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세월이 빠르게 흘러간다.
1971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타교 중학교에서 온 학생들과 세력 싸움이 있었을 때 나는 음성써클을 만들어 6명이 가출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당시 써클 이름은 TNT라는 크럽을 만들어 서대문과 명동, 서울역 양동을 휘돌아 다니며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니다 보니 라듸오에서 피해를 본 학생이 신고하여 라듸오에도 이름이 오르락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당시에 5명은 전부 퇴학을 당했고, 어머님의 회유와 눈물로 학생부에 근무하는 선생님 앞에서 무릎꿇고 빌어서 정학처분을 받고 권투를 하는 이안사노 조카의 권유로 권투를 하게 된다. 중학교 때는 용산 고등학교나 경복고등학교를 가겠다고 코피 흘리며 공부 했었던 적도 있어 전교 등수 안에 들어갔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3 담임이 타 학교로 가지 못하게 특별히 관리를 받았던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준우승만 4번 하였다. 전국 아마튜어 신인선수권대회에선 결승전에서 졌고 전국 23회 학생선수권대회에서는 준우승하였고, 대통령배 서울시 대회에서 준우승, 54회 전국체전에서 서울시 예선대회에서도 준우승. 결승 상대자는 항상 국가 대표들과의 경기였다. 끈기가 부족했고 시합 전까지도 담배를 피고 글러브를 끼러 가면 글러브 심판에게 담배를 핀다고 혼나면서 글러브를 끼었으니 찍혀도 한참 찍혔을거라 보인다.
가슴에는 항상 국가대표를 하지 못한 한이 있어 언젠가는 내가 못달았던 태극기를 달게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대학을 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갈등하고 있을 때 고3 때 담임이었던 분의 도움으로 예비고사를 보게 되었고, 특기자로서 합격을 하게 된다.
1차 시험은 00대학에 입학하려고 하였더니 그 때 당시에 4년 장학금을 주는 조건으로 꽤 많은 금액을 요구하였기에 엄두도 못내고 1차에서는 보기 좋게 떨어지게 된다. 2차는 포기하려고 하였더니 명지대학에 담임선생님이 직접 끌고 다니며 원서를 접수 시켜주었다. 그 때 학생과장으로 있었던 김건수 교수와 대학 동기 학번으로 담임선생님은 국어국문과 출신인데 김건수교수와 친분이 상당히 두터웠던 것 같았다. 나와 오대환을 소개 해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최인범 교수가 대한체육회에서 선수경력증명서를 제출하라고 하여 대한체육회 복싱연맹을 찾아가 선수경력증명서를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자존심은 있어서 가난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가난한 학생으로 인정되지 않으려고 나름 무척 잘난 척하며 살았다. 그래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움을 준 친구와 선배님들에게 늘 감사함을 지니고 있으면서 언젠가는 보은하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생각대로 되지 못해 늘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내가 죽기 전에는 보은 할 기회가 있기를 항상 마음으로 새겨본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학을 78년 2월에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는데 몸에 상처가 많아 군 신체검사에서 “2급을”을 받고 논산 훈련소를 거쳐 자대 배치를 받아 인사과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에 초등학교 동창인 박근혜대통령 문제로 한참 말이 많았던 정유라의 아버지인 정윤회를 군대에서 만나게 된다. 또 고등학교 동창인 김00도 만난다.
나는 이등병이었고 00이와 윤회는 말년 병장이었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는 군단 포병대대로 00이는 대대 교환병으로 열외 병력이었고, 윤회 역시 대대 일종계로서 열외 병력이었다. 그 친구들이 군에 있을 때는 저녁 점호 시간에 불러내어 흰쌀밥에 소주를 마시며 여유가 있는 군 생활이었는데, 그 친구들이 제대하고부터 그 친구들에게 받은 고통에 두배 이상 많은 구타와 폭력으로 맞아서 머리가 두 번씩이나 터져 쓰러지기도 했고 자살을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운 군 생활을 하게 된다.
초 .중. 고. 대학생활을 할 때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국가에 대한 의무와 폭력을 이겨내는 방법은 내가 성공하는 길이 나를 위한 길이라 마음을 굳히며 참고 견뎌내어 1980년 10월13에 만기 병장으로 제대하게 된다. 제대 후 강원도 철원 쪽으로 쳐다보며 소변도 안 보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가정형편은 더 어려웠었고 내가 벌지 않으면 더욱 어려운 형편에 부담을 줄 수 있어 국가에서 실시하는 공립학교 임용고사 시험이 그 해 11월 00일에 있다는 서울신문 공고문을 보고 응시하여 4등으로 붙는 영광을 안게 된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사회는 줄과 백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교육계도 예외는 아닌 듯 4등으로 합격한 나에게 명지대학 출신으로는 처음 공립학교 발령자인거 같은데 신설 중학교에 가서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명지대학 선구자가 되면 어떻겠냐고 인사 담당 장학사가 넌지시 나를 보며 떠본다. 그 시절에는 하루라도 일찍 발령을 받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지만 담당 장학사의 말도 맞는 말이라 생각하여 신설학교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 지금도 첫 발령받은 학교가 가좌역 옆에 자리하고 있지만 교문도 없었고 운동장은 쓰레기 더미 위에 마사토를 깔아 펴지도 않은 운동장 모습이고 건물도 한창 공사 중으로 완전한 학교 모습보다는 대형감옥 같은 학교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이 TV에 실려 민원이 발생되기도 하였던 학교였다.
체육교사로서 생활보다는 노가다 십장으로서 매일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어린 학생들과 돌과 운동장 정리를 하는게 내 임무가 되었고 신설학교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제식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하기에 매일 군대용어인 제식훈련을 시켜야만 했다.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 차렷, 열중 쉬, 우향 우, 좌향 좌, 양팔 간격으로 벌려, 좁은 간격으로 모여, 걸음 바꾸어 갓, 4열 종대로 모여. 4열 횡대로 모여, 3일 만에 목이 쉬어 목소리가 안 나왔다. 기차 길 옆에 학교가 있어 기차가 지날 때는 소리가 안들려 더욱 크게 목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잠겨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는 모션과 호각소리로 학생들을 지도해 나갔다. 지금 생각해도 열정이 폭발할 만큼 열심히 지도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육청에서 체육담당 장학사가 점검 나왔다고 하면서 나를 교장실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와 수업이 끝나고 교장실에 가니 대뜸 권투를 하셨냐고 운동부를 창설하면 어떻겠냐고 지원금은 400만원을 지원한다고 ---- 내가 왼쪽 가슴에 태극마크를 못달고 국가 대표를 못한게 가슴에 한이 맺혔었는데 -----
1년 후 권투부를 창설하여 소년체전 서울시 대표 감독을 2년을 엮임하게 된다. 소년체전 서울 팀을 맡아 서울체고에서 훈련을 하였고, 내가 있었던 학교에서도 합숙 훈련을 하면서 많은 성과를 만들어 내었다.
첫 번째 학교에서 5년간 유임을 하면서 권투에 대한 열정을 식게 만든 사건은 체육계의 부정 판정으로 억울한 판정으로 어린새싹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 행위를 보고 권투계를 영원히 끊어 버렸다. 심판 자격증과 심판복을 전부 태워버리면서 ----------
내가 키웠던 제자들은 태극마크를 달고 경희대, 한국체대,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태극마크를 못 달고 대학진학을 못한 제자들도 훈련을 통해 배운 인간애와 극기심으로 사회 일원으로 훌륭하게 극복하며 생활하고 있다.
권투계를 떠나 평교사로서 중학교 3군데를 거치고 고등학교 4군데를 거치며 00고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전문직(장학사) 시험을 강력하게 권하여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공채시험을 보게 된다. 평소 평교사로서 교직을 마무리하려던 나를 유심히 지켜보시며 강력하게 추천하신 교장선생님의 뜻을 저버릴 수가 없어 전문직 시험을 보아 공채9기로 합격하게 된다.
평교사의 책임은 물론 본인에게도 있지만 최종적인 책임은 관리자인 교장에게도 있게 되는데, 전문직은 모든 책임은 본인 스스로가 처리하여야 하고 본인 책임이 아주 크다.
그렇게 5년6개월 동안의 전문직 생활을 마치고 2006년 강서구에 있는 45학급학생 수 약 2,600명의 중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3년의 중학교 교감에서 신설고등학교 교감을 2년을 거쳐 2011년에 은평구에 있는 모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4년 동안 학생들에게 공부하라는 훈화를 한번도 안한 교장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4년의 임기를 마치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교직생활에서 최고의 자리를 옮기면서 주마등처럼 스치는 나의 어린 시절과 중,고교동창,대학동창들의 응원에 감사하며 올바른 삶을 살았다는 것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교직은 만 나이로 62세가 정년인데 호적 상 나이대로 하면 교장을 더 할 수도 있었지만, 빠른 교육계의 변화에 회의감이 들어 내 나이만큼보다 더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후배들에게 빠른 양보가 후배들의 길을 열어 주는 거라 생각하여 2017년 2월부로 명예퇴직을 하였다.
잠시 내 삶의 일부분을 회고록처럼 적어 보았다. 문득 내 삶을 둘러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느낌이다. 오늘도 홧팅!!!
첫댓글
오늘은 내가 오후에 컴퓨터에 들어 왔는데 용수의 아주 진지하고 소중한 인생 교육기가 올라 와 있구나.....
아주 귀한 글을 쓰기 시작 했음에 뭐라고 선뜻 할말 없이 그저 읽어 내려 가는 동안 감동적이고 안 스럽고...장하고...
여러가지의 감정이 지난 긴 세월을 회상하듯 가슴에 들어 오는 글.....
용수의 반생기......몰랐던 지난 날을 알게 되며 이해도 하게 되고..... 참 잘 올렸어!...라고 말한다.....
용수가 그래서 그랬구나...아니면 용수가 참 노력을 많이 하였구나.... 용수가 그런 생각을 가진 이유가 있었구나....
참 좋은 글 잘 읽었어~ 써 줘서 고맙고~ ^*^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이제 65세가 지난 이 시점..... 우리 모두 좋은 일하며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겠구나....
용수의 반인생사... 다시한번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해~ ^*^
노늘하루도 용수 뜻대로 건강히 잘 지내기 기원 해~ ^*^ 고마워! ^*^
이제는 나도 늙어가는가보다. 괜히 과거를 회상하는거보니 말야. 좀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슴 아픈 일들이라 쉽게 밝히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단다. 천천히 정리하여 어린시절 이야기, 청년기 이야기, 장년기 이야기--등 정리가 되기를 바라지만 쉽지 않네. 살다보니 내가 잘나서 살아온거 보다 주변에서 나를 보살펴 주었기에 내가존재할 수 있었던 적이 많더구나. 그래서 더불어 사는 삶이 최고인거라고 느끼고 있단다.
어차피 가는 세월 막을수는 없는거고 늘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며 평화를 바라면서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다.
모두 홧팅!
@산지기
용수야,
우리 이제 하루하루 나이 들어 가고 있어...
지금 안하면 앞으로는 힘이 없어지니 더욱 하기가 어려워져~
지난 시간들...우리 모두 철도 없고 인생도 모르고.... 누구나가 좋은거 나쁜거 다 있어~ 염려하지 마~
생각은 머리속에 있는데 그걸 글로 쓴다는게 그리 쉬운게 아닌거 알아?
시간도 필요하고 차분히 정리한 것을 책상 앞에 앉아 써야하는 그 과정이 잘 되지가 않아~
더우기 나이들어 갈 수록......ㅠㅠㅠ
사람은 건강과 돈이 있으면 자신을 성찰하는게 쉽게 오지 않아, 다 제 잘났다고 살게되지....
용수가 이제 나이들어 감은 맞는거고 후회나 반성?같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이 바로 인생 마지막장에 제대로 들어 오는게 되는거라고 믿어, 그러니 힘 내서 잘 쓰도록 해 봐~ ^*^
나이들어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어... 우리 내일을 모르니.... 그러니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 해 보고
하루하루 뜻있게 살아야 하는데...
나도 말만이지 그저 하루가 초고속으로 하는 일 없이 밥만 세끼 먹다 보면 가.... ㅠㅠㅠ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최선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만....
한국에 엄마가 제일 마음에 들어 오고 이제는 형제들도 보고 싶고....
미국 온지 35년....
내 가족과 한국 것이 그립지만.......이 사람이 담배 50년..... 건강이 안 좋으니 여기 병원이래야 되고....
모든건 하늘에 맡기고 살아가고 있어....
용수도 지난 날 뒤돌아 보며 남은 시간 뜻있게 보내면 돼..... 그게 인간이기에..... ^*^
용수야, 오늘 하루도 잘 지내고 우리 또 보자~ 안녕~ ^*^ 사랑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