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노키아와 에릭슨은 어떤 기업인가?
01. 노키아
노키아(Nokia)라는 명칭은 핀란드 남부에 위치한 노키아 강에서 유래한 것이다. 1865년 노키아 강 근처에 노키아 제지 펄프 공장이 설립되었고, 공장의 사업 범위가 확대되면서 핀란드 전선회사를 인수했다. 그 후 1967년 전선회사는 핀란드고무회사, 노키아펄프제지회사와 합병되었다.
1977년 K. 카이라모(Kari Kairamo)가 노키아의 실무책임을 맡게되었다. 그는 기술만이 노키아가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하며, 전통 공업을 통해 발생한 이윤을 새로운 분야인 전자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겨우 걸음마 단계에 있던 노키아의 이동통신 세계화 사업은 1987년 경영난으로 적자를 맛보아야 했다. 직원들이나 경영진의 생산량관리 기술 부족 때문에 노키아는 모토로라 같은 경쟁업체에 대항할 능력이 없었다. 모토로라는 이미 규모의 생산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사업에 뛰어든 상태였다.
1991년 구 소련이 해체되면서 하룻밤 사이에 주요 무역 대상국을 잃은 핀란드의 경제는 바닥을 치기 시작했고, 노키아의 최대 주주 은행에선 노키아를 에릭슨(Ericsson)에 매각하려고 했지만 에릭슨은 노키아를 원치 않았다.
그 후 1992년 노키아는 이동전화 사업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유럽 표준의 GSM(Global System for Mobil com-munication, 유럽 및 기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디지털 이동전화 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후 노키아가 이동전화 사업에서 거둘 커다란 성과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노키아는 펄프 제지업과 고무산업을 곧 초기하고 모든 역량을 통신산업에 집중했다. 전선회사는 역시 매각되었다. 몇 년 후, 텔레비전과 컴퓨터 사업체도 팔아버렸다.
현재 노키아는 전세계 이동통신 업계의 선두주자이다. 풍부한 경험과 창조력, 고객과의 우호적인 관계, 그리고 안정된 솔루션 등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이동전화 공급업체로 자리잡았고, 동신에 정보통신, IP 서비스 분야에서도 수위를 다투고 있다. 노키아의 주식은 세계 주요 증권시장 여섯 곳에 상장되었고,주주들이 전세계에 포진하고 있다. 2000년에는 세계시장에서 304억 유로(미화 270억달러)의 판매액을 기로했고, 직원은 6만 명을 넘어섰다.
2000년 말 세계 10개국에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15개국에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했으며, 세계 130여 개국에 제품을 판매 · 보급하고 있다. 또한 전세계에 걸쳐 판매 · 서비스 네트워크를 구축한 상태이다.
02. 에릭슨
에릭슨(Ericsson)은 1876년 라르스 마그누스 에릭슨(Lars Magnus Ericsson)이 스톡홀름에 전신기 수리점을 시작한 것을 기반으로 설립된 기업이다. 그해 미국에서는 벨이 전화기 전매특허를 신청했다. 1878년 에릭슨의 장부에 처음으로 '전화'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때부터 에릭슨은 전화기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해 연말, 에릭슨은 음성을 전달할 수 있는 수화기가 달린 자석전화기 22대를 출시했는데, 가격은 대당 55크로네(Krone, 덴마크 · 노르웨이 · 스웨덴 · 아이슬란드 등에서 사용되는 화폐단위)였다.
에릭슨의 전성기는 1880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미국 기업 벨은 자국의 설비를 이용해 스웨덴에 최초로 전화망을 건설했다, 이 일로 에릭슨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1881년 발트 해안에 위치한 가블레(Gavle)시에서 전화 시스템 건설을 공개입찰하자 에릭슨은 철저한 검토 끝에 과감하게 벨과 함께 응찰에 나섰다.
검증을 마친 후 입찰 공고자는 두 회사의 제품이 모두 훌륭하지만 에릭슨의 전화가 더 간편하고 튼튼하며, 미관상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가블레 교환기협회와 현지의 권위 있는 전화 전문가들의 테스트를 거쳐 에릭슨은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에릭슨의 역사상 최초로 얻어낸 쾌거로, 이때부터 에릭슨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세기가 넘는 긴 역사 속에서 에릭슨은 시종일관 후퇴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많은 사람들은 에릭슨을 단지 이동전화 제조업체라고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동전화 사업은 에릭슨 전체사읩의 20퍼센트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에릭슨이 가장 자랑할 만한 부문은 네트워크 시스템 사업으로, 이동전화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기초시설 영역인 GPRS와 3세대 이동통신 분야에서 전세계 시장의 50퍼센트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과학기술 컨설팅 업체인 가트너데이터퀘스트(Gartner Dataquest)는 2001년 2월에 에릭슨이 루슨트테크놀로지스(Lucent Technologies)를 추월해 2000년에 이미 세계최대의 통신장비업체가 되었다고 밝혔다. 가트너 데이터퀘스트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에릭슨의 라이벌인 노키아는 1999년의 4위에서 3위로 뛰어올랐고, 노텔(Nortel)은 3위에서 2위로 상승했으며, 루슨트는 2000년 4위를 차지했다.
2 : 중국 이동통신 업계의 양대산맥, 노키아와 에릭슨
01. 노키아
노키아는 1950년대부터 중국과 업무상 왕래가 있었다. 1985년 베이징에 지사를 설립했고, 다칭유전(大慶油田,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북서쪽 안다[安達] 근처에 있는 대규모 유전) 개발에 네트워크 설비를 제공했다. 이후로 노키아는 중국 기업 중 가장 많은 사용고객을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
1985년 노키아는 당시로서는 최초로 NMT450 시스템을 케이블과 함께 제공했다.
1980년대 말 케이블 생산라인을 판매했고, 동시에 중국 유전지역 최대의 지정 통신 공습업체라 는 위치를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노키아의 첫번째 NMT 이동전화 역시 중국에 판매 되기 시작했다. 1989년 노키아는 유럽 기업으로는 최초로 중국에 ETACS 휴대용 기 기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초에는 중국에 최초로 GSM 이동전화와 GSM 네트워크를 제공했다. 1985년 베이징에 지사를 설립한 이후, 노키아는 케이블과 전 송 시스템 등의 제품에서 네트워크 설비와 이동전화 제품에 이르기까지 영업범위를 확대했다. 이로써 노키아는 중국 통신업계에선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된다.
2000년 중국에서의 노키아 영업액은 28억 달러, 연간 수출액은 15억 달러에 이르렀다. 2000년 5월, 노키아는 베이징에 21세기를 향한 세계적 수준의 하이테크 산업기지인 싱왕(星網) 공업단지를 준공했다. 이 단지는 주로 이동통신 제품의 생산 · 연구 · 영 업을 담당하며, 아울러 그와 관계된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예상 투자금액은 100억 위안에 이른다.
현재 중국은 노키아의 세계시장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큰 곳으로, 20개가 넘는 지사와 7개의 합자기업, 전액을 투자한 생산기지와 연구센터를 한 개씩 보유하고 있고, 직원 수는 5,500명이 넘는다. 노키아가 중국에서 생산하는 주요 제품은 기본설비 시스템, 설비 시스템 제어기, 이동 교환센터, 접속설비, 디지털 교환기, 디지털 전송설비, 그리고 노키아의 최신 이동전화 제품 등이 있다.
02. 에릭슨
1892년 중국과의 첫번째 주문 계약서에 서명.
1894년 상하이에 전화기 2,000대 설치.
1900년 처음으로 인공 교환기 사용.
1924년 상하이에 전화기 2,000대 설치.
1961년 첫 종횡식 교환기가 중국에 진출.
1981년 베이징에 디지털 교환기 판매.
1985년 베이징에 에릭슨 사무소 설치.
1987년 친황다오(秦皇島)에 이동전화 시스템 개통.
1988년 738개의 공장과 계약하여 기술 이전, PABX MD110 투자생산에 합의.
1989년 광저우, 상하이에 사무소 설치.
1990년 상하이 국제 교환국에 교환설비 제공.
1992년 중국에 지속적으로 합자기업을 설립하여 AXE-10, 이동전화, 이동전화 설비 생산.
1994년 에릭슨유한공사 설립.
1995년 중국이 에릭슨의 세계 3대 시장으로 성장.
1996년 중국에서 최초로 ISO 9001 품질인증을 획득, 중국이 에릭슨의 세계 2대 시장으로 성장.
1997년 상하이과학연구개발센터와 에릭슨중국학원 설립.
1998년 중국이 에릭슨의 세계 최대 시장으로 성장, 충칭에릭슨과학기술유한공사 설립.
1999년 에릭슨기업자문유한공사 설립, 중관춘(中關村)에 에릭슨 이동 다매체 개방 실험실 설립.
2000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WCDMA 평가 테스트 보고서 완성.
에릭슨과 중국의 최초 접촉은 아마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1894년 2,000대의 전화기가 바다를 건너 상하이로 온것을 시작으로 에릭슨과 중국 교류의 서막은 열리게 되었다. 1985년 에릭슨은 베이징에 중국에서의 첫번째 사무소를 설치했고, 1994년 에릭슨유한공사를 설립하여, 그 총본부를 베이징에 두었다. 현재 에릭슨은 중국에서 이미 4,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고, 24개의 사무소와 10개의 합자기업을 설립하여 고객들에게 통신 문제 관련 솔루션과 서비스를 한데 묶어 제공하고 있다.
사업의 현지화를 위해서 에릭슨은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은 협상과 구체적인 실시 · 감독 · 관리를 통하여 현지화를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1999년 에릭슨이 매일 중국현지에서 물품을 구입한 금액은 이미 1,000만 위안을 넘어섰고, 그해 현지 구매량은 총 39억에 이르렀다.
에릭슨은 기술개발에 힘을 쏟는 것과 동시에 연구개발과 인재육성 역시 중시하여, 1997년에는 베이징에 에릭슨중국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학원은 1999년에 재무관리 전문가로 활동하게 될 1기석사들을 배출했다. 또한 에릭슨은 베이징과 상하이에 에릭슨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여 중국 시장과 국제시장을 위한 최신의 기술과 응용방안을 개발하고 있다.
에릭슨유한공사와 중국 내 합자기업은 이미 1996년에 연합하여 부품을 국산화하고, 중국에서 수출되는 에릭슨의 제춤과 서비스에 대한 기획을 함께 진행하는 '이동통신국산화지도위원회'를 발족했다.
3 : 갈수록 치열해지는 중국의 이동전화 시장
중국의 이동전화 고객이 대폭 증가함에 따라 중국은 세계 최대의 이동통신 시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서 에릭슨은 말레이시아에 설립했던 이동전화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이전했고, 노키아는 2000년 말 베이징 '씽위안' 생산기지 투자금액을 200억 위안으로 대촉 늘렸다. 2000년에 모토로라와 지멘스가 중국 투자액을 늘려 톈진과 상하이의 이동전화 생산기지 규모를 확대하겠다고 선언했고, 2000년에 비로소 중국 이동전화 시장에 진입한 프랑스 알카텔 역시 쑤저우에 생산기지를 설립하는 등 외국 이동전화 기업들이 중국 현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산 이동전화는 설계 및 핵심부품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몇몇 중국산 이동전화 모델을 비교해보녀 제조는 각기 다른 업체에서 했지만 내용 구성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모두 수입제품을 쓰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이동전화 시장의 대부분은 노키아, 에릭슨, 모토로라에의해 거의 점령된 상태이고, 그밖에 지멘스, 삼성, 마쓰시타도 높은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제품은 전체 시장의 10퍼센트도 차지하지 못한다. 캉자, 하이얼, TCL 등 9개 중국 제조업체와 수입업체 브랜드가 끊임없이 가세하여 시장경쟁은 과열현상을 빚고 있다. 중국 이동전화 시장경쟁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01. 다양한 마케팅 전략으로 승부한다
현재 중국의 이동전화 시장에는 특이한 브랜드 마케팅, 종합 마케팅, 입체화된 광고전략, 저가전략 등 다양한 수단이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가격경쟁 또한 치열하여 2,000위안 이하의 저가, 2,000 ~ 4,000위안의 증가, 4000위안 이상의 고가로 나뉘어 가격대가 형성되어있으나, 경쟁은 중 · 고가 제품에 집중되고 있다.
02. 기술의 발전으로 품질이 평준화되고 있다
수요의 변화에 따라 이동전화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를 거듭하여 더욱 다양하고 완벽한 기능과 한층 보완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디자인이 참신하고 정교하며, 기기는 점점 경량화 · 소형화 · 슬림화되고 성능도 강화되었다.
기술은 더육 향상되어 절대적으로 우세한 제품이 없는 모두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03. 개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수요는 다양화 · 차별화되어 있는 편이다. 합리적인 가격은 이동전화를 일반 가정에 끌어들였고, 개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수요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04.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아이템으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이동전화는 이제 개인의 우월한 신분을 나타내는 통신도구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 유행의 추구, 개성적 이미지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시장 잠재력은 엄청나지만 차별화된 시장에 진입하는 경쟁자는 아직 많지 않다.
출처 : 쉬중명, 장서우웨이, 시풍타오 지음(백은영 옮김), 차이나 마케팅,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