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서귀포 여중 2학년의 수학여행 안전지도 요원을 마치고 명동호텔에서 계양역으로 달렸다. 계양역에서 뜨거운 오뎅국물과 적당히 통통한 우동으로 뱃 속을 든든히 채우고 선인중 2학년 학생들과 함께 강화 탐방길 장도에 올랐다.
날씨는 기가막히게 청명했고 산들 산들 부는 바람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계양역 8시20분 출발 강화에 도착하니 학생들 보다 훨씬 먼저 도착해 오늘 둘러볼 탐방지를 미리 둘러보았다.
이윽고 학생들이 도착 재미있는 탐방길은 시작되었다.
고려궁지
1234년(고종 21) 최우(崔瑀)가 2,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 건립.
규모는 개경보다 작았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비슷하게 구성.
뒷산 이름을 강화북산에서 송악산으로 바꾸고,
궁 이름도 연경궁, 강안전, 수창궁 등 개경 궁궐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 붙였다.
정문의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으로 된 두 개의 대문이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승평문의 위치는 현재보다 100여m 남쪽 용흥궁 입구부분에 위치 했다고 전함.
- 1270년(원종11) 개경으로 환도할 때에,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음.
- 조선시대에 고려 궁궐터에 조선 지방 관청 건물과 궁궐 건물이 자리를 잡았다.
- 1622년(광해군 14) 봉선전 건립(태조의 영정을 봉안). 병자호란 때 소실.
1631년(인조 9) 조선 행궁 건립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
1636~37(인조 14~5)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에 의해 일부 건물 불에 타서 소실.
1638년(인조 16) 유수부 동헌 개축.
1654년(효종 5) 강화 유수 정세규가 이방청 건립.
1695년(숙종 21) 장녕전 건립(조선 국왕의 영정 봉안).
1713년(숙종 39) 만녕전 건립(조선 국왕의 영정 봉안). 조선 궁궐 모습을 갖춤.
1781~2년(정조 5~6) 외규장각 건립(왕립 도서관). 병인양요(1866) 때 소실.
1783(정조7) 강화유수 김노진 이방청 중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많은 건물이 불에 타서 소실.
1964년 고려궁지 사적 지정 (제 133호)
1977년 강화 국방중요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
· 강화유수부 강화동종(보물 제 10호;1963년) 옮겨와서 정비.
1999년 강화동종 균열로 인해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이전하고, 새것으로 만듬.
2003년 외규장각 복원.
- 현재는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이방청, 종각, 외규장각 승평문 있음.
심도직물
강화의 심도직물터는 지금 현재 굴뚝이 남아잇고 그에따른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이 곳이 그 유명했던 심도직물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성공회성당
외삼문
솟을대문, 팔작지붕, 태극 문양을 본뜬 원 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聖公會 江華聖堂 현판 왼쪽부터 읽는 전통방식.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담장과 연결 된다. 1943년 정문 계단 난간과 종을 일본 전쟁 물자로 공출 강제 공출 됨. (2010년 일본성공회에서 난간 봉헌)
내삼문
평대문, 정면3칸, 측면 1칸. 팔작지붕, 서쪽 칸은 종각 설치.
1914 영국에서 기증했던 범종은 징발되었고,1989년교우들의 봉헌으로 새로 제작
범종에 교회답게 십자가 모양과 성경구절(요한복음) 새겨짐.
3. 본당 - 성베드로와 바우로성당
정면 4칸, 측면 10칸의 2층 한옥양식. 정면 2층 현판, 天主聖殿 왼쪽부터 읽음.
지붕 위 용마루 양 끝에 십자가를 올림.
사찰, 향교 등에서 걸어두던 주련을 성당에 수용. 5개, 성경구절을 한문으로.
처마 끝에 태극 문양과 십자가가 함께 그려져 있는 겹처마.
성당 뒷면과 측면 아치형 문 4개.( 재료와 디자인 영국서 들여옴 ; 로마네스크양식 )
내부는 서양 바실리카양식(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궁궐,법정 등에 쓰이던 장방형 평면 건축)
바닥이 없는 통층 구조로 된 2층, 유리창을 만들고 서양교회 양식을 구현함.
용흥궁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왕인 강화 도령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입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포를 기둥 위에만 받친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근처의 집들과 가까이 붙어 소박하게 존재하는 용흥궁은 본래는 기와를 얹지 않은 3칸짜리 초가집이었습니다. 왕족이긴 했으나 강화도로 유배 온 철종은 가난한 평민처럼 살았습니다. 후에 1853년(철종 4)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으며 그 후 고종 때 (1903) 청안군 이재순이 중건했습니다.
용흥궁 대문 왼편에는 봉영의식을 주도한 영의정 정원용의 비와 강화유수 정기세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용흥궁'이라는 현판 아래 대문을 통과하면 행랑채 앞에 안채가 있습니다. 그리고 돌계단을 올라가면 사랑채가 있으며, 사랑채의 오른편 계단을 올라가면 철종이 살았던 옛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습니다. 작은 비각 안에 '철종잠저구기(哲宗潛邸舊基)'라는 글이 적혀 있어 철종이 머물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문으로 가서 대명헌, 소창체험관 조양방적으로 탐방로를 잡았다.
대명헌
< 1928가옥 대명헌 건축역사 >
김구의 탈옥 위해 노력한 강화도 김주경의 집 터.
- 1928년 황국현이 10년에 걸쳐 폐허가 된 터에 새로 건립.
'황씨 고택', '황부자집', '김구고택' 등 불림. (대들보에 1928년 7월 14일)
- 김구가 직접 쓴 '신독(愼獨)’이라는 글을 볼 수 있다.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감)
- 2012년 말 도예가 최성숙이 매입 후 5년 수리. 당호를 대명헌이라 지음.
소창전시관
- 소창체험관은 1938년에 건축된 한옥과 염색공장이 있는 옛 평화직물을 2016년에 매입 후, 리모델링하여 조성된 장소이다.
- 다양한 체험과 강화직물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생활문화체험공간이다.
- 소창체험관은 강화군 전통산업인 소창에 대한 전통문화유산 보존과 가치를
재조명하는 공간이다.
기념품 전시관에서는 소창으로 만든 옷과 소창 수건, 소창 행주세트 등 일생생활 속 사용하기 좋은 소창 제품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 기념품 전시관 2층에는 방직공장 사진 전시 및 소창 관련 영상 상영실이 있다.
과거 번성했던 강화군 직조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강화소창은 부드럽고 먼지가 적어, 빨면 빨수록 하얗고 단단해지는 원사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유아용품이나 위생용품으로 적당한 원단이다.
강화소창이 강화의 새 저어새와 강화순무를 품은 행주가 되어 판매하고 있다.
조양방적
조양방직은 원래 강화 섬유산업을 이끌던 방직공장이다.
1990년대에 문을 닫고 오래도록 방치된 건물은 1년 남짓 보수공사를 거쳐 조양방직 카페(선문리미술관)로 다시 태어났다. 보수공사를 했지만 회색빛 시멘트 건물 외관은 그래로 살렸고, 방직기계가 있던 기다란 작업대는 자연스럽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테이블이 됐다. 건물 내외부를 그대로 살려 강화 직물 역사를 품고 재탄생하였다.
그리고 강화 부근리 고인돌에서 탐방을끝내고 선생님들은 광성보까지 찾아가 광성식당에서 광성정식으로 맛있는 도토리묵과 빈대떡을 함께한 오붓한 시골밥상을 차려먹고 행복한 하루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