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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기독교가 삼일운동에 대해서 준비한게 뭐가 있던가?
끝까지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다가 전날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막판에 마지못해 개인적으로 서명한 16명의 기독교 인사에 빌붙어서
천도교에서 목숨걸고 주관한 거사를 가로채겠다는 심보는 예수가 가르쳐 준거던가?
이승훈목사가 천도교에서 운영자금5천원을 꿔 올때도 기독교에서는 뭘 하고 있었던가?
더구나 서명한 16명의 목사, 전도사들은 모조리 변절한 처지에,
낯짝엔 철판을 둘렀는지 어찌 인간의 얼굴을 하고는 저렇게 석판에 새겨서 자기네 공과로 치장하는가?
더구나, 일제가 삼일운동의 주동자로서 천도교를 말살 시킬때 기독교 목사들은 뒷짐지고 일제에 아부하면서 교세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지?
지금 보니, 천도교에서 빌린 돈을 안 갚을려고 그랬구나? ....
아래글을 읽어보라....개싱기독인들아....
◎ 2004/3/13(토)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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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주]3·1운동 때 진 빚을 갚자
교회 밖에서, 특히 좌파 성향의 역사학자들이 삼일운동과 관련한 기독교의 역할을 서술할 때 소극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이를 바탕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가 삼일운동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할은 크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저들은 대략 세 가지 사실에서 근거를 찾는다.
첫째 삼일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인들이 대체로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다는 것이다. 운동 참여를 권고받은 목사들이 즉각 응하지 않고 “기도해 보겠다”고 주저하였으며, 거사 전날 손병희 집에서 모인 민족 대표 모임이나 거사 당일에도 현장에 참석치 않은 사람은 기독교측 인사들뿐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비판한다.
둘째, 기독교 지도자들이 보여준 투항주의적 자세다. 이는 다른 민족대표들에게도 적용되는 혐의지만, 탑골공원에서 대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려던 처음 계획을 포기하고 요리집으로 장소를 옮겨 약식으로 선언식을 하고 경무청에 연락을 취해 자발적으로 연행됨으로 ‘영웅적’ 모습을 기대했던 청년 학생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고 비판한다.
셋째, 기독교측 인사들이 천도교 돈을 받은 대목이다. 그 때 기독교측 인사들은 천도교측에서 제공한 ‘5천원’을 받아 활동비로 썼는데 이 대목을 과장하여 “목사들이 천도교 돈을 받고 움직였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무지의 소치라고 무시하기에는 당시 역사적인 상황 증거가 분명하고, 사실 관계에서 그렇게 해석할만한 오해의 소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 상황과 사실을 재해석함으로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 변명 섞인 재해석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제는 민족대표들이 ‘종교인들’이었다는 점을 알면 풀린다. 특히 기독교측 인사 16명 중 13명이 목사와 전도사였다. 성직자들에게 정치와 민족도 중요하지만 신과 교회보다 앞설 수 없다. 독립운동 요청을 받은 목사가 “기도해 보겠다”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둘째 문제 역시 종교인의 행동 규범을 알면 풀린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며 그 수단도 평화적이어야 한다. 기독교 인사들이 처음 천도교와 합작을 꺼린 것은 동학혁명에서 보여준 천도교의 폭력성 때문이었고 선언식 장소를 옮긴 것도 폭력 시위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올 뿐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 기독교계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지향하였고 그 결과 삼일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셋째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것이다. 당시 천도교는 3백만 신도에 1년 헌금만 10만원을 거둬들일 수 있는 막강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갖고 있었지만 기독교는 10만 수준의 교세에 교회 재정은 상당 부분 선교사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였기에 교회로부터 ‘공적인’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측 대표 이승훈 장로는 천도교로부터 ‘빌리는 형태’로 활동비 5천원을 가져온 것이다. 오래 전(1969년) 교회사가 김양선 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 5천원 가운데서 현순 및 안세환의 여비 2,700원, 안동현 연락소 설치비 1천원은 천도교와 공동 부담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 반액인 1,850원과 33인중 기독교측 대표자의 가족생활비, 교통비 및 통신비로 사용한 1,300원, 합계 3,150원은 반드시 갚아야 할 돈이었다. 이승훈이 그 뒤 어떻게 했는지 알지 못하나 지금이라도 그 환보 여부를 조사하여 결제를 깨끗이 끝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꾸어 쓴 돈이기 때문이다”
과문인지 모르지만 아직도 “반드시 갚아야 할” 그 돈을 갚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교세가 역전되어 막강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한 기독교는 이제라도 선배들이 빌린 돈 ‘5천원’을 (요즘 시세로 환산하여)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조상이 옳은 일을 하다가 진 빚을 여유가 생긴 후손이 갚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빚부터 갚고 나서 종교간 평화를 운운할 것이다. 종파와 교파가 다르고 이념과 신조가 달랐어도 민족 구원이라는 종교적 동기 하나로 손을 잡았던 우리 조상들의 돈거래를 결제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 몫이다. 이른 시일에 기독교교회협이 되든, 한기총이 되든, 바라기는 두 기관 총무가 손을 잡고 인사동 천도교 본부를 찾아가 80년 전 빌린 돈을 갚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감신대 교수
(1733호 200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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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 대한 동포의 반론....
첫째 문제는,
삼일운동이 비폭력 순수만세운동이었다는 점과 2달전부터 준비해 왔다는걸 감안한다면 기도해보겠다면서 거사전날모임에도 코빼기도 안비친게 종교인이었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후안무치의 언동이며,다른 민족대표 종교인들을 모독하는 언사이다.
둘째 문제 역시
종교인의 행동 규범을 알면 풀린다고??? 다른 17명의 대표들이 폭력운동을 결의했단 말인가? 원래 방침은 폭력적 거사였는데, <기독교계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지향하였고 그 결과 삼일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라고?
감신대 교수요, 목사라는 작자가 저런 허무맹랑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오히려 타 민족대표의 종교인자격과 폭력성을 은근히 암시하면서 내비치는 작태는 종교인은 물론 인간으로도 불려지기를 포기한 언사이다. 신학교 교수가 저모양이니 배출되는 목사들의 수준과 자질이 의심받는건 당연하다.
그냥 사과하면 될걸, 꼭 자기네 들이 잘했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려는 자들이 소위 신을 믿느다는 개 신교목사들이다.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잘못된 환상을 버리지못하는 건방진 발상에서 비롯된것이리라.
http://www.jksm.com/Service4/ShellView.asp?TreeID=502&dataID=200306011601000077
3·1독립운동의 요람 천도교 중앙대교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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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손으로 나라 되찾자" 교당건축 100만원 모금 대부분 3·1운동자금으로 써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ksm.com%2FService1%2Fimages%2FSpace%2F%5BA%5D15%2B15.gif) |
종로구 경운동 운현궁 맞은편 수운회관 현대식 건물에는 천도교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씌어진 현판이 붙어있다. 그 건물 뒤로 고풍스러운 모습의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中央大敎堂)이 자리잡고 있다. 서울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이 건물이 일제시대 3.1운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천도교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선생이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포덕 59년(1918) 4월 5일 천일기념일(천도교 창명일)을 맞아 그 다음 날 열린 천도교 부구총회(部區總會) 결의에 따라 건립됐다. 그후 이곳 종로구 경운동 88번지의 대지 1,824평을 매입해 그해 12월 1일 제13주년 현도기념일에 맞춰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해 1921년 2월 준공됐다.
1897년 12월 24일 손병희 선생이 해월 최시형 교조로부터 천도교의 대통을 이어받아 1906년 2월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립하게 된다. 손병희 선생은 교인의 수행덕목을 설정하고 72개 교구를 설립해 신앙덕목을 체계화하는 한편 궁을 마크 계양 등 천도교의 조직과 체계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런 가운데 시국은 점차 기울어져 1910년 한일합병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손병희 선생은 중앙총부 직원과 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내 손으로 10년 안에 반드시 내 나라를 되찾겠다. 여러분도 각자 자신의 힘이 아니면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지극히 수도하라고 결의를 굳혔는데, 이때부터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위한 계획을 하나하나씩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뒤 손병희 선생은 1912년 우이동 봉황각이 건립되면서 3년동안 7차에 걸쳐 지방의 젊은 지도자 483명에 대해 49일 교육을 진행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18년 중앙대교당 건물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성금을 모으면서 독립운동자금까지 함께 마련했다.
천도교는 그 당시 종령 120호를 선포해 전체 교인에게 중앙대교당 건립과 아울러 독립운동 거사 계획의 일환으로 포덕 60년(기미 1919)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특별기도를 봉행케하여 기미 3.1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천도교인들로 하여금 선봉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렇게 손병희 선생은 자신이 말한대로 10년 후인 1919년 불교, 기독교인을 포함한 33인 대표 가운데 한사람으로 전국적인 3.1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 당시 각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봉황각에서 교육받았던 천도교인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천도교 대교당은 그 당시 천도교의 본부인 동시에 삼일운동을 위한 본거지였다.
(이때 목사들 16명은 33인 서명도 망설이다가 맨 나중에 했다)
일제통치하의 어려운 경제생활에서도 교인들이 모금한 성금은 그 규모가 엄청났다. 천도교는 당시 중앙대교당 공사자금으로 전국 교인에게 호당 10원(현 20만원) 이상을 성금으로 낼 것을 종령으로 반포했던 것이다.
이렇게 모금된 성금 약 100만원(약 200억원)의 대부분은 3.1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으며, 중앙대교당의 총 공사비로는 30만원(약 60억원)만 사용하였다.
성금모금 과정에서 일제는 이미 모금된 성금을 되돌려 주라는 등 적극적인 방해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천도교인들은 왜경의 감시 눈을 피해가면서 거짓으로 성금을 돌려받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제 각 교구에서는 영수증을 보내오는 등의 방법으로 계속 모금운동을 펼쳤다.
(기독교에서는 일원한장이라도 헌금한 증거있는가?
단군상 부수는데는 잘도 모으두만)
이곳 대교당의 설계는 당초 현재의 3배 이상의 규모였으나 일제는 건물내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이유로 건축허가를 반대하여 부득이 현재의 규모로 겨우 허가를 얻게 되었다. 허가를 받은 후에도 왜경은 건축공사의 철근, 벽돌, 자재 등의 구입을 방해하면서 시공자를 구금하기도 했다. 다사다난했던 우리 근대사에서 일제하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설립된 것은 곧 3.1운동의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다. 천도교 대교당은 당시 서울에서 규모로 보아 3대 건물 중의 하나였으며, 우리민족 신문화운동의 산실로 자유수호와 민주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천도교 대교당을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전체적인 평면형은 마치 에집시안 크로스(Egyptian Crose)처럼 되어 있으나 기독교 교회당들의 평면과는 다른 하나의 강당과 같은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체는 붉은 벽돌로 쌓았으며, 지붕은 맞배로 되어 있다. 건축양식상 바로크 양식의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일반 교회당들의 모양을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독특한 멋을 지니고 있다. 내 외부에는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박달나무 꽃, 무궁화 등이 특이하게 조각되어 있다. 교당의 수용인원은 1,000명.
중앙대교당은 또 일제 때 월간 잡지 개벽을 발간한 개벽사의 터이기도 하다. 1920년 6월 25일 천도교에서 정신의 개벽과 사회의 개조를 주장하면서 항일사상을 고취한 종합 월간지 개벽(주필 소춘 김기전)을 펴낸 신문화운동의 요람이기도 한 것이다. 계급주의적 경향의 김기진, 박영희와 민족주의적 경향의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등은 당시 개벽 잡지를 통해 문학과 민족과 사상을 토로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인 손용화와 결혼한 소파 방정환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와 어린이라는 호칭을 일반화시킨 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곳도 이곳 중앙대교당이다.
소파는 나라의 새싹인 어린이운동을 이 곳에서 전개하였으며, 이 운동이 어린이 날로 발전하여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날을 열어준 계기를 심어준 것이다.
방정환 선생은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창립하여 그 이듬해인 1922년 5월 1일 제1회 어린이의 날 행사를 가졌으며, 1923년 5월 1일에는 조선소년군단, 불교 소년연맹, 천도교 소년회가 연합으로 제1회 어린이 날을 제정하여 지금의 어린이 날 효시가 되었다.
지난 5월 5일은 제 81회 어린이 날이었지만, 천도교에서는 한 해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제 82회 어린이 날로 지켜오고 있으며, 따라서 천도교는 이 곳을 세계어린이 운동의 발상지라고 기념하고 있다.
어린이 날의 유래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람마다 한울 모셨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말씀에 근거하여 제2회 교주인 해월 최시형 교조의 법설에 어린아이 함부로 치지마라, 어린아이 치지말고 울리지 말라, 왜냐 어린아이도 한울님 모셨으니 도가의 부인이 아무생각없이 아이를 함부로 치면 그 아이가 곧 죽는다고 말한 데서 그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은 제3세 교조 손병희 선생과 그의 사위인 방정환 선생에 의해 어린이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8.15 광복후에는 해외로 망명했던 백범 김구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귀국해 이곳 대교당에서 환국인사와 더불어 많은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과거를 갖고있는 중앙대교당은 한국의 정치 일번지인 종로를 대표하는 건물답게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2차대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 등 굵직한 정치집회 역시 많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지난 3.1절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개최한 것을 비롯 문화 종교분야의 의미있는 행사들이 이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에는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서울 교구 시일식을 가지며, 천일기념일 등 천도교 8대 기념일에 시일식 및 기념식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세미나 발표회장이나 결혼식장 등으로 일반에도 장소를 대여해 주고 있다. 창경궁, 인사동과 연계하여 관광코스로도 지명도가 높아 외국인 관광객을 발길이 끓이지 않는다. 요즘 일반 시민대학이나 평생교육, 각 학교의 향토 답사 동아리, 내고장 바로알기 등의 프로그램들이 늘어나 우리 전통문화를 관광하려는 일반인들도 찾고 있다.
/양원정기자 ywj22@segye.com
<사진>천도교 중앙대교당 전경 사진. |
목사들의 거짓말, 날조, 왜곡---- (정해동먹사 글에 대한 동포의 반론)
성직자라는 자가 이래도 되는가? 무식한게 죄인가? 십계명은 뭐하러 적어놨는가?
이름: 정해동 감리교 먹사. 2004/3/23(화)
아름다운 기독교 유적지를 보존하고 기리자
--> 화성제암리감리교회, 천진암성지 날조부터 사과하라
인류는 역사의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인류가 남기는 역사의 발자취는 바로 문화의 발자취가 되는 것인데 야만인은 문화와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으려하지 않는다.
---> 기독교는 수메르문화, 조로아스터교, 미트라신앙, 힌두교, 불교 의 발자취를 더듬기를 넘어서 아예 베끼고도 자기만이 진리라는 적반하장의 주장을 고수해왔다. (중세 까진 그거 들통날까봐 숱하게 죽였다) 누가 야만인일까?
왜냐하면 그 가치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인은 다르다 문화인은 역사와 문화의 전통과 가치를 귀하게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만인이 되어서는 않된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단군상을 부수고, 불상을 훼손하고, 사찰에 불지르고 다녔나? 그게 역사와 문화와 전통의 가치를 귀하게 보는 자세던가? 그것도 남의것이 아니라 자기 조상의 문화였는데도? 문화인은 그래도 되던가?
기독교는 우리 5000년 역사와 문화에 가장 찬란한 햇살을 뿌리는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 천주교는 200년, 개신교는 100 년 남짓 됐다. 그래서 개신교는 전래되자마자 자기네 신의 이름을 야훼에서 하나님으로 개명시키고 일제에 충성하자고 결의하고 남의나라 조상신에게 절하고 다녔나? 기독교가 뿌린 말씀에 생명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문화 역사에 찬란한 햇살을 뿌리고 있는가? 자기 조상도 지옥보내고, 민족 시조도 부정하면서 뭔 양심으로 역사와 문화를 언급하는가?
19세기말 우리나라는 급변하는 세계사적인 흐름의 풍랑속에서 참으로 정신을 가누기 힘들 때 하나님은 우리민족을 사랑하셔서 선교사들을 부르셨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여 우리강토에 오셔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주셨다.
---> 그리하야...
미국 선교사 알렌은 첫 발전소 계획을 세우고 그 이권이득
미국 기업체들로부터 전화 및 수도시설을 끌어들여 이득. 평북도 운산금광의 채굴권 팔아 넘겨 당시 1500만 달러의 국부유출.
언더우드는 석유와 석탄 등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이득.
마펫은 압록강 주변의 산림 채벌권을 얻어 거대한 목재 재벌.
선교사 리젠드르는 1백만 달라의 자본을 투하하여 고진동과 대유동, 수안과 강릉 등 굴지의 광산들에서 ‘채굴권’을 틀어 쥐고 금, 은을 비롯한 지하자원을 약탈해 갔으며 수많은 공장들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조선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아~ 이게 복음의 씨앗이었구낭~
3.1운동 ,임시상해정부, 대한민국수립 여기에 면면히 흐르는 기독교의 정신을 잊어서는 않된다. ---> 3.1.운동은 천도교에서, 상해정부나 독립운동은 대종교에서 솔선 주관하였다.
이 땅에서 생명을 바친 분들의 고귀한 희생, 서울 외국인 묘역 선교사님들의 무덤을 보라. 그분들의 발자취를 기념하고 따르는 일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알렌은 ‘을미사변’전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민비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이노우에의 제의에 따라 리조왕실의 안전을 일본침략군에게 맡기도록 설복함으로써 일제를 도와주었다.
미국 선교사 해리스는.. 소생은 자기의 직무상 한국재류의 모든 선교사와 일본에 호의를 가지고… 실은 통감정치의 가장 열심있는 지지자임을 고백합니다 라는 글을 냈고 ,
미국 선교사 호기스는 1908년 10월 조선통감부를 찾아가 정치의 불간섭을 선서하고 광주의 구세군이 독립을 위한 투쟁에 개입한다는 것을 구실로 그 관영을 해산하여 일제의 통치체제 수립을.. 도와주었다.
미국 선교사 존스는 일제의 야만적인 통치제도에 순종할 것을 설교하였으며
헐버트는 일제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였다.
평양주재 미국 선교사 불레비는 ‘조선 교회는 일제의 침략세력을 미워하는 죄를 회개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야말로 원수도 사랑하는 무맥한 순종을 설교하였다.
아~ 이분들의 발자취를 기념하고 따르는 일은 참으로 복된 일이구낭~
지리산 왕시루봉은 기독교의 유적지가 되어 우리민족의 장래를 책임질 일군들의 정신을 함양하는 아름다운 도장이 되어 세계에까지 나아가 인류에 공헌하기를 바란다
---> 자연을 보존하여야 할 국립공원에 유적지를 만들어 건물을 세우고 기념관을 짓는게 인류에 공헌하는거던가? 시립공원인 인천공원에 웨슬리 동산만들고 웨슬리 동상 세우는거하고 단군상 초등학교에 세우는거 하고 뭐가 다른가?
뻔뻔한 족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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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개독들 사기치고 돈떼먹는거 빼면 시체죠
3.1운동은 부루주아 민족주의의 최종결산이었으나.. 대표들은 종교대표들이었다. 개신교와 천도교는 그 이후 모두 변절했다. 이른마 민족대표라는 종교대표들은 3.1 운동으로 무계획한... 민족의 역량을 소모만 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른바 민족주의는 사라졌다. 민족계량만 있을 뿐이었다.
3.1 운동의 이른바 민족대표는 종교대표였으며 결론적으로 봤을때 민족배반자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가 천도교와 개신교이다. 가장악질 친일분자... 그 이후 이른바 민족대표는 적극적 친일파로 돌변하거나 이광수 얼굴이 덜 두꺼운 분들은 소극적 친일 민족계량, 자치론 등으로 돌아 섰으며, 정말 독립하고 싶은 인간은 사회주의로 투항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천도교를 민족종교에서 빼라고 한 것이다. 대표인물 최린.. 차리리 민족종교라면 대종교나 증산도가 차라리 민족종교? (물론 릴리는 무쟈게 싫어하지만) 라고 볼 수 있다. 증산도의 한단고기류의 사서가 대동아공영권의 같은 논리를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최소한 북로군정서(대종교)는 항일인 것은 사실이다.
3.1 운동에서 이른바 민족대표라는 종교대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좀 알아나 보자.. 그 인간들 중에 3.1 운동때문에.. 피해본 인간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 기껏.. 1년 형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그것이 전부.. (한용운 예외)
최남선인지 이수광인지.. 누가 지었다더라.. 짓기 싫다는 것 억지로 지어라고 해서 지어놓은 것이 "일본의 무신함을 탓하지 아니하노라.. 금을 오등을 채찍질.." 그것 좀 읽으라고 해도 겁나서 못읽고 덜덜떨다가.. 기생집(태화관)에 모여가지고.. 지랄하다가 학생보고 대신읽으라고 해서 읽고 도망갔다는..
부루주아독립운동은 쪽팔리는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교과서에 적을 일이 없으면.. 그런일 밴도에 폭탄넣어서 던진일 나오겠냐구.. 팔레스타인 가지지구나 이라크를 보라 연일 터지는 폭탄테러.. 도대체.. 부루주아 독립운동 이른바 민족주의 가 한일은 북로군정서 빼고.. 밴또에 폭탄넣어서 던진일 하나 가지고 둘다 지가 했다고 주장한 일.. 안중근 이외에 또있나..
하여튼 이른바 민족대표라는 민족변절자들은 민중의 독립열망을 멋대로 소모시킨.. 3.1 운동에서 단지 만세만 부르면.. 독립된다는 유언비어를 살포해서 무수한 민중이 일본군의 총칼에 죽어갔다.
민족변절자들이 무계획 아무런 희생없이 그냥.. 독립선언문 서로 짓기 싫다는것..대충 지어놓고 읽고 저거들은 흩어져 버려서 민중의 역량을 일시에 소모시킨 것.. 그 이후 대규모의 어떤 운동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 사학자들은 이른바 민족변절자들에게 일본측이 먼저 제안하지 않았는가라는 강학의혹.. 아니 확실한 의혹을 가지고 있으나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그러니까.. 일제가 여러나라의 독립운동을 보고 인도 태국 등등.. 조선반도도 어떤 변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른바 민족별절자 몇놈을 꼬드겨서 무절제하게.. 운동한번 불지펴서 민족적 역량을 일시에 소모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가령 사회주의가 선수를 쳐서 국제인터네셔날의 지도하에.. 3.1운동처럼 산발적으로 조선반도에 일어나지 않고 조직적인 저항으로 일어날 경우 일본으로서는 큰 타격일 될 수 밖에 없으니.. 기 민족 민중적 역량을 어설픈 민족배반자들이 먼저 선수?칮도록 꼬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민족 배반자들은 그것도 하기 싫어허 이리빼고 저리 빼고 .. 했다는..
뿐만 아니라 양반지주들은 자기 종이나 머슴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일본군에 의해 죽게 만들어 놓고서는.. 건국후 종의들 훈포장을 자기들이 했는양 갈취하였으니.. (실제 사례를 들었음) 이 인간들... 육시할 넘들..
어쩌면 그런 우유부단한 면 때문에 우리나라가 외세의 도움으로 독립을 했는지도 모를일이지요. 외세에 의해 독립이 되어도 민족반역자 처단을 못한 것도 그렇고... 정신대 잡혀갔다 돌아온 여자들을 천대할 줄은 알면서, 요꼬 이야기 같은 게 나오도록 놔둔 건지도... 난 요꼬란 뇬이 글 쓴 거 보고 열받은 건... 그 일본 뇬넘들을 왜 살려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해방이 되면 바로 그것들이 했던 방식대로 그들을 처단해 버렸어야지... 그런 우유부단함을 볼 때 생각나는게, 그렇게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저항 운동... 웃기고 자빠진 개소리지... 민족 독립 운동이 무슨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데모쯤으로 생각하는 한심한 발상이라는...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독립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들은 설마 일본 넘들이 데모하는데 총을 안 쏠 거라는 착각을 한 건지 아니면 그걸 확인해 볼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그것으로 그들이 노리고 싶은 게 뭐였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는...
웬일로 자유인님하고 통하네요. 3.1운동을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다라고 가르치면서 자랑스러워하던.... 비폭력무저항 운동은 지도부??라는 민족변절자넘들의 술책이고.. 만세 만세 부르라고 해놓고 저그들은 도망하고 ... 병보석으로 한달만에 풀려나고.. 민중은 열받아서 곡갱이이 들고 저항했당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