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난 60년 < 2 >
일찍 출발해 세종 시청 앞 보람동에 차를 세워놓고 시내버스를 타고 대전역에서 내려 여유롭게 대흥동까지 걸어볼 심산이었다. 차령이 19년이나 된 차에 갑자기 ABS 노란불이 들어왔다. 그냥 가면 어떨 줄 몰라 카센터에 차를 맡기고 바로 앞 정류장에서 유성방향 반석역 종점 버스 1000번을 탔다. 차 계기판에 뜬 노란불이 대전행 코스를 바꾼 셈이었다. 기왕지사 방향이 이리됐으니 낙인이는 출발했나 전화를 했더니 반석역에서 만나 같이 가잔다. 낙인이가 현재 살고 있ㄴ 곳은 반석 지하철 역 주변의 멀지 않은 아파트다. 세종에서 낙인이에게 전화하고 찾아가려면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낙인이도 60년 옛 친구들을 만나는 게 설레었나 보다. 이발소를 다녀와 머릿결이 가지런하고 정갈함이 눈에 띄었다.
" 대동농기계 김도수는 봄농사에 쓸 농기계 수리하느라 정신없고 서울 사는 임춘식인 먼 데서도 오고 싶다는데 다음번 봄 모임에 초대한다 했어."
" 오고 싶다는데 오게 하지 그랬냐?"
" 걔 요즘 통원치료 다니거든. 더구나 오미크론이 판치는데 몸 컨디션에 무리일 것 같아서. 그리고 6인 이상 모이면 안 된다는데 "
" 야, 의자 하나 더 갖다 븥여놓고 요즘 다 그렇게 하더라."
그래 20년이 다 된 차도 경고등이 들어오는 데 70년이 된 우리들도 여기저기 고장 신호가 오는 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지. 그래 70년 사느라 수고 많이 한 친구들에게 훈장 하나 씩 가슴에 달아주었으면 좋겠다.
큰 일 났다. 그런 생각은 못해 봤네. 대전 가는 코스 방향을 바꾸게 한 오래된 차에 켜진 노란 불 얘기가 어떻게 가슴에 훈장으로 변하냐?
생각이란 참 별나다.
낙인이를 만나면 옛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낙인네는 집에 축사를 짓고 양계를 했다. 우리 집도 뒷마당에 측사를 짓고 닭을 키웠다.
둘이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타고 올라 보문산 기슭을 돌며 아카시아 잎을 따서 자루에 담았다. 사료에 섞어주면 닭들이 좋아하고 건강했다. 낙인이는 날마다 계란 한 개씩 먹는다고 나 보고도 꾸준히 먹으라고 했다.
어느 날 낙인이네 집에서 출발해 보문산 동쪽 계곡을 타고 둘이서 정상에 올랐다. 저 발아래 누군가가 개미같이 왔다 갔다 하는 여러 움직임이 보였다. 낙인이는 그들을 향해 겁도 없이 야호 하고 외쳤다. 그러자 잠시 후 저 아래에서 야호히고 응답이 왔다.
" 야, 낙인아 그냥 가자 재들이 깡패면 어쩌려고 그래."
낙인이는 재밌다는 듯이 또 야호 하고 외쳤다. 아 큰 일 났다. 재네들이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 낙인아 얼른 가자" 하고 재촉했다.
얘들이라 그런지 빠르다. 참 빠르게 올라왔다. 그런데 이게 누구냐. 낙인이가 망설이지 않고 여학생 집에 들어가 불러내 온 혀 짧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산 정상 봉우리에 나타나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 뒤를 연이어 올라온 친구는 내가 첫눈에 빠진 여학생의 등장이었다.
아니 이 게 말이 돼.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냐? 뭐 약속도 없이 보문산 꼭대기에서 만나다니. 그런데 그 뒤가 더 가관이었다. 이규환이가 등장한 것이었다. " 아니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보문산 정상에서 어쩌자고 왜 5인이 만나는 거야. 정말 소설 같은, 소설을 쓴 꼴이 되었다.
대체로 깜짝 쑈도 아닌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일은 그다지 환영할만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일로 그리고 그 길로 낙인이와 규환인 불교연합회로 가서 대타협을 남자답게 했다. 낙인이가 친구 규환이의 충정을 이해하고 매력의 소녀에 대한 모든 감정을 정리하기로 합의한다. 모르겠다. 별로 말 없고 가끔, 씩 하고 웃음 한 번 짓지 뭐 우리에게 살갑게 이야기한 적이 거의 없는 애에게 낙인이가 왜 그렇게까지 양보할 논리적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의리인가? 정말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아름다운 결말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5 사람이 만나는 일이 사실상 종결된 일이었다. 양보하고 물러나 주고 좋은 일했는데 한 번도 규환이와 그 매력의 소녀를 본 적이 없다. 뭐 다 그런 거지. 그런 것일지 몰랐다.
그런 낙인이와 함께 오늘 지하철을 타고 60년의 한을 풀러 대흥동 천주교 옆 월산 본가 ' 6인의 모임 ' 장소로 간다.
인상이가 먼저 도착했는지 우릴 찾는 전화가 왔다. 중앙로에서 내려 5분만 걸으면 된다 했다.
인상이는 코로나 비상사태 속에서도 용전동 고속 터미널 인근에서 나를 만나 점심이나 한 끼 같이 하자 했던 약속을 취소하고 6인의 만남으로 참석자 폭을 넓혀놓는 바람직한 일, 거시안적인 일을 했다.
오미크론 확산세가 만민치 않으니 모임의 연기를 생각해보자 할 때도
" 백신 3차 접종까지 했ㄴ데 뭘 미뤄, 일단은 면역되니 너무 쫄지 마. 코로나가 언제 끝날 줄 알고, 예정대로 해. "
이렇게 박력 있게 밀어붙였다.
인상이기 대전 한전 지점에 들어오기 전에는 멀리 파로호가 있는 강원도 화천 발전소 등으로 돌며 근무를 시작했다. 그때는 전화가 귀하던 때라 편지를 많이 썼다. 친구가 취직해서 멀리 가면 위문편지 쓰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온갖 소릴 다 적어 안부를 묻는 거라고 보냈다. 어쨌든 예전에는 서로 그랬다.
그래 인상아, 10년은 걷자. 휠체어 안 타고 스트레스 피하고 늘 즐거운 맘으로 웃어라. 마시는 게 중요하다 좋은 물 먹어라.
녹차도 즐기고. 좋은 생각만 하고. 우리 모두 그렇게 살자.
성균이도 모임 장소에 도착했나 보다. 나 어딨냐는 찾는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 가장 먼저 가 있으려 했는데 중간에 지체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지하철을 탈 때 낙인이가 교통카드를 줘서 터치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중앙로에서 내려 카드를 찾으니 없어 시간이 소요됐다. 그 카드는 반석역에서 찾아줬다. 참, 나이가 드니 별별 실수가 다 나온다.
성균이를 가장 좋아했던 아이는 형길이 같다. 같이 전화국에 다니고 군대도 조치원 51사단에 같이 입대하고 어쨌든 걔네 둘은 남달리 가까웠다. 형길이는 성균이를 잘 챙겨준 것 같다. 성균이의 의사를 묻고 성균이 말을 잘 수용해줬다.
형길이는 pop song, White House의 가사를 나에게 적어주었다. 뭘 보고 옮겨 적어준 게 아니라 노랠 부르면서 암송되어 있던 대로 적었다. 그래 그 시절엔 비키의 애조 띤 노래가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여동생까지 형길이 남매는 팝송을 좋아했다. 이태리 칸초네 음악 비키의 Casa Bianca를 영역한 노래에 내가 관심을 보이자 내 앞에서 불러 보이기도 했다. 형길이 때문일까? 팝송에 관심 갖게 된 게. 아마 그때쯤일 것 같다.
그런 형길이를 까맣게 잊구 살았다. 형길이도 초대하자. " 춘계(春季) 70 신선 클럽 6월 모임에."
병철이도 날 찾았다, 길게 설명할 수 없어, 걸어서 5분이면 간다 했다. 병철이는 범순이 소식을 기다리며 무척 보고 싶어 했다.
범순이가 화물운송을 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바빠서 쉽게 연락이 닿지 않음을 넓게 양해를 하였다. 아, 고속도로에서 무선으로 일을 배정하고 수탁하고 전국을 이동하는 일은 숨 가쁘게 바쁘고 힘들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경쟁도 치열하고 멀리 가고 일이 연결되면 며칠씩 집에도 못 오고 피로가 겹치는 어려운 일이었다. 오늘은 드디어 두 사람의 한이 풀리겠구나. 실로 50년 만의 상봉이 이루어지겠다. 방송사에 연락하여 뉴스 소재가 되도록 해도 괜찮겠다. 부대 내무반의 옛일이 옛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겠다. 그래도 병철이가 없는 데서는 부대원들이 범순이를 괴롭히는 일이 얼마는 있었나 보다,
성균네에서 맞은 편 대로변에 다리 건너기 전에 쌀가게 아들 말을 더듬는 친구인데 생각들 나면 알려주라. 얘는 대전상고 나왔다. 같은 학교 다닌 형식이가 기억하려나 모르겠다.
집은 대동 지나 신안동 지니 다음 동네였ㄴ데. 겨울방학 중 어느날, 학교 소집일에 운동징에 모여 인근의 작은 산으로 출발하여 삥 둘러 포위하고 산 위로 오르며 토끼 몰이를 시작했다. 그 때 그 날랜 토끼를 아이들이 무려 3마리나 잡았다. 어떤 아이가 달려오는 토끼를 꼴키퍼처럼 몸을 날려 덮쳤는 데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 달아 나더라. 그 토끼들은 숙직실에서 선생님들 쏘주 안주가 되었을 거다. 그래 바로 그 산이 있는 동네다. 말더듬ㄴ 것을 고치겠다고 유행가를 많이 부른 이 친구 집이 있는 동 이름이 생각이 안난다. 왜 있잖냐?. 2학년 땐가 학년 전체가 가을 산에 가서 무슨 풀씨 흝어 모아 학교에 가져온 그 산이 있는 동 이름. 생각들 나면 알려주라.
아, 소제동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