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암 채정승 만사(38세, 1799년)
하늘이 질세라 한 호걸을 내었나니
나라 운명이 그의 일신에 달렸어라
창생(蒼生-만민) 해칠 뜻은 조금도 없었고
만물을 포용할 도량 넉넉히 지녔어라
미친 물결이 공중을 걷어 차다가
높고 완강한 돌기둥에 문득 놀랐으며
요망한 꽃송이 어지러이 땅에 떨어지매
항상 곧고 푸른 소나무를 우러러 보았노라
천리나 되는 영남, 영북의 넓은 지역에
굳게 다진 터전을 선비들께 끼쳐 주었다
멀리 떠난 병든 나그네 항상 그리웁더니
임 가신 소식에 내 마음 한껏 놀랬어라
큰 못에 신거러운 용이 홀연히 가버리니
구름과 우뢰 소리 쓸은 듯 적막하며
대지를 누비던 산악이 갑자기 무너지매
세상 판국 어느듯 비고도 가벼워라
백년 동안엔 그러한 기개 없었거니
온 나라 백성 장차 누구를 의지할가
삼조(三朝)를 섬긴 늙은 신하의 거룩한 모습
역력히 생각하매 눈물이 옷깃을 적시누나
원주) 채 정승의 이름은 제공인데 국왕 정조의 특별한 신임을 업었으며 18세기 말경에 그는 수장으로서 보수당파의 박해를 받는 실학파의 인사들은 극력 보호하였다. 그는 영조와 그를 한동안 대리한 사도세자(思悼世子 후에 장조 莊祖로 추존하였음)와 정조를 내리 섬겼음으로 「삼조를 섬긴 늙은 신하」라고 하였다
음미하기)
남인의 영수격이었던 채제공(1720-1799)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만사인데 정약용이 곡산부사 시절이었다.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인데다가 정약용보다 42살이나 많은 원로대신이었다. 게다가 정조와 함께 정약용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잘 보호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여기서도 의역이 많이 들어간데다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다음 두 곳을 들 수 있다.
미친 물결이 공중을 걷어 차다가/ 높고 완강한 돌기둥에 문득 놀랐으며(怒浪蹴空驚砥屹) // 요망한 꽃송이 어지러이 땅에 떨어지매/ 항상 곧고 푸른 소나무를 우러러 보았노라(妖花墜地見松森)
‘높고 완강한 돌기둥’ ‘항상 곧고 푸른 소나무’ 등 밑줄친 부분은 내용이 과도하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채제공을 여기에 비유했음을 곧바로 알 수 있다. 또 한 부분은...
큰 못에 신거러운 용이 홀연히 가버리니/ 구름과 우뢰 소리 쓸은 듯 적막하며(蛟龍倏逝雲雷寂) // 대지를 누비던 산악이 갑자기 무너지매/ 세상 판국 어느듯 비고도 가벼워라(山岳初崩宇宙輕)
여기도 밑줄친 부분이 원문에 없거나 원문의 표현을 훨씬 넘어서서 상세히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큰 못에 신거러운 용’과 ‘대지를 누비던 산악’ 원문에 전혀 없는 수식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또한 용과 산악에 비견되는 채제공을 좀 더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에 따라 그가 사라진 세상은 ‘쓸은 듯 적막하며’ ‘비고도 가벼워’ 졌음을 탄식하였다.
해당 부분을 아래 원문에 다시 표시를 해보자. 최익한은 이 시에서 밑줄친 부분이 가장 핵심이라고 보았을 듯하다.
<樊巖蔡相公輓>
天挺人豪曠古今 靑邱社稷繫疏襟
都無夭閼群生志 恰有包含萬物心
怒浪蹴空驚砥屹 妖花墜地見松森
嶺南嶺北千餘里 堅築根基付士林
川嶺迢迢病裏情 東來消息使魂驚
蛟龍倏逝雲雷寂 山岳初崩宇宙輕
天下百年無此氣 城中萬姓倚誰生
三朝白髮魁巍象 歷歷回思淚滿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