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회의
사도행전 15:1-5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행 15:1-5 / [교회의 첫번째 회의]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을 때였다. 유대에서 온 사람들 몇이 여전히 신도들에게 유대의 옛 관습대로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자 2)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큰 논쟁을 벌였다. 그래서 신도들은 그 지방 사람 몇을 동행시켜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 문제를 사도나 장로들과 함께 협의하여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3) 온 교회가 바울 일행을 전송하였다. 그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는 동안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된 소식을 모든 신도들에게 알려 기쁨을 함께 나눴다. 4)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들은 신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인 모든 사도와 장로들의 환영을 받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여행 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를 그대로 보고하였다. 5) 그때 원래는 바리새파에 속해 있다가 신도가 된 사람들 몇이 일어서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신도가 된 이상 모세의 가르침대로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을 빠짐없이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장은 사도행전의 전환점입니다. 예루살렘 회의를 기점으로 사건의 무대는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중심인물은 베드로에서 바울로 바뀝니다. 이 회의에서 사도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으로 복음은 유대라는 좁은 틀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진합니다. 그러나 이 전환과 전진을 가져온 예루살렘 회의는 인간들이 합의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회의라는 방식을 써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인간구원의 의지와 비전을 인간들이 알게 하신 결과였습니다. 복음 선포와 전달, 부흥의 주체는 구원의 역사(歷史)를 주도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유대로부터 내려와서(1)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주의자들이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을 반드시 준수해야만 하며,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의 전통을 지켜야겠다는 판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와 비진리의 터에 서 있는 사람의 순수함과 열정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예루살렘에... 보내기로 작정하니라(2) ‘다툼과 변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들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폭동’ 혹은 ‘반란’으로 번역됩니다. 다툼과 변론이란 표현은 안디옥교회에 엄청난 투쟁과 반목, 분열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심각한 위기를 몰고 왔습니다.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교회의 질서 안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합니다. 교회의 권위를 세워지는 지혜로운 결정이라 여겨집니다.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3) 예루살렘으로 가는 약 480km의 여정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여러 회중과 교회를 방문해 이방인 선교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회중은 이방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보고 크게 기뻐합니다. 비록 단 한 절이지만 이방인 구원의 정당성과 당위성이 강조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여행을 예수의 이야기로 진행한다면 기쁨, 행복, 충만함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4-5)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다루기 위한 공식적인 회의가 열립니다. 다른 편지에서는 ‘거짓 형제’(갈 2:1-10)로 불리기도 한 바리새파 출신 기독교인들이 이방인의 율법 준수와 이방인의 할례 받음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계명과 유대 민족을 구별시킨 종교의식을 동일시 여기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신 것은 유대인을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적용: 복음이 아닌 것을 주장할 때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당신과 우리 교회는 복음 위에 올바르게 서 있습니까? 본질이 아닌 것을 가지고 죽기살기로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날 신천지 같은 이단 때문에 교회가 많이 어지럽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교회가 분열되는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어쩌면 굉장히 복 받은 나라입니다. 종교적인 간섭을 전혀 하지 않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마귀가 이단과 분열로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마귀의 놀음에 넘어갈지 모릅니다.
< 설 교 >
교회는 어떤 곳인가?(15)
“사고의 변화를 경험한 어머니 교회”
행 15장 01-21 / 김명혁 목사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출산하자 마자 소리를 지르며 우는 것도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어머니 뱃속으로 되돌려 보내달라고 호소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기가 출생하자마자 꼭 안아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요나도 그랬고 사울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고향 중심적이고 자기 민족 중심적인데, 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사고의 변화를 두려워하며 거부합니다. 특히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의 영역을 너머 서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에게로 다가가서 저들을 용납하거나 저들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이방인들이나 죄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거나 함께 음식을 먹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며 그것을 터부시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은 물론 구약은 본래부터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고향 중심적이고 자기 민족 중심적인 사고를 거부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을 품고(창12:3) “땅끝까지 이르게” 하는(사49:,행1:8) 세계 보편주의를 지향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사55:8)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민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받아드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반항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세계 보편주의적 생각과 계획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면서 이렇게 대들었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4:1-3).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히브리 전통과 바리새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던 예수를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계속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지시에 반항했습니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행10:13,14).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나바와 사울이 소 아시아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여전히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으로]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행15:1).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15:5).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현상은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와 미국의 보수주의 교회 안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어머니 교회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하나님께서 바꾸어놓으셨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 사고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지향했던 모토 중의 하나는 “semper reformata” 즉 “항상 개혁”이었는데 우리도 “항상 개혁”을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전에 로마서 12장 2절에서 “오직 마음으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분부했습니다. 현재진행 명령형입니다. 과거에 한번 변화를 받은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항상 계속해서 변화를 경험하여야 한다고 분부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안에 사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사도행전 15장을 읽으면서 이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을 본문으로 “사고의 변화를 경험한 어머니 교회”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런 제목으로 설교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주일 안디옥 교회에 대한 설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성도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오늘 아침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여러분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면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부터 선교 역사의 새로운 장이 전개됩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새롭게 전개됩니다. 그런데 그리스와 로마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바꾸어 놓으셨다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5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머니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고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 드리면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다 함께 모여서 베드로의 간증과 바나바와 사울의 간증을 다 듣고 나서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괴롭히면서 저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머니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고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고의 화가 일어났습니까?
첫째, 베드로의 간증으로부터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7-11).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간증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처음에는 가이사랴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행10:19,20). 베드로는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이방의 땅 가이사랴에 가게 되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성령께서 강림하시므로 베드로는 고넬료와 거기 모였던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오래 전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셨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셨고 믿음으로 저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고 그래서 저희나 우리를 분간하지 않으셨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방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믿음과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는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도들과 장로들과 모든 성도들이 베드로의 간증과 고백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생각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고의 변화가 자기들 마음과 생각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먼저 사도 베드로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데이빗 브레이너드와 요나단 에드워즈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던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독일과 프랑스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알버트 슈바이쳐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던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나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한국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손양원 목사님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던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먼저 사도 베드로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따라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고와 행동을 깨트리신 것을 고백하며 간증했습니다.
둘째,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으로부터 사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행15:12). 바나바와 바울은 수리아의 안디옥과 소 아시아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일어난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간증했을 것입니다. 사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수리아의 안디옥에 갔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11:22).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저들에게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했는데 큰 무리가 주께 더했습니다. 바나바는 그 사실을 보고하며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서 일년간 두 사람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교회가 부흥 발전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 사실을 보고하며 간증했을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 계속해서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었지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분명하고 강하게 명령해서 할 수 없이 두 사람이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간증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저희를 통해 자기 은혜의 말씀을 친히 증거하셨다고 간증을 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신 일도 있었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맞아 거의 죽는 경험까지 했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기들을 이방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래서 이방 인들을 믿음으로 구원하게 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거부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도들과 장로들과 모든 성도들이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과 고백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생각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마음과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저들의 닫혀진 마음과 생각을 열고 계심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저들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셋째, 야고보의 제안과 선언으로 사고의 변화가 완성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행15:13-21). 박윤선 목사님은 여기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야고보는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였던 야고보가 베드로의 간증을 듣고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의 간증을 듣고 자기의 생각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피력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라고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가 야고보의 말을 옳게 여기고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와 실라 편에 안디옥 교회와 이방인 교회들에게 전달하기로 가결했습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행15:22).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행15:23-29).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결정이었습니다. 질서정연한 민주적인 결정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하나님 중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라고 지적했습니다.
네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에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가 작성한 편지를 가지고 안디옥과 이방인 교회들을 방문하고 저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격려했습니다.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행15:30-35). 이것이 사고의 변화를 경험한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예루살렘 교회가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로의 사고의 변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복음이 이방의 땅 마게도냐와 유럽을 향해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을 향해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땅끝까지” “땅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이것이 우리 주님의 소원과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미국교회는 물론 한국교회가 복음을 “땅끝까지” “땅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기를 소원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교회나 미국교회가 공산권 선교나 모슬렘권 선교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산권과 모슬렘권에 대한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한국 교회 안에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가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사고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수 많은 사고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반일 반북에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일 반북 반흑에 대한 사고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모슬렘을 무시하고 차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반 모슬렘에 대한 사고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남미와 동남 아시아 산지에서 살고 있는 산족들에 대한 사고의 변화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긍휼과 사랑의 대상으로 점점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보다 진보적이고 보다 포용적인 자세로의 사고의 변화를 경험하여야 한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종교다원주의를 포용하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악의 세력을 그대로 용납하자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모든 족속 모든 민족에 대한 긍휼과 포용과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품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자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방으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우리가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느냐?” 한국 교회 안에는 이미 사도 베드로나 바나바와 바울의 고백과 간증과 같은 고백과 간증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 같은 분들이 그와 같은 고백과 간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항상 변화를 추구하고 변화를 경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어떤 의미에서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북한과 공산권과 모슬렘권과 힌두권을 향한 세계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어머니 교회에서 일어난 사고의 변화가 한국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그리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합의에 따른 새로운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음성을 새롭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새롭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간증을 새롭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품고 세계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 이후의 역사를 한국교회가 다시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과 한국교회 위에 새롭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해답
사도행전 15:1-15 / 박지온 목사
오늘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해답'이라 그렇게 제목을 잡았습니다. 조금 전에 광고 말씀 속에서 있었습니다 만은 건축 위해서 기도하라! 이러니까 이 건축 위해서 기도한다! 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왜 그러냐하면, 아직까지 건축에 대한 뜨거운 가슴도 잘 안 생기고 이런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안 나오는지 아마 우리 생각에 건축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면 옛날 같으면 난이 금방 차버려야 되는데 기도 훈련이 워낙 안 되어서 그러는지 아직 난이 남았다 그래요. 그리고 들려오는 소식에 좀 풍문입니다. 나한테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데 오히려 권사 님들이 2시간이 길다! 많다! 그런다! 그래요. 물론 자기는 괜찮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이 초 신자도 있고 그런데 뭐 2시간은 너무 안 길겠느냐? 염려가 되어서 그렇겠죠!
그러나 혹시라도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2시간이 긴 게 아닙니다. 진짜 기도하려고 그러면 2시간 아니고 3시간, 4시간 해야 되는데 그렇게는 못하니까! 또 기도라는 것이 건축! 그것만 붙들고 기도한다! 그게 긴 것 같아요. 사실은 오늘 여러분과 제가 구체적으로 기도 제목을 조금 붙잡고 해야 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은 기초적인 것이 안 되면 건축 위해서 기도하는 것 소용없습니다. 뭐 그리고 건축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건축하는 문제 이전에 정말 하나님 앞에 금년도에 기도 제목을 잡고... 원래 매년 옛날에 이 다락방 하기 전에는 그 초창기 첫 때가 되면 기도를 구체적으로 했습니다. 붙잡고 그 기도 제목을 갖고 금년도에 이런 계획 가지고 한다 그랬습니다 만은...
그래서 기도하게 될 때에 뭘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번에 오자마자 눈감고 4분이 그랬는데 4분! 이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요. 4명입니다. 4사람이! 4사람이 한 조가 된다! 그러니까? 그러면 기니까! 30분씩 나누어 가지고 30분씩 그러면 2시간 안 되느냐? 이라는데 그걸 그렇게 이해하지 마시고 오면서 가면서 앉아 가지고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기도하기 위해서 가야 되겠다. 이것부터 기도입니다. 생각부터... 그 다음에 오셨다! 그러면 금방 앉아 가지고 또 됩니까! 이야기 속에서 그것도 벌써 기도입니다. 그 다음에 앉아서 이야기만 합니까? 이야기 딱 시작하면 4사람이니까! 뭐부터 해야 됩니까? 당장 뭐 기도제목 내 놓고? 그것도 마음에 붙어야 기도가 나오지! 그러면 뭘 해요? 성경말씀 읽고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고 그 다음에 또 그래도 또 마음에 아직까지 열리지 않으면 뭘 해야 됩니까? 찬송도 한, 두 곡하고 그러면서 기도가 된다. 그러면서 기도가 진행이 된다. 찬송도 역시 기도고 우리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되기 때문에 말씀은 꼭 여러분들이 처음 시작 할 때에 서로 읽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혹시 그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 권사님들은 사실상 저는 그런 생각까지 했어요. 빈난에는 전부 권사님들 채워야 되겠다. 옛날에는 권사! 그러면 교회에 제일 기도 많이 해야될 사람입니다. 아예 집에서 잘 생각은 별로 안 했어요. 전부 교회에 와서 싸 짊어지고 엎드려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권사 팀들이거든요. 우리 권사님들은 특별히 이번 이 기회 통해서 내가 참 기도체제를 이 기회에 만들어야 되겠다. 그런 좀 생각을 가지시고 여러분 그 교회에 여자로서는 여자장로입니다. 사실은... 제일 중대한 그런 사명입니다. 그것을 말로 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권사 님들은 너무 다 친하고 말도 쉽게 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것 같은데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권사가 되었을 때는 기도하고 기도의 힘으로 신비의 힘으로 여러분들의 한마디, 한마디 말이 영향이 나가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 이런 의미에서 중직 자들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그것이거든요. 중직 자들에게 기도가 안 나가면 기도하지 않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 사단이 역사 하는 통로가 되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 평신도들이 중직자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하여튼 특별히 앞에선 중직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게 그냥 아니거든요. 가서 뭐 잘 되라! 그게 기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복 받기 위해서는 참 축복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선 사람들부터 참 말에 힘이 있어야 되고 말이 구체성이 있어야 되고 이것이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문제는 뭐냐하면 여러분 그 먼저 믿는 자들 묵은 디이라 안 그럽니까 참 묵은 디이들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묵은 디이라는 것은 3년만 넘으면 다 묵은 디이입니다. 나는 뭐 아직까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안됩니다. 전부 어떤 의미에서 1년만 넘어도 묵은 디이 되는 사람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위해서 기도하시고 먼저 믿은 사람부터 또 새로 온 것까지 전부 하나님 앞에 바로서야 되겠다는 그런 귀중한 그런 자세로 이건 우리 기도하는 것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금년도에 하나님께서 나를 여러분을 어떻게 축복하실 것이냐? 기도의 제목을 붙잡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그 우리 송구영신예배 드릴 때에 제가 이 표어에 대해서 거의 말씀을 안 했거든요. 그런데 사실 여러분 오늘이 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쭉 그렇게 말은 안 해도 내게서 목회에 바탕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 오늘 표어에 내용입니다. 여러분 보면 그냥 붙여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일 날마다 한번씩 읽어라! 외우까 싶은 생각이 나도 너무 그러면 형식적인 것 같아서 뭐 말 안하고 지나왔습니다 만은 오늘은 천상 말을 해야 되겠어요. 우리 받아합시다. "예배로 영육 성공" 다입니다. 바로 이 순간 복음 받지 못하면 이 순간 말씀을 붙잡지 못하면 여러분 사실상 1주일은 헛 지나갑니다. 사단의 통로 속에 살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말씀을 붙잡아야 되죠.
그 다음에 "십일조로 영육 번영" 야곱이 야곱 될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경제력과 정치력은 십일조에서 나왔습니다. 그 약속을 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성취시키는 데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십일조라는 것은 1/10에 대한 문제는 이 개념은 간단히 복 받기 위해 십일조 한다 그런 개념 뿐 아닙니다. 엄청난 축복이 경제에 대한 정치에 대한 축복이 여기 있습니다. 이걸 이해를 하셔야 돼요. 그 다음에 전도와 선교라는 것은 여러분 말 할 것 없잖아요. 받아합시다. "선교로 세계 정복" 다입니다. 여러분! 세계 정복하려고 그러면 하나님이 정복할 수 있는 증거를 주셔야 안 됩니까! 정복할 수 있는 증거를 주시려 그러면 뭘 해야 됩니까? 여기에 모든 축복이 안 붙으면 정복이 안 되어요.
제가 건강이 별로 안 좋고 그래서 저는 별로 뭐 우리 교회에서 3등 칸으로 해서 미국 들어가고 했습니다 만은 LA에 이번에 들어가면서 비즈니스로 표를 좀 끊었습니다. 끊었는데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더라 구요. 한 400만원 정도! 딱 비행기 표만 300만원이 넘더라구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계정복 그럴 때에 이 마음을 심고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가슴속에 이루어지게 되면요. 안 주셔서는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신봉준 목사님이 아프리카 갈 때에 얼마 드는 줄 압니까? 400만원입니다. 여러분 생각할 때에 이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영육으로 특별히 이 경제와 재력에 축복이 안 오면 이게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오직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곁에서부터, 가까운 곳에서부터 어디까지? 세계 끝까지! 이럴 때에 증거꺼리 주셔야 되는 거죠.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을 살려야 되겠다. 그러면 한국을 살릴만한 것 주죠. 여러분 세계정복이 어릴 때부터 들어갔다. 이건 엄청난 축복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모두가! 이것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 비에서 너무 과다지출 한다 싶어 가지고 제가 이 전도비가 책정되어 있기 때문에 또 우리 장로님이 막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목사님 나갔습니다. 그러더라 구요. 그래서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전도비가 책정이 되어 있으니까! 이 전도 비에서 나가야 되겠다. 싶어서 전도 비로 바꾸면 싶습니다. 제게 나가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갈 때에 건강도! 지금까지 못 간 것이 건강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건강도 경제력도 정치력도 그 다음에 미국 가서 너무 고생하면 안 되니까! 밥이라도 얻어먹어야 되니까! 그래도 뭡니까? 머리가 돌아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언어에 대한 것도 모든 축복이 안되면 머리가 안 돌아가면 미국 가서도 못 먹어요. 손짓 발짓을 하던지, 화장실도 흉내를 내어야 찾아가지. 그래서 세계정복 하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붙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뭐 우리 교회 조금 짓자! 이래가지고 기도하자!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 짖는다! 그럴 때에 이것은 따라오는 축복이에요. 세계정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서 먼저 교회가 힘을 얻어야 되고 교회가 우리만 아니고 우리 자손들이 그 다음에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또 모여들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사실들은 구체적으로 두고 그러자면 우리 자신이 뭐가 되어야 되느냐? 여러분 좀 그런 문제를 배경을 두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받아합시다. "이미 답은 얻었다" 얻었죠. 믿습니까? 이미 다 답 얻었어요. 언제? 예수가 내게 그리스도가 될 때입니다. 그리스도 되는 그때에...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뭡니까? 생명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미 다 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불행하게도 이 답을 얻었다고는 말은 하지만 지난번에도 그렇게 좀 설명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 없어요. 다 예수 믿어라! 그러면 예수 믿는다! 그러나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아무도 부인을 안 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딱 물고늘어지는 사단의 통로가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 예수님이 내게 네게 뭐가 되었어요?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게 안 믿어집니다.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은 뭡니까? 왕으로 오셔서 사망권세 깨었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뭐! 순교하겠습니다. 순교 당하게 해 주옵소서! 이러는 자체가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개념도 없어요. 주님을 위해서 원한다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그래서 바울이 뭐라 그랬습니까? 사나 죽으나 누구를 위해서 오직 주를 위해서 이런 개념이 나와 버립니다.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이겨버렸습니다. 이때부터 뭐냐?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지만 이때부터 근본적인 평안이 오게 됩니다. 안식이 오게 됩니다. 그 다음에 평안이 오는 만큼 뭐가 나가느냐? 내가 입을 열 때마다 능력이 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에게 평안이 없으면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오히려 불안해져요. 그래서 어느 장소 어느 곳에 가든지 무슨 문제를 당했든지 일단 마음에 평안이 왔다. 괜찮습니다.
제가 들으니까 차를 몇 바퀴 굴려놓고 들어앉아 있는데도 평안하더라 그래요. 괜찮아요. 사실입니다. 이게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역사 하는 겁니다. 듣는 사람도 그렇고 만나는 사람도 그렇고 그렇게 줄 수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죽음과 저주! 죽음이 해결된 그때부터 저주에서부터 완전히 우리가 해방된다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히 해결됩니다. 죽으면 어디 갑니까? 천국 갑니다. 그대부터 사단의 권세가 완전히 깨어집니다. 그러면 모든 삶이 이렇게 될 때에 내가 세상과 짝해서 세상이 너무 좋던 것이 이제는 오직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받아합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뭘 줘요? "새 힘을 주신다"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그랬습니다. 장정도 어린아이도 피곤해서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날마다 새 힘으로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넘어질 것 같은데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 사실이 그리스도가 되시는 순간에 이것이 개개인에게 사실이 됩니다. 이게 체험이다! 그러면 또 자꾸 신비로 가는 것 같아서 안되죠.
그러기 위해서 뭐냐 하면요. 여러분 말씀 딱 붙잡고 말씀 읽고 말씀이 들어가야 되요. 그 다음에 기도하면 말씀 붙잡고 기도하게 되면 저절로 병든 사람, 가정, 정신문제 이것이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들어가는 그때부터 점점 해결되어 버립니다. 뭐 고통스러운 것 이 점점 해결됩니다. 이것이 안 되면 안 된 상황에서 지위가 올라간다든가, 많이 받는다든가, 열심히 기도한다든가 그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 교회를 건축하는 것도 이것이 되어야 건축하면 할수록 복이 됩니다. 이것이 안 되면요. 건축하는 것이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 나는 마음에 불안스러운 것이 있다면 바로 어떤 것이냐 하면, 이 상태에서 건축해서 큰 교회가 되었다. 어디로 갈 것이냐? 위험스럽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그런 의미에서 뿌리를 내려라! 정말 뿌리를 내려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바로 붙잡아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꼭 건축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러니까 뭐 가슴에 와 부닥치는 것이 잘 안 되는가 봐요. 여러분이 기도제목을 그런 의미에서 좀 오늘 구체적으로 좀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구체적으로 읽어야 되요. 여러분이 지금 현재 강단에서의 메시지 들고 붙잡고 기도하고 그 다음에 이 메시지 잡고 기도하는 과정 속에서 여러분 아침, 저녁으로 혹시 성경을 읽으면요. 꼭 기도할 때에 뭐냐하면 말씀을 묵상하세요. 그냥 뭐 중얼중얼해서 내가 소원을 내는 그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지 여러분의 기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말씀!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어쩐다 그랬습니까?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말씀을 마음에 심고 가만히 생각만 해도 돼요. 거기에 뭡니까? 축복이 임한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되면 뭡니까? 빛으로 하나님이 역사 하심이 뭐 어떤 방향과 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방향 따라서 저절로 문이 열려지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구체적으로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미 답은 얻었지만 한번 받아합시다. 이미 답은 얻었는데 한번 다시 확인해요.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할 때에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래놓고는 뭐라 그랬느냐? 다 주시리라! 다 이루리라! 전부 그랬습니다. 모든 것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선언하기를 십자가 위해서 뭐라 그랬습니까? 다 이루었다! 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입니다. 이미 답 다 얻었어요. 다입니다. 왜? 다 이루시는 그분인가! 이미 받았습니다. 우리는 좀 확인을 해야 되겠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십니다. 바로이어서 생명 자체입니다. 그 설명을 요한복음 1장부터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집에 가서 여러분들이 다른 것보다도 이것부터 좀 찾아보시고 오늘 쭉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 창조주죠. 그 다음에 바로 창조주이면서 뭐냐하면 4절에 보면 "그 안에"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뭐라 그랬어요?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라 "사람들의 빛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빛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러분 안 믿는 사람들은 암만 이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여러분 혹시 이 설명할 대에 맞아! 이러는 사람은 받아합시다. "이미 다 이루었다" 다 해결되었어요. 이미 답 다 받은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뭐가 되어요? 자녀 생명의 축복입니다. 너무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여러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누구로부터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것을 거듭난 생명이라 그럽니다. 그 다음에 14절에 이 빛이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게 무엇으로 14절에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을 읽을 때에 빛이 들어옵니다. 말씀을 읽을 때에 빛이 들어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되죠? 흑암을 좋아하는 모든 더러운 것들은 순식간에 떠나가 버립니다.
제가 이걸 늘 설명을 했어요. 돌멩이를 들추면 그림자 지렁이 거기에 있던 모든 것들은 숨어있던 것들은 어떻게 됩니까? 숨기에 바쁩니다. 도망가기에 바쁩니다. 여러분 왜 지속해서 말씀 붙잡고 기도해야 되느냐? 성령의 빛이 비추어집니다. 바로 그 분이 빛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제게 구체화 된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 이 말씀 붙잡고 말씀 가지고 기도하게 될 때에 말씀 읽을 때에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 바로 이겁니다. 그 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저 한 구절만 묵상해도 됩니다. 한 구절만 제가 되게 어려울 때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것이 늘 마음속에서 힘이 되었던 것을 기억을 합니다. 지금도 이것은 심리적인 배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성령의 빛과 능력으로...
그래도 뭐 아프다. 슬프다. 그러니까 '주여 아픈 것 없애주옵소서. 아픈 것 없애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아픈 것!' 이렇게 하지말고, 그 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뭘? 말씀을 보고 이 말씀을 딱 마음에 담고 계속 이 묵상하면서, 묵상하면서 나가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점점, 점점 모든 문제 이미 답 얻은 건데요. 아프다. 괴롭다. 이미 답 얻은 건데, 문제는 뭐냐하면, 이 빛이 비추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통로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이 사실들을 우리가 좀 구체적으로 잘 보셔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생명이요. 그 분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문제죠. 이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저주에서부터 완전 해결 받는 것이죠. 저주에서부터 해결 받는 겁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요한복음 8장 32절인데 다같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어떻게 해요?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신 데 그 분이 그리스도 되는 순간에 완전 예수님이 내게 진리가 됩니다.
예수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알지니 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바로 그 분의 그 사실이 내게 사실이 되는 순간에 뭐가 됩니까 모든 얽매인 것, 모든 고통스러운 것, 모든 괴로운 것 완전 자유하게 됩니다. 운명에서 자유 저주에서 자유 죄악에서 자유 고통에서 자유 이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 너무 너무 엄청납니다. 그래서 오늘 당장 묵상할 것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 나에게 진리이십니다.
우리 꼬마한테 아이한테 예수님 어디에 계시냐? 이러니까 배꼽을 가리켜요. 아마 가슴에 가리킨다는 것이 배꼽에다가 자기 표현이 손이 이까지 안 올라오고 여기를 가르치더라 구요. 벌써 알더라 구요. 이야기를 하니까! 아, 아이들이 벌써 말기를 알아듣는다 코는 어디 있냐 그러면, 귀를 만져도 예수님은 어디 계시냐 이러니까? 배를 배꼽을 자꾸 두드려요.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 정말 우리 가슴에 가슴이라는 것은 폐, 장 속에 있다는 말이 아니거든요. 우리 중심에 바로 그 분이 사실이 될 때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유라는 것 이것은 구속당해 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느낄 겁니다. 저주와 그 다음에 고통에 매여있는 사람 같으면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모릅니다. 이 축복된 역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이름 속에서 그 이름에 역사가 그 이름에 축복이 임합니다.
그래서 우리 잘 알잖아요. 로마서 10장 13절이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뭐라 그랬습니까? "구원을 얻으리라"그랬습니다. 구원을 얻으리라!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주의 이름 부르는 그 이름에 뿌리를 깊이 내려라!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부를 때에 예수 그리스도 이미지가 와야 될 것 아닙니까? 아, 맞아. 참 그 분!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그랬습니다 만은 하도 이것이 이해가 안 되니까! 우리가 사람 이름을 불러도 이미지가 오는데 그렇잖아요. 여러분 혹시 자기 부인들 처가에 보내놓고 보고 싶을 때 아무개야! 이미지가 오잖아요. 괜히 보고싶어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젊을 때 그랬더라 구요. 그런데 하물며 나와 여러분의 생명이 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불렀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말이 안 되는 것이죠. 이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은 주의 이름 부르면 구원의 감격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와 져야 되는 겁니다. 다 잃어버렸어요. 왜 잃어버렸느냐? 사단의 역사입니다. 다른 것을 자꾸 생각하고 다른 것을 더 귀히 여기고 이게 안 되어서 다른 것을 열심히 하게 될 때에 오는 것이 뭐냐? 열심히 기도하는 것과 열심히 교회 일 하는 것 같아도 어디에 빠지느냐? 종교에 빠진다 그러고 또 신비에 빠진다 자꾸 그래서 안 그럽니까! 이걸 이 그리스도에 대한 뿌리를 내려야 됩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얼마나 편안해지는 그 이름 아닙니까! 얼마나 편안해져요.
저는 종교 뭐 더군다나 제가 건강할 때보다도 요즘 들어서 더 깊이 예수 그리스도 참 편안해 진 것을 느낍니다. 정말 우리가 약할 때에 부족할 때일수록 그 분은 우리를 부족과 연약한 가운데서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1절에 보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게 되면 여러분 사람 겁나지 않습니다. 이웃 겁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여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부르고 그 이름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밖에 없느냐?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누구에게? "우리에게 은사로" 은혜로 아끼겠느냐! 아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냐!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그 이 말씀이 정말 여러분 사실이 되어야 됩니다. 그 뭐 모든 것 그럴 때에 혹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되고 아닙니다. 모든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이미 모든 문제 답 얻었다" 그게 왜 안 되느냐? 그리스도가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다 자리를 못 잡는 겁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축복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좀 붙잡아야 되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 예수 그리스도는 받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 3절에 보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어떻게요? "감취어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든지 다 안다 그것은 보화가 아니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 이외에는 몰라요. 여기 앉아서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합시다. "붙어만 있어라" 언젠가는 눈이 열리게되어 있어요. 그래서 모른 는 사람들 너무 구박하지 마시고 모르는 사람들 너무 채근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어요. 붙어만 있으면 돼요. 하나님이 역사 합니다. 그런데 이 보배일수록 깊이 보화일수록 감추어져 있습니다.
저는 미국 가보면서 또 다른데 특별히 그 미국에서 많이 느낀 겁니다 만은 가보면서 느낀 것은 미국 사람들이 참 장신구를 많이 달고 다녀요. 뭐 손목하고 뭐 귀에도 달고 다니고 남자들도 막 달고 다녀요. 그런데 제가 그 보니 둥글둥글하게 굉장히 커서 참 값이 많이 나가겠다 싶어서 한번 옆에 미국 사람한테 물어봤죠. 저 정도 되면 얼마나 값이 되겠냐 하니까! 목사님! 그러고 웃어요. 왜 웃습니까? 그러니까! 전부 가짜입니다. 그러더라 구요. 내용을 알아본즉, 미국사람들이 진짜 보석을 사면 보석을 사요. 실제로 돈 있는 사람들이 사면 이것을 어디냐? 보석함에다가 깊이 감추어 둡니다. 그리고 달고 다니는 것은 그 보석하고 똑같은 모조품을 달고 다녀요. 이렇게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뭔 객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라도 모조품을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진짜를 거의 걸고 다녀요. 그래서 도적놈이 누구를 제일 공격 대상으로 삼느냐? 외국 나가면 첫판에 한국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케냐에 가니까! 요즘 이게 흰 색깔이 스텐인데 노란 메기 칠 해 놓았는걸 그것도 3만 원짜리인가? 2만 원짜리인가? 그 시계를 가지고 갔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제 피곤해서 오른손으로 얼굴을 괴고 있으니까 우리 그 선교사님이 차안에서 지나가시다가 두드려요 목사님, 목사님 문을 다 열어 놓았으니까! 왜 그러냐니까? 목사님 그 시계 주머니에 집어넣으시면 좋겠습니다. 이라더라 구요. 왜 그러냐 하니까? 여기서는 누런 색이면 금인 줄 안다 그러더라 구요. 그러면 큰일납니다 그래요. 뺏기는 정도로 끝나면 괜찮은데 사람 다칠 수 있습니다. 이래요. 그래서 내가 얼른 집어넣었죠.
왜? 한국사람들은 무조건 진짜만 가지고 다니는 줄 알아요. 외국사람들은 잘 안 건드려요. 한국사람이 누런 것 가지고 있으면 진짜 금인 줄 압니다. 여러분 진짜 보화를 가진 사람은 진짜 보화가 있는 사람들은 숨겨 놓습니다. 여러분 한국 사람들이 돈을 잘 가지고 다니죠. 진짜 미국사람 돈을 잘 안 가지고 다닙니다. 전부 수표고 전부 종이 조각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행할 때도 한국 사람에게도 그런 기회를 줘요. 여행자 수표를 끊어라 그럽니다. 그런데 굳이 돈을 가지고 다닙니다. 누구한테 공격받습니까? 도적놈들한테 하여튼 첫 번째 공격 대상이 한국사람들입니다. 왜? 한국 사람은 정신이 이상해져 가지고 일단 현금이 주머니에 있어야 마음이 안전합니다.
여러분 재벌에 있는 사람들 돈이 수 백 억씩 있어도 절대로 돈 안 가지고 다닙니다. 그 사람들은 뭡니까? 어디에 필요하다! 종이 조각을 내어놓습니다. 그래놓고 거기다가 뭡니까? 그리는 것이 돈이에요. 1억! 그대로 돈입니다. 여러분 정말 보화를 가지고 계신다면 백지수표입니다. 여러분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 안에는 숨겨진 큰 보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 믿는 사람에게는 백지 수표입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는 엄청난 보화입니다. 깊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아무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뿌리내리라는 말도 바로여기에 있습니다. 아는 만큼! 아는 만큼!
가끔 제게 있는 어떤 물건들을 우리 집사람한테 여보 거기 있는 것 좀 가지고 와 달라 그러면요. 못 찾아요. 못 찾아! 세상에... 내가 넣어 놓는 데가 있어요. 있기는... 가르쳐 줘도 못 찾아요. 그러면서 와서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못 찾는데 도적놈들은 어떻게 찾는지 모르겠다. 악령이 있으니까! 그렇게 찾습니다. 여러분 아무나 도적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뭔가 아무나 도적놈 하다가는 큰일나요. 그래서 먼저 번에 칼 빼어들고 찌르려고 하다가 뭐 넘어가 버리니까! 뭐 깨워 가지고 주무리고 그대로 엎고 119불러 가지고 엎고 가다가 그 딸한테 119불러서 엎고 가다가 데려다 놓고 잡혔어요. 그런 정도의 도적놈이면 순진한 도적놈이에요. 신문에까지 났더라 구요. 아마 그것은 봐주지 싶어요. 잡혀가도,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이 봐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뭘 말씀하고 싶으냐 하면, 여러분과 저에게 정말 깊이 주 예수 그리스도 숨겨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날마다 순간마다 사건 속에서 구체적으로 고백되어 질 수 있기 위해서 뭐가 되어야 되느냐? 뿌리를 내려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계속해서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하는 것이 그겁니다. 주일 날마다 그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한 주간 응답 받아라!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그냥 공개되어 있으면 누구나 되죠. 아무나 주 예수 그리스도 한다고 됩니까?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안 되면 자꾸 다른 것으로 사단의 통로가 된다. 뭐 문제만 생기면 다른 곳으로 가 버립니다. 받아합시다. "이때부터 참된 고백이 나온다" 그 참된 고백이 나오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더라 구요.
나는 성경 속에서 잠깐의 고백 속에서 일평생 문제 해결하는 분! 우리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 이삭을 번재를 드리기 위해서 모리아 산을 향해서 갈 때에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나무를 지워놓고 불을 들게 하고 이삭을 앞에 놓고 갑니다. 이삭이 전 같으면 양을 끌고 소를 끌고 가던데 이것은 흔적도 없고 나무하고 불뿐이거든요. 그래서 경상도 말로 '아부지요. 와! 나무하고 불은 있는데 번재 할 짐승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때에 신앙고백입니다. 어떻게 말해야 될 것인가? 참 그 난감하잖아요. 아버지의 마음에 '야! 너를 잡아 가지고 번재로 드리려고 한다' 이래도 될 일은 아니잖아요. 그랬다 그럴 때에 이삭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뭐 효성이 지극해서 도망을 안 칠지는 몰라도 대게 아브라함의 얼굴을 봐서는 분명히 그럴 것 같거든요. 그렇다 그러면 나라도 도망칠 확률이 80%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젊은 이삭이 도망 갈 때에 아브라함은 절대 못 잡습니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 잠깐 기도한 것 같아요. 일평생 축복된 고백을 했어요. 뭐냐? 하나님이 준비 하셨다! 그것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일평생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한번 고백할 때에, 그것도 참된 고백한번! 여러분 그래서 제가 우리 권사 님들이나 우리 장로님들이나 앞에선 사람들이 나도 내가 뭘 느끼느냐 하면 상당히 이 이 다락방에 대해서 전도에 대해서 행정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무슨 말들을 자꾸 하게 되더라 구요. 그래서 금년도에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 하면, 맞다! 절대로 심리전이 아니고 부정적인 이야기는 안 해야 되겠다. 작정을 했습니다. 집안에서도 아이들한테도 부정적인 이야기는 안 해야 되겠다. 왜? 워낙 부정적인 면만 보는 눈이 열려 있으니까!
그래서 제가 이 딱 보면요. 여러분이 나를 겁내는 것은 다른 것을 겁내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님한테 갔다. 그러면 뭔가 꼬집혀 뜯길게 하나 생기거든! 뭔가 하나 문제가 되어서 온단 말이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안 보이는 것이 좋거든! 그러니까 이미 경험 많은 어른들은 자꾸 숨는 것 같아요. 젊은 청년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꾸 보이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나도 모르게 이 부정적인 이야기가 자꾸 나가게 되더라 구요. 여러분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절대로! 그래서 내가 이제 살아 있는 동안에는 뭐든지 절대로 부정적인 것은 안 나와야 되겠다. 그런데 그것이 심리적으로 안 나가겠다. 그 말이 아니고요. 여러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딱 뿌리가 나가면 나갈 필요가 없어요. 이미 모든 문제가 뭡니까? 해결되었어요. 이미 답 얻었습니까? 답 얻었습니까? 이게 희미하네요! 해결되었습니까? 할렐루야! 확실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믿음의 고백이 있는 자에게는 보장입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되어져야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디든지 모일 때에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이야기 그런 배경이 아니고 믿음에 고백이 나가면 힘 주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에 고백이 안 나가면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녀들한테 그 다음에 모든 식구들한테 이웃들한테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만 하게 되면 여러분은 자연적으로 여러분 자신이 편안해지고 나가는 말이 힘이 있어 집니다. 그러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승리하게 되는 축복과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모든 답이 다 나와있거든요. 여기 보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어디에? 가깝게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어디까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시간이 갈수록 자꾸 묵상을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교회가 우리 한국에 교회다 대구의 교회다 이런 수준에서 끝내지 마세요. 어디까지 세계복음화 그러면 세계복음화 할 수 있는 뭘 주었습니까? 증거 주신다. 안 그랬습니까! 증거 주신다. 여러분 진짜 우리 고백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고백이 되시고 하나님의 소원에 맞는 소원이 될 때에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짖는다. 이 배경보다도 주여 세계의 교회입니다. 세계복음화의 교회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응답하시는 역사들이 있습니다.
제가 동삼제일 교회 35평 짜리 부터 안 갔습니까! 35평, 20평도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가서 짜증날 정도가 욕이 나오더라 구요. 거기다가 1000여명씩 밀어닥치는데 암만 꾸역꾸역 채워 넣어도 20평 조금 넘는데 1000명이 들어옵니까? 거기다가 뭐 50명, 60명, 100명 가까이 때리 넣었습니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지하실이 되어 놓으니까, 무슨 냄새가 그렇게 납니까! 머리가 아픕니다. 자! 나가는 공기 유통은 잘 안 되죠. 거기다가 뭐 100명 집어넣어 놓았죠. 뭐 20평 그래봐야 얼마나 됩니까! 거기다가 100명 200명 한 몇 백 명 넣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공기 유통은 안되죠. 냄새는 지하실 특유의 냄새가 나죠. 그러면서 지금 있는 현재의 교회로 삽시간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배경에서 뭐라 그랬냐 하면요. 교인들이 세계복음화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하나님이 열어 버렸다고 그러더라 구요. 그리고 우리 목사님 세계복음화 하는 목사님이다 이걸 깨닫는 순간에 옮겨버렸다 그래요. 그 고백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다시 한번 마음에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교회다! 교회 건축이다! 우리가 교회건축 해 가지고 대구에 이름 내보자 ! 우리가 조금 해서 다락방 하는데 잘했다, 이름 한번 내보자! 아닙니다. 여러분 그 이름과 상관없습니다. 이미 이름이 났습니다. 송현교회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났어요. 우리 집사 님 한 분이 갔다 오시더니만 또 지금 거기 있는 집사 님들이 그르데요. 우리 나가있는 집사 님이 아, 부담된다 그래요. 왜 그러냐 하니까? 송현교회 그러니까 무조건 잘 하는 줄 안다 그래요. 그리고 한국에는 이름났어요. 그래서 어떤 교회는 내 이름이 나가면 될 일도 안 될 일이 생깁니다. 그런 이름이 말고 이제는 세계를 정복하는 이름!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뭘 주시느냐? 하나님께서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증거를 주십니다. 뭘 줘야 되느냐? 체력 주어야 되죠. 세계까지 가려면 체력 주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신문을 읽다 보니까 신문인가? TV인가? 그래요. 3등 석에 오래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죽는 수가 있답니다. 쪼그려 앉아 있으면요. 그걸 내가 읽으면서 그러면 지금까지 왔다 갔다 했는데 안 죽은 게 다행이구나! 안 죽는 길이 있데요. 뭐냐? 자주 일어서 가지고 통로를 왔다 갔다 하래요. 왔다 갔다! 자꾸 일어서는 길이 뭡니까? 물 많이 마시는 겁니다.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체력 관리가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참 어렵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그것뿐 아닙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죠. 경제력을 주어야 됩니다. 여러분 경제력이 안 생기면 어떻게 세계복음화 합니까? 아이들이 이 비전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후대 살린다는 비전도 오늘 보니 대학생들 어디 간다! 그럴 때에 정말 여러분 가슴에 비전이 있어야 됩니다. 나와 내 후손 못 살리면 여러분 진짜 이 땅과 세계를 살릴 수 없습니다. 뭐, 그런 문제 자꾸 끄집어내려 그러면 한정이 없어요.
그 다음에 어떤 경우냐? 정치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머리가 돌아가야 됩니다. 미국 처음 가 가지고 진짜로 머리 굴려야 되지. 머리 안 굴리면 못 살겠더라 구요. 말이 제대로 되나? 그러니까 여러분 화장실 가려면 흉내라도 머리 굴려야 흉내가 나옵니다. 뭐 이런 지혜가 있어야 그런 배경에서 뭔가 이 표현이 되죠. 하나님께서 세계복음화 위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에게 뭘 주셔야 됩니까? 지혜도 주셔야 됩니다. 말에, 언어에도 지혜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과 은혜의 역사가 우리 가슴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백될 때마다 뭐합니까? 증거 주시겠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직!" 사도행전 1장 8절이 다 입니다. 받아합시다. "이미 다 해결되었다" "답 얻었다! 답 얻었다!" 믿습니까? 진짜 여러분 붙잡고 이제는 할 일이 뭡니까?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다 이루리라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그리스도 고백도 안 되지만 안 믿어요. 왜? 예수가 내게 그리스도 되심이 사실적으로 부닥쳐 오지 않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부닥쳐 오는 사실을 뭐라 그럽니까? 자꾸 뿌리내리라는 배경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자꾸 뿌리 내리라! 모든 것이 여기에 다 포함되고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드린 것처럼 골로새서 2장 3절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전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 조금 들어가서 오늘 조금 말씀을 읽었는데 바울이 여기서 해답을 얻고 난 후에 사도행전에 들어가 보면요. 1장에 가면 기도가 나옵니다. 약속을 잡고 기도하고 2장에 가면 그 기도 속에서 구체적으로 문이 열려요. 어떤 문이? 2장 1절부터 보면 뭐가 나오느냐 신비한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신비한 힘에 대해서 말씀 드렸죠. 워낙 우리가 기도 안 하니까 신비한 힘을 얻을 기회가 없어요. 온 교회가 한번 여러분 사업과 직장과 삶에 신비한 힘을 좀 얻어야 됩니다. 그래서 연 초에 기도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주여 내게 먼저 신비한 힘을 주옵소서. 신비한 은혜 주옵소서. 그래서 능력이 여러분과 제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참 사실로 또 체험 그러면 또 뭔가 보려고 그러고 자꾸 그러는데 아닙니다. 말씀이 믿어지고 기도하는 사실이 되어지면 그 사실 자체로 벌써 일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 신비한 능력이 체험되게 될 때에 전도라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15나라에 일꾼을 다 보내버렸습니다. 순간에 보냈습니다. 세계복음화에 문이 열려 버렸습니다. 여러분 능력 주셔야 사람 보낼 때에 바꿀 수 있는 힘이 안 생깁니까! 안 그러면 보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왜 전도가 안 되느냐? 보내봐야 소용이 없는데요. 그때부터 뭐가 이루어지느냐? 보내놓고 나니까! 성경에 약속한데로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되겠다는 약속이 성취되어 오잖아요. 말씀성취와 기도응답에 대한 사실이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왜요? 말씀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보여지기 시작하죠. 그러면 이것이 보여지게 될 때에 그 사람을 향해서 뭐냐? 비로소 제자라는 것이 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캠프 하고 난 후에 사람 모으고 영접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제자는 그 후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훈련을 지속해서 하되, 제자를 뭐, 금방 갈급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갈급한 사람은 오히려 속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제자는 갈급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들을 때는 뭐 심상하게 듣다가 나중에, 나중에 보면 숨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제자의 역사입니다. 제자의 문이 열립니다. 이때부터 뭐가 오느냐? 경제와 정치에 축복이 문이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제자가 생기지 않는데 경제 주고 정치에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럴 때에 전부 다른 곳으로 갑니다. 다른 곳으로 가요.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제자 화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이 여기에 모든 것을 부어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기초가 튼튼하게 서 있지 아니하면 참 하나님의 제자들이 깔려 있지 아니하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흔들리게 되어 있을 때에 결국 어떻게 했느냐? 지휘가 올라갈수록 모든 것을 받을수록 많을 것을 가질수록 무너질 때 충격이 더 큽니다.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조용히 오늘 말씀하십니다. 참 그리스도의 해답이 여러분과 제게 이루어지고 이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소리 없이 모든 분야에 확실한 답을 주실 뿐 아니라 눈뜨면 일이 됩니다. 눈뜨면 문이 열립니다. 눈뜨면 사건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역사가 말씀잡고 기도할 때에 사실로 체험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
사도행전 15:1-11 / 조재진 목사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는 자리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눅5:37-38)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포도주가 본질적인 것, 진리를 말한다면 가죽부대는 진리를 담고 있는 교리나 형식, 그리고 전통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새 포도주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고 낡은 가죽부대란 유대교의 교리나 종교적인 형식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을 수 없듯이 유대교라는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인 복음을 담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늘 새로운 것입니다. 로마서 3:21에 보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합니다. 율법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10:20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새롭고 산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제정하실 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새 언약의 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가죽부대는 낡은 것입니다. 가죽부대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담은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시간에 지남에 따라 낡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죽부대는 늘 새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바꾸지 않으면 낡은 가죽부대는 결국 터지고 말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제기된 문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문제들을 제기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성공적으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서 전도 여행 때 일어났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도 좋고 성령을 받는 것도 좋고, 예수 믿는 것도 다 좋다. 그러나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다 헛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1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여기에 보면 유대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목숨을 걸고 증거한 복음하고는 다르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안디옥 교회에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모세의 율법도 지킴으로 완성되어 지는가?" 라는 것이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문화적인 갈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 이 할례문제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한 많은 유대인들은 아직도 계속해서 율법에 대하여 매우 열성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자라왔고 또 이러한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공동체에 들어온 이후에도 여전히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음식도 구별했고 성전 예배와 유대 민족의 절기를 경축하였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 개종자들이 문제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믿는 것만으로 안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했습니까? 할례가 무엇입니까? 원래 할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그 언약의 표시로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살에다가 언약을 새겨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너를 보호해주겠다. 너는 나만 의지하고 살아라" 라는 표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 받는 것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할례 받는 것을 율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약의 내용이야 어찌됐든 할례를 행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시를 할례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라도 구원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된다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의 생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보십시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갈등은 안디옥교회의 문제였고 초대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5: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또 3-4절에 보면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보십시오 할례를 주장하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입니다. 할례를 꼭 받아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안 믿겠다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율법입니까? 은혜입니까?
여기서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끊임없이 기독교 역사에 논쟁의 대상이었고, 결국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모티브가 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예수만 믿으면 다냐?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지" 라고 말합니다.
유대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 이 할례 문제를 제기한 안디옥 교회의 문제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돌아온 이방인들을 볼 때 유대인들은 도무지 수긍할 수 없었는 부분이 바로 삶의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게 보였습니다. 식사하는 모습을 보십시다. 정통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손을 씻고 먹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손도 씻지 않고 너무나 게걸스럽게 먹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은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소중히 지킵니다. 워낙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몸에 배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자유스럽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음도 있고 은혜도 받은 것 같은데 삶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다못한 유대인들이 일어선 것 같습니다. "예수도 좋다. 성령도 받아야 되고 은혜도 다 좋지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이런 문제는 안디옥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형식화되고 율법화되기 쉬운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유교에서 말하는 예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 교회에 눈에 보이는 행위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긴 죽었는데 그런데 뭔가 좀 부족한 것 같아, 내가 노력도 하지 않고 너무 쉽게 구원받는 것이 찜찜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는데 그런데 뭔가 좀 부족한 것 같아. 정당한 죄 값을 치러야 되지 않을까?" 어떤 경우에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기만 하면 완전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아멘 믿습니다" 해 놓고는 그래도 뒤돌아서면 뭔가 불안합니다. "믿음으로는 부족해 그래도 뭔가 행해야 돼, 지금 상태는 부족한 것 같아, 한 70%는 된 것 같은데 더 노력해야돼 담배도 피우고 있고, 술도 먹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받겠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예수님 당시에나 있었던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생활수칙들을 만들어서 교회에 붙여 놓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성수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 주일에는 돈을 쓰면 안된다. 주일에는 놀러가도 안된다라고 가르칩니다. 또 십일조 생활, 새벽기도는 빠져서는 안되고, 성경을 매일 3장씩 읽되 주일에는 5장을 읽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일년에 한 사람 이상씩 전도해야 하며,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30분 이상씩 그 기도시간에 맞추어 기도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보 전면에 실어서 그렇게 지키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잘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런 규칙을 지키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런 규칙을 잘 지키는 자신을 보고는 마치 자기가 가장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행위를 통해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더 헷갈리게 하는 것이 카톨릭의 도전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과 동시에 선한 행위를 강조합니다. 카톨릭 교인들에게 전도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그 귀한 구원을 나같은 사람이 받겠습니까? 아직 멀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과 함께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고해성사를 하면 지은 죄에 해당하는 정도의 어떤 행위를 명령합니다. 또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의 기준도 믿음이 아니고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라 자꾸 행위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식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무시해도 되는데 마더 테레사 같은 분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은 무시할 수 없잖아요. 또 적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분명히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했는데 저렇게 훌륭한 분들이 착한 행실도 필요하다고 말하니 정말 어떤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정말 예수믿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율법의 행위가 더 필요한 것일까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신약성경에서 명쾌한 답을 내렸습니다. 율법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심지어 율법을 제정한 모세도 율법을 다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율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은 이유는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오늘 이미 결론 난 해묵은 이 논쟁을 다시 끄집어내어 설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반성의 의미입니다. 한국교회가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데 한국교회는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보면 늘 부딪히는 문제가 이것입니다. "예수는 좋으나 기독교는 싫다"(Jesus Yes!, Christianity No!)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라는 새 포도주는 좋은데 기독교라는 가죽부대는 싫다는 거지요. 이것이 요즘 교회의 고민입니다. 보십시오 교회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떼어놓고 어떻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화되고 교리화된 교회가 복음증거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참 아이러니칼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포도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보여 주려면 가죽부대인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워지지 않는 교회는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십자가의 완전성에 대한 부분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자라지 않습니다. 요19:30에 의하면 십자가 달리신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모든 언약을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을 정말로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완전한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것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부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사람
본문 2절에 보면 유대에서 온 사람들과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논쟁이 심해졌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적지 않는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이 분명히 옳았지만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말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안디옥 교회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사람을 사도들과 장로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회의,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다.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지금 바울과 바나바은 논쟁에 휘말려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이들은 작은 도시들을 들러가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주님께 돌아온 간증들을 했다는 것이지요. 보십시오 이들의 가슴속에는 예수님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갈급했던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디로 가든지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교리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차이를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통과 교리에 묶어 있는 사람과 예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인 것을 믿고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믿을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생각, 믿고 있다는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적인 믿음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정도로는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교회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왜 불안합니까? 분명히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왜 자꾸 뭔가 모자라는 것 같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가져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령님을 체험해야 하는데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나 교회에 다닌다는 형식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교리나 형식에 붙잡혀서 성령의 능력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손을 들고 기도하자"라고 말하면 잘안됩니다. 손을 들고 안들고는 가죽부대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새포도주와 같은 것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전통과 교리에 붙잡혀서 교회에서 기타 치는 것도 불안해 합니다. 드럼치는 것은 아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혹시 기타를 치면 불경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전통, 교리에 묶여있는 것이지요. 기타 치는 것은 가죽부대에 해당한다면 찬양하는 것이 새 포도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나 형식만 가지고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교리나 정통, 형식을 무시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도 필요하고 교리, 전통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보다 더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교리가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전통이 아니고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꿈뜰되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요셉이 노예생활을 이기고 감옥생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적인 동의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는 노예생활의 어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칼을 피해 도망가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의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인격은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가 느부갓네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상에게 절하기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아는 것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고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이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정말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분과 대화하고 그 분과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 분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것을 교리화 하거나 관념화하지 마십시오. 나는 몇 년 교회다녔는데... 나는 성경을 몇 번 통독했는데, 나는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데... 물론 중요하지만 그런 것을 교리화, 율법화하면 낡은 가죽부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정말 내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삶, 은혜 안에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 회의
드디어 바울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장로들과 사도들은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어떻게 이방인들이 주님께 돌아왔는지를 간증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은 안디옥에서와 똑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결국 6-7절에 보면 최초의 기독교 회의인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라고 말합니다. 아주 심각하고 광범위한 토론이 계속된 것 같습니다. 이 토론이 끝난 후에 침묵하고 있던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어 말합니다. 그 내용이 7-11절에 나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말한 것을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우리와 동일하게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에게 주어진 은혜가 다르고 유대인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다를 수 없습니다. 성령은 임하심은 마가 다락방이나 고넬료 집이나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은 또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은 믿음을 주셨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믿음으로 그들도 동일하게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나 저희나 분간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조상들도 다 지키지 못한 율법의 멍에를 왜 이방인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주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너무 분명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증거 후에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이 있었고 또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실세였던 야고보 사도가 일어나 모든 논쟁을 정리합니다. 13-17절에 야고보가 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고보의 이야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의 가정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이방인의 구원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시고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킨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시고 그 메시야를 통해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회심을 단순히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세 번째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인 할례를 강요하지 말고 단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이방인들에게 권고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교회사에 놀라운 한 획을 긋는 역할을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유대교의 전통에 가두지 않고 전세계를 살리는 복음이 되기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세계와 한 시대를 살리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웨슬레 목사님을 변화시켰고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위기입니다. 교회가 교리화 되거나 율법화 되면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복음은 원래부터 새로운 것입니다. 복음은 역동성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 복음을 제도나 율법에 가두어두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복음을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도입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은 단지 교회 다닌다는 것, 예수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 열심히 봉사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위로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가죽부대에 불과합니다. 새 포도주인 예수님을 실제로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임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가득 차서 그 은혜로 세상을 이기고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