을 쌓고, 기와지붕을 올린 형태였다. 이 무렵, 하마덴(浜殿)은 부지가 엔료칸(延遼館)이 있는 외무성 소관의 부지와 정원을 점하고 있는 해군성 소관의 용지로 나뉘어 있었으나, 1868년 정원이 궁내성 소관으로 이관되어 하마리큐(浜離宮)가 되었고, 1872년에는 엔료칸(延遼館)까지 궁내성 소관이 되었다. 1875년 외무성 본청이 소실되면서 카스미가세키( 霞ヶ関)에 재건될 때까지 임시로 엔료칸(延遼館)을 청사로 사용하였고, 1882년, 하마리큐(浜離宮)의 부지와 건물 전체가 왕실 소유가 되었다.
1923년 9월 칸토 대지진으로 하마리큐(浜離宮)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고, 다음해부터 복구작업이 이루어졌다. 1924년 3월에는 갑자기, 하마리큐(浜離宮)나 시바리큐(芝離宮)가 어시장이나 철도시설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식자층에서 두 정원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나왔고, 6월에 가서야 정원협회 대표 혼다 세이로쿠( 本多静六, 1866-1952)와 궁내성 차관, 우치노타쿠미노카미(内匠頭)을 가지며 궁내성에서는 앞으로도 불하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태평양전쟁 중이었던 1944년 11월 하마리큐(浜離宮) 일대에 방공호와 고사포가 설치되었지만, 본격적인 공습을 피하지 못하고,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역사적인 건물은 거의 전소되었고, 현재의 호우바이테이(芳梅亭) 정도만 살아남았다.
패전 직후인 1945년 11월 3일 하마리큐(浜離宮)는 도쿄도에 하사되었고, 약간의 수리 후에 1946년 일반공개되었다. 당시 폐허로 뒤덮인 도쿄 시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초록빛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연합군최고사령부의 요청으로 1947년 5월 19일부터 무기한 군사연습을 위한 장소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 정원 수리도 이루어지기도 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는 도립회관, 오리농장, 국제호텔, 유원지 등 다양한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시기였고, 정구장을 설치하거나, 보트를 대여해주거나, 불꽃놀이 대회를 열거나 하는 일이 잦았으며, 1953년 시작한 수상버스 운행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기도 하다.
1947년 11월 20일, 하마리큐에 대한 문부성 조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명승,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1952년 문화재보호위원회에서 해수면 부분이 추가 지정되었다. 1946년 하마리큐 북서쪽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안이 고시되어, 문화재 보존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어 1955년 최종적으로 하마리큐 쪽 시오도메 강변을 그대로 남기면서 나머지 수면을 매립하여 도로를 짓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최근 원내 시설이 속속 복원되어, 1983년 나카지마노고차야(中島の御茶屋)의 복원을 시작으로, 마츠노 고차야(松の御茶屋), 츠바메노고차야(燕の御茶屋), 그리고 2018년에는 타카노고차야(鷹の御茶屋)가 복원되었다. 시오미노고차야(汐見の御茶屋) 복원은 검토중이며, 엔료칸(延遼館)은 도쿄 올림픽에 맞춰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현재는 장기적으로 복원할 계획으로 미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