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청년 유도회 홈페이지 게시판 안내문-
안동청년유도회(회장 변동걸)는 2012. 8. 18(토) 오후 3시부터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에 소재한 함벽당에서 제43회 누정순회강좌를 개최한다.
- 함벽당 류경시(1666~1737)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흠약(欽若), 호는 함벽당(涵碧堂)이다. 1694년(숙종 20)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순천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 강포 류홍원柳弘源(1716~1781)은 자는 汝遠, 호는 강포江浦이다. 함벽당 류경시의 손자로 류정원의 문인이다. 학문에 성취가 있었으며 필법이 뛰어났다. 저서로는 강포집이 전해진다. 또한 강포선생과 관련 있는 강포유홍원의현금․어은보江浦柳弘源의玄琴․漁隱譜는 시도유형문화재 31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다음은 안동 향교지에 수록된 내용을 발췌한 두분 할배에 대한 참고자료 입니다
유경시(柳敬時)
성명(姓名) |
유경시(柳敬時) |
본관(本貫) |
전주(全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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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時代) |
1666(현종 7)∼1737(영조 13) |
자(字) |
흠약(欽若) |
호(號) |
함벽당(涵碧堂) |
이력(履歷) |
안동향교지(安東鄕校誌) 第一節 人物 류경시(柳敬時) (헌종7:1662~영조13:1737) 전주인(全州人). 자(字)는 흠약(欽若) 호(號)는 함벽당(涵碧堂)으로 동휘(東輝)의 자(子)이다.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門下)에 나아갔고 숙종20년(169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지냈다.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善政)을 함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아 뒤에 청백이(淸白吏)에 들었다. 고훈(古訓)을 즐기고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자경편(自警篇)」을 즐겨 읽었다. 「함벽당집(涵碧堂集)」이 있다. 13세 류경시(柳敬時) 字欽若 號涵碧堂 父東輝 祖木學 曾友潛 文科 掌令 1666(현종 7)∼1737(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흠약(欽若). 동휘(東輝)의 아들이다. 1694년(숙종 20)10월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의 복위를 계기로 실시된 별시에서 유학(幼學)으로 병과 12인에 급제하였다. 문한관(文翰官)과 외직을 거쳐 1732년(영조 8) 사헌부장령에 올라 김정(金$정01)·김시발(金時發)의 옥사를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같은해 9월 국휼(國恤)에 불참하였다 하여 사직(司直) 이재(李縡)의 탄핵을 받아 이하원(李夏源)·이광도(李廣道) 등과 함께 불서용(不敍用)의 처벌을 받았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張東翼〉 류경시(柳敬時) 전주인(全州人) 자(字)는 흠약(欽若)이요 호(號)는 함벽당이니 기봉 복기(岐峰 復起)의 현손(玄孫)이며 야계학의 손자(孫子)이고 동휘(東輝)의 二男이다. 공(公)은 현종(顯宗) 7년 병오(1666)에 나서 영조(英祖)13년 정사(1737)에 졸하니 향년이 72세였다.公은 천품(天稟)이 영오(남보다 뛰어나게 깨달음)하고 성질이 온정(溫靜)해서 독서(讀書)하기를 좋아했다. 너무 가난해서 의복도 제대로 못입고 목엽(木葉) 으로 발을 싸서 한기(寒氣)를 막으며 송령(솔방울)을 주워다 태워가며 독서를 하니 연기가 얼굴에 끼어서 세수하면 물이 먹물 같았다고 한다. 임술년 公이 17세때 조부인 야계公이 고산 이유장(孤山 李推樟)의 문에 입학시키니 그 先生은 찬양하여 말하되 (입지(立志)를 류동자(柳童子)갈게만 하면 어찌 성공하지 못할까)고 했다. 기사년(1689)에 향시에 통과하고 숙종(肅宗)20년 갑술(1694)에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전적(典籍)과 화랑(住郞)을 거쳐 황해도사 (黃海都事)로 취임하니 그 지방사람들이 청탁하기를 좋아해서 뇌물을 가지고 온 자가 있으면 형장(刑杖)으로 치니 그뒤로는 그 풍속이 없어졌다. 그리고 용강현령(龍岡縣令)이 되어서는 감세(減稅)를 하고 권학(動學)을 하여 그의 치적이 드러나 다음은 한산(韓山)군수(郡守)로 가니 그곳은 험악해서 난치(難治)한 지방이나 억강부약(抑彈府弱)하는 처사를 해서 민심(民心)이 감화되었다. 영조1년 을사(1725)에는 풍기군수로 가니 그곳은 친구의 향(鄕)이나 오직 법대로만 평치(平治)해서 비록 친속(親屬)이라도 사정(私情)을 쓰지 않았다 公은 일찌기 순흥의 죽계(竹漢)의 산수를 좋아해서 그곳에 정거 (定居)하였던 것이다. 영조3년 정미년(1727)에는 양양부사(襄陽府使)가 되니 대관령에는 도적의 소굴이 있었다.그 적도에 부종(附從)하든 산맹(山氓)을 통해 탐지하여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處刑)하니 부내(府內)가 안도 하였다. 영조4년 (1728) 이인좌의 역난(逆亂)이 일어나매公이 병서를 연구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기도 했기에 부내(府內)사대부들이 (公은 진실로 문무의 겸재(兼材))라고 했다. 양양은 산과 바다의 물산이 풍족하여 공물(貢物)을 진상할때면 봉하고 나머지는 백성(百姓)에게 돌려주었다.한번은 갈은 고향사람이 국유림을 살피는 황장경차관(黃腸敬差官)으로 양양에 왔는데 진봉 (進封) 하고 남은 나무로 관재를 마련하라고 했는데 公은 이를 거절하자,그 아들에게 주었으나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고 역시 거절(拒絶)하였다. 公이 졸함에 자신올 위해 준비해둔 것이 전혀 없었음으로 조객(弔客)들이 모두 그청백함을 못내 감탄했다.公은 그 兄 정시(正時)의 병에 손수 뱀을 잡아 대접하였고, 그조카들을 친아들처럼 돌보았다. 일가 친척(親戚)을 만나면 촌수가 멀어도 항렬(行列)이 높으면 공손히 절하고 끓어 앉았다.公은 고훈(古訓)을 즐기고 근사록(近思錄),심경자경편(心經自警篇) 등을 읽었다. 저서(著書)에는 함벽당집 二책이 있다. 영남사림(嶺南士林) 전주류씨인물 류경시(柳敬時 ; 1666∼1737) 자는 흠약(欽若). 호는 함벽당(涵碧堂). 증조가 의병 우잠(友潛)이고, 할아버지는 학(嵩)이며, 아버지는 동휘(東輝)이다. 1694년(숙종 20) 10월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의 복위를 계기로 실시된 별시문과에 유학(幼學)으로 병과 12인에 급제하였다. 문한관 (文翰官)과 외직을 거쳐 1732년(영조 8) 장령(掌令)에 올라 김정(金囚)·김시발(金時發)의 옥사를 변명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 국휼(國恤)에 불참하였다 하여 사직(司直) 이재(李縡)의 탄핵을 받아 이하원(李夏源)·이광도(李廣道) 등과 함께 불서용(不敍用)의 처벌을 받았다. <국조 문과 방목> 유경시(柳敬時) More Info. 숙종(肅宗)20년(1694년), 별시(別試) 병과12(丙科12) >>> 인적사항 생년(生年) 1666년, 병오 자(字) 흠약(欽若) 호(號) 본관(本貫) 전주(全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유동휘(柳東輝) 생부(生父) 조부(祖父) 유학(柳<0x3DFE>) 증조부(曾祖父) 유우잠(柳友潛)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황창술(黃昌述)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유학(幼學) 품계(品階) 관직(官職) 장령&(掌令&), 부사&(府使&) | ||||
묘(墓) | |||||
부(父) | |||||
모(母) | |||||
배(配) |
배위는 창녕황씨(昌寧黃民)이며 슬하에 一子가 있으니 진현 (晉鉉)이고, 주손(?孫)은 건기(建基:정오생 1930)이다.묘는 가야(佳野)후산 임좌(壬坐)이며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가 찬갈하다. | ||||
자(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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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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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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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유경시(柳敬時) #경상도(慶尙道) 안동(安東) *낙연서원(洛淵書院) 정조갑진건(正祖甲辰建). 제향. 이유장(호고산 익찬 증이판 본전의). 김 간(호죽봉 판결사 본풍산). 유경시(호함벽당 청백이 부사 본전주). 祭享. 李惟樟(號孤山 翊贊 贈吏判 本全義). 金 侃(號竹峯 判決事 本豊山). 柳敬時(號涵碧堂 淸白吏 府使 本全州). 2. 13세 류경시(柳敬時) 涵碧堂柳公敬時墓碣銘 公諱敬時字欽若姓柳氏本文化人自中世移籍全州麗朝有諱克恕寶文閣直提學我世宗朝有諱義孫集賢殿學士贈吏曹判書以弟執義贈參判諱末孫子諱季潼爲嗣贈都承旨三傳至諱復起從內舅鶴峰金先生學贈左承旨是爲公高祖曾祖諱友潛賢而隱祖輝木學有至行考諱東輝?漢陽趙氏進士諱廷珩女顯宗丙午十一月十三日生公幼穎秀甫受書能屬文語驚人稍長攻苦力學嘗入山讀孟氏書出見山木皆成卷中字甲戌擢別試科內而成均典籍禮曹佐郞司憲府掌令外而黃海平安兩道都事龍崗縣令韓山豊基郡守襄陽順天府使其仕歷也爲黃海都事有以其子囑都會試者賂以○杖其人罰其子使不得赴試爲平安都事敦文敎勵士風江西令尹淳?都會考官語公曰今試無有以私干者亞使效也差檢?官歷視被?諸邑傷愍之意至發篇什報道伯多?虛稅西民感頌爲龍岡士曰是嘗課吾學也氓曰是嘗?吾稅也相率來謝縣有支?銀錢鉅萬散給民間收其??不入則責隣族逋亡相踵公至則割俸得入千緡錢擇授縣中?勤者主?散取?以償之期償盡乃巳公旣去新守趙相顯命曰此大惠也出錢二千緡以益之還朝盛言公治行爲韓山用善治陞也韓號難治而寬猛互施吏民畏懷有道伯姨弟而以事干者持道伯囑簡來在坐公察其不法狀叱令?下着枷?之庭具狀報營道伯患之移其訟他邑爲遮護計而公呈辭狀力爭竟置定配律聞者快之爲豊基不屈法爲故舊地益恤?祛?爲民惠爲襄陽奸究作賊盤結數郡??閭吏不敢近公鉤致良民之?而賊者諭使自新授方?譏?以告官卽發吏襲捕戮渠鬼三人及尤無良者數十人賊悉平照惠肅殺以?民境內乃安戊申逆變起圻湖營關?繕戎以待時昇平己久武士不識陳法公取??諸書夜講究晝出操鍊居數日軍容可觀府之士大夫??歎曰公可謂文武兼才府有山海産月俸上供膳而封有剩則還給浦氓凡官俸之非不可己者悉爲?浦氓私獻異味則戒曰奈何納不索物啓日後患耶却不受浦出二巨鯨搾油爲賑荒資浦氓??城人曰海神監我使君至誠爲饋二鯨魚?人笑曰是浮吾境而恐爲納官??之者豈海神饋耶士聞之曰?人之笑乳穴人之笑不祥也坐定配罪人逃?罷歸民欄路悲泣不忍送爲順天甫赴任以會經侍從未?王大妃哭班論罷道伯惜其去欲狀請因任公卽解印緩發歸爲掌令因辭疏極言歲饑民困有??之勢宜退俸甚?邑正供之半以待秋成後祛偏黨懋平蕩本人主一心願秉公正若權衡導率?臣用臻大猷之域語甚?切上賜優批趙公德隣以書賀曰有言責者如是庶不負朝家置臺閣之意盡公施於世而?出其所蘊者如此嘗慟二親未逮養無宦達意而遵遺敎應擧伯氏病須蛇手捕蛇作脯嘗而後進?孤猶子若巳子遇宗黨篤厚母論戚?近苟尊行則拜?甚謹事有絲毫涉非義者若脂毫染嘗赴會試圍有德公而欲爲之報者就公索試製文其意欲囑考官中選也公據義責不肯視同鄕人差黃腸官至襄陽勸公得棺材付海船公笑曰宰襄陽者必入襄陽木耶不聽又以語公之子曰大人之所不欲有不敢爲道伯李衡佐聞之曰不獨父賢乃其子亦賢子也有以廉白譽公者謝曰終身資而生者皆官物而敢居是名乎然公歿附身需無素具弔者驚歎盡公制行律已之大?如此早遊孤山李先生門多所警發謁愚潭丁先生先生寢疾語人曰聽某論經旨覺??祛體喜古訓嘗讀近思錄心經自警篇等書在官不廢盡公質性之美資之問學之工爲多者如此丁巳四月八日卒壽七十有二用其年六月二十四日葬家後向巽原配昌原黃氏?奉昌述女婦道甚備嘗從公韓山任値生日吏進膳及○幣郡例也夫人却不受公喜曰吾非廉吏乃夫人廉也先公三年卒葬家西坐庚原男晉鉉生員壽職僉知女金龍欽李元麟朴性履南斗精側室女金砥河晉鉉男思永弘源會源女李世臣崔南重金龍欽男秋漢女鄭種學權思兼任亨大權省度李元麟男弘慶弘天弘能女李重維金坰孫相龍兵使朴性履男?女李重魯弘源男晟休繼思永后雨休顯休是休簡休冕休會源男霽休餘不錄晟休以狀來請銘公墓銘曰有守干我不以易時有蘊如玉而以璞施有師爲歸奚?不知有欲考公視此銘詩 通訓大夫前行吏曹參議 錦城 丁範祖 撰 [海左先生文集 丁範祖, 涵碧堂先生文集 柳敬時] 함벽당류공경시묘갈명 공의 이름은 경시(敬時)이고, 자는 흠약(欽若)이다. 성은 류씨(柳氏)요, 본래 문화인(文化人)이었으나 중세(中世)에 전주(全州)로 적을 옮겼다. 고려 때 류극서(柳克恕)는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으며, 조선 세종 때 류의손(柳義孫)은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으며, 동생 집의(執義) 말손은 참판(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말손(末孫)의 아들 류계동(柳季潼)은 양자로 가서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3대를 내려와 류복기(柳復起)는 외숙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류우잠(柳友潛)은 현명했으나 은거하였고, 조부 류학은 행실이 뛰어났다. 부친은 류동휘(柳東輝)이고, 모친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진사 조정형(趙廷珩)의 딸이다. 공은 1666년(현종 7) 1월 13일생으로,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총명하여 처음 책을 받자마자 글을 지을 수 있었고 하는 말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점점 자라서는 각고의 노력을 하며 힘써 공부하였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맹자(孟子)』를 읽다가 나와 보니 산의 나무들이 모두 책 속의 글자가 되었다고 한다. 1694년(숙종 20)에 별시과에 급제하여 대궐 안에서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예조좌랑, 사헌부장령을 지냈고, 대궐 밖에서는 황해도·평안도도사(都事)와 용강현령, 한산·풍기군수, 양양·순천부사를 지냈다.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 아들 때문에 회시(會試)를 감독하는 사람을 사적으로 불러 새매를 뇌물로 준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곤장치고 아들을 벌주어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평안도도사로 있을 때에는 문교(文敎)를 도탑게 하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키니, 평안도관찰사 윤순(尹淳)이 도회(都會)를 보는 곳에 참석하여 공에게 말하길 “이번 시험에서 사적으로 구한 사람이 없는 것은 공의 덕분이라.”하였다. 검재관(檢災官)에 뽑혀서는 여러 읍의 근심걱정들을 살핀 뒤 서류를 작성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헛된 세금을 많이 덜어내니, 서북의 백성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용강현령이 되니, 선비들은 “예전에 나의 학문을 진작시키셨다.”라고 말하고, 서민들은 “예전에 나의 세금을 덜어주셨다.”라고 말하며 서로 와 사례하였다. 현에는 칙사(勅使)를 접대하는 은전(銀錢) 몇 만이 있었는데, 민간에 나누어 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이자가 들어오지 않으면 이웃과 친척까지 꾸짖고 도망간 이를 잡으러 다녔다. 공이 이르자 녹봉을 쪼개어 8천 꿰미를 구한 뒤 현의 성실한 자를 택하여 주고서는 흩어진 돈을 거두는 것을 주관하게 했다. 이자를 받아 없어진 돈을 메우고, 메우는 것이 다 되면 그만두었다. 공이 떠난 뒤 새로운 수령 조현명(趙顯命)이 “이것은 큰 은혜다.”하고는 2천 꿰미를 내어 더해주었다. 공이 조정에 돌아오자, 공의 치적을 성대히 말하였다. 한산군수가 된 것은 잘 다스려서 승진한 것이다. 한산은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불렸는데, 관대함과 엄함을 함께 시행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 사모했다. 도관찰사의 이종사촌 중 일을 구하는 자가 있어 관찰사의 부탁 편지를 꾸며서 가지고 왔었다. 공이 그 불법 문서를 살피고 꾸짖으며 잡아가두라 명한 뒤, 칼을 씌워 뜰에 꿇어앉히고 서류를 갖춰 감영에 보고했다. 관찰사가 걱정하여 그 송사를 다른 읍으로 옮기고 비호하려 했으나, 공이 사령장(辭令狀)을 올리고 힘껏 싸워 마침내 귀양에 처하게 하니 듣는 사람들이 통쾌해 했다. 풍기군수가 되어서도 법에 굴하지 않고, 연고 있는 옛 땅이었기 때문에 더욱 병폐를 제거하는 데 힘써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양양부사가 되었을 때, 도적들이 안팎으로 어지럽히고 몇 개의 군에 걸쳐 있으면서 마을들을 약탈하였으나 관리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공이 양민 중 속아서 도적이 된 자들을 불러 가르치고 스스로 새롭게 되게 한 뒤, 그들에게 염탐할 방책을 주고 관에 고하게 하여 관리들을 내어 습격하였다. 괴수 3인 및 특히 불량한 자 수십 명을 죽이니 적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따뜻하게 은혜를 베풀고 엄하게 대하며 백성들을 바로잡으니, 양양부 지역이 편안해 졌다. 1728년(영조 4)에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기호지방의 감영에서는 군대를 정비해 시기를 기다리라는 칙령이 내렸다. 태평한 세상이 오래되어 무사들이 진법을 모르자, 공이 병서들을 가져다 밤새도록 연구하고 낮에 나와 군사를 훈련시켰다. 며칠이 지나 군대의 위용이 볼만해지니, 부의 사대부들이 칭찬하고 감탄하며 말하길 “공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부에는 산과 바다의 산물이 있어 매월 공물을 바쳤는데, 봉하여 남는 것이 있으면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관의 공물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모두 이렇게 덜어냈기 때문이다. 백성들 중 개인적으로 특별한 것을 바치면 주의를 주며, “어찌하여 찾지 않는 물건을 바치는가? 후환을 만들려는가?”하고 받지 않았다. 포구에서 큰 고래 두 마리가 나와 그것에서 기름을 짜 구황(救荒)의 자금을 만들었다. 양양의 백성이 간성(杆城) 사람에게 말했다. “바다의 신이 우리 사또의 지극한 정성을 보고 고래 두 마리를 대접한 것이오.” 간성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우리 지역에서 떠오른 것인데, 관에 바치고 버린 게 아닌가 하오. 어찌 바다 신이 대접한 것이겠소?” 선비가 듣고는, “간성 사람의 우스개는 젖먹이 수준이지만, 동굴에 사는 사람의 우스개는 상서롭지 못하다.”하였다. 공이 유배 가는 죄인이 구호책으로 한 말에 연루되어 파면되어 돌아가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길을 막고 슬피 울며 차마 보내니 못했다. 순천부사가 되어 막 부임했는데, 일찍이 시종신(侍從臣)으로 있을 때 왕대비(王大妃)를 곡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파직이 논의되었다. 관찰사가 떠나는 것을 애석히 여겨 장계를 써서 부임할 것을 청하려 했으나, 공은 즉시 인끈을 풀고 귀향하였다. 장령(掌令)이 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려 다음의 내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니, 위태로운 형세입니다. 마땅히 심하게 재난이 든 읍의 공물은 반으로 줄이고 가을추수한 후를 기다려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붕당을 없애고 탕평에 힘쓰십시오. 본래 임금의 마음은 한결같으니, 바라건대 저울처럼 공정함을 잡아 군신들을 이끄시어 여럿을 모아 큰 계책을 세우십시오.” 그 말이 매우 간절하여, 임금께서 좋은 비점을 내려주셨다. 조덕린(趙德?)이 편지로 축하하기를, “말로 책선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군요. 바라건대 조정에서 대각(臺閣)을 둔 뜻을 저버리지 마십시오.”하였다. 공이 세상에 베푼 것은 대개 이와 같이 온축된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찍이 부모님을 봉양하지 못하게 된 일에 애통하여 벼슬길에 뜻이 없다가 남기신 가르침을 따라 과거에 응하였다. 형이 병이 들어 뱀이 필요하자 직접 뱀을 잡아 포를 만들어 맛본 후에 올렸고, 조카들을 친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종중들을 대할 때에도 독실하고 돈후하여 촌수의 가깝고 먼 것을 막론하고 항렬이 높으면 절하며 매우 공손하였다. 일에 한 오라기라도 불의한 점이 있으면 기름에 물든 것처럼 여겼다. 일찍이 회시(會試)에 응시하였는데, 공에게 덕을 입을 자가 있어 이를 보답하고자 공에게 나아가 공이 지은 글을 찾았다. 시험 감독관에게 선발하기를 부탁하려고 한 것이다. 공은 의(義)에 의거해 꾸짖고 보여 주지 않았다. 동향 사람 중 황장관(黃腸官)으로 뽑힌 사람이 양양에 이르러 공에게 관으로 쓸 목재를 얻어 배로 부칠 것을 권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길, “양양을 다스리는 사람이 반드시 양양의 나무에 들어가야 합니까?”하고 듣지 않았다. 또 이 말을 공의 아들에게 하니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감히 할 수 없습니다.” 관찰사 이형좌(李衡佐)가 듣고는 “아버지만 현명한 것이 아니라 아들도 현명하구나.”하였다. 청렴결백으로 공을 칭찬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사례하며 말하길, “종신토록 도움 받고 사는 것이 관의 물건이니 감히 이 이름을 받겠습니까?”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함께 묻을 평소 쓰던 물건이 없어 조문객들이 경탄하였다. 공이 자신을 절제하고 바로잡음이 대략 이와 같았다. 일찍이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선생의 문하에서 노닐어 깨달은 바가 많았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은 병중에 계시며 주변 사람에게 말했다. “누가 경의 뜻을 논하는 것을 들으니, 고질병이 몸에서 떠나는 것을 알았다.” 공은 옛 가르침을 좋아하여 일찍이 『근사록(近思錄)』, 『심경자경편(心經自警篇)』 등의 책을 읽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도 폐하지 않았다. 공은 본성의 아름다움에 바탕하여 학문의 공을 더한 것이 이와 같이 많았다. 1737년(영조 13) 4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이다. 그 해 6월 24일에 집 뒤 동남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창원황씨(昌原黃氏) 참봉(參奉) 황창술(黃昌述)의 딸로 부인의 도를 매우 잘 갖추었다. 일찍이 공의 한산 부임지에 갔다가 생일을 맞았다. 아전들이 선물 및 모시를 바치는 것이 군의 관례였는데, 부인은 물리치고 받지를 않았다. 공이 기뻐하며 말하길, “내가 청렴한 관리가 아니라 부인이 청렴한 관리군요.”하였다. 공보다 3년 일찍 돌아가셨고, 집 서쪽의 서쪽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류진현(柳晉鉉)은 생원(生員)이었고, 수직(壽職)으로 첨지(僉知)가 되었다. 딸들은 김용흠(金龍欽)·이원린(李元麟)·박성리(朴性履)·남두정(南斗精)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에게 딸이 있었는데 김지하(金砥河)에게 시집갔다. 류진현의 아들은 류사영(柳思永)·류홍원(柳弘源)·류증원(柳曾源)이고, 딸은 이세신(李世臣)·최남중(崔南重)에게 시집갔다. 사위 김용흠(金龍欽)의 아들은 김추한(金秋漢)이고, 딸은 정종학(鄭種學)·권사겸(權思兼)·임형대(任亨大)·권성도(權省度)에게 시집갔다. 이원린(李元麟)의 아들은 이홍경(李弘慶)·이홍천(李弘天)·이홍능(李弘能)이고, 딸은 이중유(李重維)·김경(金坰)·손상룡(孫相龍)에게 시집갔다. 박성리(朴性履)의 아들은 박평(朴坪)이고, 딸은 이중로(李重魯)에게 시집갔다. 손자 류홍원은 아들 류성휴(柳晟休)가 류사영의 양자로 들어가고 나머지 아들은 류우휴(柳雨休)·류현휴(柳顯休)·류시휴(柳是休)·류간휴(柳簡休)·류면휴(柳冕休)이다. 류증원의 아들은 류제휴(柳霽休)이다. 나머지는 적지 않는다. 류성휴(柳晟休)가 가장(家狀)을 들고 와 공의 묘소에 명(銘)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명(銘)을 지어 말한다. 나에게 지킴이 있어, 때에 따라 바꿀 수 없네. 옥 같은 온축됨이 있으니, 박옥으로 펼치네. 귀의할 스승 있으니, 어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성내리오. 공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이 명시(銘詩)를 보시오. 통정대부 전 행 이조참의(通政大夫前行吏曹參議) 금성(錦城) 정범조(丁範祖)가 짓다. [해좌선생문집 정범조, 함벽당선생문집 류경시] 3. 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涵鏡堂先生柳公敬時行狀 公諱敬時。字欽若。姓柳氏。其先文化人。中世掌令諱濕。始籍全州。生諱克恕。麗朝寶文閣直提學。生諱濱。入我朝。官直提學贈參判。生諱義孫。世宗朝。選入集賢殿提學。贈吏曹判書。無子。以弟執義贈參判諱末孫子諱季潼爲後。贈都承旨。生諱軾。弘文館典翰贈參判。生諱潤善。秉節校尉。生諱城。始卜居于安東之水谷。贈司僕寺正。生諱復起。從舅鶴峯金先生學。號岐峯。贈左承旨。於公爲高祖。曾祖諱友潛。隱德不仕。號陶軒。祖諱?。有至性。幼時親患斷指。金公克亨爲著刀子說。號天台老人。考諱東輝。?漢陽趙氏。進士諱廷珩之女。公以崇陵丙午十一月十三日。生于水谷里第。幼端秀穎悟。?能言。便曉文字。授史略數板。已能屬文。語多驚人。性?靜。喜讀書。長者慮其生病。時令止讀。輒復默誦不已。家甚貧。被服不完。以木葉裏足禦寒。手拾松鈴。?裡書。烟氣上面。朝起??。水如墨黑。戊午。遭母喪。公年甫十三。而季弟方在襁褓。公哭?號慕之餘。輒手器求乳於隣里。又自含飴而止其啼。見者莫不酸鼻。隣婦爲之來乳。旣免喪。讀孟子于開目寺。及出山。山門木葉。盡成孟子書。就寢合眼。字字眩花。不能成寐。鳩巢權公聖矩聞之。以書嘉奬。勸讀他書以已之。自是。文藝蔚然。行業日進。壬戌。以天台公命。負?于孤山李先生之門。先生?加奬許曰。立志如柳童子。何患無成。嘗隨諸名勝。做工山房。京人有文鑑者。見公策草。彈指久之。歸語人曰。諸人中有一童子。其人如玉。其文如其人。早年策名。必此童子也。又有異僧遇公於路中。拜之曰。秀才他日。當作名大夫也。癸亥。處士公下世。公哀毁踰制。殆不可支吾。天台公甚憂之。命進肉汁。公承命?食。輒吐出。不能下咽。戊辰。天台公又下世。自是無復有進取之意。伯氏以遺意。勸令應擧。己巳秋。魁鄕解。隨計入洛。自會圍出。有一京人來見。欲知試製頭辭。蓋此人曾謫嶺南得死病。賴水谷人生還。而覆試試官。乃其至親。欲因此而報其厚意。公正色曰。吾族之當初救拔。非但出於急人之意。實以公爲可人也。今反欲陷人於不義邪。其人?謝而去。甲戌別試。及第出身。辛巳。除典籍。丙申。遷禮曹佐郞。出爲黃海都事。西路風俗。喜請囑。有長淵人。以其子私謁曰。都白不遠。願公留意也。公斥退之。其人又臂鷹而進之。乃拿入杖之。發關停擧。一路悚然相戒。不敢復爲請囑事矣。戊戌。拜平安都事。方伯以一道文敎。專委於公。公考其勤慢。勵其廉恥。江西令尹淳。爲都會參試。向公言曰。今番都會。無一人請托。亞使勵廉恥之效也。秋發?祥覆審之行。秉法不饒。列邑風生。到江東。以病滯留服藥。有一邑宰。因公親厚之人。送人蔘一斤。公却之曰。吾旣有病而服藥。若其量入送助者。則不必固辭。而今所贈若是?然。是貨之也。本?爲政。擧此可知。卽欲啓罷。其人漸懼。使人?謝不已。病少間。卽發行。見江邊列邑被?特甚。爲吟一絶曰。王事馳驅度?原。平明跨馬抵黃昏。荒年若不?虛稅。黎庶何知戴聖恩。遂論列營門。多所?免。西民莫不稱頌。辛丑。除龍岡縣令。旣赴任。一路儒士皆曰。此前日勸學之柳亞使也。爭來請業。江邊列邑之民。亦皆相率來拜。以謝前日?稅之恩。縣有支?庫。畜藏銀錢累鉅萬。前後守宰。私自流幣。以開貨殖之路。末業之類奔趨。獲其?利則償之。不償則逃匿。徵族徵隣。流散者相望。公知其爲一邑痼弊。爲設償債廳。割俸祿得八千緡。擇邑中之忠信可仗者八人。主管斂散。取?償債。期以償盡。卽罷廳。公旣拜他郡新官。趙公顯命曰。此大惠也。亦出錢二千緡。補其不足。還朝。盛言公治行爲當今第一云。癸卯。以善治。陞拜韓山郡守。湖邑素稱難治。公初到。頗尙嚴猛。後乃務存寬恤。邑民畏威。懷惠。境內大治。有京居金姓人。以推奴事。持?相權以寬。囑柬而來。金卽?相之姨從。而時太宰之甥姪也。公延見禮待。金請官使令。公不許。翼日。金又來見。忽有被髮流血而伏於庭下者。問之則乃金之贖奴而被杖於金者也。金色動曰。彼漢瞞告。幸勿聽也。公不應。取考文券後。令拿金而下。金高聲大喝曰。老兄待我如是。將何以爲之。公曰。汝爲法庭罪人。安敢言老兄。奴婢再贖。私門凶杖。俱有法律。不可貰也。著大枷?之庭。卽呼草報狀。刻期發送。當日烈寒折綿。金寒凍垂死。乃拘留村舍。代囚其二奴。金跳往營門。言韓山守朔望用禁肉。?相曰。韓山秉法之人也。汝必犯法而見敗矣。言未巳。報狀來到。乃依例回題。別作書以謝之。移定査官。公連呈辭狀。爭之不已。營門不得已以?勢壓良。照律定配。聞者快之。甲辰。以御營軍布逋欠事。罷還。蓋事在兼官時。而公不自明也。乙巳。除?基郡守。?是嶺底弊邑。而爲親舊之鄕。公到郡。爲之蘇殘去?。嚴立科條。雖姻?親屬。必裁之以法而無所貸。俄以事罷歸。嘗愛興州竹溪山水。有老焉之志。至是仍家焉。丁未秋。除襄陽府使。相臣送之曰。江襄之間。土賊橫行。至不可制。今以公爲守。不足憂也。及到官。果聞賊黨自黎婆嶺至大關嶺。巢窟相連。殺越人命。焚燒村廬。近峽之民。擧爲脅從。至於民與賊不可辨矣。公與江陵守金公?政 合勢?捕。終未得一賊。而剽掠愈甚。公乃密召山氓諭之曰。汝等皆入賊黨。都目官方夷賊之律治汝輩。汝輩將如何。山氓皆涕泣曰。小人等本是良民。豈有從賊之心。而爲其所脅。不能自拔。願明府指示可生之路。公曰。官家亦知從賊非汝本心。故姑不繩夷賊。汝輩若求自新之路。一從官令可乎。咸曰。諾。乃?左右。招入其稍慧者數人。授以方略。或標其所著。或?其出入。或誘以致之。或乘而襲之。與官將校。相爲表裏。未一旬。果獲魁賊三人。自後?捕相屬。伏法者數十人。賊徒駭散。無復有?警。於是宣布惠信。申嚴敎令。邑人洽然從令。民有從兄弟爭第宅者。公以閉閤思過之意。下帖境內。其人感悟。待罪官門求自新。乃責諭而遣之。又有李氏者。憑藉營門。欲掘久遠之塚。公據法論報。監司?到本邑。將發卒掘之。公極言其不可。竟不能掘。李亦不敢怨也。居官一年。政淸事簡。每朔?。行?闕禮。次謁先聖廟。試文武士於太平樓。佳時吉日。則與鄕父老。嘯?於峴山大堤之間。風流都雅。不知郡符之在身。戊申春。作楓岳之遊。歸路。得?營秘關。知畿湖逆變。疾驅還官。別關又來到。戒以??軍政。且曰。列邑軍器之修鍊。無如襄陽者。如有發軍之令。則襄陽當居前。公修治軍器。精利可用。故云。公乃悉呼大小民人。勉以忠義。刻日聚軍操鍊。時昇平日久。無有曉解陣法者。公取兵學指南,兵機鍊要等書。講求略遍。夜則招軍任輩。敎以旗招鉦鼓之令。方圓坐作之法。晝則操習于沙場。如是五日。軍容有可觀者。李承宣彙晉,崔正言逵泰。見而歎之曰。柳公可謂文武兼材矣。俄聞王師已?賊。設?師於太平樓下。以南將軍延年罵賊不屈歌詞。被之絲竹。以爲樂府故事。本府處山海之間。朔膳及方物封進。無月無之。前此多有生事之患。自土賊平定之後。峽氓樂赴。有獵必獲。其封進羚羊角。請?納其皮。公却之曰。貢角已是甚艱。何可兼取其皮。以啓無?之弊邪。海獺皮封進。亦爲本邑鉅弊。每獵捉時。發六津漁船。遮結南川海口。以遊船五六隻。上下鼓?。?獺崩駭跳出。則擊刺取之。公與杆城?同舟觀獵。日未暮。獺塡海口。?取十二頭。公遽命罷獵曰。已足封進之數。何必盡物取之邪。時關東失稔。方以賑資爲憂。忽有二長鯨浮出海上。?油得二百石。以補賑資。餘以貿來牟。分給飢民之不能耕種者。浦氓謂杆城海尺曰。我使君至誠恤民。海神爲送二鯨魚。杆人笑曰。此實浮于杆境者。而恐爲海戶之弊。?之海中。豈是海神之送汝境者乎。林泉李承宣聞之曰。杆人之所笑。眞是乳穴民之笑。非祥也。海戶所供。只存官之不可已者。餘悉?之。魚有大者。則輒還給曰。官用則雖小無害矣。浦氓相與?曰。他等時。每患大魚之不得。此等時。則惟患小魚之不得。嘗於東宮葬禮時封進大魚。餘又還給。海尺曰。封餘還給非例也。且願一納大魚。公笑而受之。客有言海紅爲東海絶味。願得嘗之。公曰。滿盤海味足矣。何必求食海紅。以啓後弊邪。有一海民。苞納??臍二具。以官無藥用。?而不受。且戒之曰。汝何自納不索之物。以爲汝等日後之患邪。前例有雪馬之獵。所獲甚多。嘗於大雪後。該吏請依例出獵。公曰。若事關進封。則不得已爲之。至於官獵。則擧廢在我。豈有前例之可言邪。己酉冬。以爲奴罪人逃?事。江襄杆三邑。一時狀罷。公見營關。卽發對吏之行。夫人以病留調私邸。村巷婦?。持饌味餠果。迭相來問。發行之日。街路塡塞。至有涕泣不忍送者。行至洞山。里民人方治善政碑。皆遮拜泣送曰。吾屬何時更見我?侯也。公當寒就理。身無重?。而?起寒廳。首尾二十四日。獄中有先生房。同囚諸人皆入處其中。要與公同之。公曰。吾性耐寒。不以爲苦。諸人皆曰。嶺人之固執也。事旣解。還竹溪寓舍。養閒授徒。爲終老之計。辛亥。値歲大無。資活無計。不得已捲歸于嘉野舊居。是年春。拜司憲府掌令。爭上辭?。因陳時務之要。其略曰。今年凶?倍於乙丙。臣在鄕里。日夕所聞見者。無非可愕可驚可慽可悲者。昔宋臣鄭?以監門之賤。尙能爲圖而進其君。?臣人雖至微。職則言責。而受恩非常者乎。夫民之有恒?者絶少。無恒?者居多。雖?年樂歲。常患事育之不贍。?今振古所無之殺歲。民安得不?且?哉。老幼攀牽。或五六爲?。或十數爲?。流散四出。甚至街路之上。赤子多棄。白晝之間。剽掠公行。間有自活之家。以時擧火。持瓢之徒。塡溢門巷。蹴?之與。或未遍及。則輒懷憾怒。潛火其家。奠居之民。晝夜憂懼。忘寢廢食。如備大盜。若此危?之狀。亦乙丙之所無者也。臣之待罪襄陽也。關東少飢。自朝家割給一年耗?。全數歸之賑民。臣宣布德意。分給民間。一境民物。莫不感戴。至今稱頌朝家意不衰。仁政之入人深者蓋如此。殿下旣行之於往年。收其顯效者。何不又命之於今日邪。夫大同田稅。乃是惟正之貢。經費之資。固難裁損。而卽今民間赤立。有同刮毛於龜背。臣愚以爲諸路中尤甚者。三稅大同。姑爲折半退捧。以待秋成之後。則民力有稍?之幸。國用無永?之患。此亦便民之一大惠政。伏乞殿下留念焉。至若蕩平二字。旣堯舜禹湯文武不偏不倚大公至正蕩蕩平平之道也。萬世帝王之盛節。孰有大於此者乎。殿下卽祚以來。欲革數百年痼弊。首建此議。遠近聽聞。孰不曰太平可復見於今日也。惜乎。人心之不同。如面目。言議之不?如鑿?。獨使至尊憂歎於上。臣竊痛之。雖然。殿下之率之也。亦近於捨本取末。苟殿下克去一毫之偏私。懋回十分之公正。是非好惡。若止水權衡。?下敢不精白一心。同寅協恭。以臻大猷之域哉。?或不然。徒以爵祿?之。雷霆加之。雖日陞而日黜之。恐不能齊不齊之心歸之一也。上下批優答。前後四上辭?。而有懷必陳。言益?切。玉川趙公德?。以書賀之曰。有言責者。每人如是。則庶不負朝家置臺閣之意矣。七月。拜順天府使。到官未幾。以曾經侍從。不參王大?哭班見罷。方伯適?到本府。方治困任狀啓。公知之。卽解印符。爾袍笠子。往見方伯。浩然而歸。宅傍有故康將軍希哲園亭。卽所謂涵鏡堂也。有退陶先生題詠。後爲權氏所有。公以資易之。復其故沼。列植花竹。與冠童嘯?其中。樂而忘憂。子弟請改堂號。公曰。修葺旣仍舊制。堂號亦仍舊何傷。丁巳四月初七曰。有?節。命寫諸處輓章。分封訖就寢。中夜卒革。扶起進藥。反席未安而卒。初八日某時也。享年七十二。以六月二十四日。奉?于家後巽向之原。會葬者四百餘人。公儀貌端凝。性度剛方。假僞矜肆之態。不設於身。鄙俚?雜之語。不出於口。身長不踰中人。而儼然人望而畏之。自敵以下。不敢面出?言。少時氣調豪邁。晩來濟以寬和。平居靜默。渾厚周實。無甚廉稜。而及其剖判義利。一劒兩段。未嘗有回互遷就之意。孝友之行。出於天性。幼時著墨子傳。蓋言墨子之功。可以立揚顯親。而自傷其慈母捐背。無以報?勞之恩。辭甚悽切。鳩巢公見之曰。此兒之作。非但有辭彩。使有風樹之感者。不忍讀也。與伯季氏同其苦樂。如手如足。伯氏嘗??疾。子弟請公出避。公曰。兄病濱危。吾何忍棄去。親執藥物。晝夜不離側。凡數十日。而病亦不染。伯氏又患??。聞蛇之黑質白章爲良劑。遇之。輒手自捕殺。作膾。先嘗而後進之。果得神效。伯氏旣歿。撫恤諸孤。無間已出。每解官歸。斥賣章服轎傘之屬。分與諸姪。其處宗黨。曲有恩意。嘗以故土稍間爲恨。有時思起。輒命駕入水谷。家人請歸期則曰。吾往吾家。何問歸期。先至宗家。拜祠廟。次謁門尊。退與諸親隨處觴詠。以?離闊之情。其?房遠親。?殘歸農者。亦不輕視。苟爲尊行。必下階趨迎。讓以奧席。事之如嚴父兄。其在州郡。時節之饋。遍及?族。鄕?交友。亦皆各有問遺。而歸?則蓋洗如也。解官之日。往往無夕炊之資。再從姪?窩公。從容言曰。淸白固吾家長物。而常祿亦不必辭。公之居官。無或近於苦淸者乎。公笑曰。異日君淸。必苦於我。君可謂責人則明也。其任襄陽也。有女新嫁。就衙後隙地種紅藍花開。欲摘以染裳。公曰。時方呈辭?歸。出住私次。衙內之物。不可取也。女曰。然則此紅花誰可摘之。曰。吾但不取而已。某人之摘。非所知也。有?鄕人爲黃腸敬差。言於公曰。吾以封餘壽板。船載海運。本官亦以餘板付之。可謂順便矣。公笑曰。爲吏襄陽。則必入襄陽之木邪。敬差又言於上舍公曰。尊丈則以自己壽板之故不欲也。君則爲親事也。不必固辭。上舍公曰。父所不欲。子不敢爲也。方伯李衡佐聞之曰。不惟使君?也。其胤子亦?矣哉。凡?州郡。書冊亦未嘗印取。幼孫輩求借日課冊子不得。曰。爲官雖不可近銅臭。獨不可取書冊乎。公聞之曰。非銅臭而可以取書冊乎。但勤於書則書冊自隨耳。其於世俗紛華。泊然無所好。非在官時則食不重肉。或有二味登盤。則輒捨其一。衣服有新美者。輒掛置?架。塵生而不著。夫人有時?領而拂之曰。此衣不著而可洗矣。有一行擔柳骨而衣皮者。常置之座側。經五邑而不改。侍傍者。或言其不堪用。則曰是舊物不欲捨也。下世後。開而視之。則只有書札數束。墨一筆二。兒時袴紐腰帶絶而復結二。弊囊三。見者曰。此可以遺示子孫也。公之淸介儉約有如是者。而常自隱蔽。不使人知之。苟有問者。輒曰。吾之一生喫著。無非官?。何以爲廉吏。以故人不甚知之。及其喪出。棺木不備。襲殮無衣。赴吊之人。無不嗟歎。蓋其處心行事公正廉潔。明白的當。其淸非要譽。其直非沽名。恬於進取。而爵不苟辭。才足經邦。而斂若無能。雖其資質有過人者。學問之力。不可誣也。嘗謁愚潭丁先生。先生深加奬與。及後再進。先生方寢疾。呼入?內。令與其孫聖工甫。討論經旨而聽之。曰。柳君精奧之論。足令??去體也。公遊孤山之門最久。而未嘗有問目。人曰。孤翁之門。以書質疑者相續。君獨不然。何也。公曰。居不甚遠。讀書有疑。則自可躬造。而親承誘掖。何必列箚爲問目邪。居官亦不廢看書。每於簿牒之暇。讀近思錄,心經等書。日有程課。襄陽時。手寫自警編一秩。常置之?案。以資觀省。晩年。惟以訓誨後進爲樂。遠近來學者甚多。隨其才分。各有成就。所著詩文。皆明切簡當。絶無閒剩語。當時諸公。皆以爲有作者典刑。而公未嘗以文學自居。凡有所作。不留草。子弟或從傍收拾。輒呵禁之。配淑人昌原黃氏。參奉諱昌述之女。事大舅甚謹。家貧朝?不繼。無戚戚意。及公歷典州郡。未嘗以一毫累官政。在韓山時。吏進盛饌及細苧布數疋。蓋夫人生朝進饌幣。是郡中故例也。夫人曰。此龍岡時未見之事。且今空官。無所稟白。欲而不受。公聞之曰。吾非廉吏。夫人廉也。先公三年而歿。葬于家西庚坐之原。有一男四女。男晉鉉生?。女金龍欽,李元麟,朴性履,南斗精。晉鉉有三男二女。男思永,弘源,曾源。女李世臣,崔南重。思永早死無子。以弘源子晟休爲後。弘源有六男二女。男晟休入繼。雨休,顯休,昭休,簡休出繼,冕休。女邊益春進士。餘幼。曾源四子。霽休,鼎休,殷休,周休。晟休子懿文。女金宗信。餘幼。雨休子斗文。內外子孫總若干人。嗚呼。公之下世垂五十年。而尙未有紀行文字。孫弘源。蓋嘗錄得遺事。未及修潤成篇。而不幸逝歿。門下諸人。大懼至行懿範仍致泯沒。責道源以狀行。顧道源愚陋無文。何敢當是役。而惟是平生景仰之心。愛慕之私。蓋有自別於人者。謹就考遺事。參以聞見。撰次一通。以?立言君子之采擇云爾。柳道源 撰 [蘆厓集 柳道源] | ||||
문헌(文獻) |
1. 輓丁時翰詞 洛水傳餘派。關東說勝區。地靈非偶降。人傑應時須。川障狂瀾倒。風回末路趨。功從眞地著。德見粹容符。俯仰而無?。優游也自娛。如居言志列。可與浴沂徒。蕩蕩心彌泰。??樂豈?。楓宸勞睿想。雲壑遠亨衢。未覩儀丹鳳。誰能?白駒。遐情超俗累。閒興遍名湖。憂國精忠炳。陳章??輸。危言歸草野。嘉策代都兪。始識絲綸力。終能鼎?扶。人方瞻泰嶽。星已晦箕弧。自是乘眞返。其如考德無。高風今寂寞。世道漸艱虞。獨抱私情慟。追惟盛眷殊。吾師生也竝。時望與之俱。晩歲襟期托。神交道義孚。仙舟同李郭。雪夜會張朱。講討身何倦。遊從德不孤。猥因陪杖?。幾荷發蒙愚。?嶽驚頹隕。蟾江仰楷模。滄洲曾理楫。蘭室更趨隅。杳杳山川?。悠悠歲月?。每懷親丈席。那意隔泉途。痛結?樑木。情辜奠束芻。撫躬安所倣。懷?倍堪?。轉益迷歸路。如何免俗儒。悲?無限意。揮淚望松梧。 門下生 柳敬時 撰 出處 : 愚潭先生文集 丁時翰 著 2. 祭李象靖文 嗚呼。小子自在?齡。負?而遊先生之門。計中間往來受業及周旋於函丈之間者。蓋將三十年于?。先生於小子。耳提面命。誘掖之勤。發我之蒙。?我之昏。?我小子粗分魚魯。而得齒於人數者。秋毫皆先生之賜也。荷先生敎養之恩。莫如小子。薰炙先生之親且久。亦莫如小子。而自顧平生。小子之負先生多矣。先生不以小子爲無似。常勉以爲己之學。而小子識趣卑陋。志氣頹惰。卒之?喪於名利?臼之中。鹵莽滅裂。以至四十而無聞焉。是小子之負先生也大矣。小子之居。距軒屛不遠。或月一造焉。或間月一造焉。起居之禮。未嘗曠也。數年來。輒爲薄宦所?。久滯京洛。先生寢疾。而小子不得親藥餌。先生考終。而小子又不得躬含。殮葬之日。四方來會。而又不得奔走於執?之列。以小伸情事。噫。先生視吾猶子也。吾不得事猶父也。至此而小子之負先生爲尤大。前年十二月。小子始解官南歸。哭先生于芋園之舊廬。入門而儀形無所覩。警?無所聞。已矣已矣。吾將安仰。亦將安倣。言念至此。自不覺其失聲而長慟。長慟之不足。而繼之以涕血交零。昔人所謂余懷之悲天地之知者。已說得小子心事矣。嗚呼。此則猶哭吾私耳。先生歿。遠邇士林知與不知。莫不齎咨涕?而曰。天不整遺我先生以惠後學。先生之存歿。其關係於世敎。若是其重。此豈但爲小子之私慟而止耶。先生平日用功。在於學問上。其造詣之淺深。固非小子之所可窺測。而亦何敢過爲揄揚。以負我先生?謙之德哉。直以所得於言行動靜之間者記之。蓋先生得之天賦者固厚。而其踐履之篤操養之密。有非人所能及者。小子每侍側。見先生終日危坐。未嘗有惰容。沈潛於聖經賢傳。?焉孜孜。樂而忘其倦。平居寡默。言若不出諸口。而及其剖析義理。明白痛快。粹然一出於正。平居退讓。粥粥若無能。而確乎難奪。有千萬吾往之勇。家事蕭然。簞瓢屢空。而處之晏如也。高臥林泉。若無意於當世事。而每聞國家有災。輒爲之?然深憂。寢食不置。蓋不以樂天知命之樂。而忘與人同憂之憂也。先生不求人知。而德日益進。行日益高。朝之薦紳大夫。交口薦之。徵?屢至。先生以?辱恩命。??不安于心。嘗一起而謝翊贊之命。入直三日。卽呈告南還。有一學士。以詩贈之曰。四皓暫來爲羽翼。淵明歸去出風塵。此可見先生之出處綽然有裕。爲世所高也。先生易?之前一日。南嶽李公遣書問疾。卽口呼而復其書。無一字錯。蓋訣語也。翌日。門人筮之遇訟之九四。先生遍誦其卦辭。斷之以歸化之兆。命侍者正席。整衣帶。?然而逝。是先生平日定力。益可見於臨盡之際也。先生晩與丁進善。爲道義交。相與千里命駕。?翔於佳山美水之間。小子亦嘗一陪杖?。從遊於龜潭。?然兩翁。合席從容。雖商?之詠芝。南山之對牀。殆無加焉。小子望之。若仙鶴然。私以爲平生之幸也。今小子不幸。而失我先生。獨丁先生在世。欲以事吾先生者事之。前冬之歸自洛也。歷候于法泉。今年夏。又至于龜潭。謁丁先生。先生悲且感。小子亦悲且感。?仰陳跡。不忍爲懷。山光水色。亦爲之帶恨而助咽。小子千古之慟。至此而其有極耶。嗚呼。歲月荏苒。初祥在明。而先慈諱辰。又與相値。平生此日。小子?日。終身之喪。私痛雖切。而心喪之制。於義爲重。銜哀展誠。來哭筵下。此在情理。?或不悖。惟冀尊靈。鑑我衷曲。 門人 柳敬時 撰 [孤山先生文集附錄 李象靖] 3. 挽權斗寅詞 有鳥生丹穴。其名是長離。文章備綵珍。五色爭紛披。和聲逐祥風。爲遊瓊樹枝。憶昔禮網密。奇羽蒙無遺。暫屈千?志。翩然向丹?。佇聞朝陽鳴。堪作王廷儀。還嗟枳棘林。捿息非所宜。??又從?。肯學?池爲。??遂高逝。從此與世辭。靑巖石泉上。?翔聊自嬉。梧桐可寄宿。竹實可療飢。??與?雛。爲群好相隨。先覩爭爲快。美瑞賢愚知。丹?忽晦彩。德輝竟難追。恨不和虞韶。至治再雍?。恨不嗚岐罔。晟德攀蒼姬。千載?其光。歸來更何時。聞說雛皆好。毛羽?稱奇。振翼會長鳴。可能待來玆。自憐同鷄鶩。飮啄在汚泥。猶存壤蟲慕。欣瞻瑞世姿。嗟嗟今已矣。此懷知者誰。日暮群鴉亂。感興托哀詞。完山 柳敬時 撰 [荷塘先生文集 權斗寅] | ||||
기타(其他) |
UCI | G002+AKS-KHF_13C720D64DC6D0B1764X0 |
자 | 여원(汝遠) |
호 | 강포(江浦) |
생년 | 1716(숙종 42) |
졸년 | 1781(정조 5) |
시대 | 조선 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학자 > 유학자 |
유홍원(柳弘源)
성명(姓名) |
유홍원(柳弘源) |
본관(本貫) |
전주(全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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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時代) |
(1716∼1781) |
자(字) |
여원(汝遠) |
호(號) |
강포(江浦) |
이력(履歷) |
15세 류홍원(柳弘源) 字汝遠 號江布 父晉鉉 祖敬時 曾東輝 幼生 안동향교지(安東鄕校誌) 第一節 人物 류홍원(柳弘源) (숙종42:1726~정조5:1781) 전주인(全州人). 자(字)는 여원(汝遠) 호(號)는 강포(江浦)로 함벽당(涵碧堂) 경시(敬時)의 손(孫)이요 녹균헌(綠筠軒) 진현(晋鉉)의 자(子)이다.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에게 학문(學問)을 익혀 문장(文章)을 이루었으며 서법(書法)에 뛰어나 고금(古今)의 각체(各體)에 모두 능했고 거문고 역시 조예(造詣)가 있어 부사(府使)가 그 소리를 듣고 세금(稅金)을 면제(免除)하라는 명(命)이 있을 정도였다. 문집(文集) 1책이 있다. 영남사림(嶺南士林) 전주류씨인물 조선 후기의 학자인 류홍원(柳弘源 ; 1716∼1781)의 자는 여원(汝遠), 호는 강포(江浦),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진현(晉鉉)이며 어머니는 상락김씨(上洛金氏)로 이단(履端)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으며, 뒤에 류정원(柳正源)에게 수학하였다. 선생은 문장에 있어서 초년에는 기(奇)를 숭상했으나 만년에는 순탄하고 담백하여 일점의 속진(俗塵)이 없었다. 서법이 고건(古健)하고 기굴(奇굴)하여 구루비(구루碑)로부터 고전(古篆) 등을 모두 능서(能書)했고 안·류(顔·柳)의 필진(筆塵)이 항상 책상 위에 놓여져 각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만년에는 연상(漣上)의 서체를 좋아했다. 또 거문고에도 능하여 문을 닫고 홀로 거문고를 탈 때 세리가 세금을 받으러 왔다가 거문고 소리를 남몰래 듣고 부사(府使)에게 복명(復命)하기를 "처사의 집에 세금 받으러 갔더니 거문고 소리가 황홀하여 문밖에 현학(玄鶴)이 춤추고 맑은 기운이 가슴에 스며들어 속된 일로 맑은 흥을 깨뜨릴까 봐 감히 이야기를 못했습니다"라고 하니 부사가 듣고 "지금 세상에 그런 고사(高士)가 있는가 세금을 면제하라"하였다고 한다.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江浦文集 (古明 810.819 유95?) (古上 810.819 유95?) (古西 810.819 유95?) 柳弘源 (1716∼1781) ; 字 汝遠, 號 江浦, 本貫 全州. 石印本. - 慶北安東 : 涵碧堂, 1956. 3卷1冊 ; 30.1x21.cm. 조선 후기의 학자인 유홍원의 시문집이다. 유홍원의 아버지는 진현(晉鉉)이며 어머니는 상락김씨(上洛金氏)로 이단(履端)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으며, 뒤에 유정원(柳正源)에게 수학하였다. 이 문집은 권상규(權相圭)의 편집을 거쳐 1956년에 후손 영희(泳熙)가 간행하였다. 시(詩)는 아버지의 시에 차운한 것이 10수로 가장 많고, 기타 친족들과 창수(唱酬)한 것, 만시(輓詩) 등이다. 이 중에 밤중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 지었다는 "소리 속에는 삼경달이요, 머리 위에는 한 가지의 꽃. 너의 울음 들으며 부지런히 글을 읽어, 늙으신 아버님의 탄식을 없애리라(聲中三更月 頭上一枝花 聽爾勤吾讀 無爲老父嗟)"고 한 시가 유명하다. 서(書)는 아버지·아들, 친족과 유정원에게 보낸 안부 편지가 대부분이다. 유사는 저자의 학문과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지낸 할아버지 유경시(柳敬時)의 일생사적을 연대순으로 기술한 것인데, 권2의 전권을 차지하는 많은 분량이다. 目錄. 卷之 1. 詩 ; 題琴款, 王世孫誕降韻, 伏次大人下目示0韻, 伏次大人下示韻二疊, 病中懷親, 伏次大人開目菴韻, 伏呈大人, 夜來覓茶粥忽成一絶, 封橘薑茶上大人, 伏次大人?日韻, 輓李(漢佑), 多病歎, 庚寅臘月送龍兒于瓢溪書三絶遣懷, 送兒晟休?川僑居, 送兒後有枕上韻, 癸酉五月族弟叔文(道源)陪往其生大人鏡城任所余有拘不能?餞吟呈短句以替行?, 族弟叔遠(長源)來訪梅下欲覓句而未果追作梅嘲客一絶以呈, 庚子九月到枕澗亭做十日團會臨分叔文誦隱侯詩遂各步其韻以爲離亭之曲, 歸臥無聊又用前韻求和, 賀族姪範休聞喜慶席, 賀李持世(重維)回甲宴, 地仙歌, 次李司猛(廷憲)涕淚帖韻, 輓鄭孟光(道濟), 伏次大人下寄韻, 伏次大人韻, 述懷, 伏次大人韻五七言?一絶, 輓懶拙齋先生李公(山斗), 吟贈姜鳳文, 輓邊柔遠(尙緩), 輓金丈師叔(復濂), 輓李君輔(尙慶), 輓族姪景佑(震休), 輓族姪德甫(萬休). 箴. 書 ; 上三山先生(3), 答李敬美(世靖)(3), 與李山甫(宗岳), 答邊佐郞(得龍), 與李甥聖範(龜洛), 答聖範, 與叔文, 答叔文叔遠(3 答叔文, 答族姪昌甫(明休), 與昌甫, 與昌甫諸昆仲, 與族姪德逸(日休), 答德逸, 上大人(6), 答舍弟聖之(曾源), 寄兒晟休, 寄兒(5), 寄龍兒(簡休), 寄春孫(懿文). ?辭 ; 鄭敦甫(仁濟), 孫斷金宗信, 族孫鴻文, 族孫載文. 祭文 ; 祭三山先生, 祭懶拙齋先生李公, 祭鄭戚叔仲進(在淵), 祭李若天(象辰), 祭金通兼(致達), 祭或人, 祭堂叔父葛天窩公(師鉉), 祭德逸, 祭亡子雨休, 祭亡子顯休. 卷之 2. 遺事 ; 王考通訓大夫司憲府掌令府君. 卷之 3. 附錄 ; 輓詞, 祭文, 墓碣銘, 行狀. 跋 ; 權相圭. | ||||
묘(墓) | |||||
부(父) | |||||
모(母) | |||||
배(配) | |||||
자(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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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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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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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
1. 祭柳正源文 ?嗟先生。是年癸未。周甲之歲。是日癸未。終祥之祭。宜觴而壽。柰酌而涕。哲人存亡。斯文興廢。微言易隱。大義將?。顧瞻茫茫。我目其?。孰策其?。孰發其蔽。孰質而疑。孰叩而啓。越在辛夏。趨診登?。虛堂夜坐。侍聽掖提。語及侯管。縷解無滯。而又發慨。憂難之繼。早歲謬名。有臍欲?。是以退藏。蘊而弗泄。人或過知。我戒告筮。晩因退閒。看書小?。有時神遇。?若心契。旁或叩問。我言肯?。兒惰不媚。爾多疾?。靡憤而?。孰敎而勵。追往之誨。若今之?。識蔑窺斑。名虛奉袂。?負師承。雖悔曷逮。易解有篇。爲後學惠。四聖餘意。二賢宗系。疑或有證。要必有係。宏博無遺。精義入細。天不假年。書未就例。誰補無缺。而承以綴。一通精寫。子雲以?。先生不朽。吾道之衛。嗟我先生。閒世儁睿。學極天人。道合?霽。凝重山嶽。平直砥礪。執守牢確。義理明?。堯舜素志。之死靡替。先生在世。吾黨之?。先生一去。世道陰?。我痛若私。言不敢贅。矯首三山。白雲洩洩。緘辭瓣香。替奠丹?。族弟 柳弘源 撰 [三山先生文集 柳正源] 2. 祭李山斗文 嗚呼、如小子者、何以知大人先生耶。童時嘗聞先王考大夫公、語先子曰、某甫吾之畏友、非爾敢友也。越自丁丑以來、先子僑居?川、得與公從遊者源源、而果以先飯之禮、公辭謝不得、則且年之曰、子未可字余耶。何爲此不敢當者、先子曰、吾先人命之矣。嗚呼、先王考長於公十四歲而以畏友許之、先子以八十歲、少於公七年、而亦有所不得友者、小子於是乎。有所受矣。先子每與公相會而歸、則充然如有所得、顧語小子輩曰、生晩不及出程朱晦退之門則當以此老門牆爲依歸、又嘗曰、此老持身若處子、而及臨事有千萬人可往底氣像、又嘗曰、富貴不能淫、威武不能屈、貧賤憂患不能隕?者、惟此老庶幾矣。小子雖不肖、早而聞王考之所期、繼而聞先子之所訓、又嘗隨先子之後、而奉席者、日月矣。亦豈無偶然一斑之見、而困蒙不知善學、所誦者、先子之言而已。何敢曰、有所諦得於語默步趨之間哉。然小子亦嘗語人曰、衛武公九十歲作懿戒、以武公之年而無愧於武公、惟先生未知小子、此言豈阿好之言耶。嗚呼、公每於不肖輩、登謁之時、輒語及先子、必愴然起懷、小子之庇依於公、趨仰於公者、宜無異於事吾父者、而旣不得視公之含、又不得相公之?則小子實不知先子之意也。一觴之訣、乃在鬼事之後、而又不免情溢而辭蹙、不昧者存、庶賜歆格、柳弘源 撰 [懶拙齋先生文集 李山斗 著] 3. 輓李山斗詞 痛哭逢蛇歲、衣冠葬鳳原、不欺經一字、無競達三尊、魯?文親製、殷?墨寵恩、先人宿昔誼、孤子淚乾坤 柳弘源 撰[懶拙齋先生文集 李山斗 著] 4. 류홍원(柳弘源) 족제(族弟) 여원(汝遠) ※ 三山先生文集 (古枕 810.819 유73걁) (古上 810.819 유73걁) 柳正源 (1703∼1761) ; 字 淳伯, 號 三山, 本貫 全州.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哲宗14(1863)跋. 6卷3冊.附錄2卷.合4冊 : 年譜 ; 31.4x20.9cm. 四周雙邊. 半匡 ; 20x15.5cm.有界.10行18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후기의 문신 유정원의 시문집이다. 유정원은 석구(錫龜)의 아들이다. 1729(영조 5)년 생원에, 1735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후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형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제자백가·천문(天文)·지지(地志)·음양(陰陽)·복서(卜筮) 등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본 문집 이외에 1851(철종 2)년에 간행된 《역해참고(易解參攷:附河洛指要)》가 있다. 이 문집은 1863(철종 14)년에 후손 병문(炳文), 휘문(徽文), 형진(衡鎭)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시(詩)에는 금강산, 청량산 등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것, 유경원(柳景源), 조계온(趙季溫), 이민적(李敏迪), 권정웅(權正雄), 이충국(李忠國) 등의 시에 차운한 것 등이 있다. 소(疏)는 모두 사직하는 내용이다. 강의(講義)는 1754(영조 3)년 10월의 경연강의(經筵講義)와 서연강의(書筵講義)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書)는 1755년 당시 관찰사로 있던 한광조(韓光肇)에게 보낸 것으로 자염(煮鹽)과 환곡(還穀)의 중요성 및 그 문제점에 대해 논한 것, 이경미(李敬美)와 재종제 선장(善長)의 학문 및 이기론에 대한 물음에 답하여 보낸 것, 친척인 홍원(弘源)에게 보낸 것으로 기형(璣衡), 혼천의(渾天儀)에 대해 설명한 것 등이 있다. 잡저에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인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 조령산성(鳥嶺山城)에 진(陣)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자세히 설명한 「조령산성설진의(鳥嶺山城設鎭議)」, 천체에 대한 중국 및 조선의 학자들 사이의 전통적인 견해인 좌선설(左旋說)의 내력을 소개하고 자신은 안성유씨(安城劉氏)가 주장한 우선설(右旋說)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안성유씨우선설변(安城劉氏右旋說辨)」 등이 있다. 설(說)의 「정전설(井田說)」은 정전제(井田制)에 대한 논의를 소개한 글이다. 卷之 1. 詩 ; 次宗叔月會堂(元鉉)韻, 卷之 4. 書 ; 汹窩再從叔(升鉉), 答陽坡再從叔, 答陽坡從叔(4), 與陽坡從叔, 與再從弟善長, 答善長問目, 答族弟汝遠(弘源)(4), 別紙, 答三從弟叔文(道源), 寄兒震休, 答震休(4), 寄震休(2), 寄諸兒(3), 答兒明休, 寄兒日休, 答諸兒. 卷之 6. 祭文 ; 叔祖磨泉公(大時), 族祖壺窩公(顯時), 再從叔汹窩公, 兒震休, 第三子婦金恭人. 卷之 6. 墓誌 ; 七代祖考 贈通訓大夫司僕寺正府君, 六代祖考通訓大夫禮賓寺正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府君, 五代祖考陶軒處士府君, 高祖考折衝將軍行龍槐衛副護軍府君. | ||||
기타(其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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